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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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제
Hongwu1.jpg
명나라의 초대 황제
재위 1368년 ~ 1398년
황후 효자고황후
부친 인조
모친 순황후
다음 황제 건문제
묘호 태조(太祖)
시호 개천행도조기입극대성지신인문의무
준덕성공고황제
(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
俊德成功高皇帝)

명 태조(明太祖) 홍무제(洪武帝, 천력 원년 9월 18일(1328년 10월 21일) ~ 홍무 31년 윤 5월 10일(1398년 6월 24일)는 명나라(明)를 건국한 초대 황제(재위 1368년 ~ 1398년)이다.

고아 출신 한족으로 빈한한 환경에서 자라 탁발승, 홍건적 참여 등을 하다가 곽자흥의 휘하에서 활약했다. 후에 독자적 세력을 키워 곽자흥의 군대가 분열되자 독자적으로 군대를 모아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원나라 강남(江南)의 거점인 난징(南京)을 점령하였다. 1366년 스스로 명왕이 되고 각지의 군웅들을 굴복시킨 뒤 1368년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설하였다. 반원, 반몽골과 한족의 국가 재건을 기치로 북벌군을 일으켜 20년만인 1388년 몽골족을 만리장성 밖으로 축출하고 중원을 통일하였다. 왕조 성립 뒤에는 지역 토호 및 공신세력을 숙청하고 지방관 파견과 제후국 봉지 임명 등으로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시켰다. 또한 한족의 문화를 부흥시키려 노력하였다. 유교 사상에 따라 자급자족 농경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1] 공신들의 대량숙청을 감행하는 등 비정상적인 공포정치를 펼쳤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이다.

목차

[편집] 생애

원나라 말기(元末) 천력 원년(天歷 元年, 1328년) 호주(濠州) 봉양현(鳳陽縣)(현재의 안휘성 봉양현)에서 가난한 농부 주세진과 진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태어났을 무렵의 이름은 주중팔(朱重八), 후에 주흥종(朱興宗)으로 개명했다가 주덕유(朱德裕)로, 홍건군에 참가하는 무렵에는 주원장(朱元璋)으로 개명했다. (字)는 국서(國瑞)이다.

[편집] 유년기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부친 주세진이 죽고 이어 맏형과 여러 형제들이 연이어 사망하고, 둘째 형수와 셋째 형수, 둘째 형의 아이들과 어머니 진씨마저 사망했다. 그와 그의 둘째 형 주중육(朱重六)만이 살아남았고 묘자리를 구하지 못해 지주 유씨 댁에 찾아갔다가 면박만 당하였다. 한 마을에 살던 이웃이 자신의 땅을 제공하여 낡은 옷에다가 시신을 감싸서 겨우 매장하였다. 뒤에 황제가 된 뒤 부친을 인조 순황제로 모친을 순황후로 추존하고 황릉비를 쓸 때 이것을 기억하며 통곡했다고 한다.

큰 형수는 조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되돌아갔고, 백부 역시 아들과 손자를 잃고 어렵게 살았으며, 이씨 집으로 출가한 누이와 다른 1명의 누이 역시 사망하여 의존할 데가 없었다. 늦게 두 딸을 두었던 외할아버지는 이미 99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외할아버지에게도 아들이 없어서 그는 혈혈단신 고아가 됐다. 그는 황각사(皇覺寺)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탁발승으로 떠돌아다니며 생계를 유지했다.

[편집] 홍건적의 난

이 부분의 본문은 홍건적의 난입니다.

몽골이 건국한 원나라14세기에 들어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나 통치력이 저하되었다. 거기에 천재 지변에서 전염병까지 일어났기 때문에 백련교도(白蓮敎徒)가 1351년홍건적의 난을 일으키자 반란은 순식간에 널리 퍼져나갔다. 당시 그는 허베이(河北) 지방과 그 일대를 떠돌아다녔는데, 당시 이 일대는 원나라 중앙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고, 당시 중국의 중부와 북부 지방에서는 기근과 가뭄으로 700만 명 이상이 굶어죽었다. 이러한 상황은 민중봉기를 촉진시켜 1325년경부터는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평민 출신의 비적(匪賊)이 이끄는 반란군들은 부유한 사람들의 집을 습격하여 그들의 재물을 빼앗은 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351년 탁발승으로 있던 그는 홍건적의 한 대장인 곽자흥(郭子興)의 휘하에 들어갔다. 곽자흥은 1352년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호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주원장은 이 반란군의 일개 병졸로 참가하였으나 실력으로 관군을 거듭 패퇴시키면서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곽자흥의 참모로 승격한다.[2]

