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초 (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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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

마초(馬超, 175년 ~ 222년)는 중국 후한 말기의 군벌이며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이다. 는 맹기(孟起)이다. 관우(關羽), 장비(張飛), 황충(黃忠), 조운(趙雲)과 더불어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으로 불렸다.

생애[편집]

마초는 192년(초평 3년) 마등한수(韓遂)가 군대를 이끌고 장안(長安)으로 진입하자 한 왕조는 한수를 진서장군에 임명해 금성으로 귀환시키고 마등을 정서장군에 임명해 미에 주둔시킨다.

위략에서는 마초가 염행과 싸웠다가 죽을 정도로 얻어맞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를 두고 출처가 위략이라는 이유만으로 신뢰하지 않는 의견도 있으나 배송지는 주석으로 사료를 인용할 때 신뢰도가 떨어지거나 모순이 발생하는 기록에 대해서는 조목조목 이유를 들어 반박하는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어 같은 위략에서 유선이 유비와 헤어져 노예로 생활했다거나, 제갈량삼고초려 이전에 먼저 유비를 찾아갔다거나 하는 기록 등은 인용을 하면서도 그 모순과 허황됨을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염행과 마초의 대결에 대한 기록은 별다른 반박이나 의심을 표하지 않고 그대로 차용했다. 그 시기에 마등한수 사이에 전투가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에란 말이있지만 허나 이또한 반박을주장하는게 진수 는 염행과마초의대결부분은 삼국지정사에 넣지도 않았을뿐만아니라 위략에서만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사실이 사실이라면 진수가 이부분을 놓칠리없고 이런일이있는데 조조 에게 관직과 등용 [높게쓰임] 을 안받을리없다. 당시 서량에서 영웅이라 칭송받았던 마초였는데 위략 에서만나오는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어찌 서량에서 영웅이라칭송받았겠는가, 그또한말이되지않는다. 위략빼곤 어떤곳에서도 염행이 마초를 이겼다란 말이나오지않는다, 즉 위략 에서만나오는이야기일뿐이다. 이것을볼때 염행 이 마초를 이겼다란 말을 사실이라고 할수가없다. 어디까지나 위략 에서만 나오는것이고 배송지 또한 위략 은 사실이 아닌것들이 너무많다 라고하였다. 위략위나라 위주로 적었기 때문에 촉나라 장수들이나 오나라 장수들을 비판적으로 쓴내용이 많다. 마초가 유비 에게 귀순했을때도 관우는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재주는 누구에 비견될 수 있는지를 물은 일이있다, 만약 염행에게 진것이라면 자존심 강한 관우 가 마초의재주를 물어볼일이없다. 그이유로 염행에 행적은 나오지도않는다. 만약 염행이 마초를 이겼다면 조조 에게 높은 관직을 받지 않을리있겠는가, 당시 마초가 반란을 이르킬때 조조 는 마초가 큰 근심이라 여겼다. 또한 이에 제갈량장비와 비견해도 밀리지않는다라고 평가까지 하였다. 삼국지정사 에서 진수 가 마초를 평가할때 융족과 용력에 의지했다, 란 말이나올정도로 그 무예와 야망이큰 인물로 묘사했다. 위략 은 신비성이 떨어지는게 어환위나라 를 돋보이기 위해 촉나라오나라의 인물을 비판적으로 쓴내용이 많기때문이다.


사례교위 종요(鍾繇)가 관중으로 부임해 한수마등에게 서신을 보내 복종하는 경우와 반항하는 경우의 이해 득실을 각각 설명했다. 마등은 이에 응하고 아들 마초를 종요 밑으로 보냈다.

그리고 승상이 된 조조(曹操)는 마초까지 초빙하지만 마초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 뒤 사례교위 독군종사가 되어 평양현 곽원(郭援)과 고간(高幹)을 토벌하고 이때 전장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은 상촹에서도 마초는 다리를 포대로 싸매고 계속 싸우는 용맹함을 발휘하였고 결국 마초가 곽원을 격파하자 마초의 부하 방덕(龐德)이 곽원의 목을 베었다.[1]

이윽고 조칙으로 서주자사가 되고 이후 간의대부에 임명된다. 그 뒤 아버지 마등한수와 사이가 벌어져 위위로 조정에 소환되고, 동생 마휴(馬休)와 마철(馬鐵)도 각기 봉거도위, 기도위에 임명되어 모두 (鄴)으로 이주했다. 편장군이 된 마초만 양주에 남아 마등 군영을 장악해 통솔하였다.

