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표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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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표(劉表, 142년[1] ~ 208년 8월[1])는 중국후한 말의 정치가로, (字)는 경승(景升)이며 연주(兗州) 산양군(山陽郡) 고평현(高平縣)[2] 사람이다. 경제(景帝)의 4남 노공왕(魯恭王) 유여(劉餘)의 후손이다.

생애[편집]

처음에는 대장군 하진(何進)을 섬겼다. 영제(靈帝) 사후, 칙서에 따라 장사태수 손견(孫堅)에게 살해당한 형주자사(荊州刺史) 왕예(王叡)의 후임으로 임명되어 임지로 향했다.[3]

당시 장강 이남에는 종적(宗賊)이라는 도적떼가 들끓었고, 토호들은 후한 조정의 지배를 거부하여 제멋대로 할거하고 있었다. 유표는 그 때문에 장강 이남에 있는 본래 형주의 주도(州都)인 한수(漢壽)[4]로 부임하지 않고 의성(宜城)[5]으로 들어가, 남군 지역의 유력 호족인 채모(蔡瑁) · 괴월(蒯越) · 괴량(蒯良) 등을 직접 방문하여 그들의 조력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들의 조언에 따라 종적들의 우두머리를 유인하여 살해하고 그 휘하 무리들을 흡수했다. 강하의 도적 장호와 진좌가 양양(襄陽)[6]성을 점거하자, 사람을 보내 항복시켜 마침내 강남 일대를 지배하에 두는 데 성공한다. 이후 양양을 주도로 삼고 통치했다.[7]

190년 각지에서 반동탁연합의 의병이 일어나자 유표도 참가하였다.[8] 192년 남양에 웅거한 원술(袁術)이 장사태수(長沙太守) 손견으로 하여금 유표를 공격하게 했다. 이 싸움에서 유표 수하의 강하태수(江夏太守) 황조(黃祖)가 패하여 양양성이 직접 포위당하는 지경까지 몰렸으나, 황조의 군사가 쏜 화살에 손견이 죽어 위기를 넘겼다. 그리하여 유표는 마침내 원술의 침략을 저지했다.[9][10] 《삼국지연의》에서는 유표가 옥새를 얻어 장사로 돌아가는 손견을 원소(袁紹)의 명령을 받아 공격하였으며, 이에 분노한 손견이 장사로 귀환하고 형주에 침입하자, 황조에게 명령하여 이를 방어하고, 원소와 동맹하여 대항했다. 황조는 포로로 잡히기까지 하며 고전했지만, 괴량의 계책으로 추격하던 손견을 살해하여 형주를 지킬 수 있었다. 이 때 괴량이 손씨를 완전히 파멸시키도록 권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손견의 유해와 황조를 교환함으로 마무리지었다.

192년 겨울에 조정에 공물을 바쳤고, 193년 이각(李傕)이 실권을 장악한 조정에서 가절(假節), 진남장군(鎭南將軍), 형주목(荊州牧)으로 승진하고 성무(成武侯)에 봉해졌다. 이는 유표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속셈이었다.[10][11] 같은해 원술과 조조가 다투자 원술의 보급로를 끊어 원소와 협조관계에 있던 조조를 지원하였다.[12]

197년 양현(穰縣)[13]에 장제가 쳐들어왔으나, 유시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유표는 장제의 군사를 들여보내게 하였고, 이후 장제의 군사를 거느린 조카 장수와 동맹을 맺었으며, 장수를 도와 조조와 싸웠다. 장사태수 장선(張羨)이 장사(長沙) · 무릉(武陵) · 영릉(零陵) · 계양(桂陽) 4군을 들어 유표에게 항거하고 조조에게 투항하자, 유표는 장선을 공격하였으나 몇 년이 지나도록 거꾸러트리지 못했다. 장선이 얼마 못 가 병들어 죽자, 유표는 그 뒤를 이은 아들 장역(張繹)의 세력을 아울렀다. 이로써 유표는 남으로 영릉 · 계양, 북으로 한천을 거두어 땅이 수천 리에 달하고, 병력은 10여 만에 이르렀다.

