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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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달(孟達, ? ~ 228년)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이다. 부풍군 사람이다. 자경(子敬)이었으며, 후에 유비(劉備)의 숙부의 이름을 피휘하여 자도(子度)로 바꾸었다.

생애[편집]

유장을 섬기다[편집]

건안 초기, 같은 군 사람 법정(法正)과 함께 기근을 피해 촉으로 들어가 유장(劉璋)에게 의탁했다. 장송(張松)이 유장에게 조조(曹操)와 관계를 끊고 유비와 결탁하여 한중을 취하도록 하자, 유장법정과 맹달에게 각각 병사 2천 명을 주어 유비를 원조하게 했다.

유비를 섬기다[편집]

유비유장을 무찌른 후 의성태수에 임명되었다. 219년에 맹달은 자귀에서 방릉을 쳐 태수 괴기를 죽이고, 한중에서 내려온 유봉(劉封)에게 소속되어 함께 상용을 공격하여 태수 신탐(申耽)의 항복을 받아냈다. 같은 해, 관우(關羽)가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을 무렵 맹달과 유봉에게 여러 차례 원군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들은 원군 요청을 거절한다. 더구나 유봉과 맹달은 서로 화합하지 못해, 유봉이 맹달의 군악대를 빼앗았다. 관우는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여 죽고, 유비는 그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유봉과 맹달을 증오하기 시작한다.

위나라로 투항하다[편집]

맹달은 관우를 구원하지 않아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였다. 또 유봉의 행위에 분노하여 위나라에 투항했다. 《위략》에 따르면 이 때 4천여 부곡을 이끌고 투항했다고 한다. 그리고 하후상(夏侯尙), 서황(徐晃)과 함께 유봉을 무찔러 성도로 쫓아냈다.

유엽(劉曄)과 사마의(司馬懿)는 맹달에겐 충성심이 없으니 중용할 수 없다고 여러 차례 간했지만, 조비(曹丕)는 맹달의 재능과 용모를 좋아하여 맹달을 산기상시로 임명하고, 상용, 방릉, 서성 3군을 합쳐서 신설된 신성군의 태수로 삼아 서남방의 일을 맡겼다. 맹달은 조비의 총애를 받았고, 또 하후상, 환계(桓階)와 친교를 맺었다.

위나라를 배반하다[편집]

조비, 하후상, 환계가 죽고 조예(曹叡)가 즉위하자, 맹달은 스스로 불안히 여겼으며 오나라와 연결하고 촉나라와 관계를 공고히 해 중원을 노렸다. 태화 원년(227년), 제갈량(諸葛亮)이 북벌을 시작하자 맹달은 제갈량과 서신을 교환하며 거병할 준비를 했는데, 제갈량이 맹달에게 거짓 항복을 시킨 곽모가 맹달과 사이가 나쁜 위흥태수 신의(申儀)에게 계획을 드러내었다. 맹달은 탄로난 것을 알고 서둘러 거병하려 했으나, 사마의가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편지를 보내자 맹달은 기뻐하여 거병을 망설였다. 이는 《진서》 선제기에 따른 것이고, 《위략》에 따르면 신의가 표를 올려 맹달이 촉나라와 내통한다고 알리자, 황제는 믿지 않았으나 사마의가 맹달을 살피게 하고 맹달에게 입조할 것을 권하자, 맹달은 놀라서 모반했다.

12월, 사마의가 진군한 지 8일 만에 상용성에 이르렀다.

이듬해 1월, 사마의가 16일 간 성을 공격하니 맹달의 생질 등현(鄧賢)과 장수 이보(李輔)가 사마의의 유인을 받아 항복하였고, 맹달은 참수되었다. 맹달의 머리는 경사로 보내졌으며, 《위략》에 따르면 번화한 길에서 태워졌다.

《삼국지연의》 속 맹달[편집]

자가 자경(子慶)으로 설정되어있다.

제갈량이 북벌을 시작하자 맹달은 낙양을 공격하여 내응하려 하였다. 그러나 맹달의 모반 계획은 마침 복귀한 사마의에게 간파되어, 사마의는 신속히 맹달을 진압하러 출병한다. 맹달은 진압군의 선봉 서황이 항복을 권유하자 화살을 쏘아 죽이고 서황 군을 추격했으나, 막상 사마의 군이 이르자 맹달은 사마의가 생각보다 너무 빨리 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등현, 신탐신의가 배반하여 맹달을 죽이고 사마의에게 투항했다.

맹달의 친족관계[편집]

타(他)━달(達)━흥(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