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경
| 임수경 | |
| 출생 | 1966년 11월 6일 (45세) |
|---|---|
| 국적 | |
| 별칭 | 통일의 꽃 |
| 학력 | 한국외국어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박사 |
| 직업 | 평화운동가, 연구원, 언론인 |
| 종교 | 천주교 |
임수경(林秀卿 1966년 11월 6일 ~ )은 대한민국 평화, 통일, 사회운동가, 방송인. 언론인이다.
1989년 대한민국 정부의 허락없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평양축전)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자격으로 참가한 후 휴전선을 통해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통일운동가로, 한국 전쟁으로 한반도 군사 분계선이 가로막힌 후 공개적으로 휴전선을 걸어서 넘은 최초의 민간인으로 기록되었으며,[1]“통일의 꽃”으로 불렸다.[2]
목차 |
[편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사건
[편집] 시대배경
1989년 3월 20일 소설가 황석영이 평양에 들어간 닷새뒤, 기독교 장로회 목사 문익환은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 자격으로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초청을 받고 1989년 3월 25일 대한민국 정부의 허락을 받지않고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두차례 회담하여 7·4 남북 공동 성명의 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전대협은 남북한 대결구도를 원천적으로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통일이라고 판단했고,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젊은 사람들의 고민과 노력을 한반도 전역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까지 정부주도로 획일화 되어있던 통일 논의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향한 물꼬를 트고자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 축전에 임수경을 대표로 보냈다.
[편집]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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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6월 11일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 선고 : (국가보안법상의 탈출과 잠입, 회합, 고무 찬양, 금품 수수 등 13가지 죄목으로 유죄판결) 재판장 송재헌
- 1992년 12월 24일 3년 5개월 옥살이 후 가석방
- 1999년 3월 1일 사면복권
- 2001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적인 허락을 받아 평양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에 참석
[편집] 영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에게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만난 대한민국 젊은 학생 임수경의 행동은 ‘미국 사람들 앞잡이 노릇’만 하는 줄 알았던 종교인에 대한 편견을 깨, 천주교 신자로서 성호긋기 등 그가 행했던 행동과 옷차림이 유행하여 금지되었던 반팔 티셔츠가 다시 허용되는 등[3] 북한 주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4] 결과적으로 정신적으로 해방시켰다.[5] 귀국길에 있어서도 제3국을 통하지 않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유엔사령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문규현 신부의 손을 잡고 판문점을 통하여 귀국하였다.[6]
[편집] 학력
-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불어과
- 1990년 김일성종합대학 명예학사
- 서강대학교 대학원
- 코넬 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인권학 전공
- 미국 코넬대학교 평화학 박사
- 한국외국어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
[편집] 이력
- 언론개혁시민연대 부설 21세기 언론연구소 연구원
- 월간 ‘해인’ 객원기자
- KTV ‘통일로! 미래로!’ 진행
- 방송통신위원회 남북방송교류추진위원회 위원
- 한국 외국어대학교, 성공회대학교 언론학 강의
- 라디오21 ‘임수경의 원코리아’ 진행
[편집] 생애
임수경은 서울 출신으로 중산층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랐으나,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불어과에 입학한 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등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대학교 4학년이던 1989년에 북한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평양축전) 전대협 대표로 선발되었고, 전대협 측은 비밀리에 파견 계획을 세웠다. 임수경은 서울을 떠나 출국하였는데, 출국 당시 행선지를 일본으로, 출국 목적을 관광으로 밝혔다. 그러다가 동독 동베를린을 거쳐 북한에 들어갔다. 그가 허가를 받지 않고 북한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남한에서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천주교 신자 보호를 위해[7]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 ‘평양 장충성당 축성 10주년 기념미사 봉헌’의 명목으로 공식 파견한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걸어서 남한으로 귀환하였고, 동시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임수경은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92년 12월에 가석방되어 풀려났고, 1999년 사면 복권되었다. 1993년 8월에 한국외국어대학교를 뒤늦게 졸업했고, 이후 서강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미국 코넬 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인권학을 공부했다.
임수경은 그 후 1995년에 신문기자와 결혼했으나 몇 년 후에 이혼하고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면서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2003년에 영어 연수를 받으러 필리핀에 갔던 아들이 물에 빠져 죽는 사건을 당하고 충격을 받아 슬픔에 빠져 절(해인사)에 머물렀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빈 평화대학원 등에서 공부를 했으며,[8] 2011년 4월 5일 함세웅, 고은, 윤민석 등과 함께 정의를 위해 싸웠지만 외롭게 살아온 사람을 위로하는 ‘김은숙을 위한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9]
[편집] 상훈
1990년 8월 15일, 북한에서 조국통일상을 수여받았다.[10] 김일성종합대학은 10월 12일 열린 제43회 대학 졸업식에서 명예학생으로 등록된 임수경에게 졸업증을 수여했다.
[편집] 저서
- 《참 좋다! 통일 세상》 (황소걸음, 2003년) 박재동 그림
- 《어머니, 하나된 조국에 살고 싶어요》 (돌베개, 1990년)
- 《어머니, 하나된 조국에 살고 싶어요 :림수경 항소리유서》 (평양출판사, 1991년)
[편집] 같이 보기
[편집] 바깥고리
- 평양축전 기간 북한의 "통일의 꽃" 영상
- 평양축전 기간 평양거리를 행진하는 임수경
- 평양축전을 마치고 북한에서 판문점으로 돌아오는 임수경의 영상
- 분단의 벽을 넘어- KBS 인물현대사(로그인 필요)
[편집] 주석
- ↑ 정청래 (2003년 10월 28일). 《사람만이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든다》. 황소걸음, 29쪽. 2011년 5월 14일에 확인.
- ↑ 장영달 (1999년 4월 10일). 《참과 거짓 싸울때에 어느편에 설 건가》. 도서출판 산하, 249쪽. 2011년 5월 14일에 확인.
- ↑ 박효민. 《북한 기독교 이해의 변화에 관한 연구》. 감리교신학대학교, 36쪽. 2011년 5월 14일에 확인.
- ↑ “두만강을 세 번 건넌 여자”, 《조선일보》, 2011년 4월 9일 작성. 2011년 5월 14일 확인.
- ↑ 목용재 기자 (2010년 10월 24일). 임수경 청바지가 北주민 남한 인식 바꿨다. 데일리NK. 2011년 5월 14일에 확인.
- ↑ “통일이 되든, 안 되든… 그녀는 영원한 통일의 꽃이다”, 《한국일보》, 2009년 6월 22일 작성. 2011년 5월 14일 확인.
- ↑ 문정현 신부. “방북 임수경 귀환 동행길에 동생을 떠밀다”, 《한겨레》, 2010년 7월 19일 작성. 2011년 5월 14일 확인.
- ↑ “통일의 꽃’ 임수경”, 《주간경향》, 2009년 9월 29일 작성. 2011년 4월 15일 확인.
- ↑ 남상욱 기자. “임수경씨 정의 위해 싸웠지만 잊혀진 사람, 기억시켜주고 싶어요”, 《한국일보》, 2011년 4월 4일 작성. 2011년 5월 4일 확인.
- ↑ 북한,조국통일상에 임양ㆍ운동권 학생도, 한국일보 1990-08-17자, 0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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