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 (19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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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朴泰俊
대한민국 대한민국제32대 총리
임기 2000년 1월 13일~2000년 5월 18일
대통령 김대중
전임: 김종필(제31대)
후임: 이한동(제33대)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출생일 1927년 10월 24일
출생지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임랑리[1]
사망일 2011년 12월 13일 (84세)
사망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학교 의료원
학력 대한민국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대한민국 단국대학교 정치학 학사
대한민국 국방대학원 행정학 석사
종교 개신교
배우자 장옥자
자녀 아들 박성빈
딸 박진아, 박유아, 박근아, 박경아
부모 아버지 박봉관, 어머니 김소순
웹사이트 포스코역사관
박태준
별칭 아호 청암(靑岩)
경력 민주정의당 대표
자유민주연합 총재
소속 포스코 명예회장
상훈 20세기 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 (1999)
박태준
1927년 9월 29일 ~ 2011년 12월 13일
태어난 곳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임랑리[1]
죽은 곳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복무 대한민국 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 1948년 ~ 1963년
최종 계급 소장.JPG 대한민국 육군 소장
주요 참전 한국 전쟁
서훈 내역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등

박태준(朴泰俊, 1927년 10월 24일(음력 9월 29일) ~ 2011년 12월 13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기업인이다. 포항제철(포스코의 전신)을 설립한 대한민국의 기업인으로, 창업 25년이란 짧은 기간에 세계 3위의 철강업체로 키운 한국철강업계의 명실상부한 대부이자 세계철강업계의 거목으로 꼽히며 한국의 "철강왕" 혹은 한국의 "카네기"라고 불렸다. 또한 정치인으로서 민주정의당 대표, 자유민주연합 총재,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경상남도 출신으로, 호는 청암(靑岩)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1927년 10월 24일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임랑리(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1]에서 박봉관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일하던 점령국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자랐다. 1945년 일본의 징병을 피하기 위하여 와세다 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하였으나 해방으로 학업을 중단한 후 귀국하였다.

학력[편집]

군 복무[편집]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6기로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하였다. 한국전쟁에 출전하여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등을 수훈하였다.

5.16 군사 정변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으나 박정희가 쿠데타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쿠데타 전날 가족을 맡겼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입안에 관여하였다.

1961년 단국대학교에 편입, 1963년 8월 정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를(육사6기) 비롯해 당시 국군 장교로 근무하던 사람들이 정부의 조치로 4년제 정규대학의 학사 학위과정을 이수했다고 한다. 이것은 해방 이후 국군에 근무하던 사람들이 정규 학위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채 현역으로 복무했고, 또 정규 학사과정 육군사관학교(설립 당시 남조선경비사관학교)가 (11기 이후) 뒤늦게 신설되어 정부차원의 학사 학위과정 위탁교육이 필요해서 취해진 조치인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에서 인정하는 정규 학사학위는 단국대학교가 유일하다. 이 외에도 군생활을 하면서 육군대학교, 국방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63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하였다.

주요 상훈으로는 충무무공훈장(1950, 1952), 화랑무공훈장(1951, 1953, 1954), 국민훈장 무궁화장(1974), 레종도뇌르훈장(1990), 노르웨이국왕훈장(1991), 한국경영자대상(1992) 등을 수상하였으며, 사후 청조근정훈장이 추서되었다. 이밖에 고 박태준은 대한민국을 세계 최고 철강국가로 끌어올린 공로로 미국 카네기 맬런대, 영국 셰필드대와 버밍엄대, 캐나다 워털루대에서 명예 공학박사 학위와 러시아 모스크바대에서 명예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9년 12월 21일 고려대학교로부터 국내대학에서는 처음으로 명예 경영학박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신종이산가족》(1987) 이 있다.

