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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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직
김형직
1894년 양력 7월 10일 ~ 1926년 양력 6월 5일
태어난 곳 조선 평안남도 평양 만경대
죽은 곳 일제 강점기 한국
복무 대한제국 대한제국
근무 조국광복회
지휘 제1차 세계 대전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기타 이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 김일성의 아버지,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할아버지

김형직(金亨稷, 1894년 양력 7월 10일 ~ 1926년 양력 6월 5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 김일성의 아버지이다. 좌우명은 지원(志遠)이다. 일제 강점기의 군인, 독립운동가이다.

목차

생애 [편집]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났고, 평양 숭실학교(숭실대학교의 전신)를 졸업했다고 한다. 조만식은 그의 학교 선배라고 한다. 조국광복회를 창립한 독립운동가라고 한다. 이후 후대교육사업과 대중계몽, 동지규합을 위한 활동에 집중해 왔다고 한다. 그는 1913년 봄 직업적 혁명가로 나서면서 《지원》의 사상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을 지도해왔다고 한다.[1]

그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합작해 창립한 신간회 산하의 조선국민회에 가입하고, 무장 게릴라 전투(빨치산)을 통해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 1917년 3월23일 조선국민회를 결성하고 그 두리에 광범한 민중을 묶어 세웠다고 한다. 이것은 반일지하혁명조직으로 한국 반일민족해방투쟁을 민족자체의 힘에 의하여 전진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하여 왔다고 한다.[1]

그는 1918년일본에 대항하여 조국광복회를 설립했다고 하는데, 조국광복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조국광복회 십대강령"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는 이 강령을 발표하면서 신분차별을 두지 않고 농민, 백정, 노동자가 협동, 일제에 대항할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평양에서 항일운동을 펼치다 대거 조직원들이 일본에게 체포되자, 중강진으로 피신하여 게릴라전을 펼쳤다고 한다. 1925년 1월 일정의 경찰에 체포되었다 한다.

그 후 만주로 도망쳐 항일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의 좌우명은 지원(志遠)이라고 한다.

장남 김일성의 본명인 성주라는 이름을 직접 지었는데, 이름을 장차 나라의 기둥이 되라는 뜻에서 성주라 지었다 한다.[2] 사후 평양시 대동군 김일성의 생가 만경대 근교에 안장되었다.[3]

혁명활동거점을 무송으로 옮긴 후 일제경찰의 고문과 심한 동상의 후 과로 극도로 쇠약해졌지만 고려혁명당 결성과 정의부 조직에 적극 관여하며 몸소 <무송회의>도 조직 지도하면서 독립운동의 통일단결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926년 6월 5일에 사망하였다.[1]

사후 [편집]

198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의 이름을 따서 함경북도 후창군김형직군(郡)으로 개칭하였다. 평양김형직사범대학1975년 그의 이름을 따서 개칭한 명칭이다.

2008년 7월 10일 아침 봉화리에 모셔진 김형직의 동상과 만경대에 있는 그의 묘, 삭주군중강군에 있는 동상 등에 헌화하고 탄신 104돌을 추모하였다. 이날 행사에는 리종옥박성철계응태김철만김국태김기남박기서김복신장철 등 당 고위관계자들이 참석하였다.[3] 평양시 강동군 봉화리와 평안북도 삭주군 남사로동자구, 자강도 중강군 중강읍 등에 동상이 세워졌고, 만경대 묘지에 반신상이 모셔져 있다.

같이 보기 [편집]

가계 [편집]

주석 [편집]

출처 [편집]

  •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항일혁명편 제1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