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여포

여포(呂布, ? ~ 198년 12월)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봉선(奉先)이며 병주(幷州) 오원군(五原郡) 구원현(九原縣) 사람이다. ‘마중적토 인중여포(馬中赤兎 人中呂布)’라는 말로 표상되듯 신기에 가까운 무예로 천하의 명성을 얻었다. 동탁의 부하였으나 왕윤과 공모하고 동탁을 죽여 왕윤 정권의 군사적 중추에 있었으며, 이각 · 곽사 · 장제 · 번조와 싸워 져 왕윤 정권을 몰락시켰다. 이후 각지를 떠돌다 서주(徐州)를 근거지로 조조와 맞섰으나 패망하고 처형되었다.

생애[편집]

여포

힘이 세고 궁마술에 능숙하여 전한 무제 때의 명장인 이광에 비유되며 비장(飛將)이라 일컬어졌다. 병주자사 정원이 특별히 중용해 주부에 임명되었으나, 이숙의 꾐에 넘어가 정원을 죽이고 동탁을 섬겼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정원은 여포의 의부(義父)였으며, 동탁이 선물한 적토마의 유혹에 넘어가 정원을 죽였다고 묘사한다.[1]

동탁의 수하시절[편집]

동탁은 여포를 자신의 수하로 넣자 암살을 두려워해 여포로 자신을 곁에서 호위하게 했다. 하지만 동탁의 포악스러운 성격은 결국 여포와의 갈등을 불렀다. 동탁이 술에 취해 길길이 날뛰며 여포의 얼굴을 향해 수극을 내던진 일로 인해 여포의 마음 속에는 동탁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싹텄다. 또한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사통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동탁에게 발각될까 두려워하였다. 당시 사도 왕윤(王允)은 황제의 권위를 무시하고 폭정을 일삼고 있던 동탁을 죽일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동탁과 여포의 사이가 벌어진 것을 기회로 여포를 동탁 주살 계획에 끌어들인다. 천자가 미앙궁으로 신하를 소집했을 때 동탁을 불려들여, 여포는 동탁을 죽이고 그의 삼족을 멸했다. 이때가 192년(초평 3년) 4월이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동탁을 섬기게 된 여포는 동탁과 부자의 서약을 맺었으나 왕윤의 이간책에 의해 동탁과 여포 사이가 벌어졌는데 그 원인을 왕윤의 양녀인 초선(貂蟬)을 둘러싼 다툼으로 묘사한다.

동탁 사후[편집]

동탁을 죽인 후 여포는 분무장군에 임명되고 온후(溫侯)에 봉해졌고 조정의 정사를 담당했으나 불과 한달도 지나지 않아 동탁의 무리였던 이각(李傕)·곽사(郭汜) 등에게 패하여 장안(長安)을 빼앗겼다. 여포는 원술(袁術)에게 몸을 맡겼다. 원술은 처음에는 그를 무척 후대했으나 여포는 자신이 동탁을 죽였으므로 원씨의 복수를 한 공이 있다고 믿어 마음대로 군사들을 풀어 노략질을 일삼으니 원술은 여포를 근심거리로 여겼다. 여포는 이를 두려워하여 달아나 하내의 장양(張楊)을 따랐는데, 이각 등이 여포에게 현상금을 걸어 여포를 찾자 장양 휘하의 제장들은 모두 여포를 도모하려고 했다. 여포는 장양에게 자신을 죽이기보다는 산 채로 넘기는 것이 더 공이 크게 않겠냐며 시간을 끌다가 곧 달아나 원소(袁紹)에게 항복한다.

