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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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탁

동탁(董卓, 139년 ~ 192년 음력 4월 23일)은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이며, 는 중영(仲穎)이다.

생애[편집]

동탁은 완력이 뛰어나 두 개의 궁대(弓袋)를 몸에 차고 말을 몰면서 어느 손으로도 활을 맘대로 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젊어서부터 의협적인 무리와 함께 강족 지역을 방랑하여 유력자와 친분을 맺었다. 그 후 향리에 돌아와 농사에 전념하였는데, 강족 무리가 찾아오자 마침 밭을 갈고 있던 소를 잡아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강족은 그 의기에 감격하였다. 또한 병주 정벌에서 전공을 세우자 포상금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인심 장악에 뛰어난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1]

이민족 토벌[편집]

동탁은 북방 이민족 토벌에 수많은 전과를 올려 승진을 거듭하여 중랑장이 된다. 그 후 황건적(黃巾賊) 토벌에서 패배하여 면직되지만 한수(韓遂) 등이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복직되어 진압을 맡았다. 이 전투에서 수만 명의 강족에게 포위되어 식량이 떨어지지만 동탁은 물고기를 잡는 척하면서 빠져나가고, 도중에 하천을 막아 연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군대를 통과시키고 나서 제방을 무너뜨렸다. 이에 강족은 물이 깊어 추격하지 못해 동탁은 상처없이 무사히 귀환했다. 조정에서는 그를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소환하여 소부로 삼고 군대를 좌장군 황보숭(皇甫嵩)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동탁은 계속 칙명을 거역했다. 이때문에 일찍이 손견(孫堅)은 군율을 무시하는 동탁을 살려두면 절대 안된다고 장온(張溫)에게 진언했지만, 장온은 강족과 동탁의 관계를 들어 이를 무시하였고, 훗날 동탁은 장온을 매질하여 죽였다. 연의에서는 동탁이 베푸는 연회 중에 여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장온을 밖으로 끌고가서 죽여버린다고 묘사되어 있다.

소제 폐위[편집]

그 무렵 하진(何進)이 환관 제거를 모의하기 위해 전국의 제후들을 소집하였는데, 동탁도 이 거사에 동참하기로 했다. 그러나 동탁이 낙양(洛陽)에 도착하기 전에 하진이 주살되고, 환관들에게 연행된 소제(少帝)와 진류왕(陳留王 : 헌제)의 신변을 보호하면서 낙양으로 들어왔다. 이때 동탁의 병사는 3천여 명밖에 없었으나, 4~5일 간격으로 밤에 네 성문에서 밖으로 군사를 보내 다음날 아침 군기와 북을 가지고 입성시켜 대군처럼 보이게 했다. 이것으로 하진·하묘(何苗) 형제의 군사를 병합하는 데에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포를 부추겨 집금오 정원(丁原)을 제거하도록 하고 그 군대를 흡수했다. 그리고 가뭄을 이유로 사공 유홍(劉弘)을 면직시키고 대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자마자 태위로 승진한다. 소제를 폐위하여 홍농왕으로 강등시킨 뒤, 진류왕을 제위에 앉혔고 소제를 모후인 하태후와 함께 시해하는 동시에 하진을 죽게 했다는 혐의로 십상시의 난 때 죽음을 당한 하묘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절단하면서 길에다 아무렇게나 버렸으며 하진, 하태후, 하묘의 어머니 무양군(舞陽君)을 비롯한 하씨 일족들을 모조리 몰살시켰다. 또한 소제 대신 헌제를 제위에 올리면서 스스로의 벼슬을 상국(相國)[2]으로 높였다.

동탁의 포악함이 극심해진 것은 이때부터다. 군대를 이끌고 순찰 중에 주민들이 춘절을 즐기는 것을 보자, 거기에 있던 남자들은 목을 베고, 여자는 탈취하여 병사들에게 첩으로 주고,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심지어 궁녀나 공주에게까지 함부로 폭행(성폭행을 포함한다.)을 가하기까지 했다. 이와 같은 만행을 참을 수 없어 오부가 동탁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지만 실패하여 살해되고 만다. 조조(曹操)도 칠보도(七寶刀)를 빌려 동탁 암살을 모의하지만 실패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또한 오수전(五銖錢)을 녹여 조그만 동전으로 주조했는데, 막대한 양의 금속을 여기에 투입했고, 이 때문에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나 곡식 한 석이 수만 전에 이를 정도였다.[3]

반동탁 연합군[편집]

