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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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

강유(姜維, 202년 ~ 264년)는 중국 삼국 시대 촉한의 무장으로, 백약(伯約)이며, 천수군(天水郡) 기현(冀縣)[1] 사람으로 한족(漢族)이 아닌 강족(羌族) 출신이다.

생애[편집]

본래 위나라의 장수로써 천수태수 마준(馬遵)을 섬겼으나, 227년 제갈량(諸葛亮)의 1차 북벌 때 천수군의 각 현이 촉한에 호응한다는 소식을 들은 태수가 의심을 품는 바람에 버림을 받아 갈 곳이 없어졌다. 제갈량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가 지극한 효자 라는 것을 이용해 투항하게 만든다. 학문과 무예, 인품을 모두 갖춰 제갈량으로부터 "마량(馬良)보다 뛰어난 인재"라는 평가를 받았다.

제갈량 사후에 대장군으로서 정권을 장악한 장완(蔣琬)의 지원을 받아 를 치려했으나, 장완이 사망하고 그에 대해 부정적인 비의(費禕)가 뒤를 잇자 야심은 잠시 가라앉게 된다. 비의는 북벌에 소극적이고 내정부터 충실히 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장완과 비의가 모두 죽자, 유선(劉禪)은 강유에게 대장군의 직책을 맡긴후 를 견제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강유는 제갈량이 생전 이루지 못했던 북벌에 집착하여 9차례 북벌을 하지만 모두 위의 장수에게 막히거나, 환관 황호(黃皓)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유선의 퇴각명령으로 끝난바가 있다.[2]

후에 263년 등애(鄧艾)의 촉 정벌검각에서 위나라의 장수 종회(鐘會)에 맞서 끝까지 싸웠으나 유선의 항복문을 받아 위에 항복하고, 등애의 촉 정벌로 불안감을 느끼던 장수 종회에게 접근해 반란의 계획을 짠다.

264년 1월, 종회를 부추겨 등애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종회 밑의 위나라 장수들이 종회와 강유를 살해하였다.

《삼국지연의》[편집]

  •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천수에 머물던 강유는 제갈량의 계략을 간파하여 제갈량을 패퇴시키는 공적을 세웠다고 묘사한다. 제갈량의 패퇴 이후 제갈량은 강유가 효자임을 파악해 계략을 베풀어 강유를 사로잡고 강유의 모친을 통해 강유를 항복하게끔 한다.
  • 234년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한 제갈량이 강유의 하늘에 제단을 열고 기도를 하라는 조언을 받아들여 7일 동안 촛불을 키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하는 기도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위연(魏延)이 이를 깨트렸다고 하였으며, 그 후 제갈량은 죽기 전 강유를 불러 그의 병법을 담은 책을 전수했다.

평가[편집]

  •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는 강유가 문무를 갖추었고 공명을 세우려는 뜻이 있었다고 하면서도 병사들을 경시하였고 병력을 함부로 사용했다고 평한다. 또한 분명하게 결단을 내렸지만 조밀치 않아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노자를 인용하며 '대국을 다스리는 자는 작은 물고기를 삶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하물며 작은 나라에 대해서야 여러 차례 소란스럽게 할 수 있겠는가라며 강유를 비판하고 있다.
  • 하지만 이것은 다소 진수의 평가 실수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럴 것이 강유가 처했던 상황을 본다면 강유가 병력을 함부로 사용하고 경시했다고 보기 힘들다. 강유는 병력을 함부로 쓰기 어려운 것이 그가 명목상 대장군까지 올랐었다고 하나 제대로 된 권한과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사서에서 강유가 거느렸던 병력은 몇 만 안팎에 불과했고, 물자는 오로지 현장에서 자급자족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 원망스러운 상황에서도 강유는 유선을 탓하기보다 조금이라도 나라의 국력에 손실이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고, 그의 북벌을 반대한 중신들도 그의 능력과 인품을 인정했다.
  • 위나라 장수이자 강유의 맞수라고 흔히 추켜세워지는 등애는 지인들과의 자리에서 '내가 강유보다 뛰어나다.'라고 말했다가 비웃음을 들었다.
  • 극정(郤正)은 강유에 대해, 상장의 위치에서 신하들의 위에 있었음에도 강유는 초라한 집에 살았으며 재산이 별로 없었다고 하면서 강유와 같이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게으르지 않고 청렴하며, 소박하고 절약하는 인물은 한 시대의 모범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와 관련된 유적들[편집]

민담과 삼국지 야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유적들이 남아있다고 한다.

1. 강유가 검각으로 와서 진영을 정비하고 요새를 지키고자, 종회의 10만 대군이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유선이 그에게 장수와 군사들을 거느리고 종회에게 항복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강유는 이 말을 듣고 원망스럽고 화가 나서 분통을 참다못해 칼을 뽑아 돌을 베었다. 그때 그가 자른 돌은 지금도 검각 협곡 안에 있으며, 사람들은 이 돌을 「감도석」이라 부른다.

2. 촉나라의 항복 소식을 들은 강유는 성지를 거역할 수 없어 양면으로 된 군기를 거꾸로 걸리는 명령을 내려 투항할 뜻을 표했다. 그 양면으로 된 기는 주가채의 바위 절벽에 남아있는데, 지금까지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있으며, 이를 「쌍기암」이라 부른다.

3. 그는 장수와 병사들에게 병기를 소검산의 한 동굴에 숨긴 다음, 차후에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 왕실을 부흥할 때 다시 사용하고자 했다. 백성들은 그 동굴을 「강유 도창고」라고 부른다.

4. 강유는 마지막으로 검문관을 떠날 때 마고자를 벗어 빨아 산의 바위 위에 널어 말리며 반드시 돌아올테니 그때 다시 입을 거라고 했지만, 결국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옷은 돌로 변하였고, 지금도 검문관 20리 밖에서는 바위 위에 널려 있는 마고자의 모양을 볼 수가 있다. 이를 가리켜 「양의암」이라고 한다.

주석[편집]

  1. 현재 쓰촨성(四川省) 아바티베트족창족자치구(阿坝藏族羌族自治州) 원촨현(汶川县, 문천현) 옌먼향(雁门乡, 안문향) 러보자이촌(萝卜寨村, 나복채촌)
  2. 진수: 《삼국지》권44 촉서14 장완비의강유전(蒋琬費禕姜維傳) 중 강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