원소는 상산에서 장연(張燕)을 공격할때 여포를 부장으로 종군시켰는데 이때 여포는 명마인 적토마를 타고 전장을 질주하며 맹활약했다. 후한서 여포전에 의하면 여포는 적토를 타고 능히 적의 해자를 뛰어넘으며, 성렴(成廉), 위월(魏越) 등 수십 기(騎)와 함께 말을 달려 장연의 진(陣)에 부딪치며 하루에 때로 3-4번에 이르기까지 맹렬히 싸워 적들을 모두 참수하고 빠져나왔다다고 한다. 이때의 활약상으로 사람들이 여포를 일클어 “사람 중에 여포요, 말 중에 적토가 있다(人中呂布 馬中赤兎)”라고 했을 정도였으나, 여포는 이 공을 믿고 다시 교만하며 영내에서 마음대로 군사를 늘린 데다가 원소의 수하들은 대개 원소가 임의로 관직을 임명한 반면 여포는 천자에게서 직접 관직을 임명받았다 하여 여포는 항상 원소의 제장들을 업신여겼다. 또한 원소의 영토에서 노략질을 일삼았으므로, 원소 역시 여포를 골칫거리로 여기게 되었다. 여포는 이를 두려워하여 낙양으로 가겠다고 말하며 스스로 떠나기를 청했다. 원소는 이를 승낙해 임의로 자신이 칭하고 있던 사례교위의 관직을 여포에게 주며 장사들을 보내 여포를 전송하게 하는 한편, 그들에게 여포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나 이를 눈치챈 여포는 다른 사람을 시켜 군막 안에서 쟁(箏)을 켜게 하며 자신은 몰래 달아났다. 암살이 실패한 것을 안 원소는 군사를 보내 여포를 뒤쫓았으나 추격병들 중 여포의 무용을 두려워하여 가까이 접근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여포는 다시 장양에게 의탁했지만 장양은 원소의 미움을 살 것을 두려워했으므로 여포는 장양 밑에서도 오래 있지 못해 장막(張邈)에게 의탁했다. 장막은 조조(曹操)가 서주도겸(陶謙)을 치러 본거지를 비웠을 때, 여포 등과 합세하여 복양을 점거하고 조조를 위기로 몰아넣었지만, 결국엔 조조에게 패배해 장막은 원술에게 구원을 요청하러 가던 도중 살해당했고, 여포는 장막의 부하들을 이끌고 유비(劉備)에게 몸을 의탁한다.

유비가 원술과 싸우는 틈을 타 여포는 배신하여 하비(下邳)를 점거하고 서주를 취하고 서주자사라고 칭하였다. 원술은 이를 기뻐하며 여포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유비는 원술에게 패하고 갈 곳이 없게 되자 여포에게 귀의했는데, 원술이 기령(紀靈)을 보내 유비를 토벌하려 하자, 여포는 화극에 화살을 맞추는 무용을 선보이며 기령을 돌려보냈다. 원술은 이후 한윤(韓胤)을 사자로 보내 황제를 참칭할 생각을 여포에게 알리고 사돈을 맺으며 결속을 굳건히 할 것을 권했는데, 여포는 이 혼담을 승낙하고 딸을 원술에게 보냈지만, 진규(陳珪)의 설득에 넘어가 군사를 보내 이를 뒤쫓으며 혼담을 파기했다. 또한 한윤을 붙잡아 형틀에 묶은 채로 조조에게 보냈다. 한윤은 허도(許都)의 저자거리에서 참수되어 목이 내걸렸고, 조조는 여포를 좌장군에 제수했다.

원술은 대노하여 그의 대장 장훈(張勳), 교유(橋蕤)에게 수만명을 지휘하게 하고, 한섬(韓暹), 양봉(楊奉)과 세력을 연결하며 일곱 갈래 길로 여포를 공격했다. 여포는 이에 크게 두려워하며 진등을 힐책했으나 진등은 한섬과 양봉은 원술과 막 합세했으므로 그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진언했으므로 마침내 편지를 보내 원술군을 격파하면 그 노략한 군수물자를 모두 그들에게 주기로 약속했다. 한섬과 양봉은 이에 계획을 바꿔 여포를 따르기로 결심했고, 여포가 진군하여 원술군의 둔영과 불과 1백보 가량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때 한섬과 양봉의 군사들이 동시에 이들을 공격하자, 원술의 장군 10명이 죽었고 전사자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뒤 여포는 또 한섬, 양봉의 2군과 함께 수춘으로 향하며 지나는 곳마다 노략했다. 종리(鍾離)에 이르러 크게 노획하고 되돌아갔는데, 회수를 건너 그 북쪽에 도달한 뒤 원술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귀하는 군(軍)이 강성한 것을 믿고 늘 호언하기를, 휘하의 맹장과 난폭한 무사들이 서로 죽이고자 하여 늘 이를 억제한다고 하셨소. 내가 비록 용맹하지 못하지만 회수 남쪽에서 한 때의 시간동안 범처럼 거닐었는데, 족하는 수춘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고 고개를 내미는 자조차 없으니 맹장, 무사들은 모두 어디에 있단 말이오? 족하는 큰소리 쳐서 천하를 속이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찌 천하인들을 모두 속일 수 있겠소? 옛날 군사들이 교전할 때에도 그 사이에 사신은 오갔고, 책략을 꾸미는 것도 나 여포가 먼저 주창한 일이 아니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니 다시 소식 전할 수 있을 것이오.”