기업인 활동[편집]

예편 이후 경제인으로 변신, 1964년 대한중석 (현재 대구텍) 사장으로 임명되어 1년 만에 대한중석을 흑자기업으로 바꾸었고, 1968년 4월 포항제철의 초대 사장이 되어 10년 만에 연 550만 톤의 철강을 생산하는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정치 활동[편집]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 경제 제1위원장으로 취임한 것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하여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 전국구)로 당선돼 국회 재무위원장을 역임하고, 1988년 민주정의당 대표를 맡았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박태준은 포철 회장직을 1992년 10월 물러났다. 설립 당시부터 정치 외풍으로부터 포철을 지키는 울타리 역할을 해 오다, 김영삼 정부와 불화로 결국 정권 수립 직전에 회장직을 내놓았다. 1992년 10월 5일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은 당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박 명예회장은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직을 거절하고 백의종군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날, 포철은 긴급이사회를 소집, 박 회장의 사퇴번의를 촉구키로 결의하기도 하였다.[2] 이와 같이 김영삼과의 불화로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김영삼 집권 이후 포철 협력사들로부터 39억여 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한동안 외국을 떠돌았는데, 여기에는 표적수사라는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1997년 김영삼 정부의 경제적 실패를 공격하면서 포항 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입후보하여 당선됨으로 재기에 성공하였다.

자민련 총재와 국무총리 역임[편집]

1997년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총재가 되었고 김종필과 함께 김대중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선을 지원하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에 국무총리로 취임하였으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으로 궁지에 몰려 재임 4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하였다.[3][4]

말년[편집]

포스코의 명예회장과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매년 포스코 청암상을 수여하는 것에 참여하였다. 2011년 12월 13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호흡 곤란 증세로 치료를 받고, 회복 중에 병세가 다시 악화되어 향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5]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2001년에는 미국 코넬대병원에서 폐수술을 받았으나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또한 박 명예회장이 세상을 떠난 13일에는 포스코가 국가산업의 동력으로 성장하길 바란다고 유언을 전하였고 발인일인 17일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사회유공자묘역 17묘역에 묻혔다.

공로인정 근정훈장 수여[편집]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에게 청조근정훈장이 수여되었는데 포스코 관계자에 따르면 "행정안전부에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고인의 공로를 인정해 청조근정훈장을 수여한 것"이라고 밝혔다. 청조근정훈장은 국가 발전에 지대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 [6]

또한 행안부는 이와는 별도로 고인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박 명예회장이 수상했던 7개의 훈장 중 6개를 다시 제작해 빈소에 비치하였는데 고인은 충무무공훈장 2회, 화랑무공훈장 3회, 국민훈장 무궁화장 1회, 금탑산업훈장 1회 등 총 7회 훈장을 수상했다. 행안부는 이 중 금탑산업훈장을 제외한 6개의 훈장을 다시 제작해 장례기간동안 빈소에 비치하였다.[6]

참고로 근정훈장(勤政勳章)은 공무원(군인 ·군무원은 제외)으로서 직무에 정려(精勵)하여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훈장인데 1등급의 훈장은 대수(大綬), 2 ·3등급은 중수(中綬), 4 ·5등급은 소수(小綬)로 되어 있고, 정장(正章) ·부장(副章) ·약장(略章) ·금장(襟章)이 있으나, 다만, 3 ·4 ·5등급의 훈장은 부장이 없다. 1967년에 공포된 현행 상훈법은 청조근정훈장은 1등급, 황조근정훈장은 2등급, 홍조근정훈장은 3등급으로 인정하고 있다.[6]

美 박물관에 헌정관도 마련하여 세계 철강업계 지도자 8인에 선정되다[편집]

박태준 전(前) 포스코 명예회장은 '철강 명예의 전당(Steel Hall of Fame)'에 이름이 올랐다.

제철보국(製鐵保國, 철을 만들어서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다짐)의 이념으로 철강 불모지 대한민국에 일관제철소를 설립해 산업 근대화를 이끈 철강왕 박태준 전(前) 포스코 명예회장을 비롯해 미국 카네기 철강사 창업자 앤드루 카네기, '베세머 제강법'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고(故) 헨리 베세머, 미국 US Steel의 창업자 고(故) 저지 엘버트 개리, 미국 철강사 Nucor 회장을 역임한 고(故) 케네스 아이버슨, 일본 신일본제철 초대 사장 이나야마 요시히로, 독일 경제발전의 주역 코프(Korf) 코퍼레이션 창립자 윌리 포크, 미국 베들레헴 스틸을 이끌었던 찰스 슈압등 8명으로 철인(鐵人) 고 박태준 회장은 세계 '철강 명예의 전당'에 오른 한국인이 되었다.[7]

