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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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무열제
(始祖 武烈帝)
본명 손견(孫堅)
재위 추존
출생일 156년
출생지 오군(吳郡) 부춘현(富春县)
사망일 192년 2월 18일 (음력)
사망지 형주(荊州)
매장지 고릉(高陵)
배우자 오국태
자녀 손책, 손권, 손익, 2명, 손랑, 손광
부친 손종
후임자 손권
묘호 시조(始祖)
시호 무열제(武烈帝)

손견(孫堅, 156년 ~ 192년 1월 7일)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문대(文臺)이며 양주(揚州) 오군(吳郡) 부춘현(富春縣) 사람이다. 손종의 차남이며, 손책(孫策), 손권(孫權)의 아버지로, 묘호는 시조(始祖)며 시호는 무열황제(武烈皇帝)다.

목차

생애 [편집]

낙양의 우물가에서 전국옥새를 찾아낸 손견

생애 초반 [편집]

출신에 대해선 춘추 시대의 명장 손자의 후손일 것이라고도 한다. 17세 때 전당에서 약탈을 일삼던 해적을 죽여 유명해졌다.[1] 회계에서 허창의 난이 일어나 스스로 양명황제라 칭하자, 손견은 군사마로서 정병을 모아 주·군의 군사와 함께 허창을 토벌했다. 이로 인해 염독승이 되었고, 다시 우이승, 하비승이 되었다. 184년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회계 사람으로 중랑장인 주준(朱儁)이 표를 올려 좌군사마로 삼아 참전해 주준과 함께 분투하였으며, 반란이 끝나자 별부사마를 제수받았다.[2]

동탁과의 불화 [편집]

변장(邊章), 한수(韓遂)가 양주에서 난을 일으키고 중랑장 동탁(董卓)이 토벌하지 못하여 사공 장온(張溫)이 거기장군이 되어 이를 토벌할 때, 장온이 토벌군에 참여하게 했다. 동탁이 새로이 상관이 된 장온에게 불순히 대했으므로, 손견은 동탁이 무례하며, 출전하였으나 공적은 없고, 오만하니, 지금 군율을 물어 죽이지 않으면 형벌이 어그러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장온동탁과 이민족들과의 관계를 들어 거절했으며, 훗날 동탁이 집권한 후 장살당했다. 장사에서 구성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사태수에 임명되어 난을 진압했고, 주조와 곽석이 영릉과 계양에서 봉기하고 구성과 상응하자 장사군의 경계를 넘어가 이들도 토벌해 장사 · 영릉 · 계양 3군을 평정했다. 이 공으로 오정후에 봉해졌다.[2]

반동탁 연합군에서 선봉장으로 서다 [편집]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호응하여, 형주자사 왕예(王叡)를 자신에게 무례했다는 이유로 벼르고 있었는데 때마침 조인(曹寅)이 거짓 격문을 띄웠으며 손견은 이에 속아서 왕예를 살해했다. 남양태수 장자를 연회에서 사로잡아 참수하며 노양에 이르러 원술(袁術)을 만났다. 원술이 표를 올려 파로장군을 대행하게 하고 예주자사로 삼았다. 양동에서 동탁의 대군을 만나 겨우 달아났다. 다시 병사를 수습하여, 양인에서 동탁의 대장 호진을 크게 무찌르고, 도독 화웅(華雄) 등을 효수했다. 동탁군은 손견을 꺼려 이각을 사신으로 보내서 손견의 자제들을 손견이 원하는 곳의 자사로 삼아준다는 조건을 걸고 화친을 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손견은 대곡으로 진군하니 낙읍이 90리 거리였다. 동탁은 낙읍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옮겼다.[2]

《삼국지》 주석 《오서》에 따르면, 동탁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할 때, 손견은 불타는 낙양성의 화재를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낙양 재건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때 손견은 낙양 궁전인 건장전 근처 우물가에서 궁녀의 시체를 끌어올려 황실의 가장 소중한 보물인 전국옥새를 찾아냈다. 그러나 이를 삼국지에 주석으로 채록한 배송지는 '어찌 손견과 같이 충의로운 사람이 한 왕조의 신기를 얻어서 숨겨두겠는가.'라며 부정한다. 《삼국지》 주석 《산양공재기》에서는 이 옥새를 원술에게 빼앗겼다고 한다.[2]원술이 손견으로부터 옥새를 빼앗는 과정이 꽤 추잡한데 손견이 옥새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은 원술은 바로 손견의 아내를 납치한 후 손견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였다. 결국 손견은 자신의 아내와 옥새를 맞교환했다.

