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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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빙(文聘, ? ~ ?)은 중국 삼국시대 위 (삼국)의 장수이다. 는 중업(仲業)으로 형주 남양 사람이다.

임관과 종군[편집]

문빙이 언제 유표군에 임관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조조(曹操)가 남하하여 유종(劉琮)이 항복하였을 때 아직 이립(而立)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였고, 당시의 관직이 아문장(牙門將)이었다고 하므로, 약관을 전후하여 형주자사가 된 유표(劉表)에게 임관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유표의 세력은 하북의 원소(袁紹)와 마찬가지로 다수 세력의 연합체와 같은 형태로, 호족인 양양 채씨와 괴씨, 유표와 함께 내려온 연주세력, 유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강하의 황조(黃祖)의 세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의 임지가 한진이었으므로, 당시 형주성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나뉘어있던 북쪽의 채씨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91년으로, 원술(袁術)의 아래에 있던 손견(孫堅)과의 충돌 과정에서 언급된다. 하지만 자세한 기록은 없고 참전했다는 기록만이 있다. 다시 등장하는 것은 192년으로, 채모의 부장으로써 괴량의 매복계에 참전하여 손견군의 퇴로를 막고 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다시 기록에 등장하지 않다가, 196년, 강진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곽준(霍峻)의 형 곽독이 전사하고 1년이 넘도록 수비하고 있던 곽준을 구원하러 간다. 당시 반란은 이미 발생한지 1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강진은 형주성 남쪽의 괴씨의 세력으로, 초기 반란의 수준을 심각히 보지 않다가 이것이 장기화되고 수습이 힘들어지자 채씨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1]

반란의 토벌 이후에는 유표의 조카인 유반(劉磐)을 따라 손가의 견제를 목적으로 시상군, 번양군 등을 공격했다.

유표 사후와 적벽대전[편집]

유표 사후 유종채모에 의해 208년 조조(曹操)에게 항복하자, 이에 따랐다.[2] 그 뒤 당양 장판파에서 유비(劉備)를 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정사에서는 추격을 완수하지 못했다고 하며, 연의에서는 유비가 꾸짖자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고 한다.[3]

적벽대전에서는 군량고와 보급로를 지켰다.[4][5] 군내에 전염병이 퍼지자, 군사장군이 되어 남군으로 물러나 병사를 수습하는 임무를 맡았다. 후에 적벽에서 패한 조조가 물러나면서 그대로 남아 조인(曹仁)과 함께 남군의 수비에 임했다. 주유가 공성에 돌입하였다가 부상을 입어 퇴각한 뒤 거짓으로 죽음을 위장하여 장사지내자 제장들이 모두 조인의 의견에 동조하여 이를 공격하려하였으나 홀로 의심하여 반대했다. 결국 조인은 패했으며, 남군은 유비군의 손에 떨어졌다. 문빙은 조인과 함께 퇴각하여 양양으로 들어갔으며, 뒤이어 공격해온 관우를 합류해온 만총(滿寵)의 책략에 따라 기습하여 격퇴했다. 이 공으로 강하군의 태수로 임명되어 관내후 작위를 얻었다.

형주에서의 활약과 삼국정립[편집]

214년, 유비(劉備)가 유장(劉璋)의 요청에 따라 익주로 들어가자 관우(關羽)가 남군을 맡았다. 후에 유비가 위기에 빠지자 제갈량(諸葛亮)이 재차 주력을 이끌고 익주로 들어갔기 때문에 형주는 극도로 취약해졌다. 이에 문빙은 악진(樂進)과 더불어 심구에서 관우(關羽)를 대파하고 정후로 작위가 올랐다. 216년, 요격을 위해 출진한 관우를 격파하고 218년 형주에 야욕을 드러내던 손권군에 편승하여 재차 관우를 위협하며 군량고를 불태웠다.[6] 유비가 관우를 구원할 병력을 파견하게 된다.