업적[편집]

포항제철 경영 성공[편집]

일본의 미쓰비시 종합연구소의 "한국의 성공 기업을 본다"라는 제목의 1991년 연구보고서에서는 포스코가 성공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요인으로 "모험사업 추진의 리더로서 지도력, 통찰역, 사명감을 충분히 발휘한 박태준 회장의 공헌"을 들고 있으며, 하버드대 경영대학원과 서울대가 공동으로 연구한 "포철의 경영 성공 사례" 1992년 보고서 역시 "박태준 회장의 탁월한 리더십"을 포스코 성공의 가장 주요 요인으로 들고 있다. 또한 스탠포드대 경영대학원이 연구한 "한국의 발전과 포철의 역할"이라는 보고서에서도 역시 "박태준 회장의 탁월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결론짓고 있다.[8]

사원 주택단지 조성[편집]

포항제철을 경영하면서 사원들의 복지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최고 수준의 주택단지를 조성, 사원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을 포함해 초-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포항공과대학교 설립[편집]

1986년포항공과대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제철장학회, 포스코청암재단 설립[편집]

1971년에 6000만원을 종자돈으로 포스코청암재단의 토대가 된 제철장학회를 설립,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길러 냈다. 기존 장학재단을 확대해 그의 호인 ‘청암’을 따서 2005년 9월 새롭게 출범한 포스코청암재단은 현재 아시아의 교류와 협력을 위한 포스코아시아펠로십, 차세대 인재육성, 참여와 나눔 실천의 3대 전략 아래 대한민국이 포함된 아시아를 대상으로 11개의 공헌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08년 6월 16일 포스코센터에서 이사회를 열고 박태준을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으로 추대하였다. 포스텍(포항공과대학교)에서는 설립자로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해마다 장학금으로 청암상을 수여하고 있다.


포항축구전용구장(현 스틸야드) 건립[편집]

1973년에 고 박태준 명예회장은 현 포항 스틸러스의 전신인 포항제철 축구단을 창단하였고 포항에 전국 최초로 전용구장 건립, 광양 축구전용구장 건립, 포항스틸러스 유소년 시스템 정착, 포항스틸러스 클럽하우스 건립 등 축구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회자되고 있다.

1988년 당시 한국축구대표팀이 월드컵 본선행이 확정되자 이탈리아의 한 기자는 '축구 전용구장 하나 없는 불모지에서 한국이 2년 연속 월드컵을 진출했다'라는 뜻의 기사를 내었었다. 우연히 이 기사를 본 고 박태준 명예회장은 당장 포항에 축구 전용구장 건립을 지시했고, 착공 2년만인 1990년 대한민국에서 축구 전용구장이 첫 선을 보였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실사단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우리나라 측에서는 지체없이 포항으로 안내했다. 유일하게 축구 전용구장이 있는 도시였고 그 당시로는 보여줄 것이 그 축구장 하나 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실사단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한국이 월드컵을 개최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 이 기세를 이어 광양에도 축구 전용구장을 건립하였다. 포항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동편 관중석을 청암 존이라고 이름붙였고, 고 박태준 명예회장은 포항 스틸러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철과의 인연[편집]

1940년 일본의 이야마북중학교에 진학한 박태준은 2차대전 기간 중 제철 근로봉사에 동원됐었다고 전한다. 철과의 첫 만남으로 평가되는 기록이다. 당시 현장 작업반장은 그가 철광석을 사전 처리하는 소결 공정에 상당한 소질이 있다고 평가했다고 전한다.

박정희와의 인연[편집]

1947년 육사 시절 생도와 중대장으로 나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당시 육사 중대장 겸 탄도학 교관을 맡고 있던 박정희수학실력이 우수한데다 자기 규율에 엄격한 박태준을 눈여겨봤다고 한다.

그러나 박태준이 졸업, 임관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한동안 끊어졌다. 그러다가 10여년 후인 박태준이 육군본부 인사과장(대령)으로 근무하던 시절 다시 시작됐다. 그 무렵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발령을 받은 박정희는 박태준에게 "참모장으로 나를 보좌해 달라"고 요청했고 박태준은 선뜻 이를 수락하였다.

