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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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역시·도별 우세지역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김종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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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大韓民國 第十三代 大統領 選擧)는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1987년 12월 16일 수요일에 직선제로 실시되었다. 헌정 이후에 치러진 사상 첫 선거였으며 5공의 주역 중 하나인 노태우와 대표적인 민주 인사인 양김(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군사정변의 주역 중 하나인 김종필의 대결이었다. 본래 김영삼 후보가 앞섰으나 단일화 실패에 따른 실망감, 잇따른 중대사고들의 여파로 여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목차 |
개요 [편집]
- 선거 일시 : 1987년 12월 16일(수) 오전 6시~저녁 6시
- 선거 대상 : 만 19세 이상(1968년 12월 16일 이전 출생자)
선거법 개정 [편집]
제5공화국 신군부 정권은 집권계승 시나리오에 의해 12·12 군사 반란의 동지 노태우를 차기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또 다시 선거인단에 의해 간접선거로 하기에는 6월 항쟁으로 국민의 저항이 거셌다. 이에 그들은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특별선언인 6·29 선언을 하여 헌법을 바꾸기에 이른다. 그 가운데 민주화투쟁의 최대과제였던 대통령 선출 규칙이 핵심이었다. 국민투표를 거쳐 1987년 10월 29일 확정·공포된 헌법에는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제67조)는 선거의 기본원칙이 분명히 적시되어 있었다.
선거 직전 상황 [편집]
제5공화국은 반대파 억압 및 인권 유린 등의 독재정치로 국민들의 반발을 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전두환 정부는 노태우를 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그러나 노태우는 국가 반역을 주도하였다는 점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이 여파로 야권의 지지율이 올랐으나 양김의 단일화 실패, 중대사고 등으로 인해 노태우가 승리할 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갔다.
후보 선출 [편집]
민주정의당 [편집]
민주정의당은 1987년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 민주정의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개회를 열여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1]
통일민주당 [편집]
통일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유력시된 사람은 양김(김영삼, 김대중)이었다. 이 후보 선출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었고, 결국 김대중이 탈당함으로서 김영삼이 후보로 선출되었다.
평화민주당 [편집]
통일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을 두고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갈등을 겪었고, 이 와중에 동교동계가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새로 창당된 평민당은 김대중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신민주공화당 [편집]
신민주공화당은 1987년 10월 30일 서울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겸한 중앙당 창당대회를 열어 김종필 창당준비위원장을 당 총재와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2]
사회민주당 [편집]
사회민주당은 1987년 11월 11일 서울 천도교수운회관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홍숙자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3]
기타 [편집]
한주의통일한국당은 한얼 사상의 창시자인 신정일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고, 일체민주당은 김선적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시인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사자 백기완은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단일화 [편집]
양김 [편집]
양김은 통일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유력시되면서 갈등을 빚었다. 이에 단일화를 결심한다.
1987년 8월 11일, 김영삼은 김대중과 회동을 갖고 대통령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으나, 김영삼의 조기 후보 단일화 주장과 김대중의 개헌 협상 후 조정 주장이 맞서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4] 이후 9월 14일에는 김대중과 만났고, 김대중은 김영삼에게 36개 미창당 지구당 결성을 요청한다. 그러나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총선에서의 조직책 선정이나 다름없는 36개 지구당을 창당하는 것은 적전 분열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경선을 하지 않을 바에는 굳이 잡음의 소지가 있는 36개 지구당 창당은 필요없는 것이다"[4]라고 주장하며 김대중의 주장을 일축한다.[4] 계속된 토론에도 김대중과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이후 9월 29일 김영삼 총재, 김대중 고문 간 후보단일화 회담을 하였으나 이견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다음날인 9월 30일 김영삼은 김대중과 야당 후보단일화 협상을 벌였으나 양자간의 시각차이만 확인하고 결렬되었다.[5] 야당 후보자들의 단일화를 촉구하던 재야인사들은 이를 '적전분열'이라며 강도높게 질타하였다. 10월 10일 통일민주당을 장악한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하고 나서자 당내 경선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던 김대중은 10월 18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였다.[6]
김대중과의 대선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결과 1987년 11월에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이후 김대중이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자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2위로 28%의 득표율을 얻어 민주정의당의 노태우에게 패배하였다. 1987년 당시 노태우, 김영삼 대선 후보는 각각 광주 유세에 나섰다가 성난 시민들이 던진 돌과 화염병에 곤욕을 치렀다.[7]
당시 김대중이 평민당을 창당하면서 젊은피 수혈이라는 정책을 펴서 학생운동권 중 민족 해방 계열 출신 청년 정치지망생들을 대량으로 영입하면서 언론 매체 등에서조차 통일민주당의 영향력은 감소했고, 충격을 받은 그 역시 다른 재야 인사 및 운동권 계열 인사 영입에 박차를 가하게 한다.