건안 17년(212년), 마초는 한수와 연합해 반란을 일으킨 뒤 군대를 이끌고 동관까지 진군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문하시랑 황규(黄奎)와 손을 잡아 조조에 대한 반란을 기도하고, 처형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조조와 싸움을 벌인다. 조조한수, 마초와 회담하였는데, 마초는 비밀리에 조조를 체포할 생각이었으나 허저(許褚)가 엄하게 호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이것이 《삼국지연의》에서 마초와 허저가 일대일로 격돌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조조가후(賈詡)의 계략으로 마초와 한수 사이를 멀어지게 했으므로 둘은 서로 의심하게 되는데, 그 때문에 마초는 패하게 된다.

건안 17년(212년),마초는 달아나 제융(諸戎-여러 융족들)에 의지하고 조공이 추격해 안정(安定)에 이르렀으나 때마침 북방에 일이 생겨 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양부(楊阜)가 조공을 설득하며 말했다, “마초는 한신(韓信), 영포(英布)의 용맹을 갖추고 강(羌), 호(胡)의 마음을 심히 얻고 있습니다. 만약 대군(大軍)이 돌아가며 이를 엄히 방비하지 않는다면 농상(隴上)의 여러 군(郡)들은 국가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과연 마초는 서융의 강족과 융족 등의 지지를 바탕으로 다시 거병하여, 마침 하간[2]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조조가 서둘러 철수한 빈 틈을 노리고 농상을 공격했다. 농상 지방의 군과 현들은 기를 제외하고 모두 마초에게 호응했으며, 또 한중의 장로도 마초에게 원군을 보내 주었다. 마초는 양주자사 위강 등 자사 · 태수들이 항전하는 기성을 정월부터 8월까지 공격하였으며, 구원군이 오지 않아 희망을 잃은 기성의 관리들은 결국 마초와 화의를 맺고 성문을 열어 항복했다. 이러던 중 5월에 조정에 있던 아버지 마등 등의 일족은 마초의 죄에 연좌되어 삼족이 모두 멸한다. 마초는 입성한 뒤 화의를 깨고 양앙을 시켜 위강 등 자사와 태수들을 살해하고 기성을 거점으로 그 군세를 부하로 흡수했다. 마초는 스스로 정서장군이라 칭하고 병주목을 겸무해 양주의 군사도독이 되었다. 9월, 원래 위강의 부하 양부와 강서가 노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마초가 출진하지만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그 틈에 양관과 조구 등이 마초의 처자를 살해하고 기성의 성문을 굳게 닫고 있었으므로 마초는 진퇴양난에 빠져 할 수 없이 한중으로 도주하여, 장로(張魯)에게 몸을 의지하였다. 장로에게 군대를 받아 윤봉, 조앙이 지키고 있는 기산을 공격했으나, 하후연이 보낸 장합의 원군을 보자 달아났다.

마초는 장로를 따른 후부터 종종 북쪽으로 진군해 양주 탈환을 노리지만 승리하지 못했다. 장로는 마초가 바라는 대로 군사를 내주었지만, 장로의 장군 양백 등이 마초의 능력을 비난하자 설자리를 잃은 마초는 무도에서 저족이 사는 곳으로 달아났다. 이때 마초는 투병중이라서 후방의 진지에 남아있는 방덕을 버리고 마대(馬岱) 혼자만 데리고 가버렸고, 이 일로 인해 방덕은 위에 투항하여 관우와 대적하게 된다.

214년 유비(劉備)가 성도의 유장(劉璋)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밀서를 보내 항복을 알리고 촉한으로 도망갔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그 전에 장비와 둘이서 호각지세로 한판 승부를 벌이고, 이회(李恢)의 설득으로 유비에게 투항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때 사자머리 투구와 은으로 만든 갑옷, 하얀색 도포 차림새로 등장해 ‘금(錦)마초’라고 불렸다. 후에 219년, 한중에서의 싸움에서 조조의 삼남 조창을 격파해 승리하였다.

