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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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문황제
(世祖 文皇帝)

조위 황제
염립본의 제왕역대도권 중 위문제 조비 부분
염립본의 제왕역대도권 중 위문제 조비 부분
본명 조비(曹丕)
재위 220년 10월 28일 ~ 226년 5월 17일 (음력)
대관식 220년 10월 28일 (음력)
출생일 187년
사망일 226년 5월 17일 (음력)
매장지 혜릉(惠陵)
배우자 견황후, 곽황후, 그외
자녀 조예, 동향공주, 조협 등
부친 조조
모친 무선황후 변씨
전임자 조조(추존)
후임자 명제 조예
묘호 세조(世祖)
시호 문황제(文皇帝)

조위 세조 문황제 조비(曹魏 世祖 文皇帝 曹丕, 187년 ~ 226년 음력 5월 17일)는 조조(曹操)의 셋째 아들이며,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초대 황제는 자환(子桓)이다. 그는 줄곧 조조의 첫째 아들로 불리는데, 원래는 셋째 아들이다. 조조의 첫째 아들은 조앙(曹昻)이며 둘째 아들은 조앙의 동복 아우인 조삭(曹鑠)인데, 조앙은 조조를 지키려다 전사했으며 조삭은 일찍 죽어서 셋째 아들인 그가 첫째 아들로서 행세했기 때문이다.

생애[편집]

조비는 조조와 원래 측실이었던 황후 변씨 사이에 출생한 서자였다. 태어날 때 하늘에 푸른 뭉게구름이 피어올라 후광처럼 머리 위를 감쌌다고 한다. 또한 본인의 저서인 《전론》(典論)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조조의 영재교육을 받고, 6살 때 궁술을 마쳐 좌우 어느 쪽으로도 자유자재로 쏠 줄 알았으며, 8살 때는 말에 올라탄 채 활을 쏠 수 있었다. 검술도 좋아해 여러 스승에게 사사받고 모든 검법을 숙달했고, 문학적 소양도 뛰어나 이미 8살에 붓을 들면 그대로 훌륭한 문장이 되고, 고금의 경서와 그 주석, 제자백가 등에 완전히 통달하여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조조에게는 25명의 아들이 있었다. 측실 유씨 부인이 낳았으나 본래 정실인 정씨 부인의 양자로 들어가 적자(嫡子)로 입적된 장남 조앙은 197년(건안 2년)에 장수(張繡)와의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역시 적자로 입적된 차남 조삭은 조앙이 죽기 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 후 변씨 부인이 정실이 되었으므로 조비의 후계 지위는 굳건해 보였다. 그러나 환씨 부인 사이에 태어난 조충(曹沖)이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조조는 처음엔 그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충도 208년에 13살의 어린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204년 아버지의 큰 경쟁 상대였던 원소(袁紹)의 세력을 공격하는 데 종군한다. 거기서 원소의 둘째 아들 원희(袁熙)의 아내인 견씨를 약탈하여 처로 삼았고, 견씨는 이듬해 조예(曹叡)를 낳는다. 211년 조비는 오관중랑장 겸 부승상으로 오르지만, 조조는 다섯째 아들 조식(曹植)의 재능을 아꼈으므로 아직도 후계자가 결정되지 못한다. 하지만 조식이 술로 말미암아 조조의 노여움을 사고 총애를 잃자, 마침내 217년 그의 나이 31살 때 조조가 위왕에 오르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조비

조비는 220년 정월 조조의 죽음으로 위왕의 자리를 이어받았고, 조조의 지위를 승계한 그 해에, 결국 후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수도를 허창에서 낙양으로 옮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비가 헌제를 협박하여 제위를 넘겨받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정사 《삼국지》에서는 그런 묘사는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헌제(민제)가 스스로 양위를 주도한 게 아니라 조비가 선양이라는 평화로운 형식적 절차를 통해 한나라 4백년 사직을 찬탈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리하여 조비는 황제로 즉위하고, 헌제는 산양공에 봉해져 하내군 산양현 1만 호를 받았으나, 한때는 주살되었다는 소문도 널리 퍼졌는데, 촉한에서는 이 소문을 유비(劉備)가 황제로 즉위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이 이후 조비는 백성들을 잘 다스리는 정책을 쓰는 한편, 냉혹한 인사를 단행했다. 우선 가난한 백성을 위해 자신이 많은 재산을 기부한다. 그 영향을 받아 조비를 섬기고 있는 고위 관직층의 신료도, 가난한 백성을 위해 구제 활동을 한다. 그 결과 위나라는 삼국 시대 중 가장 번영한 나라로 거듭난다. 그리고 조비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관우(關羽)에게 항복했던 우금(于禁)이 돌아오자 선친인 조조의 무덤지기로 임명했다. 조조의 묘지 담벼락에는 희한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다름 아닌 관우가 방덕(龐德)과 우금을 생포해 놓은 상황을 묘사한 그림으로, 방덕은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 관우 앞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관우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지만, 우금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비굴한 모습으로 무릎 꿇고 고개 숙이고 울면서 관우한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를 본 우금은 분통이 터져 죽었다. 조창(曹彰)의 경우 역시 병력을 남김없이 몰수하고 내쫓아버렸다.

조비는 대외적으로는 순종의 뜻을 밝힌 손권(孫權)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오왕으로 책봉했으나, 손권이 태자를 인질로 바치기를 거절하자 대군을 동원해 2차례에 걸쳐 손권을 공격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내치 면에서는 유학을 장려하며 도덕성의 향상을 기치로 삼았으나 스스로는 이와 반하는 패륜적 행위를 거듭 자행했으며, 결과적으로도 지도 계급의 도덕성 향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또한 즉위 직후에 시행했던 구품관인법의 제정은 사대부 계층의 문벌 귀족화를 초래해 수많은 폐단을 낳았다.