1961년 봄, 당시 대구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는 일단의 장교들을 규합하여 후에 5.16 군사 쿠데타로 알려지는 군사 쿠데타를 준비하였다. 여기에는 김종필 등 측근 참모는 물론 일선부대의 많은 지휘관들이 동참하였다.

쿠데타 성공 두 달 뒤인 그 해 7월 박정희는 박태준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발탁했다. 두 달 뒤인 9월에는 박태준을 다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담당 최고위원에 임명하였다. 집권 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전국을 돌며 기공식, 준공식 등 각종 행사에 자주 다녔는데, 박태준은 늘 박정희를 보좌하며 동행하곤 했다.

군정(軍政) 시절 박정희는 중장(1961년 11월 대장 승진), 박태준은 준장 계급장을 단 군복 차림이었는데 두 사람은 1963년 박정희의 대선 출마를 앞두고 예편하여 군복을 벗었다. 박정희1963년 5월 27일 민주공화당 개편대회에서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자, 그로부터 3개월 뒤인 8월 30일 자신이 마지막으로 지휘관을 지냈던 강원도 철원군 제7사단 연병장에서 전역식을 치르고 민간인 신분이 되었다.

그 무렵 박태준도 육군 소장에서 예편하여 민간인 신분이 되었다. 박정희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면서 김종필 등 측근 참모들은 대거 정계로 진출하였는데 박태준은 경제인으로 변신하였다. 이듬해 말 박태준은 텅스텐 수출 업체인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만성 적자에 허덕이고 있던 대한중석을 부임한 지 1년 후 흑자 기업으로 바꿔놓았다.

그러던 중 1967년 4월 포항제철의 사장이 되었다.[9]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박태준은 박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의 후견인을 자청[10] 하였고, 박지만은 박태준을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는 사이가 되었다.[11] 그리고 박지만이 삼양산업을 인수할 때에도 박태준이 도와 주었다.[12]

고승덕과의 관계[편집]

1984년 수원지방법원 판사로 재직 당시 고승덕은 박태준 자유민주연합 총재이자 포스코 전 회장의 둘째 딸인 박유아와 결혼했다. 박유아는 이화여자대학교 동양학과를 졸업하고 고승덕과 미국으로 유학할 때 미술사와 드로잉을 공부하기도 했으며, 1987년 이후 남매를 두었다.[13] 고승덕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2011년 12월 16일 부모님과 함께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마련된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빈소를 찾은 자리에서 "개인 사생활 없이 큰 것만 생각하다 가신 분"이라고 애도하면서 "옆에서 지켜보기도 했지만 대한민국의 정말 큰 분이셨다"고 높이 평가했다.

고 박태준 명예회장의 전 사위이기도 하였던 고승덕은 고인과의 추억을 묻는 질문에 "저를 항상 많이 아껴주셨다"고 말했다. 장인이었던 박태준은 고승덕의 정치 입문을 말렸다고 한다. 정치판에서 단맛, 쓴맛 다보고, 볼 것, 못볼 것 다 본 박태준이었기에 고승덕을 아끼는 마음에서 닥쳐 올 미래를 미리 예견하여 정치 참여를 반대했던 것같다는 후론이다. 하지만 고승덕은 2007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BBK 주가조작 의혹 사건에 대한 변호에 나서며,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고, 18대 국회의원으로 여의도에 입성했다.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을 폭로와 함께 MB 최대 의혹 스캔들인 BBK사건에 연루되어 있자 '고승덕도 결국 흙탕물에 발을 담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14][15]

평가[편집]

태백산맥조정래 작가는 박태준은 한국의 간디”라며 “인도인들이 간디에게 ‘성스러운’ 이라는 뜻의 ‘마하트마(Mahatma)’를 붙여준 것처럼 저도 그의 이름에 마하트마를 붙여 ‘마하트마 박’이라고 칭하고 싶다”는 말로 그의 업적에 경의를 표했다. 조 씨는 그러나 “간디가 죽고 난 뒤 인도인들은 간디가 걸어갔던 길을 걸으려 하지 않고 있다. 힘들고 외롭기 때문”이라며 “아마 한국인도 마하트마 박이 걸어온 길을 따라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박 명예회장은 우리의 영원한 사표이자 보물이다”고 전했다.[16]