유비가 사람을 보내 마초를 등용하자 마초는 군사를 이끌고 성에 도착하였고, 유장도 곧바로 항복하고 만다. 《산양공재기》에서는 유비가 마초를 후하게 대해준 것을 계기로 마초가 유비를 낮추어 부르자 관우장비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어느 날 마초와 유비가 만나는 자리에서 유비의 양쪽에 관우장비가 칼을 차고 지키는 것을 본 마초는 이내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고 이후 태도를 바꾸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배송지가 주석을달았다. 신송지가 보건대(주석자인 배송지裵松之의 견해), 마초는 궁박해져 유비에 귀의하여 그의 작위를 받았는데 어찌 오만하게 유비의 자를 부를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유비가 촉으로 들어올 때 관우를 남겨 형주를 진수하게 했으니 관우는 일찍이 익주 땅에 있은 적이 없다. 그래서 관우는 마초가 투항했다는 말을 듣고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재주는 누구에 비견될 수 있는지를 물은 것으로 이 책(산양공재기)이 말하는 바대로가 아니니, 관우가 어찌 장비와 함께 곧게 서 있을 수 있었겠는가? 무릇 사람이 일을 행할 때는 모두 그것이 가능하다 하여도 불가함을 알면 이를 행하지 않는 법이다.



과연 마초가 유비의 자를 불렀다면 또한 이치로 볼 때 의당 그리해도 된다고 여겨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령 관우가 마초를 죽일 것을 청했다 하더라도 마초는 이를 듣지 못했는데, 단지 두 사람이 곧게 서 있는 것을 보고 무슨 까닭으로 이내 (자신이 유비의) 자를 불렀기 때문임을 알아채고는 ‘하마터면 관우,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다’고 말했겠는가? 말이 이치에 닿지 않음이 너무 심해 가히 분질(忿疾-분노하고 미워함)에 이르는구나. 원위(袁暐-헌제춘추의 지은이), 악자(樂資-산양공재기의 지은이) 등이 기재한 여러 대목은 추잡하고 헛되고 그릇되니(穢雜虛謬) 이와 같은 부류가 거의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다.

유비는 마초를 평서장군에 임명하고 임저를 다스리게 하면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도정후에 봉했다. 219년,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장비, 관우, 황충과 더불어 사방장군의 필두인 좌장군에 봉해졌다.

장무 원년(221년) 표기장군으로 승진해 양주목을 겸무하고 태향후에 봉해졌다. 장무 2년(222년), 47세에 세상을 떠난다. 시호는 위후(威侯)이다.


마초의평가[편집]

진수의 평: 마초는 융족과 용력에 의지해 자신의 일족을 망쳤으니 애석하구나! 곤궁함에 처하여 이로 인해 태평함으로 나아갔다면 더 낫지 않았겠는가!

조조의 평: 조공(조조)가말하길 “마초 저 아이가 죽지 않는다면 내가 묻힐 땅이 없겠구나` 출처-조조전-

양부의 평: 조공(조조)에게말하길 마초는 한신(韓信), 영포(英布)의 용맹을 갖추고 강(羌), 호(胡)의 마음을 심히 얻고 있습니다. 만약 대군(大軍)이 돌아가며 이를 엄히 방비하지 않는다면 농상(隴上)의 여러 군(郡)들은 국가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출처-마초전-

제갈량의 평:“맹기(孟起-마초)는 문무를 겸비하고 웅렬(雄烈-굳세고 맹렬함)이 남보다 뛰어난 일세의 호걸로 경포(黥布), 팽월(彭越)과 같은 무리입니다. 응당 익덕(益德-장비)과 말머리를 나란히 해 달리며 선두를 다툴 수있는 자라 평하였다. 출처-관우전-

마초는 이렇게 모든이가 두려워하는존재였으며 [산양공재기] 에선 마초가 유비에게 귀순할때 유비는 마초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내가 익주(益州)를 얻었구나.”라며 얘기하였다.

마초의 친족관계[편집]

마등.png

관련 인물[편집]

마대 마등 마승 마운록 마원 마철 마휴 마추 마평 마원

주석[편집]

  1. 관장마황조전(關張馬黄趙傳)
  2. 기주의 속군

읽을거리[편집]

전 임
-
(촉한 건국)
좌장군촉한 표기장군
221년 ~ 222년
후 임
이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