호주종리(濠州鐘離) 출신의 가난한 평민 출신이었지만, 말(元末)에 세력을 떨친 홍건군(紅巾軍)에 가담하여 세력을 키웠다. 홍건군이던 곽자흥의 장수였던 주원장은 남경(南京)을 근거지로 하여 장강(長江) 유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우던 그는 곽자흥의 군대가 분열되자 독자적으로 군대를 모아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원나라 강남(江南)의 거점인 난징(南京)을 점령하고, 스스로 오국공(吳國公)에 취임하였다. 1355년 곽자흥이 병으로 죽자 주원장은 곽자흥의 군벌을 흡수하였다.

[편집] 세력 확장

장강으로 진출하면서 주원장은 중국 동부지역의 여러 읍과 성을 함락시킨 뒤 중국 동부의 사대부 계급 출신의 지식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주원장의 봉기에 가세하자 그는 그들을 사부나 참모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학벌이 없었던 주원장은 동부 지방의 학자들로부터 한어와 중국사와 유교경전을 공부했다. 또한 그들로부터 성리학적 대의명분과 통치의 원칙을 배웠는데, 문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계속 반복하여 독서하여 그 내용을 흡수하였다. 이는 훗날 군대조직과 함께 효과적인 지방행정제도를 추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1356년 주원장은 난징으로 진격하여 함락시켰다. 난징은 양쯔 강 유역의 비옥한 땅과 군량미와 수송물자를 쉽게 조달할수 있는 전략적 군사요충지였다. 스스로를 무공(武公)이라 선언한 그는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난징 일대에 효과적인 행정업무를 수행했고, 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쓸데없는 약탈을 위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일을 삼갔다. 또한 땅이 없는 농민들에게 아직 개간하지 않은 토지를 하사하여 백성들에게 농업을 적극 권장, 장려했다. 여러 차례 군사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신을 왕으로 선포하지는 않고, 한림아를 황제로 모시고 자신은 신하에 머물러 있었다. 한림아의 전폭적인 신뢰 하에 그는 반군의 승상 직위에 올랐으나 1366년 한림아를 비밀리에 암살한다.

그러나 주원장에게도 라이벌은 있었다. 진우량은 스스로를 한왕(漢王)이라 선포하고 후베이 성(湖北省) 우창(武昌) 주변에서 활약하며 중국 서부로 뻗어나가고 있었고, 장사성은 스스로를 오왕(吳王)이라 선포하고 동부의 평강(平江:지금의 장쑤 성(江蘇省)에 있는 쑤저우(蘇州) 지역)에서 활약하며 동방 진출을 계획하고 있었다. 1363년 홍건적 군벌이던 소주의 장사성(張士誠)과 난징진우량(陳友諒)이 계획, 양쪽에서 협공하여 주원장을 죽이고 그의 영지를 빼앗을 계획을 세웠으나 주원장은 장사성진우량의 연합군을 파양호 전투에서 상대, 진우량의 대규모 중선단(重船團)과 격파하고 진우량을 사살했으며 1364년 진우량의 근거지인 우창으로 진격하여 함락시켰다. 1365년 장사성도 격파했고 1367년 마침내 장사성과 그 잔당까지 모두 사살하였다. 난징으로 압송된 장사성은 곧 자결하였고 해적으로 활동하면서 처음으로 원나라에 대항했던 한족 해적 방국진(方國珍)도 주원장에게 투항하여 사실상 그는 중국 남부지방을 제패하였다.

[편집] 황제 즉위

[편집] 명왕과 황제

1366년 스스로 명왕(明王)이라 하고 멸몽흥한이라 하여 반원 한족 독립의 기치를 세웠다. 푸젠 성(福建省)을 지켰던 원나라의 관료 진우정(陳友定)을 격파한 뒤 그도 사로잡아 난징에서 처형하였다. 남부지방이 평정되자 주원장은 서달(徐達)·상우춘(常遇春) 등의 장수를 파견하여 북벌을 도모했다. 1368년에 남경에서 칭제건원하여 황제라 칭한 뒤 명나라를 건국하였고, 연호(年號)를 홍무(洪武)로 정하고 한 황제가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는 '일세일원(一世一元)'의 원칙을 세웠다. 홍무제라는 명칭은 일세일원의 원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산둥 성(山東省), 허난 성(河南省)이 명에 항복해왔다.

