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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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담(袁譚, ? ~ 205년)은 후한의 군웅 원소(袁紹)의 장남(호적상으론 조카)으로, 현사(顯思)이며 예주(豫州) 여남군(汝南郡) 여양현(汝陽縣) 사람이다. 원소가 죽은 후 원상(袁尙)과의 내분으로 원씨 가문의 몰락을 초래했다.

청주 공략[편집]

191년 공손찬(公孫瓚)은 부하 장수 전해(田楷)를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삼았는데, 이후 공손찬과 원소가 다투게 되자 원소는 청주에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수년 동안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193년 초, 원소와 공손찬 사이에 일시적인 화해가 있었는데, 이때 원담은 공손찬 진영의 유비(劉備)에게서 무재로 천거되며 관직에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자치통감에 의하면 이 무렵 원담은 청주자사로 임명되어 전해와 대치했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으나, 후한서에 의하면 195년 말 원소가 원담을 폐출시키고 청주자사로 삼아 내보냈다고 하며, 이를 봤을 때 193년의 청주 부임은 단지 일시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원소가 원담을 폐출시킨 것은 어린 원상을 후계자로 삼기에 위험이 될 원담을 일찌감치 권력에서 소외시키려는 의도였으나, 원담 본인의 성격적인 결함도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본디 원담이 청주에 부임했을 때 청주에서 원소의 영향력은 미미하여 하수 이서에서 시작해 평원(平原)군의 경계에 겨우 근접하는 수준이었으나, 원담은 북쪽으로는 전해를 공격해 격파했고, 196년 1월에는 다시 공융(孔融)이 다스리는 북해(北海)를 공격하여 여름 4월에 북해를 점령하고 공융의 가족들을 사로잡았다.

또한 청주 일대에 들끓던 황건적 잔당과 해적질을 일삼던 소군벌들을 평정, 흡수해 그 위세가 바다까지 빛나게 할 정도였으며 오랫동안 전란에 시달리던 청주의 백성들은 청주를 통일한 원담을 열렬히 추앙했다고 한다.

이로써 청주 전역은 완전히 원소의 땅이 되었고 원담도 이로 인해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원담은 평소 행실이 워낙 방자하고 사치스러우며 호색한이었고, 정무에 있어서도 농정을 등한시하고 아첨하는 소인배들만을 총애하며 곁에 두어 청주의 통치를 완전히 망쳐 버렸으므로 현명한 선비들을 널리 초빙해도 그들이 원담을 피해 달아날 정도였다. 원담의 평판은 다시 나빠졌다.

또한 구주춘추에 의하면 원담이 청주에 부임했을 때 도독이었을 뿐 자사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하나, 이후 황제를 옹립한 조조(曹操)가 표를 올려 자사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원소의 사촌동생 원술(袁術)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중(仲)이라 했으나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조조에게 격파되어 곤경에 처하자 199년 원소가 있는 하북(河北)으로 가려 했다. 원담은 청주에서 원술을 맞아들이려 했으나 원술이 조조(曹操)가 보낸 유비(劉備)에게 쫓겨 도중에 죽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차주를 속이고 서주를 장악한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여 피신해 오자 유비를 맞아들여 원소에게 가게 하였다.[1]

원상과의 내분[편집]

200년 원소는 대군을 거느리고 조조와 관도(官渡)에서 싸웠으나 대패했으며, 202년 5월 병들어 죽었다. 이후로 원소의 세력에 내분이 일어나 맏아들 원담과 셋째아들 원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나뉘게 되었다.

원담은 원소 생전에 폐출되었고, 원상은 호적상 원소의 적자가 되었음에도 원소의 죽음을 두곤 '후사를 정함에 미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여론은 나이가 많은 원담을 지지했다고 하는데, 이는 원상의 나이가 너무 어린 데다가 원소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후계자 문제에 혼선이 생겼기 원소의 부하들이 갈라지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린 원상에 비교했을 때 원담은 나이와 경력 면에서 압도적이었으므로, 곽도(郭圖)·신평(辛評)을 중심으로 원담을 지지하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했고, 마침내 원담은 군사를 이끌고 (鄴)으로 향한다. 하지만 평소 원담과 사이가 나빴던 심배(審配)와 봉기(逢紀)는 원담이 집권하면 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했으므로 먼저 선수를 쳐 정권을 장악하고 원상을 옹립했다. 이 과정에서 심배는 존재하지도 않는 원소의 유명(遺命)을 만들어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원담은 뒤늦게 당도했으나 이미 후계자가 원상으로 결정된 후였다. 원담은 이에 불복해 스스로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자칭하며 사실상의 독립을 선언했다.

