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초 (촉한)
마초(馬超, 176년 ~ 222년)는 중국 후한 말기의 군벌이며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이다. 자는 맹기(孟起)이다. 관우(關羽), 장비(張飛), 황충(黃忠), 조운(趙雲)과 더불어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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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편집]
마초는 192년(초평 3년) 마등과 한수(韓遂)가 군대를 이끌고 장안(長安)으로 진입하자 한 왕조는 한수를 진서장군에 임명해 금성으로 귀환시키고 마등을 정서장군에 임명해 미에 주둔시킨다. 이 무렵 마등과 한수가 격전을 하게 되었는데 마등의 진영에서는 마초가 한수의 진영에서는 염행이 나와서 1:1 결투를 하게 되었다. 마초는 선제공격으로 염행의 창을 부러뜨렸으나 염행은 그 부러진 창자루로 마초를 사정없이 폭행하여 마초는 생명이 위독할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그 뒤 마등은 장안을 습격하지만 패배해 양주로 도망갔다. 이것에 대해 사례교위 종요(鍾繇)가 관중으로 부임해 한수와 마등에게 서신을 보내 복종하는 경우와 반항하는 경우의 이해 득실을 각각 설명했다. 마등은 이에 응하고 아들 마초를 종요 밑으로 보냈다. 그리고 승상이 된 조조(曹操)는 마초까지 초빙하지만 마초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 뒤 사례교위 독군종사가 되어 평양현 곽원(郭援)과 고간(高幹)을 토벌하고 이때 전장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은 다리를 포대로 싸매고 계속 싸우는 용맹함을 발휘하여 곽원을 격파하자 마초의 부하 방덕(龐德)이 곽원의 목을 베었다.[1]
이윽고 조칙으로 서주자사가 되고 이후 간의대부에 임명된다. 그 뒤 아버지 마등은 한수와 사이가 벌어져 위위로 조정에 소환되고, 동생 마휴(馬休)와 마철(馬鐵)도 각기 봉거도위, 기도위에 임명되어 모두 업(鄴)으로 이주했다. 편장군이 된 마초만 양주에 남아 마등 군영을 장악해 통솔하였다.
건안 17년(212년), 마초는 한수와 연합해 반란을 일으킨 뒤 군대를 이끌고 동관까지 진군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문하시랑 황규(黄奎)와 손을 잡아 조조에 대한 반란을 기도하고, 처형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조조와 싸움을 벌인다. 조조는 한수, 마초와 회담하였는데, 마초는 비밀리에 조조를 체포할 생각이었으나 허저(許褚)가 엄하게 호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이것이 《삼국지연의》에서 마초와 허저가 일대일로 격돌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조조가 가후(賈詡)의 계략으로 마초와 한수 사이를 멀어지게 했으므로 둘은 서로 의심하게 되는데, 그 때문에 마초는 패하게 된다.
건안 17년(212년), 마초는 서융의 강족과 융족 등의 지지를 바탕으로 다시 거병하여, 마침 하간[2]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조조가 서둘러 철수한 빈 틈을 노리고 농상을 공격했다. 농상 지방의 군과 현들은 기를 제외하고 모두 마초에게 호응했으며, 또 한중의 장로도 마초에게 원군을 보내 주었다. 마초는 양주자사 위강 등 자사 · 태수들이 항전하는 기성을 정월부터 8월까지 공격하였으며, 구원군이 오지 않아 희망을 잃은 기성의 관리들은 결국 마초와 화의를 맺고 성문을 열어 항복했다. 이러던 중 5월에 조정에 있던 아버지 마등 등의 일족은 마초의 죄에 연좌되어 삼족이 모두 멸한다. 마초는 입성한 뒤 화의를 깨고 양앙을 시켜 위강 등 자사와 태수들을 살해하고 기성을 거점으로 그 군세를 부하로 흡수했다. 마초는 스스로 정서장군이라 칭하고 병주목을 겸무해 양주의 군사도독이 되었다. 9월, 원래 위강의 부하 양부와 강서가 노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마초가 출진하지만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그 틈에 양관과 조구 등이 마초의 처자를 살해하고 기성의 성문을 굳게 닫고 있었으므로 마초는 진퇴양난에 빠져 할 수 없이 한중으로 도주하여, 장로(張魯)에게 몸을 의지하였다. 장로에게 군대를 받아 윤봉, 조앙이 지키고 있는 기산을 공격했으나, 하후연이 보낸 장합의 원군을 보자 달아났다.
마초는 장로를 따른 후부터 종종 북쪽으로 진군해 양주 탈환을 노리지만 승리하지 못했다. 장로는 마초가 바라는 대로 군사를 내주었지만, 장로의 장군 양백 등이 마초의 능력을 비난하자 설자리를 잃은 마초는 무도에서 저족이 사는 곳으로 달아났다. 이때 마초는 투병중이라서 장로의 진지에 남아있는 방덕을 버리고 마대(馬岱) 혼자만 데리고 가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장로가 이 상태로 조조에게 항복했다는 점이다. 이 일로 인해 방덕은 위에 투항하여 관우와 대적하게 된다.
214년 유비(劉備)가 성도의 유장(劉璋)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밀서를 보내 항복을 알리고 촉한으로 도망갔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그 전에 장비와 둘이서 호각지세로 한판 승부를 벌이고, 이회(李恢)의 설득으로 유비에게 투항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때 사자머리 투구와 은으로 만든 갑옷, 하얀색 도포 차림새로 등장해 ‘금(錦)마초’라고 불렸다. 후에 219년, 한중에서의 싸움에서 조조의 삼남 조창을 격파해 승리하였다.
유비가 사람을 보내 마초를 등용하자 마초는 군사를 이끌고 성에 도착하였고, 유장도 곧바로 항복하고 만다. 《산양공재기》에서는 유비가 마초를 후하게 대해준 것을 계기로 마초가 유비를 낮추어 부르자 관우와 장비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어느 날 마초와 유비가 만나는 자리에서 유비의 양쪽에 관우와 장비가 칼을 차고 지키는 것을 본 마초는 이내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고 이후 태도를 바꾸었다고 한다.
유비는 마초를 평서장군에 임명하고 임저를 다스리게 하면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도정후에 봉했다. 219년,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장비, 관우, 황충과 더불어 사방장군의 필두인 좌장군에 봉해졌다.
또 장무 원년(221년) 표기장군으로 승진해 양주목을 겸무하고 태향후에 봉해졌다. 장무 2년(222년), 47세에 세상을 떠난다. 시호는 위후(威侯)이다.
마초의 친족관계 [편집]
관련 인물 [편집]
마대 마등 마승 마운록 마원 마철 마휴 마추 마평 마원
주석 [편집]
읽을거리 [편집]
| 전 임 - (촉한 건국) |
좌장군 → 촉한 표기장군 221년 ~ 222년 |
후 임 이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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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대장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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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와 삼국지연의의 주요 등장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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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주 | |
| 참모 | |
| 무장 | |
| 비한족 | |
| 기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