190년, 각지의 제후가 원소를 맹주로 하여 반동탁 연합군을 조직하였다. 마침 영제 말기에 일어난 백파적(白波賊)이란 도둑이 태원 · 하동 일대를 노략하자 우보를 보내 막게 했으나 실패했기에 더욱 두려워한 동탁은 장안(長安) 천도를 강행했다. 이때 낙양 사람들을 강제로 장안으로 옮기게 하니 사람들은 가는 도중 굶거나 약탈을 당하거나 하여 길에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황제가 3월에 장안의 미앙궁에 입궁한 후, 동탁은 낙양의 궁궐과 민가를 불태웠다. 한편 여포에게는 왕릉이나 대신들의 묘를 도굴하게 했다. 동탁 자신은 필규원에 주둔하고 있었다.[4][5]

반동탁 연합군은 서로 강대한 동탁의 눈치를 보며 진격에 지지부진했고, 조조포신이 독자적으로 동탁을 공격하려 하자 동탁은 서영을 보내 이들을 무찔렀다. 한편 장사태수 손견이 남양태수 장자를 죽이니 남양은 원술의 손에 넘어갔고, 원술은 손견을 예주자사로 삼고 동탁을 공격하러 보냈다. 손견이 노양까지 진격하자, 동탁은 다시 서영을 보내 손견을 패주시키고 영천태수 이민(李旻)을 사로잡아 삶아죽였다. 하내태수 왕광이 하양 나루에 주둔하여 동탁을 치려 하자, 왕광을 도발하는 한편 몰래 정예병으로 강을 건너게 해 왕광 군을 무찔렀다. 191년, 손견이 군사를 수습해 양인에 주둔하자 동탁은 호진(胡軫)을 대독호로 삼고 여포를 기독으로 삼아 손견을 막게 했으나, 호진과 여포가 불화하여 양인성을 공략하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군세를 수습한 손견에게 대패하여 도독 화웅(華雄)을 잃었다. 동탁은 이각(李傕)을 사신으로 보내어 손견에게 화친을 시도하였으며 이때 손견의 자제들에게 자사나 태수의 직위를 천거하겠다는 약조를 붙였으나 손견은 화친을 받아들일 의사가 전혀 없었으므로 결렬되었다. 동탁은 연이어 손견과 싸워 져, 손견은 마침내 낙양에 입성했다. 그러나 동탁은 낙양에서 물러난 후에도 민지 · 안읍 · 화음 등 요충지에 자기 장수들을 배치하여 반동탁 연합군을 방어할 태세를 갖추었다.[6]

한편 낙양에는 주준을 남겼으나, 주준은 반동탁 연합군과 내통하고 있었다. 동탁은 주준을 쳐 형주로 내쫓고 양의(楊懿)로 대신 하남윤을 삼았으나, 주준이 다시 군대를 수습해 양의를 쫓아내니 동탁은 하남을 다시 잃었다.[7]

동탁은 중국 전토를 차지할 야욕이 있었는데 이에 걸림돌이 될 만한 다섯 가지 요소를 꼽았다. 원소의 명성, 원술의 명성, 유표의 세력, 유언의 세력, 그리고 손견의 용맹이였다.

말년[편집]

반동탁 연합군은 오래가지 못하고 자연스레 해체되었지만 동탁의 전횡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192년,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으나 동탁이 이 결혼에 대해 여포에게 화극을 던져가면서까지 반대하였으므로 여포는 동탁에 대해 극에 달하는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해 4월 이를 이용한 왕윤(王允)은 동탁의 심복 여포에게 그 시녀와 여포를 혼인시켜준다는 조건으로 꾀어내어 동탁 살해를 모의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왕윤이 양녀 초선(貂蟬)을 이용하여 ‘연환지계(連環之計)’로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쓰여있다. 이리하여 동탁은 선양과 관련된 회의에 참석하라는 전갈을 받고 궁궐에 들어갔다. 그 때 왕윤과 여포가 서로 짜고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 칼을 들거나 말을 타고 알현할 수는 있지만 휘하병력을 이끌고 알현할 수 없다는 궁중규칙을 이용하여 황제의 호위병을 이용하여 동탁을 제지하였다. 이에 동탁은 호위병들에게 제지당한 후 황제의 조칙을 받은 여포에게 54세의 나이로 사형당한다. 동탁은 사망한 후 참수되어 동탁의 머리와 몸통이 따로 분리되어 장안성에 효수되었는데, 한 병사가 동탁의 영구 중에 뚱뚱한 몸의 배꼽에 불을 놓자 며칠씩이나 계속 탔다고 한다.