원상은 중재역으로 봉기를 파견했다. 마침 조조의 북상 움직임이 포착되었으므로 원담은 원상에게 원군을 청했으나 심배 등은 원상에게 원군을 보내지 말 것을 거듭 진언했고 원상은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원담은 봉기를 죽였는데, 봉기가 죽자 마침내 원상이 직접 나서서 원담을 돕게 된다. 다만 이 무렵의 기술이 상당히 불확실한데, 한진춘추에 의하면 이때 원상에게서 중재역으로 파견된 봉기가 오히려 원담을 부추기며 원상과의 불화를 조장했기 때문에 원상이 원군을 보내지 않았으며, 마침내 원담이 봉기를 죽이고 정통 후계자가 원상임을 인정함으로써 원상과 화해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 9월부터 수 개월에 걸쳐 조조와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전황은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나, 마침내 203년 3월, 원담과 원상은 여양(黎陽)을 포기하고 업으로 달아났다. 조조는 계속 진군하다가 오히려 원상의 역공에 격파되어 허도로 퇴각한다. 이때 원담은 패주하는 조조군을 추격해 습격하면 완전히 궤멸시킬 수 있다고 진언했으나 원상은 이를 의심하여 따르지 않았다.

또한 원상은 전쟁이 끝나자 청주로 돌아가지 않고 있던 원담군에 대한 무기와 병력의 보충을 중단했는데, 후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원담은 이 일련의 조치에 크게 분노했다. 이때 곽도와 신평은 원담을 부추기며 원소 생전에 원담이 폐출된 일 역시 모두 심배(평소부터 원담과 사이가 나빴으며 원소 사후에 원담의 집권을 두려워해 먼저 정권을 장악하고 원상을 옹립했다)가 뒤에서 꾸민 일이라고 모함했다. 당연히 근거없는 말이었으나 원담은 이를 그럴듯하게 여겼고 마침내 군사를 끌어모아 원상을 습격하다가 도리어 대패하여 남피(南皮)로 달아났다.

별가(別駕) 왕수(王修)는 의친간을 이간질하며 영달을 노리는 간신(곽도, 신평을 가리키는 것이다.)들을 베어버리고 화해할 것을 간했으나 원담은 따르지 않았다. 원담은 거듭 군사를 모아 원상을 공격했으나 또다시 참패했고, 원상의 맹렬한 공격이 이어지자 결국 조조에게 항복했다.

이에 응한 조조는 기주로 진군해 원담을 구원했으며 원상은 조조와 대치하기 위해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다. 조조는 원담의 딸을 자신의 아들 조정(曹整)과 결혼시켰다. 유표는 원담과 원상에게 각기 서신을 보내 화해를 권했으나 양쪽이 모두 이를 듣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원상 진영에서도 모든 문제의 원흉인 곽도를 베고 화해하자는 서신을 보냈으나 원담은 이를 듣지 않았다. 이때 원담은 서신을 읽고 눈물을 흘렸으나 곽도에게 겁박당하고 있었기에 태도를 바꿀 수 없었다고도 한다. 어쩌면 이 무렵의 원담은 이미 곽도에게서 실권을 빼앗기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원상은 조조와 원담, 양 쪽으로부터 포위당하는 형국이 되어 참패하고 그 형세가 극도로 약해진다. 한편 원담은 조조에게 항복한 것이 본심은 아니었기 때문에 204년 세력 확대에 매진하여 여러 군현을 공격해 점령하고 재차 원상을 공격해 기주에서 완전히 내쫓고 그 잔병을 흡수하면서 조조에게 반기를 든다.

조조는 원담의 딸을 돌려보내고 친히 나아가 원담을 공격한다. 원담은 남피에서 항전하면서 한 번은 조조를 물리쳤으나 이어진 전투에선 결국 격전끝에 패하여 달아나다가 죽었으며 원담의 시체는 왕수가 거두어 장사지냈다.

원담의 죽음에 관한 기록[편집]

원담은 군이 패하자 휘날리듯 재빠르게 말을 몰며 추격을 대부분 따돌렸으나, 유독 집요하게 추격하는 자가 있어 결국 추격을 피하지 못했고 결국 낙마하여 땅에 떨어졌다. 원담은 추격자를 향해 목숨을 구걸했으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목이 잘려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원담을 섬긴 사람들[편집]

엄경은 원상의 부하일 가능성이 있다.

원담의 친족관계[편집]

여남 원씨.png

관련 인물[편집]

원기 원매 원봉 원상 원성 원소 원술
원안 원외 원요 원유 원윤 원평 원희

주석[편집]

  1. 袁紹劉表 열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