기타 후보들 [편집]
사회민주당 홍숙자 후보는 1987년 12월 5일 김영삼에 대한 지지를 표하며 사퇴했다.[8]
무소속 백기완 후보 역시 훗날 사퇴했다.
선거 운동 기간 [편집]
헌정 이후에 치러진 첫 선거이고, 1971년 이후 16년만에 치러지는 직선제 형태였다는 의의를 담고 있다. 그만큼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민정당 노태우 후보는 대통령 선거 당시 차별화 된 선거 공약을 내세우며 자신을 코미디 소재로 다뤄도 좋다고 하기도 하였다.[9] 이후 대머리, 주걱턱 등 연예계의 금기용어도 이때 해금되었다고 한다.[9] 그는 정권 중간평가와 경인운하 건설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에도 불구하고 광주직할시 지역 유세 당시 '광주 학살의 원흉' 또는 '방조자의 한 사람'이라는 항의 시위대가 나타나서 달걀 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민주주의의 양념'이라며 관련자들의 처벌을 반대하고 오히려 전두환에게 선처를 호소하면서 사건은 그냥 넘어가게 된다.
한편 김영삼 후보는 후보측이 12·12 군사 반란 당시 신군부에 의해 체포되면서 강제로 전역당했던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을 영입하면서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40%를 넘어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단일화 실패의 결과로 국민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1987년 당시 노태우, 김영삼 대선 후보는 각각 광주 유세에 나섰다가 성난 시민들이 던진 돌과 화염병에 곤욕을 치렀다.[7] 게다가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두고 일어난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과 선거일 바로 전날 용의자 김현희가 서울로 압송되면서 김영삼 후보에게 치명타로 적용,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게 유리하게 돌아서고 말았다.
대선이 앞으로 다가오면서 후보들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이러한 가운데 사퇴하는 후보들조차 늘어났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사민당 홍숙자가 사퇴했고, 일체민주당의 김선적도 사퇴했다. 그리고 무소속 백기완 후보 역시 사퇴했다. 이리하여 후보로 등록한 8명 중 5명만이 출마하게 되었다. 오로지 이들만의 대결로 이어졌는데 그들이 바로 민정당의 노태우, 민주당의 김영삼, 평민당의 김대중, 공화당의 김종필, 한주의통일한국당의 신정일이었다.
선거 [편집]
드디어 1987년 12월 16일 선거가 치러졌다. 민정당 노태우는 36.6%의 최다득표율로 당선되었는데 이 가운데 특히 1차적 연고지인 대구직할시에서는 70%가 넘었다. 민주당 김영삼은 연고지역인 부산직할시와 경상남도에서 50% 이상의 득표를 보였다. 평민당 김대중은 1차 연고지인 전라남도과 광주직할시에서 90% 이상의 몰표를 뽑아냈으며 2차 연고지인 전라북도에서도 압도적인 몰표를 보였다. 반면에 공화당 김종필은 1차 연고지인 충청남도에서도 최다득표의 위치는 지켰으나 겨우 절반에 못미치고, 2차 연고지인 충청북도에서는 오히려 노태우가 46.9%로 충남에서 김종필이 득표한 45%를 상회함은 물론이고 연고당사자인 김종필은 13.5%에 그쳤다. 이들과는 달리 한주의통일한국당 신정일은 그 어떠한 지역에서도 최다득표를 얻지 못했으며 46,650표를 얻어 0.2%를 기록하였다.
