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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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책

김책(金策, 1903년 8월 14일 ~ 1951년 1월 3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인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산업상(1948년 9월-1951년 1월)과 부수상을 지냈다.

생애[편집]

함경북도 학성군 출생으로, 일찍이 가족을 따라 중국 옌지(延吉)에 이주하여 거기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옌지에서 성장하다가 반일 활동에 가담하기 시작했고, 만주 지린성(吉林省) 동흥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동흥중학교 재학 중 반제지하청년단체에서 활동하다가 1927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고, 동흥중에서는 퇴교당하였다. 이후 만주 펑톈, 지린 등에서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풀려나오기를 반복하면서 무장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초기에는 엠엘파와 대립되는 화요파 계열로서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어 요직을 맡았고, 이후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했다.

출감 후 북만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1936년 조국광복회를 조직하는데 가담했다. 1940년대 동북항일연군 때 김일성을 만나 같이 행동하였으며 당시 인연으로 공화국 수립후 김일성 주석의 측근이 됐다. 동북항일연군이 소련에 들어와 재편된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도 함께 있었다. 당시 직급은 김일성, 강건, 안길과 동급이었다.

광복후 김일성과 함께 귀국한 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위원을 시작으로, 1946년 평양정치군사학원 원장이 되었다. 이후 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1948년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평양학원 초대 원장 등을 지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참석하였고, 6월 남북 로동당이 통합되어 조선로동당이 결성되자 그는 로동당 정치위원에 선거되었다. 9월 공화국 내각수립후 부수상 겸 산업상을 역임하는 등 [1]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의 핵심으로 활동했다.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한국 전쟁을 맞았으며,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선사령관을 겸하여[2], 군사위원회 위원 및 전선사령관으로 참전했다가, 전쟁 중이던 1951년 1월 30일 최전선에서 전사했다. 또는 평양에서 심근경색 또는 가스 중독으로 급사했다고도 하며 권력 투쟁 중 암살당했다고도 한다.

사후[편집]

사후에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국가훈장 제1급을 추서하였다. 최고인민회의는 그의 사후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고향인 성진을 개명한 김책시, 청진제철소를 개명한 김책제철소평양김책공업종합대학 등 시설물에 그의 이름을 명명한 것이다.

함북 학성군은 김책군으로 유자녀 군사학원은 유자녀 김책군사학원으로, 인민군 제2정치군관학교는 김책군관학교로, 서울근위 제4사단은 김책 서울근위 제4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3]

김책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참고 자료[편집]

  • 김일성 (1992년). 〈제1부 항일혁명편, 제23장 국제반제연량과 연합하여 - 2. 혁명가 김책〉, 《세기와 더불어》.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주석[편집]

  1.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경향신문》, 1948년 9월 11일 작성, 1면.
  2. 이정훈 기자. "[6•25 50주년 특별연재|‘잊혀진 전쟁’의 비록<상>]", 《동아일보사》, 2000년 5월 1일 작성.
  3. 북한,조국통일상에 임양ㆍ운동권 학생도, 한국일보 1990-08-17자, 02면
전 임
(초대)
북한의 제1대 부수상
(홍명희, 박헌영과 공동)
1948년 9월 ~ 1951년 1월 30일
후 임
박헌영, 홍명희
전 임
-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산업상
1948년 9월 ~ 1951년 1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