동탁의 재평가[편집]

적은 수이긴 하지만, 동탁이 삼국지연의의 작가인 나관중과 역사가들에 의해 악의적으로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동탁이 중원 출신이 아니라 변방 서량 출신으로 중앙 최고 관직에 오른 것을 사람들이 시샘하였다는 것이 그 주 내용이며, 반동탁 연합군들도 모두 전통적인 권세가들이라는 것을 볼 때, 반동탁 연합군 자체도 신흥귀족에게 자리를 빼앗긴 기성귀족들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서 전쟁을 벌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반동탁연합군에 참가한 제후 중 한복(韓馥), 유대(劉岱), 공주(孔伷), 교모(喬瑁) 등은 동탁이 임용한 관리였다.

동탁을 섬긴 사람들[편집]

동탁의 친족관계[편집]

동탁.png

관련 인물[편집]

여포

주석[편집]

  1. 범엽: 《후한서》 권72 열전제62 동탁전: 董卓字仲穎,隴西臨洮人也。性麤猛有謀。少甞遊羌中,盡與豪帥相結。後歸耕於野,諸豪帥有來從之者,卓爲殺耕牛,與共宴樂,豪帥感其意,歸相斂得雜畜千餘頭以遺之,由是以健俠知名。
  2. 한 역사 400여년을 통털어 이 관직에 오른 사람이 조참, 소하 등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적었는데 상국은 승상보다 높은 관직으로 황제와 황제가 아닌 사람을 구분하기 위한 기준으로 삼으며 황제의 권위를 존중하기 위해 일부러 공석으로 남겨둔 관직이였다. 그나마도 동탁 이외에는 전부 전한시대의 상국이였으며 후한의 상국은 동탁이 유일하다. 그런 관직에 동탁이 오른 것이다.
  3. 위 책: 又壞五銖錢,更鑄小錢,悉取洛陽及長安銅人、鍾虡、飛廉、銅馬之屬,以充鑄焉。故貨賤物貴,穀石數萬。
  4. 위 책: 初,靈帝末,黃巾餘黨郭太等復起西河白波谷,轉寇太原,遂破河東,百姓流轉三輔,號爲「白波賊」,衆十餘萬。卓遣中郞將牛輔擊之,不能却。及聞東方兵起,懼,乃鴆殺弘農王,欲徙都長安。(중략) 於是遷天子西都。初,長安遭赤眉之亂,宮室營寺焚滅無餘,是時唯有高廟、京兆府舍,遂便時幸焉。後移未央宮。於是盡徙洛陽人數百萬口於長安,步騎驅蹙,更相蹈藉,飢餓寇掠,積尸盈路。卓自屯留畢圭苑中,悉燒宮廟官府居家,二百里內無復孑遺。又使呂布發諸帝陵,及公卿已下冢墓,收其珍寶。
  5. 위 책: 권9 제기제9 효헌제기: 初平元年春正月,山東州郡起兵以討董卓。辛亥,大赦天下。癸酉,董卓殺弘農王。白波賊寇東郡。二月乙亥,太尉黃琬、司徒楊彪免。庚辰,董卓殺城門校尉伍瓊、督軍校尉周珌。以光禄勳趙謙為太尉,太僕王允為司徒。丁亥,遷都長安。董卓驅徙京師百姓悉西入關,自留屯畢圭苑。壬辰,白虹貫日。三月乙巳,車駕入長安,幸未央宮。己酉,董卓焚洛陽宮廟及人家。
  6. 위 책: 권72 열전제62 동탁전: 時河內太守王匡屯兵河陽津,將以圖卓。卓遣疑兵挑戰,而潛使銳卒從小平津過津北,破之,死者略盡。明年,孫堅收合散卒,進屯梁縣之陽人。卓遣將胡軫、呂布攻之,布與軫不相能,軍中自驚恐,士卒散亂。堅追擊之,軫、布敗走。卓遣將李傕詣堅求和,堅拒絕不受,進軍大谷,距洛九十里。卓自出與堅戰於諸陵墓閒,卓敗走,却屯黽池,聚兵於陝。堅進洛陽宣陽城門,洛陽記洛陽城南面有四門,從東第三門。更擊呂布,布復破走。堅乃埽除宗廟,平塞諸陵,分兵出函谷關,至新安、黽池閒,以截卓後。卓謂長史劉艾曰:「關東諸將數敗矣,無能為也。唯孫堅小戇,說文曰:「戇,愚也。」音都降反。諸將軍冝慎之。」乃使東中郎將董越屯黽池,中郎將段煨屯華陰,中郞將牛輔屯安邑,其餘中郞將、校尉布在諸縣,以禦山東。
  7. 위 책: 권71 열전61 중 주준전: 卓後入關,留儁守洛陽,而儁與山東諸將通謀爲內應。旣而懼爲卓所襲,乃棄官奔荊州。卓以弘農楊懿爲河南尹,守洛陽。儁聞,復進兵還洛,懿走。
전 임
유홍
제64대 후한의 사공
189년 음력 8월 ~ 189년 음력 9월
후 임
양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