[편집] 외정

홍무제는 건국한 직후에 20만 대군을 이끌고 북벌을 개시하여 1368년 8월 명나라의 군대가 베이징에 입성하자 원 순제(토곤 티무르)는 대도(大都)를 버리고 상도(上都)로 도망쳐 북원(北元)을 건국함에 따라, 만리장성(萬里長城) 이남의 중국은 명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결국 1388년 원정을 시작한지 20년 만에 중원을 점령하고 있던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고 명(明)을 건국하여, 한족(漢族) 왕조를 복원시켰다. 한편 그는 번번히 대도와 북으로 후퇴한 뒤에도 타타르로 자객을 보내 원 순제와 황태자 원 소종을 암살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1372년 서달(徐達)을 보내 북원까지 정벌하려 했으나 코케 테무르의 반격으로 크게 패배했다.

[편집] 치세

홍무제는 통일을 달성한 뒤에는 외정을 자제하고, 농촌의 토지 조사 및 인구 조사를 진행해 이갑제, 위소제를 배포하고 내정의 안정에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홍무제는 건국공신을 숙청하고, 재상이 있던 중서령을 폐지하고 6부를 황제 직속으로 만들어 독재체제를 만들었다.

말년에는 한 고조 유방(漢高祖劉邦)을 능가할 정도로 건국 공신들을 대거 숙청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1379년 재력가 심만삼(沈萬三)을 낙향시키고 1380년 좌승상 호유용(胡惟庸)을 역모를 꾀했다 하여 처형하고 그와 연루된 1만 5천 명을 죽였으며 1384년 봄 자신의 외조카이자 건국 1등 공신인 조국공 이문충을 독살하고 1385년에는 넷째 아들 연왕 주체의 장인이기도 한 노장 서달도 독살당했다.

이문충은 무재와 지략 외에 문재도 출중하였으나 외숙부에게 고언을 자주 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사돈인 서달은 몸에 종기가 퍼져서 만년에 고생하였는데, 거위는 종기에는 상극이었다 한다. 주원장은 서달에게 거위를 선물했는데, 서달은 자신에게 자결을 강요한 것으로 해석하고 통곡하며 거위를 달인 물을 마시고 죽어갔다 한다.

1390년 초대 승상 이선장(李善長) 등이 호유용의 역모에 다시 연루되어 관료들의 탄핵을 받았다. 홍무제는 호유용 사건을 빌미로 이선장에게 자결을 명한 뒤 1만 5천 명이 처형되고 1393년 양국공(凉國公) 남옥(藍玉)도 역모 혐의를 받고 2만 명의 연루자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남옥을 처형한 죄목은 원나라가 보낸 여자 간첩을 받아들여 미인계에 호응하여 내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4대 선생이던 유기도 낙향해 있다가 독살당하고 송렴도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가 학살극을 감행한 이유는 그의 아들에게 보다 확고한 황제의 지휘권을 물려주기 위함이었는데 큰 아들이 급사하는 바람에 손주(건문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었고 왕위 계승자가 아직 어려 숙청작업은 더욱 가혹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주원장이 걱정하였던 황제의 위협세력은 그를 도왔던 개국공신들이 아니라 26명이나 되는 그의 아들이었다.

[편집] 사망

그는 즉위와 동시에 장남 주표를 태자로 삼았으나 주표는 1392년에 4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장남의 사망으로 어린 손자에게 제위를 물려주어야된다는 강박관념은 그를 괴롭혔고, 공신들과 관료들에 대한 의심을 부추겨 주원장은 만년에 고독하게 보냈다. 이어 둘째 아들 진왕도 곧 병사하였다.

1398년에 홍무제가 10월 21일에 사망하니 묘호는 태조, 사후 개천행도조기입극대성지신인문의무준덕성공고황제(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俊德成功高皇帝)로 추존되었다. 그의 손자인 흥종 의문태자 장남 주윤문(朱允炆)이 즉위한다(건문제. 그러나 손자 주윤문의 자리를 노렸던 것은 제후나 공신이 아니라 그의 26명이나 되는 후궁 소생 아들들이었다.