226년(황초 7년), 평소 주색에 빠져있던 것이 원인이 되어 병을 얻은 조비는 병세가 위독해지자 아들 조예를 황태자로 책봉한 후 조진(曹眞)과 조휴(曹休), 사마의(司馬懿), 진군(陳羣)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사망하였다. 그가 제위에 오른 지 7년, 나이 40살 때의 일이었다. 조예는 조비가 사사로운 이유로 피해를 준 모든 사람을 찾아내어 사면, 복권했다.[1]

조비의 비인간성[편집]

조비는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논공행상을 폈지만, 과거에 사사로운 원한이 있는 자는 육친이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후계 경쟁의 쟁탈자였던 조식의 측근들은 조비의 즉위 직후 삼족이 몰살되었으며, 조식은 모친 변 태후의 만류로 간신히 목숨만은 건졌지만, 그 후 지방으로 쫓겨나 철저한 감시 속에서 다시는 중앙으로 복귀하지 못한 채 몇 번이나 영지를 옮기면서 쓸쓸히 죽었다. 또 다른 동생인 조창도 비슷하게 취급되었는데, 《세설신어》(世說新語)에서는 조비에 의한 독살설조차 제기할 정도였다.

일찍이 조비는 당숙뻘인 조홍(曹洪)에게서 무리하게 재물을 빌리려고 했지만 거절당한 일이 있었다. 이후 조비는 그 때문에 조홍에게 원한을 품고 황제로 즉위한 이후 조홍을 내쫓고 조홍의 식객이 범한 죄를 이유로 처형하려고 했다. 이것도 변 태후의 사주를 받은 곽 황후의 처절한 만류로 죽음만은 면했다. 이밖에도 과거의 원한으로 사소한 트집을 잡아 신하들을 처형한 일이 많으며, 조강지처이던 견 황후에게는 질투가 심하다는 이유로 자결을 명하는 등 치졸한 면이 많이 보인다.

또한 조비는 인재를 보는 안목 역시 매우 좋지 않았는데, 맹달은 촉나라에서 관우의 죽음에 연루되어 위나라로 도피해서 귀순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잘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용태수에 임명하는 등 매우 극진히 대우했으며, 정의는 못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청하공주와 결혼하지 못하게 막았다. 전술한 견 황후에게 자결을 명한 것은 대외적으로는 질투가 심하다는 혐의지만, 실제로는 늙어서 미모가 떨어졌기 때문에 자결을 명한 것이다. 따라서 조비는 사람의 외모로 그 됨됨이를 판단할 정도로 매우 치졸했다.

가족 관계[편집]

  • 황후 : 문소황후 견씨(文昭皇后 甄氏)
    • 장남 : 조예(皇太子 曹叡) - 평원왕(平原王)에서 태자로 책봉됨. 열조 명황제(烈祖 明皇帝)
    • 장녀 : 동향공주(東鄕公主)
  • 황후 : 문덕황후 곽씨(文德皇后 郭氏) - 조예가 황위에 오른 뒤 사사됨.
  • 후궁 : 귀인 이씨(貴人 李氏)
    • 차남 : 찬애왕 조협(贊哀王 曹協) - 요절
  • 후궁 : 귀인 시씨(貴人 柴氏) - 곽황후와 함께 입궁
  • 후궁 : 귀인 음씨(貴人 陰氏)
  • 후궁 : 귀인 유씨(貴人 劉氏) - 한 헌제의 장녀, 유귀인의 언니
  • 후궁 : 귀인 유씨(貴人 劉氏) - 한 헌제의 차녀, 유귀인의 동생
  • 후궁 : 부인 이씨(夫人 李氏)
  • 후궁 : 숙원 반씨(淑媛 潘氏)
    • 3남 : 북해도왕 조유(北海悼王 曹?)
  • 후궁 : 숙원 주씨(淑媛 朱氏)
    • 4남 : 동무양회왕 조감(東武陽懷王 曹鑒)
  • 후궁 : 소의 구씨(昭儀 仇氏)
    • 5남 : 동해정왕 조임(東海定王 曹霖)
  • 후궁 : 서희(徐姬)
    • 6남 : 양애왕 조애(梁哀王 曹哀)
  • 후궁 : 소희(蘇姬)
    • 7남 : 한단회왕 조옹(邯鄲懷王 曹邕)
  • 후궁 : 장희(張姬)
    • 8남 : 청하도왕 조공(淸河悼王 曹貢)
  • 후궁 : 송희(宋姬)
    • 9남 : 광평애왕 조엄(廣平哀王 曹儼)
  • 후궁 : 손희(孫姬)
  • 후궁 : 임씨(任氏) - 조비가 처음으로 맞이한 처첩, 성격이 온순하지 못해 조비와 잦은 불화가 있었음. 견황후가 조비에게 시집온 뒤 출궁됨.
  • 후궁 : 설영운(薛靈芸)
  • 후궁 : 막경수(莫瓊樹)
  • 후궁 : 단교소(段巧笑)
  • 후궁 : 진상의(陳尙衣)

주석[편집]

  1. 문제기(文帝紀)
전 임
아버지 위무왕 조조
제2대 후한의 위왕
220년 음력 1월 경자일 ~ 220년 음력 10월 을묘일
후 임
-
(황제 즉위)
전 임
-
(황조 성립)
제1대 중국 황제
220년 음력 10월 을묘일 ~ 226년 음력 5월 정사일
후 임
장남 위 열조 명제 조예
전 임
후한 헌제 유협
중국 황제
(촉한-유비유선)
(-손권)
220년 ~ 226년
후 임
장남 위 열조 명제 조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