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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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 찬(公孫瓚, ? ~ 199년 음력 3월)은 중국 후한 말의 군벌로, 백규(伯圭)[1][2]이며 유주(幽州) 요서군(遼西郡) 영지현(令支縣) 사람이다. 수많은 전공을 세워 백마장군이라는 명성을 쌓으며 북방에서 위세를 떨쳤다.

생애[편집]

용모가 수려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의 소유자로, 노식(盧植)의 밑에서 학문을 익혔다. 공손찬은 처음에 요서 군현 문하의 서좌(書佐) 직위에 있었다. 그 곳의 태수가 공손찬이 변설에 능하고 지혜가 있는 것을 보고 탁군의 노식의 문하에 보내 경전을 배우도록 했다. 이후 효렴(孝廉)에 천거됐고, 요동속국(遼東屬國)의 장사(長史)에 임명됐다. 그 곳에서 선비(鮮卑) 기마병들과 맞서 싸웠고, 이후 탁령(涿令)으로 영전되었다.

관청에서 나와 유명한 마융의 수제자였던 탁의 노자간을 사사하였다. 노식이 직접 편찬한 교과서 <<삼례해고>>를 익혔다. 그러나 시세가 역변하여 장인 요서태수가 징좌되었다. 유배지는 저승이라 불리는 남쪽 끝의 일남이었다. 공손찬은 곧바로 수레꾼을 자청하였다.

어양(漁陽) 사람 장순(張純)이 반란을 일으켜 우북평(右北平)과 요서속국(遼西屬國)을 공격하였다. 공손찬은 병사를 이끌어 장순을 토벌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 공으로 기도위(騎都尉)로 승진됐다. 오환(烏丸)의 탐지왕이 공손찬에게 투항했다. 분위장군(奮威將軍)에 계후가 되고 북평태수(北平太守)까지 올랐다. 공손찬은 궁술에 뛰어난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 부하 수십 명은 모두 백마를 타고 있었으므로 ‘백마의종(白馬義從)’으로 불렸으며 변경의 이민족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다.[3]

그러나 유주목(幽州牧)에 황족 유우(劉虞)가 부임하여 덕으로 이민족을 복종시키자, 무력으로 다스리던 공손찬과 대립이 일어났다. 한때는 원소(袁紹)까지도 위협하여 기주(冀州) · 청주(靑州) · 연주(兗州)를 지배하였지만 반하 전투에서 원소에게 참패하게 되자 세력을 잃고 귀환하였다. 그리고 공손찬의 야심을 두려워한 유우에게 공격당하지만, 이를 격파하여 그를 사로잡았다.‘공손찬은 황제라고 자칭했다’고 무고하여 유우를 처형하였고, 유주를 탈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 수단으로 민심을 잃게 된다.

건안(建安) 3년(198년), 원소의 대군에 농성전으로 대항하였으나, 다음해 봄 아들 공손속(公孫續)을 사신으로 보내 장연(張燕)의 구원을 받아 봉화를 신호로 안팎에서 협공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사자 문칙(文則)이 원소의 척후병에게 사로잡혔고, 원소는 신호를 반대로 취해 거짓 봉화를 올렸다. 공손찬은 봉화에 응하여 출병하였으나, 복병을 만나 대패하고 만다. 공손찬은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갔지만, 이번에는 원소군이 지하도를 파 안에 불을 지르자, 성벽 기초가 불타 무너지고, 원소군이 입성하자 패배를 인정하고 불타는 역경루 속에서 처자와 함께 자살하였다.[4]

삼국지연의》 속 공손찬[편집]

자는 백규(伯珪)이다.

공손찬은 유비의 동문으로 유비에게는 거의 친형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친밀한 존재였다. 공손찬은 반동탁 연합군에 참가하며, 중간에 평원을 들러 유비와 함께 낙양으로 향하는 것으로 나와있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에서는 공손찬이 반동탁 연합군에 참가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공손찬을 섬긴 사람들[편집]

공손찬의 친족관계[편집]

공손찬.png

관련 인물[편집]

공손범 공손속 공손월

주석[편집]

  1. 《태위유관비(太尉劉寬碑)》
  2. 삼국지》·《후한서》 등에서는 백규(伯珪)라고 하나, 圭로 이름짓고 때에 따라서 珪를 혼용하였던 가차자 관계인 것으로 간주된다. 《예기》 왕제(王制)편에 '규찬(圭瓚)을 하사한 후에야 창주(鬯酒)를 빚는다(賜圭瓚然後爲鬯)'란 구절이 보이는데, '규찬'은 술잔의 일종으로 손잡이가 옥으로 장식된 것이라 하였다. 자의가 정확하게 일치한다.
  3. 劉虞公孫瓚陶謙 열전
  4. 이공손도사장전(二公孫陶四張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