[편집] 체제 정비

주원장은 지방관의 인사임명을 직접 담당하여 중앙의 지방통제권을 강화하였다. 중앙에는 1380년 중서성(中書省)과 승상을 폐지하여 육부(六部)를 황제가 직접 관장하고 결제받게 하였으며, 도찰원(都察院)·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 등을 설치하여 이들 기관을 감독, 규찰하게 하였다. 지방 관제도 병권과 행정, 감찰권을 분할하여 포정사사(布政使司:行政)·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軍事)·안찰사사(按察使司:檢察)를 각각 독립시키고 이들을 중앙에 직결시켜 황제는 이 통치기구 위에 군림하여 군사, 행정, 사법의 절대권한을 장악하였다. 또한, 지방관 외에 24인의 황자(皇子)를 전국의 요지에 제후국왕으로 분봉(分封)하여 변방의 반발을 최소화하였다.[3] 한편, 농민통치에도 힘을 기울여 전국의 농촌에 이갑제(里甲制)를 설치하고 부역황책(賦役黃冊)과 어린도책(魚鱗圖冊)을 만들도록 하여 조세·부역의 징수를 공평히 하고 세율을 조정케 하였다.

황족에 대한 율령도 직접 작성하였다. 그에 의하면 황제의 장남은 황태자, 황태자의 장남은 황태손으로 하고 황제의 아들과 황태자의 아들은 친왕에 봉하고, 친왕의 직위는 장남이 세습하고, 친왕의 다른 아들들은 군왕(郡王)으로 봉한다. 황제와 황태자의 딸은 공주, 친왕의 딸은 군주(郡主), 군왕의 딸은 현주(縣主)로 임명하고, 황제와 태자의 사위는 부마, 친왕과 군왕의 사위는 의빈으로 하라고 직접 지시하였다. 군왕직은 장남이 세습하고 군왕의 차남 이하는 진국장군(鎭國將軍), 군왕의 손자는 보국장군(輔國將軍), 군왕의 증손은 봉국장군(奉國將軍)으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황족은 (제국의)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정하였는데, 지역 번국의 국왕이나 절도사로 파견되었던 친왕과는 달리 영토나 부임지가 없었던 군왕 이하의 먼 황족들은 생계에 지장을 초래했고 이들 중 일부는 범죄를 저지르거나 관료를 능멸하기도 하였다. 군왕의 4세손 이하에게는 작위를 주지 않아 이는 뒤에 문제가 되었다.

[편집] 가족

  • 부친 : 인조순황제 주세진(仁祖淳皇帝 朱世珍)
  • 모친 : 순황후 진씨(淳皇后 陳氏)
  • 황후 : 효자고황후 마씨(孝慈高皇后 馬氏)
    • 장남 의문황태자 주표(懿文皇太子 朱標) - 흥종 효강황제(興宗 孝康皇帝)로 추존
    • 차남 진민왕 주상(秦愍王 朱樉)
    • 삼남 진공왕 주강(晉恭王 朱棡)
    • 사남 연왕 주체(燕王 朱棣) - 성조 영락문황제(成祖 永樂文皇帝)
    • 장녀 영양공주 주아(永諒公主 朱阿)
    • 차녀 영수공주 주소(永秀公主 朱蘇)
  • 후궁 : 고려 여인
  • 후궁 : 몽골 여인
  • 후궁 : 옹비(擁妃)
    • 오남 주정왕 주숙(周定王 朱橚)
  • 후궁 : 도씨, 진우량의 첩으로 진우량을 죽이고 빼앗아 온 여자이다.

[편집] 외교

그는 조선의 재상 정도전을 몹시 경계하였는데, 정도전은 요동 정벌을 계획, 이를 목적으로 사병 혁파를 단행하고 조선국의 국가 군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4] 이 점은 주원장이 정도전을 끝까지 경계한 이유가 되었다.

[편집] 기타

성격이 가혹하다는 시각도 있다.

[편집] 공신 숙청

공신들의 존재를 두려워한 그는 즉위 직후부터 공신 숙청에 나섰고, 개국공신 중 일부 무장들은 자발적으로 은퇴하여 시골로 내려갔다. 악몽에 시달린 이후에 공신들에 대한 의심은 심해졌고, 장남 주표와 차남 주상이 요절하면서 공신들에 대한 의심과 박해는 심해졌다. 손자인 건문제가 그에게 잔인하지 않느냐고 항의하자, 어느 날 그는 장미 나무의 가시를 꺾어서 손자에게 손으로 쥐어 보라고 하였다.

