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민족)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샨베이 벨트 버클 3-4세기

선비(중국어: 鮮卑, 병음: Xianbei, 기원전 1세기 ~ 6세기)는 남만주과 몽골지방에서 산 튀르크족몽골족의 혼혈[1] 유목 민족이다. 흉노족이 힘을 잃은 후 내몽골 지방에서 발생[2]했으며 위진남북조시대에는 남하하여 중국북위 등의 나라를 세웠다. 선비를 번역하면 혼합이라는 단어로 정의되며, 선비족은 하북성, 요동 서부에 살던 민족과 관계가 깊다. 따라서 선비족은 흉노, 돌궐, 말갈과는 태생의 기반이 조금 다르고, 같은 선비족이라고 하더라도 부족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선비족 출신인 당 태종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것도 이러한 요소가 있다.[3]

역사[편집]

전한 시대 동안 한무제위청을 보내 허타오지역을 흉노로부터 빼앗았다. (기원전 127년) 점령 후에는 흉노의 공격을 막기 위해 허타오 지역에 계속해서 정착촌을 건설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동안 삭방(朔方)과 오원(五原) 군을 설치했다. 이 시기에 내몽고 동부지역은 선비족이 점령했다. 선비는 이후 흉노가 한과의 전쟁을 치른후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다. 그들은 동호(東胡)족의 북쪽 일파이며 동호족의 남쪽 일파는 오환(烏桓 또는 烏丸)이다. 언어학적으로는 몽골어계통이라는 설이 강하지만 투르크계, 몽골계, 퉁구스계와의 혼혈이라는 설도 있다. 선비족의 흥성은 1세기 흉노족의 몰락과 때를 같이 한다. 87년과 93년에 선비족은 흉노족의 두 선우를 처단했다.

선비족은 기원전 시기에는 대흥안령산맥 기슭에서 목축, 수렵을 생업으로 하는, 흉노에 복속했었다. 그 후 흉노가 북과 남으로 분열하자 전한에도 결합되는 부족이 나와 반독립상태가 되었다. 1세기가 되자 북흉노가 후한과의 항쟁을 계속하는 사이에 힘을 모아 북흉노를 몽골고원으로부터 서쪽으로 내쫓았다. 2세기 반경 단석괴(壇石槐)가 등장하여 부족의 통합에 성공하여 강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석괴의 사후 다시 분열되었다.

후한 시대, 한나라는 남흉노와 연합하여 북흉노를 서아시아로 밀어낸다. 이 시점에서 사실상 흉노는 와해되고, 남흉노는 한나라에 공조 관계를 갖게 된다. 한나라가 멸망하고 삼국 시대가 시작되자, 이때부터 유목 민족이 남하하여 한족과 통합되는 과정이 있었다. 흉노의 지배를 받았던 갈족, 말갈족도 하북성, 산동성 등으로 남하했다. 일 예로 관구검의 휘하 부대는 말갈족, 갈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부대를 이끌고 고구려의 수도를 함락 시켰다.

선비족은 삼국 시대 이후로 중국과 만주의 징검다리 지역인 하북성에서 한족과 유민 민족이 결합한 민족을 말한다. 한족은 유민 민족으로 개량되었고, 유민 민족은 한족으로 개량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삼국시대, 5호 16국,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 수나라까지 계속되었다.

후한이 망하고 서진(西晋)의 황족 중에 8왕의 난이 일어나자 선비족은 용병으로서 서서히 중국 내부에 이주하게 되었다. 오호십육국시대에 들어서자 흉노의 유연(劉淵)이 서진으로부터 독립하여 전조(前趙)를 세우자 선비족도 이를 따라 중국에 나라를 세웠다. 이 즈음의 선비는 여섯 부족이 각각 강하게 되었다. 각 부족은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3]

6개의 부족 선비족의 정체성이 강한 부족은 탁발부, 모용부이고, 단부, 우문부는 우환족에 가깝다. 흘독부, 독발부은 본래 선비족에서 나왔다고 하며, 남량이 망하고 북위에 귀속되었다.

이 외에 모용부로부터 나와 서천한 토욕혼(吐谷渾)도 선비계인데 현지의 강인(羌人)도 융합했다.

탁발부의 북위(北魏)는 439년에 화북을 통일하여 이 이후는 남북조 시대가 되었다. 그 후 수의 양견(楊堅)에 의하여 중국이 통일되었으나 양견은 우문부가 세운 북주(北周)의 외척이고 자신도 선비 출신일 가능성도 있다. 동일하게 선비족시기 다얀씨(大野氏, 대야씨)인 북주(北周)의 귀족이었던 당의 이연(李淵)도 선비 출신일 가능성이 주장되고 있다. 북위의 한족화 정책으로 선비족은 한족에 동화되었다.

선비족 가운데 요서 지역의 민족은 당나라 후기에는 거란이 되었고, 요나라를 세웠다. 이때 그 휘하에 있던 말갈족, 갈족들이 일부 동만주로 이동했다. 말갈족, 선비족, 타타르 혼합 민족인 여진이 거란을 정벌하고 거란인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그 주위에 여진인을 배치하여 거란, 여진의 민족 통합이 이루어 졌다. 요서 선비족은 거란족을 거쳐 여진족으로 전환되었고, 금나라 멸망 이후 해서 여진, 야인 여진, 건주 여진으로 나뉘어 진다.

요사에서의 선비족[편집]

요사(遼史)는 “요나라는 그 선조가 거란이고 본래는 선비의 땅이다. 요택(遼澤)에 살았다(“遼國其先曰契丹 本鮮卑之地 居遼澤中” 遼史 地理志)”고 한다. 이 요택(요하의 삼각주 유역)은 대릉하~요하 유역의 세계 최대 습지로 전국시대에는 고조선 땅이었는데 연나라의 침입으로 고조선이 밀려간 서쪽 국경 지역으로 비정된다.

또한 요사는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했고 요사의 지리지에는 “(수도의 동쪽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 遼史 地理志2)”이라고 기록한다.

이것은 고조선 후예들은 고구려부(高句麗部)와 선비오환부(鮮卑烏桓部)로 나눠지고, 선비오환부는 다시 모용부(慕容部)·탁발부(拓拔部)·우문부(宇文部)·단부(段部) 등으로 분류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위서에 따르면 북위의 태무제 때(443) 지역 부족들이 나라의 발상지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태무제는 동굴에서 제사를 지낸 뒤 축문을 새기고 돌아왔다. 축문은“위대한 선조들 덕에 천하를 다스리게 됐고 조상의 은덕으로 무궁 발전할 수 있도록 축원한다”는 내용이다.

BC 2세기 한나라는 ‘흉노’를 견제하는 완충지대를 만들기 위해 요하상류의 동호(東胡·선비오환부)를 한나라 5부 북쪽으로 옮기려 했다(後漢書 烏桓鮮卑列傳). 그런데 흉노가 이를 간파해 동진하자 동호는 선비산(鮮卑山)과 오환산(烏桓山)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이들을 선비 또는 오환으로 부르게 됐다(烏桓鮮卑列傳)고 전한다. [3]

함께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선비족 ‘금동제 마구’ 들여온 주인공은 누구? 문화일보(24면 TOP, 2012.08.21) 기사 참조
  2. 김해 가야 고분에 북방 선비족 유물이? 한겨레(22면2단, 2012.08.12) 기사 참조
  3. 선비족도 고조선의 한 갈래, 고구려와 형제 우의 나눠 중앙SUNDAY(2011.03.13) 기사 참조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