교우 및 친분 관계[편집]

평소에 사람을 좋아했던 박태준은 1990년대 초반까지 전두환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 김종필 전 국무총리 등과 각별히 친하게 지냈다고 하고 이철승신민당 국회의원과도 술친구로 지낸 바 있다고 하고 재계에서 삼성 이병철, 현대 정주영을 비롯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천신일 고려대 교우회장, 작가 조정래 등과도 친분이 두터웠다.[17]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박봉관(사망)
  • 어머니: 김소순(사망)
  • 장인: 장도원 - 삼표 회장
    • 배우자: 장옥자(張玉子, 1931.05.12-)
      • 장남: 박성빈(朴成彬, 66년생, 1966.06.03-) - 미국 실리콘밸리 스리컴 근무
      • 자부: 정지윤
      • 장녀: 박진아(朴進雅, 1957.04.30-)
      • 사위: 윤영각(尹榮恪, 1953.12.04-) - 삼정KPMG그룹 대표이사
      • 차녀: 박유아(朴裕雅, 1961-) - 한국화가
      • 사위: 고승덕(高承德) - 변호사, 정치인, 이혼
      • 삼녀: 박근아(朴根雅)
      • 사위: 김형수(金亨洙, 1959-) - 맥킴 대표이사 (영호남과 제주도의 맥도날드 운영법인)
    • 사돈: 김도근 - 동일고무벨트 전 회장
      • 사녀: 박경아(朴京雅) - 디자이너
      • 사위: 김병주(金炳柱, 1962-) - 미국 칼라일그룹 아시아회장 겸 이사

박태준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드라마[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주석[편집]

  1. ‘철의 사나이’ 박태준, 鐵도 녹였던 불꽃 같은 삶
  2. "朴泰俊거취에 政·財界 술렁", 《매일경제신문》, 1992년 10월 6일 작성, p. 3.
  3. 주간한국 2000. 5. 26.
  4. 경제부총리, 당연직 총리대행(?) - 동아일보 2007년 3월 7일자
  5.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별세(3보)", 《연합뉴스》, 2011년 12월 13일 작성. 2011년 12월 13일 확인.
  6. "李대통령, 故박태준 회장에 청조근정훈장 수여", 《연합뉴스》, 2011년 12월 14일 작성. 2011년 12월 21일 확인.
  7. "박태준 전 명예회장 '철강 명예의 전당' 등재", 《부산일보》, 2012년 6월 21일 작성. 2012년 6월 21일 확인.
  8. 박상하 (2006). 《에니어그램 리더십 (9가지 리더 유형으로 살펴보는 한국의 CEO들)》. 고수출판. ISBN 89-91114-10-5
  9.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박정희, "아니 자네는 무쇳덩어리인가?" (한국어)", 《헤럴드경제》, 2011년 12월 13일 작성.
  10. 박근혜, 언제 입 열까…"MB같이 불통 문제 생길 수 있어" - 머니투데이
  11. "아버님·친구·간디 같은 분 인데…" 생전 고인 회고하며 눈물의 추도 - 서울경제
  12. '선덕여왕 덕만'의 '착한 동생' 박지만의 시련 - 오마이뉴스
  13. 주식고수로 변신한 고시 3관왕 고승덕
  14. "고승덕, 故 박태준 회장 조문 "나를 많이 아껴주셨다"", 《머니투데이 배소진 기자》, 2011년 12월 16일 작성. 2012년 3월 12일 확인.
  15. "고승덕에 품었던 꿈", 《뉴시스 한평수 사회부장》, 2012년 1월 10일 작성. 2012년 3월 12일 확인.
  16. 조정래, “박태준은 ‘한국의 간디’” 아시아경제 2011-12-17
  17. "조정래, “박태준은 ‘한국의 간디’”", 《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2011년 12월 14일 작성. 2012년 3월 12일 확인.
  18. 박태준을 모델로 한 박태형 役
전 임
김종필
제32대 국무총리
2000년 1월 13일 ~ 2000년 5월 18일
후 임
이헌재
(권한대행)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허화평(15대)
제15대 국회의원(포항시 북구)
1997년 7월 25일 ~ 2000년 5월 29일
무소속→자유민주연합
후 임
이병석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