219년 7군이 수몰되고 병사를 수습한 문빙은 위와 동맹한 오군과 함께 관우를 포위, 공격하여 3천여 수급을 얻었다. 220년 향후가 되고 222년 문제(文帝) 조비(曹丕)의 친정에 따라 하후상(夏侯尙)과 더불어 강릉을 포위했다. 이때 하후상이 삼각주로 들어가 부교를 설치하고 공성에 집중하고자 하였으나 근방의 지리에 익숙하던 문빙이 홀로 반대했으나 장합 등은 이에 걱정만 많은 겁쟁이라고 비웃었으며 하후상이 강경하고 제장들 대부분이 찬성했으므로 문빙은 아무런 내색 없이 물러나 배를 끌어모았다. 오래지않아 동소(董昭)의 상소에 따라 문제가 조칙을 내려 빠져나오게 했고 반장(潘璋)이 뗏목으로 부교를 불태우려하고 있었으므로 하후상 등은 물러났다. 이때 문빙이 끌어모아두었던 배는 위군이 신속히 물러날 수 있게 하였다. 과연 열흘 후 동소의 상소대로 물이 차올라 삼각주는 모두 물에 잠겼으며, 부교도 떠내려갔다. 반장은 물이 찬 삼각주에 위군의 군선이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자 화공을 포기했다.[7][8]

제갈량의 북벌과 말년[편집]

문제가 귀환하고 난 이후에도 강하남아 수십 년 동안 오나라촉나라에 용명을 떨쳤다. 227년, 문제가 사망한 것을 틈타 육손(陸遜)이 북상하는 것을 요격하여 월교도위 부영을 전사시키고 승리했다.[9] 228년, 제갈량의 북벌에 다시금 편승해 공격해온 서성을 격파했고, 유찬을 부상시켰다. 232년 육손이 단독으로 북진 해온 것을 수비한채 움직이지 않아 육손은 별 수 없이 퇴각했다. 234년, 제갈량이 마지막 북벌을 위해 출정하고 이에 오나라 또한 호응하여 동으로는 육손이, 서로는 주연전종이 지휘하여 북진하자 요격하여 형주로 진격해온 전종을 패주시키나 곧이어 달려온 주연으로 인해 숫적 열세로 격파하지는 못하고 수비 일관세로 돌아선다. 뒤이어 유소가 강하로 구원을 오고, 전예가 양양을 구원하러 오자 역공하여 여거를 격파하고 정봉(丁封)을 패주시켰으나 정봉(丁奉)의 매복에 당했으나 가까스로 물리친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정봉(丁奉)의 비수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오군이 물러간 뒤 적을 막은 공로로 후장군, 현후가 되었으나 몇년 후 상처가 도져 병사했다.

주석[편집]

  1. 이 때를 기점으로 괴씨의 몰락과 채씨의 독주 체제로 넘어간 것으로 보이며, 204년, 괴량이 죽으면서 이는 완전히 고착화된다. 괴씨가 멸문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부분의 기반을 이 반란을 통해 상실한 괴씨는 영향력에 있어서 극도로 축소된다.
  2. 연의에서 조조에게 늦게 도착한 것이 언급되나 이는 문빙의 임지의 거리문제였다.
  3. 부장의 신분에서 개인의 판단이든, 임무의 실패이든 무사할 수 없지만 이는 아직 자신의 사람이라 판단한 채모의 도움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를 연의는 최대한 이용했다.
  4. 수전에 익숙한 인물을 후방에 배치되었다는 것은 연의에서 조조가 수전에 약하다고 한탄한 것이 허구임을 드러낸다.
  5. 황개(黃蓋)의 병사가 쏜 화살에 맞아 고꾸라진 것은 그가 전선에 있지 않았으므로 완연한 허구이다.
  6. 후에 관우가 손권군의 병창을 공격하여 불화의 원인이 되었다.
  7. 장합은 이에 문빙에게 그를 비웃은 것을 사과했으며, 문빙은 마찬가지로 아무런 내색 없이 장합을 용서했다.
  8. 연의에서는 오군이 위 문제 조비(曹丕)가 탄 용선과 군함에 기습하여 화공에 조비가 위험에 처한 것을 구해줬다고 하나,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9. 명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