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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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烏桓 또는 烏丸)은 허베이 성, 랴오닝 성, 산시 성, 베이징 근처와 내몽골 등 중국의 북부에 거주한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동호의 후손으로 흉노에 패하였다.

그들은 한 왕조의 후반에 활동적이었으며 한군의 정규군에 참여하였다. 중국 황제의 최전선의 주요 비중국 민족들과 같이, 오환은 황실과 상대적으로 협조적이었다. 190년경 후한이 멸망할 당시 오환은 중국의 반란과 내전에 참여하였다. 200년대에 오환의 3부는 황하 이북의 중요한 군주였던 원소를 지지하였다. 207년 조조는 오환의 영토로 깊숙이 행군해 들어오고 그들을 볼랑산(白狼山之戰)에서 격파하였다. 많은 오환의 기병이 그에게 투항하고 그는 천하의 가장 위대한 기병대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비록 다양한 오환 지도자들이 3세기에 산발적인 반란을 이끌었지만 4세기에는 선비나 한족에 흡수되었다.

[편집] 인물

학단(郝旦): 서기 49년(건무 25년), 무리를 이끌고 낙양으로 가서 황제를 만나고 후왕(侯王)으로 봉해졌다. 그의 무리는 요동속국, 요서, 우북평, 어양, 광양, 상곡, 대군, 안문, 태원, 삭방군에 줄지어 있었다.

흠지분(欽志賁): 영평(서기 58년~75년) 연간에 어양(漁陽)에서 종인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후에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군사를 모아 흠지분을 죽이고 그 무리들을 격파했다.

무하(無何): 후한에 의해 솔중왕으로 봉해진 대인으로 후한 안제(安帝: 106-125) 때에 이르러 어양, 우북평, 안문에서 자신의 무리와 함께 선비, 흉노와 합쳐 대군, 상곡, 탁군, 오원을 약탈했다. 이에 후한은 대사농 하희(何熙)를 행 거기장군으로 삼아 좌우우림(左右羽林) 5영의 병사들과 변방 7군 여양영(黎陽營)의 군사를 일으켜 도합 2만 명으로 이를 공격하니, 흉노는 항복하고 선비, 오환은 각각 새 밖으로 돌아갔다.

융말외(戎末廆): 무하가 후한 변경에서 쫓겨난 후, 후한에 귀부하여 도위(都尉)의 관직을 얻었고 왕후(王侯) 돌귀(咄歸), 거연(去延) 등을 거느리고 오환교위 경엽(耿曄)을 따라 새(塞)를 나가 선비를 공격해 전공을 세웠다. 이후 융말외와 돌귀, 거연은 솔중왕(率衆王)으로 봉해졌고 속백(束帛-비단 묶음)을 하사받았다.

구력거(丘力居): 요서 오환대인으로 5천여 락(落)을 이끌었다. 왕이라 자칭하였다. 중산태수 장순을 중심으로 난루, 소복연, 오연 등과 함께 청주, 서주, 기주, 유주 등지에서 노략과 참살을 자행하였다.

난루(難樓): 상곡 오환대인으로 9천여 락(落)을 이끌었다. 왕이라 자칭하였다.

소복연(蘇僕延): 요동속국 오환대인으로 천여 락(落)을 이끌고 초왕(峭王)을 자칭하였다.

오연(烏延): 우북평 오환대인으로 8백여 락(落)을 이끌고 한로왕(汗魯王)을 자칭하였다.

답돈(蹋頓): 구력거의 조카. 구력거가 죽은 뒤, 구력거의 아들이 어려 그를 대신해 자리에 오른 오환의 대인으로 원소가 공손찬과 싸울 때, 원소를 도와 공손찬을 쳤다. 이후 소복연, 오연 등과 함께 원소에게 선우로 봉해졌다. 누반이 장성하자, 그에게 자리를 돌려주고 자신은 누반 휘하의 왕이 되었다. 원소가 조조와 싸워 지고 원상이 도망쳐 오자 받아주었다. 이후 유성에서 조조와 싸웠으나 원상과 함께 전사했다.

누반(樓班): 구력거의 아들. 장성하고 나서 소복연을 통해, 선우로 추대되었다.

속부환(速附丸): 답돈이 조조에 패해 죽은 후, 누반, 오연 등과 함께 요동으로 도망쳤으나 요동에서 붙잡혀서 참수되었다.

구루돈(寇婁敦): 우북평의 오환대인으로, 원상, 답돈, 호류섭과 함께 요서로 달아났다. 관구검 군이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 호류섭과 함께 5천여 무리를 이끌고 항복했다.

호류섭(護留葉): 요서 오환대인으로 요서 오환도독 솔중왕에 봉해졌다. 예전에 원상을 따라 요서로 달아났었는데, 관구검 군이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 5천여 무리를 이끌고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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