손자 윤문이 장미가지를 들다가 손에서 피가 흐르며 고통을 느끼자, 그는 내가 생전에 이 가시들을 다 제거하여 너에게 주려 함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지나친 공신 숙청은 훗날 넷째 아들 연왕 주체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주윤문을 도와 줄 세력이 하나도 없게 만들어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한 격이 되었다. 이를 두고 일부 명나라의 관료, 지식인층은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것이라고 조롱하였다.

[편집] 금기어 사건

그가 재위에 있는 동안 생(生)과 칙(則)은 금기어였다. 그가 소년기에 탁발승 생활을 했는데 이것이 컴플렉스로 남아 승(僧)과 발음이 비슷한 생(生)자, 적(賊)과 비슷한 칙 등은 금기어로 설정했는데, 간혹 생(生)이라는 자를 써서 상소를 올리는 신하나 홍건적 출신이라는 컴플렉스를 자극하는 적(賊)자와 모양이 비슷한 측(則)자를 써서 상소를 올리는 자는 가차없이 처형하였다.

[편집] 초상화

Hongwu emperor3.jpg

그의 실제 얼굴은 광대가 튀어나오 긴 장두형의 못생긴 얼굴이었다 한다. 그의 초상화를 그릴 때 실물과 같이 그리면 그는 불쾌히 여겼고, 초상화 중 약간 살이 붙고 덕스러운 얼굴로 그린 초상화를 선호했다고 한다.

그러나 화가가 그린 초상화 외에 그의 실물과 가깝게 그린 초상화 3점[5]이 어느 사찰에 보존되다가 현재까지 중국에 전래되고 있다.

[편집] 효자고황후

1352년 경에 곽자흥의 양녀와 결혼을 하여 사위가 되었는데, 곽자흥이 그를 사위로 받아들인 배경에는 곽자흥이 주원장에게 상서로운 기운이 있음을 알아보고 사위로 삼았다는 설과 주원장의 능력을 질시하고 두려워하여 사위로 삼았다는 설이 있다. 곽자흥의 사위가 된 뒤에는 곽자흥이 그의 능력을 꼬투리잡아 광에 가둔 일이 있다. 이때 부인 마씨는 광의 구멍을 파고 그에게 먹을 것을 들여주기도 했다. 또한 양아버지 곽자흥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계모[6]에게 지극정성으로 대했다 한다.

황후가 된 뒤에도 검소했다 하며 주원장의 유일한 친조카가 민가에 피해를 입혀서, 사건에 연루된 관료들이 모조리 처형당하고 조카 역시 처형당할 위기에 몰렸으나 유일한 친혈육임을 들어 구명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효자고황후가 죽은 뒤에도 주원장은 신하들의 청을 물리치고 다시 황후를 세우지 않았다.

[편집] 기타

넷째 아들 연왕 주체의 재능을 알아본 홍무제는 장남 주표의 사후 연왕 주체를 황태자로 올리려 하였으나, 유학자들의 반대[7]로 실패하였다. 홍무제는 이를 심히 애통해했다고 한다.

[편집] 주석

  1. 쇄국정책을 펼쳤다는 주장도 있다. 조공을 바치는 나라와만 무역을 하는 정책을 유지하였다
  2. 1352년경 곽자흥의 양녀 마씨와 결혼한다.
  3. 그러나 1600년대에 가서는 황족 수가 10만 명을 넘어서 나눠줄 영지가 부족하게 되었다.
  4. 조선 태종이 사병을 혁파하기 이전까지는 개인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5. 청년기의 초상화 1점, 즉위 이후의 초상화 2점
  6. 양아버지의 두번째 부인
  7. 적장자 승계라는 주자가례에 의한 반대

[편집] 참고 항목

제1대 명나라의 황제           

전 임
-
(황조 성립)
1368년 ~ 1398년 후 임
손자 혜종 건문제 주윤문
홍무제 | 건문제 | 영락제 | 홍희제 | 선덕제 | 정통제 | 경태제 | 천순제(복위) | 성화제 | 홍치제 |
정덕제 | 가정제 | 융경제 | 만력제 | 태창제 | 천계제 | 숭정제
전 임
-
제1대 명왕
1366년 ~ 1368년
후 임
(황조 성립)

[편집]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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