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품중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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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는 위진남북조시대(220~589)에 실시된 관리 임용제도이다. 구품관인법이라고도 하며 능력위주의 직제로 알려져 있다. [1] [2][3]

개요[편집]

구품중정제는 우선 지방의 군(郡)마다 그 군 출신 관리들 가운데서 중정(中正)이란 관리를 선정하여 군내 관리에 대한 재능·덕행을 조사시켜 이를 1품에서 9품으로 나누고 이를 향품(鄕品)이라 했다. 한편 정부는 이 향품에 대응하기 위해 관료의 등급을 역시 1품에서 9품까지 구분하고 이를 관품(官品)이라 칭했다.

이것은 (漢)나라 때의 향거이선(鄕擧里選)에 대치된 제도이며, 이 시대에도 다른 선정 방법과 병용되었는데, 의 시대가 되어 과거가 실시되기까지 관리 임용법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당초 구품관인법으로 시작된 구품중정제는 송나라 이후에 이름이 바뀌었다. 상서(尙書) 진군(陳群)의 건의에 따라 위왕(魏王)이 제정한 것으로, 관직의 등급을 1품(品)에서 9품까지 구분하고 관품(官品)에 따라 대우를 달리한 것을 말한다. 중앙정부에서는 지방의 주(州)·군(郡)에 중정관(中正官)을 설치하고, 관내 사관(仕官) 지망자의 덕행과 재능을 심사, 1품에서 9품까지 등급[鄕品]을 매겨 내신서를 작성하게 하였으며 대개 향품(鄕品)보다 4등급 낮추어 초임(初任)시켰다.

이 법은 정실에 좌우되지 않고 개인의 재덕(才德)에 따라 등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현실적으로는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유력자의 자제는 향품 2품으로 사정되어 그 집안의 기득권으로 바뀌었고, 이에 미치지 못한 한사(寒士)와의 사이에 커다란 단절이 발생하였다.

또한 가격(家格) 2품 중에서도 상·하의 차이가 생겼으며, 같은 관품 안에서도 상류자가 오르는 청관(淸官)과 하류자가 오르는 탁관(濁官)의 구별이 생겼다. 이에 정부의 인사원(人事院), 즉 이부(吏部)는 귀족의 계보(系譜)를 외어 두고 가격에 따라 임관시켰다. 이 제도는 남조(南朝)의 송(宋)·제(齊) 때 절정을 이루었다가 북조(北朝) 때 황제권력의 강화로 점차 쇠퇴하였으며, 수(隨)나라 문제(文帝) 때 폐지되고 과거제도가 채택되었다. [2][4][5]

전해오는 이야기[편집]

중국 위(魏) · 진(晋) · 남북조 시대의 관리선발제도. 한(漢)대의 향거리선제에 대신해서 위(魏) 문제(文帝) 황초(黃初) 원년(220)에 처음 실시되었으며 이후 약간의 변화는 있었으나 과거제에 의해 대체되기 전까지 계속 시행되었다.

군에는 소중정이 있어 언행이 훌륭한 자를 선발하여 주의 대중정에게 보내고, 대중정이 이를 다시 살펴 중앙의 사도에게 추천하면 사도가 이들을 평가한 후 상서에게 올려 임용하는 방식인데, 이 때 중정관은 대상자를 평소 관찰한 바의 언행에 따라 9품으로 나누어 추천하였다.

이는 찰거제(察擧制)의 한 형태로 이 시기 교양(敎養)의 본질이 행동적인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중정관은 보통 그 지방의 유력 문벌이 장악하였으므로 실질적으로는 가문의 고하가 추천등급의 기준이 될 수 밖에 없어 상위의 3품은 문벌 출신이 아니면 차지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중앙정부는 선발된 자들에게 각종의 고시를 가하여 공정성을 기하려 하였으나 제도의 성격상 추천 자체가 이미 문벌 위주로 이루어진 이상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한계는 과거제에 의해 극복되었다.[2]

삼국 (魏)의 진군(陳群)이 220년대에 제창, 입안하여 시작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런 구품중정제는 가문에 구애됨이 없이 개인의 재능과 덕망에 따라 조정 관리에 임명하자는 것이 원래의 취지였다.

그러나 중정직에 임명되는 사람은 거의 모두가 지방의 유력자들로서, 향품을 정할 때 동료나 중앙의 대관(大官)으로부터 청탁을 받고 유력자의 자제는 후하게, 무력자의 자제는 박하게 매기는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제도는 당시 상류 사회의 귀족화라는 조류에 밀려 오히려 귀족 계급에게 유리하게끔 운영됨으로써 귀족 제도의 견고한 하나의 지주(支柱)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 구품중정제에 있어서 관품이 향품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은 귀족의 신분이나 지위가 비록 왕조 권력에 의해 부여되는 것 같다 하더라도 근원적으로는 그 향당사회(鄕黨社會)의 지위나 권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문벌에 관계없이 인재를 널리 등용한다는 본래 취지와는 달리, 호족 세력이 관직을 독점하게 하는 길을 터주게 되어 결국 이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여 귀족 계급을 형성하는 악습제도로 실패한 제도였지만 관품제도만은 계속되어 청(淸)나라 말기까지 실행되었다. [1][3]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교육학용어사전(구품중정제, 서울대학교 교육연구소 1995년 하우동설 편찬) 참조
  2. 국제신문 디지털뉴스부, "선택의 해 고전을 만나다", 《국제신문》, 2012년 2월 14일 작성. 2013년 8월 3일 확인.
  3. 미야자키 이치사다저, 임대희 역 (2002). 《구품관인법의 연구》. 소나무. ISBN 9788971395370
  4. 진수 저, 김원중 역 (2007). 《정사 삼국지(위서)》. 민음사. ISBN 9788937425820
  5. 동북아역사재단 편집부 (2009). 《동북아 관계사의 성격》. 동북아역사재단. ISBN 9788961871266

참고 자료[편집]

  • 「삼국지 강의」, 장강은 여전히 동으로 흐른다, 이중톈 저, 홍순도 역, 김영사(2007년, 530~532p)
  • 「한중일 국가기원과 그 역사」, 수당제국의 뿌리, 김성호 저, 맑은소리(2008년, 198~202p)
  • 「중국을 말한다」, 귀족들의 부귀 경합, 허청웨이 저, 김봉술 역, 신원문화사(2008년, 248~24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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