조홍 (조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이름 조홍(曹洪)
시대 후한 ~ 삼국 시대
생몰  ? ~ 태화 6년(232년)
자렴(子廉)
소속 조조조비조예

조홍(曹洪, ? ~ 232년)은 중국 삼국시대위나라의 장수이다. 는 자렴(子廉)이다. 조조(曹操)의 종제(사촌 혹은 육촌)이다.[1]

생애[편집]

조홍의 삼촌인 조정이 후한의 고위 관직에 있었던지라, 조홍은 매우 젊은 나이에 기춘현(蘄春県)의 현령이 되었다. 서기 190년, 조조동탁(董卓)을 치고자 군대를 동원했을 때, 양주자사 진온(陳温)은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진온과 절친한 친구였던 조홍은 함께 조조군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조인(曹仁)과 함께 조조군의 장군이 된다.

형양에서 동탁의 수하 장수 서영(徐榮)에게 패배하여 추격당하자, 말을 잃어버린 조조에게 자신의 말을 내주어 그를 구했다. 조조서주를 공격하는 동안 장막(張邈)과 여포(呂布)가 합심하여 연주를 점령하였을 때 큰 기근이 들었는데, 조홍이 군사를 이끌고 선두에 서서 동평(東平), 범(范)을 점거해 양곡을 모아 군에 공급했다. 조조가 여포와의 복양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인근 10여개 현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이 공적으로 응양교위에 임명되고, 양무중랑장으로 승진했다.

관도 대전에서는 조조가 오소로 출격하였을 때, 본영을 지키는 임무를 맡아 조조가 오소의 원소군의 보급기지를 불태울 때까지 장합(張郃)과 고람(高覽)의 공격을 방어했다.

서기 219년, 한중에서 벌어진 유비군과의 전쟁에서 조홍은 음평에 살고 있던 저족의 군대를 합류시켰고. 강단(強端)과 함께 촉한의 장군 오란(吳蘭)과 뇌동을 무찌르고 그 둘을 죽였다. 이 전공으로 그는 도호장군에 임명되었다.

조비(曹丕)가 즉위한 후, 위장군에 임명되었다 표기장군으로 승진, 또한 아왕후(후에 도양후로 고쳐 봉해진다.)에 봉해져 식읍이 2천 1백호가 되었다. 조예(曹魏)가 즉위한 후, 조휴와 함께 대사마에 임명되었다가 서기 232년에 허도에서 사망하였다.

성격으로 인한 갈등[편집]

조홍은 과거의 전공을 그 자신을 치켜세우는 데 쓰곤 했다. 또한, 그는 조진(曹眞)을 과체중이라고 심하게 놀린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양부(楊阜)로부터 지적을 받기도 했다. 조홍의 집안은 부유하였으나 재물을 빌리면 절대 갚지 않는 조비의 성격을 일찌감치 파악한 조홍으로서는 조비에게 재물을 빌려줄 수 없었다.

조조가 죽고 그의 아들 조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그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과거, 조비가 조홍에게 돈을 빌리려다 거절당한 이후 둘의 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 결국 조비는 조홍의 식객 중 한 명이 범죄를 저지른 것을 구실로 조홍을 체포하여 사형을 선고한다. 보다못한 변태후가 나서 그를 구명해준 덕에 면직과 봉토가 깎이는 것으로 그치게 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의 조홍[편집]

연의 58장에서 그는 동관(潼關) 전투에서 마초(馬超)와 한수(韓遂)의 공격을 받을때 확연하게 드러난다. 조홍은 요새를 떠나지 말고, 어떤 댓가를 치러서라도 10일간 동관을 사수하라는 명을 조조로부터 받는다. 하지만 마초의 9일간의 도발로 인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전투를 벌이나 패배하고, 동관은 함락당하고 만다.

조조는 매우 화가 나 조홍을 참수하라는 명을 내리지만, 참모들의 만류로 명을 거두어들인다. 얼마 후, 조조는 직접 마초의 군대와 일전을 벌였다 패배하여 마초에게 추격당한다. 조홍은 마초와 수십 합을 싸우며 시간을 벌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조조를 구출하였다. 이 사건 이후 조조는 조홍을 용서해주었다.

주석[편집]

  1. 제하후조전(諸夏侯曹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