이후 조정에서는 어사중승(御史中丞) 종요(鍾繇)를 유표에게 파견하여 유표를 진남장군(鎭南將軍)에 임명하였고, 북 · 피리 · 큰 수레를 하사하는 한편 조칙을 내려 백부(伯父)라는 존칭을 주었다. 또한 진남장군의 밑에 장사(長史) · 사마(司馬) · 종사중랑(從事中郞) 등의 속관을 두었고, 부를 열어 인재를 초빙할 권한을 주는 등 격식을 삼공(三公)과 같이 하였다. 또한 좌중랑장(左中郞將) 축탐(祝耽)을 보내 부절을 주어 위엄을 더하였고, 교주(交州) · 양주(揚州) · 익주(益州)를 다스리도록 하였다.[1]

200년 관도 전투에서는 원소에게서 구원을 요청받았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 후 여남에서 유비가 몸을 의탁해 오자, 그를 받아들였다. 조조가 요동에 원정한 사이, 유비는 조조의 본거지를 급습하자고 진언하였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조조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해 유비를 신야(新野)[14]에 주둔시켰다.

208년 8월 병으로 죽으니, 향년 67세였다. 남양태수(南陽太守) 민사(旻思) 등이 향리의 유지들과 함께 자금을 모아 시신을 운구하였다. 아들은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에 임명되었고, 조정의 허락을 받아 고향에서 장사지냈다.[1]

유표는 본래 큰아들 유기를 아꼈으나, 막내아들 유종이 후처 채씨의 인척이 되면서 채씨의 공작에 따라 점차 유기를 싫어하게 되었다. 또 채모장윤이 유종의 후원이 되었다. 결국 유표는 유기를 황조의 후임 강하태수로 내치고 유종을 정식 후계자로 삼았다.[11] 이에 따라 유종이 유표가 죽은 후 그 자리를 계승하였으나, 유기도 유비에 의해 형주의 주인으로서 일어났다.

인물 및 일화[편집]

유표의 용모는 키가 8척에 달하고, 위엄이 있는 풍모였다고 한다. 유표는 정치를 잘 해 전란이 계속되어 토지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안전한 형주에 모여들게 되어 형주는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또 형주에 들어온 사람중에는 명사들이 있어, 형주에는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유표는 학문을 장려하였고, 송충이나 사마휘 등의 학자도 육성하게 되었다. 유표 자신도 유학자로서 당인(黨人)이었던 왕창(王暢)에게 사사하여, 젊을 적부터 유학자로서 알려져 “팔교”(八交) 혹은 “팔고”(八顧) 및 “팔우”(八友) 중 한 명에 뽑히기도 하였다. 하지만 유표는 후계자 문제를 쉽게 결단내리지 못하여 훗날 그 사업이 그대로 조조에게 흡수되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유표가 한숭으로 조조를 정탐하게 했는데, 한숭은 황제를 끼고 있는 조조를 만나게 되었다가 황제의 명을 받는 날에는 유표의 명령에 복종할 수 없게 되므로 거부했으나 유표는 기어이 한숭을 조조에게 보냈다. 돌아온 후 과연 한숭은 조조를 추켜올렸고, 유표는 한숭을 죽이려 했다가 주변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또, 감녕을 병졸로 남겨두며 중용하지 않아 결국 감녕이 손권의 부하가 되어 자신 수하의 황조를 잃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게다가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하여 사실상 채모의 허수아비로 전락했는데 이런 위인 주제에 권력의 욕심은 대단해서 헌제가 즉위하자 조공을 끊고 황제와 복식을 동일하게 하며 칭제했다.

평가[편집]

진수는 《삼국지》에서 유표를 원소와 묶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유표와 원소는 모두 위용이 있으며, 넓은 도량과 식견으로 이름이 당세에 알려졌다. 유표는 한남을 점거하고 섰으며, 원소는 하삭에서 웅위를 보였으나, 모두 겉으로는 너그럽고 속으로는 꺼리며, 모략을 좋아하나 결단이 없었으며, 재주가 있어도 쓰지 못하고, 좋은 것을 들어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우고, 예의를 버리고 편애를 숭상했으니, 그 후사가 고통을 받고, 사직이 기울어져 엎어진 것이 결코 불행이 아니었다.”