원술에게 의탁하다 [편집]

손견은 평소에 친분이 있던 원술에게 남양을 내주고 의탁하게 된다. 군사력은 강력했지만 평민 출신인 탓에 아무런 권력적 기반이 없었던 손견은 빈털털이에 가까울 정도로 세력이 약한 대신 명문 귀족 출신의 원술과 힘을 합쳐서 자신의 뜻을 펼치려 했다. 원술은 손견을 양성(사례 하남윤 양현 양인취, 혹은 예주 영천군 양성현)으로 보내 동탁을 막게 했는데, 원소주앙을 보내 그곳을 빼앗았다. 이에 원술은 손견과 공손월(유화의 일 때문에 공손찬이 그때 마침 원술에게 보냈었다)을 보내 주앙을 공격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공손월이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3]

최후 [편집]

원술유표(劉表)와 대립하자, 손견은 원술의 명령으로 유표를 공격하여, 유표가 파견한 황조(黃祖)를 무찌르고 황조를 생포하였으며 양양성을 포위하는 등 승승장구 했으나, 순시 도중 황조의 군사에게 화살을 맞아 죽었다. 다만 《영웅기》에서는 유표의 장수 여공을 치다가 여공의 군사가 쏟아부은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7세였다. 손견이 전사한 후, 그의 수하 환계는 손견을 장사지내기 위해 손견의 영구를 되돌려받는 교섭을 하기 위해 유표 진영에 사신으로 갔다. 이에 유표는 목숨걸고 주군의 영구를 찾으려는 환계의 행동에 감복하여 이를 묵살하고 환계의 교섭에 응하여 손견의 영구를 넘겨줬다. 이후 조카 손분(孫賁)이 손견의 무리를 거느리고 원술에게 의탁했다.[2]

이후 장남 손책은 원술의 명령에 따라 육강 등을 토벌하고 다녔으나 원술이 칭제하자 그대로 병력을 들고 도주하였으며 그 길로 바로 유요를 토벌하고 의 기반을 닦았다.

차남 손권를 건국하고 황제에 오르면서, '시조 무열황제(始祖 武烈皇帝)'로 추존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의 손견 [편집]

삼국지 연의 최대의 피해자로서 손견의 무훈 대부분이 축소되었다. 실제로는 손견이 화웅을 베고 동탁을 공포에 질리게 하여 결국 이각이 손견에게 화친을 청하러 손견에게 찾아오지만 연의에서는 이 모든 부분이 죄다 삭제되었으며 손견은 화웅이 무서워 도망친 졸장부로만 묘사되어 있고 화웅은 아무 상관없는 관우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게다가 연의에서 묘사된 손견은 실제로는 충의지사 중에서도 상충의지사인 손견과는 다르게 낙양의 화재를 진압하던 도중 발견된 옥새를 훔쳐 달아나는 역적으로 묘사되었다. 더군다나 원술의 지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유표를 공략하는 실제의 손견과는 달리 연의의 손견은 유표에게 옥새를 빼앗기기 싫어서 유표를 공격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삼국지 연의가 절세의 충의지사를 역적으로 만들어놓았다. 이 때문에 정사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손견만한 천하의 충의지사는 이 세상에 없는데 어째서 손견이 옥새를 탈취했다 하는가."라며 손견이 옥새를 갖고 도망간 사실을 적극적으로 부정했다.

손견을 섬긴 사람들 [편집]

손견의 친족관계 [편집]

손견.png

주석 [편집]

  1. 허숭(許嵩)의 《건강실록(建康實錄)》에 따르면, 이 해적의 이름은 호옥(胡玉)이다.
  2. 진수 : 《삼국지》 권46 오서1 손파로토역전
  3. 《삼국지》 권8 이공손도사장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