이에 원술이 대노하여 친히 보기 5천을 이끌고 회수 가에 이르렀으나, 여포군은 이미 모두 회수를 건넌 뒤였다. 여포와 그의 기병들은 모두 회수 북쪽에서 크게 비웃은 뒤 되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원술은 세력을 만회하고자 진(陳)국을 점령하고 진왕 유총(劉寵)을 죽였으나, 이 직후 조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완전히 몰락하고 만다.

198년 여포는 다시 원술과 연합하여 조조에게 맞섰다. 조조가 친정에 나서 여포를 포위하자 여포는 항복하고자 했으나 진궁 등은 그 계책을 저지했다. 한편 원술은 기병 1천기를 이끌고 직접 여포를 구원했으나, 조조의 반격에 패퇴하여 도망쳤으며 간신히 성을 지킬 뿐 다시는 여포를 구원할 수 없었다. 진궁은 여포를 설득하여 자신은 성을 지키고 여포가 병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조조의 군량을 끊으며 서로 협공한다면 조조를 물리칠 수 있다고 진언했으나, 여포의 처가 이를 말리자 여포는 결국 진궁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삼국지에 의하면 여포는 꾀가 없고 시기심이 많아 무리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제장들은 뜻이 달라 서로 의심했으므로 번번이 패했다고 한다. 조조가 여포를 포위하고 3개월이 지났을 무렵, 여포의 부장 후성(侯成)은 사소한 일로 여포에게 크게 책망을 받았는데 이 일로 인해 송헌(宋憲)·위속(魏續)과 함께 진궁을 사로잡은 뒤 군을 이끌고 조조에게 투항했다.

여포는 남은 부하들과 함께 백문루(白門樓)에 올라가 저항했지만, 송헌,위속,후성이 그를 묶어서 바쳤으므로 잡혔고, 하비는 함락 되었다.

최후[편집]

여포는 조조를 만나자 “묶은 것이 너무 조이니 조금 느슨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으나 조조는 “범을 묶는데 꽉 조이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며 거절했다. 또 여포가 조조에게 말하길, “내가 제장들을 후대했으나 제장들은 위급해지자 모두 나를 배반했소”라고 했으나 조조는 이를 비웃으며 “경은 처를 저버리고 제장들의 부인을 사랑했으면서 어찌 후대했다 하시오?”라고 반문했고 여포는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여포는 “명공께서 보병을 거느리고 나 여포에게는 기병을 거느리게 하면 천하의 평정이 실로 쉬울 것입니다”라고 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조조가 이에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띄자 유비가 조조에게 진언하길 “공께서는 여포가 정건양(丁建陽=정원)과 동태사(董太師=동탁)를 섬기던 일을 보지 못하셨습니까?”라 하자 조조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여포는 유비를 손가락질하며 “저 귀 큰 아이가 가장 믿지 못할 놈이다!”라고 외쳤다.

조조는 곧바로 여포의 목을 매어 죽였고, 머리는 잘라서 허도로 보내 효수했다.

여포의 친족관계[편집]

동탁.png

관련 인물[편집]

동탁

여포를 섬긴 사람들[편집]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劉焉袁術呂布 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