즉 진수는 원소와 유표를 비슷한 자라고 생각하였다. 조조나 손권의 후계자 다툼에서도 서자를 후계로 세우는 것을 간언할 때 그 나쁜 사례로서 원소와 유표를 여러 번 썼다. 하지만 유종은 유표의 후계자로서 순조롭게 지위를 계승했고, 한편 유기는 유비를 의지하였다. 이 점에서 후계자의 권위가 인정되지 않고 골육상쟁이 벌어졌던 원소 일족과는 다르다. 또한 형제가 조조와 유비에게 순순히 흡수되어 버렸던 것도 끝까지 조조에게 저항을 계속하던 원소 일족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유표의 친족관계[편집]

유표.png

유표를 섬겼던 주요인물[편집]

  • 감녕 - 정확히는 황조의 수하. 병졸에 가까운 하급자로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가 손권에게 귀순했다.
  • 곽준 - 유표의 명령으로 죽은 형 곽독이 모은 사병을 통솔했다. 유표 사후 유비에게 귀순했다.
  • 괴량 - 남(南)군 중로(中盧)현 사람. 괴월 및 채모와 함께 유표에게 초청받았다. 이후 계략으로 손견을 전사시킨다.
  • 괴월 - 유표를 보좌하던 여양현령(汝陽縣令; 후에 장릉태수(章陵太守). 유표 사후 유종에게 조조에게 귀순할 것을 권한다.
  • 두기 - 유표의 명령으로 천자를 위한 악단(樂團)을 편성했다. 유종의 항복에 따라 조조를 섬겼다.
  • 등희 - 치중(治中). 간언을 유표가 듣지 않자, 병을 이유로 사직했다. 조조가 형주를 평정한 후, 초빙하여 시중(侍中)이 되었다.
  • 문빙 - 형주북쪽을 수비하던 대장. 유종의 항복에 따라 조조를 섬겼으나, 형주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슬퍼하였다.
  • 방계 - 양양에 할거하던 장호(張虎)와 진생(陳生)을 항복시켰다.
  • 부손 - 동조연(東曹掾). 유표 사후, 유종에게 조조에게 귀순할 것을 권하고, 그 공으로 조조에게도 중용받았다.
  • 상랑 - 유표에 의해 임저(臨沮)의 현장(縣長)에 임명되었다. 유표 사후 유비에게 귀순했다.
  • 송충 - “후정(後定)-오경장구(五経章句)”을 편찬한 학자. 유종이 항복한 것을 유비에게 전했다. 이렇게 되자 장비에게 차여버렸다.
  • 이엄 (촉한) - 유표를 섬겨 형주의 여러 현의 장을 역임한다. 조조의 침공으로 서천으로 망명해 유장을 섬기다가 유비의 서천 공략 때 투항한다. 백제성에서 유비의 탁고를 받고 제갈량의 북벌 때 식량수송을 담당하지만 거짓정보를 흘려 관직이 박탈되고 유배된다.
  • 이적 (촉한) - 유표를 섬기다가 유비와 인연을 맺게 되고 그 후로 계속 유비를 섬긴다.
  • 왕위 - 조조를 사로잡아 패권을 노리자고 유종에게 진언했으나 거부당했다.
  • 왕준 - 원소와 동맹을 맺는 것에 대해 유표에게 간언했으나 실패했다.
  • 왕찬 - “한말영웅기(漢末英雄記)”를 썼다. 용모가 추해서 유표에게 존중받지 못했다. 유표 사후 유종에게 조조에게 귀순할 것을 권한다.
  • 위연 - 《삼국지연의》에서는 유표의 부하로 있으면서 유비의 편을 들다가 채모, 문빙 등과 치열하게 싸우고 도망가 장사태수 한현의 부하로 들어갔다. 유비가 장사로 쳐들어오자 한현을 베고 유비에게 항복했다. 사서에서는 유표를 섬겼다는 말은 없으며, 처음부터 유비를 섬겼다.
  • 유망지 - 종사(從事). 위나라의 시중 유이의 형. 명성이 높았으나, 유표에게 직언을 토하다가 처형되었다.
  • 유선 - 별가(別駕). 한숭과 함께 유표에게 조조를 따를 것을 진언하였으며, 형주를 점거한 조조에 의해 상서령(尙書令)에 임명되었다.
  • 장윤 - 채모의 외척. 채모와 함께 유종을 후계자로 세우는 것에 대해 유표에게 권했으며, 조조에게 투항한 후 주유의 계략으로 죽는다.
  • 채모 - 유표의 측근이며 형주의 실세. 유표의 아내가 채모의 누나다. 자신의 조카였던 유종을 후계자로 세우도록 적극적으로 유표에게 권했다.
  • 한단순 - 박학다식하여 젊을 때부터 명성을 떨쳤다. 유표 사후에는 유종을 섬겼으며, 유종을 따라 조조에게 항복했다. 조조는 한단순을 아들 조식의 밑에 두었다.
  • 한숭 - 종사중랑(從事中郎). 조조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뒤, 유표에게 의심받아 감금되었다.
  • 황조 - 강하태수(江夏太守). 손견의 침입을 퇴치한 후, 그의 아들 손권과 전투를 벌이다 패해 전사했다.
  • 황충 - 유표에 의해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어 장사군(長沙郡) 유현(攸縣)을 지켰다. 유비가 장사를 평정하자, 신하가 되어 한중에서 하후연을 죽였다.