개표 [편집]
개표 초반부터 결과가 민정당 노태우 후보의 독주로 나타나자 제일 먼저 개표되는 부재자 투표함 개표에 조작 의혹이 제기되었고, 구로구 갑구 개표소인 구로구청에서는 부재자 투표함이 봉인되어있지 않다며 학생과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쳐 개표가 지연되다가 학생과 시민들에게 구청이 점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10]
선거 결과 [편집]
| 득표순위 | 기호 | 이름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비고 |
|---|---|---|---|---|---|---|
| 1 | 1 | 노태우 | 민주정의당 | 8,282,738 | ||
| 2 | 2 | 김영삼 | 통일민주당 | 6,337,581 | ||
| 3 | 3 | 김대중 | 평화민주당 | 6,113,375 | ||
| 4 | 4 | 김종필 | 신민주공화당 | 1,823,067 | ||
| 5 | 7 | 신정일 | 한주의통일한국당 | 46,650 | 0.2% | |
| - | 5 | 홍숙자 | 사회민주당 | 중도 사퇴 | ||
| - | 6 | 김선적 | 일체민주당 | 중도 사퇴 | ||
| - | 8 | 백기완 | 무소속 | 중도 사퇴 | ||
| 선거인 수 | 25,127,158 | |||||
| 총투표수 | 23,066,419 | |||||
| 투표율 | 89.2% | |||||
- 득표율은 총투표수 대비 백분율을 가리킨다.
지역별 득표수 [편집]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김종필 | 신정일 | 합 계 | |
|---|---|---|---|---|---|---|
| 서울 | 4,560 | |||||
| 인천 | 1,126 | |||||
| 경기 | 5,621 | |||||
| 강원 | 2,628 | |||||
| 충남 | 3,902 | |||||
| 충북 | 2,796 | |||||
| 광주 | 1,111 | 74 | ||||
| 전남 | 4,831 | 994 | ||||
| 전북 | 1,501 | |||||
| 부산 | 3,612 | |||||
| 경남 | 7,567 | |||||
| 대구 | 3,774 | |||||
| 경북 | 7,812 | |||||
| 제주 | 683 |
주석 [편집]
- ↑ MBC뉴스데스크 (1987년 6월 10일). [6.10 민정당전당대회전당대회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강성구]]. 2013년 5월 3일에 확인.
- ↑ MBC뉴스데스크 (1987년 10월 30일). [13대 대선신민주공화당 중앙당 창당 대회[김형민]]. 2013년 5월 3일에 확인.
- ↑ “社民黨 대통령후보 洪淑子씨 선출”, 《동아일보》, 1987년 11월 11일 작성.
- ↑ 인용 오류:
<ref>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dd200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 ↑ KBS 영상실록 20051030 방송분, http://www.kbs.co.kr/end_program/1tv/sisa/image_story/vod/1365900_12449.html
- ↑ 우정이 있는 민주공화국 (김성호 지음 | 사군자 | 2007-11-16 ) 97페이지
- ↑ 인용 오류:
<ref>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autogenerated5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 ↑ “社民, 洪淑子후보제명”, 《매일경제》, 1987년 12월 5일 작성.
- ↑ 가 나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 ↑ “구로구청 점거농성 1천5백명 연행조사”, 《매일경제》, 1987년 12월 18일 작성, p. 11면. 2010년 6월 10일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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