주석[편집]

  1. 채옹(蔡邕), 《채중랑집(蔡中郞集)》 권3 유진남비(劉鎭南碑)
  2. 현재 산동성 · 하남성의 경계.
  3. 진수가 쓴 《삼국지》 본문에 배송지가 추가한 주석에서는 유표에게 칙서를 내린 날짜는 있으나, 칙서를 내린 주체가 누구인지는 명기되어 있지 않았다.
    관련된 기술
    《삼국지》 위서 무제기 등에 따르면, 영의 서거는 189년 4월의 일이었고, 후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대장군 하진도 같은해 8월에 환관에 의해 살해되었다.
    후한서》 유표전에 따르면, 유표에게 형주 자사 취임의 칙서를 내린 것은 190년 형주 자사 왕예가 손견에 의해 살해당한 후의 일이라고 한다.
    《삼국지》 오서 손파로토역전에 따르면, 왕예는 손견에 의해 살해당할 때까지 형주 자사직을 맡고 있었다. 주석 〈왕씨보〉에서도 그와 같은 얘기가 확인되었다.
    《삼국지》 위서 동탁전에 따르면, 190년 당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이는 동탁이었다.
    《삼국지》 촉서 유언전-주석 속한서에 따르면, 유표가 형주목이 된 시기를 유언이 익주목이 된 188년으로 보고 있다. 배송지는 이 기술에 대해 유표가 형주의 장관이 된 것은 영제 사후, 왕예가 손견에 의해 살해당한 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하여 기술하였다.
    《유진남비(劉鎭南碑)》에서는 유표가 형주자사로 부임한 시기를 초평(初平) 원년(190년) 11월이라고 하였다.
  4. 무릉군의 속현.
  5. 남군의 속현.
  6. 남군의 속현이며, 현재 호북성 양번시 북부에 있었다.
  7. 사마표: 《전략》 (진수의 삼국지 위서 권6 동2원유전 중 유표전의 배송지 주석에서 재인용)
  8. 《삼국지》 위서 권6 동2원유전 중 동탁전에 따르면, 같은 시기 동탁은 주밀, 오경의 천거를 받아, 각주 자사를 인사 혁신하였다. 그러나 임명된 자들-한복(韓馥) · 유대(劉岱) · 공주(孔伷) · 장자(張咨)-은 동탁을 배신하고 반동탁 의병을 일으켰다.
  9. 진수: 《삼국지》 권56 손파로토역전 중 손견전
  10. 위와 같음, 권6 동2원유전 중 유표전
  11. 범엽: 《후한서》 권74하 열전제64하 중 유표전
  12. 《삼국지》 무제기의 기술.
  13. 하남성 남양 주변.
  14. 현재 하남성 남양시 신야현.

출전[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