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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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정변 직후, 5월 16일 오전 8~9시 경 중앙청 앞에서 박정희와 이낙선 소령, 박종규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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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정변(쿠데타)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소장 박정희, 중령 김종필, 소령 이낙선 등을 비롯한 육군사관학교(이하 육사) 8기, 9기 출신 일부 장교들이 장면 내각의 무능력과 사회의 혼란을 명분으로 제6군단 포병대, 해병대, 제1공수특전단 등을 동원해 청와대를 장악,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변이다.

목차

[편집]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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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의 정치력 부재와 사회적 문제, 그리고 군 내부 인사들의 불만이 촉발된 성격이 강하다. 정치권은 집권당인 민주당이 신·구파간의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다양한 사회세력들은 각각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여 정국이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특히 혁신계 정치세력의 부상과 학생세력의 진출은 민족자주화운동, 통일촉진운동으로 전개되어 사회 분위기가 혼란해졌고, 군이 정권을 장악하기 쉬운 상태가 형성되었다.

한편 1958년부터 미국의 요청으로 추진된 감군(減軍)으로 인한 군내부의 불만으로 촉발되어 한국 전쟁 이후 한국사회에서의 사회적 지위 신장과 더불어 권력에 대한 욕구가 충만되어 있던 군부 내 군벌세력 중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고급 장성의 부정 부패와 승진의 적체현상을 공격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결심했던 데에는 그가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군사정변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하다. 1960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역임 후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면서 소장 박정희, 중령 김종필 등 육사 8기, 9기생들은 군사정변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60년 1월부터 김동하 포항 주둔 제1해병상륙 사단장과 함께 5월 8일을 정거사일로 정하고 병력동원계획을 세웠지만 4·19 혁명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이미 이승만을 축출하려는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그 때의 일로 군에서 배제되었고 전황이 급한 틈에 예비역의 신분으로 군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1952년 부산정치파동 당시다. 이 때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병력 파견 지시를 내렸는데, 여기에 육군참모본부가 반대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 당시 훈령 217호 '육군 장병에게 고함'의 초안을 쓴 사람이 박정희라 한다.[1]

[편집] 정변 배경

윤치영,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던 그는 장면 내각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제2공화국국무총리이던 장면은 재임기간 동안 10여 차례나 쿠데타 정보를 보고 받거나 입수했다. 근거 없는 설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정보였다. 장면은 그때마다 "미군이 있는데 어떻게 쿠데타를 하겠소"라는 말로 대응했다. [2]

1950년대에 이미 이승만을 축출하려는 쿠테타 시도를 했던 박정희는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정했지만, 4·19 혁명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960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역임 후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군내 부패행위에 항거하다가 중령에서 예편된 김종필 등 비롯한 지지 세력을 규합하였다.

또한 장면 내각에 불평, 불만이 많던 윤치영, 임영신, 임병직 등의 극우적인 인사들과도 사전에 여러 번 교섭하였고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한다.

[편집] 전개

[편집] 정변 초기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대통령 윤보선장도영으로부터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으니 피신하라는 연락을 접하였다. 당시 상황에서 헌법상의 국정 통솔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에게 있었다. 그러나 장면은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수녀원에 숨어버렸다. 이제 그의 손에는 두 가지 중요한 선택권이 쥐어졌다.[3] 하나는 그가 쿠데타 진압을 명령하고 헌정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도력을 상실한 장면 정부를 포기하고 쿠데타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장면 총리는 보좌진의 안내로 차량을 타고 정부중앙청사에서 빠져나갔고,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와 주한 미국 대리대사 그린은 윤보선을 찾아갔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육사 8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부사관[4]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문재준 대령 제6군단 포병단 지휘관과 박치옥 대령 등은 곧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해 전권을 장악하고, 정변의 성공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군사정변은 초기에 미8군 사령관 C. B. 매그루더, 야전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지만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 의사 표명, 장면 내각의 책임 자각형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의 체념 등에 의하여 성공했다.

5월 16일 윤보선은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마샬 그린 주한미대리대사를 만났다.[5] 그들은 이미 "장면 총리가 영도하는 합법적인 한국 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두 사람은 윤보선에게 쿠데타군을 무력으로 진압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국군끼리 전투를 벌여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북한의 공산군이 기회를 노려 남침한다.[5]"며 끝까지 반대했다. 주한미국대사 그린은 마지막 경고로 "각하의 이번 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입니다.[5]" 그러나 윤보선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보선은 5·16 군사정변 후 정변 당시 정변주체세력들의 계엄령 사후 추인과 정변지지성명 발표 요구를 모두 거절했으며,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그린 미국 대리대사의 군사정변 진압을 위한 병력 동원에 대한 요구 역시 국군간의 전투와 이로 인한 북한의 남침을 우려해 거절했다. 그가 일면으로는 '싸움을 피하기 위해, 다른 일면으로는 장면 내각에 대한 적개심[6]' 때문에 진압 행동을 거부했다는 분석도 있다.[7]

[편집] 5월 16일 새벽

정변의 성공을 잘 알 수 없었던 박정희는 매우 초조해하며 흥분한 상태였다. 이즈음 장도영은 비밀통로를 이용해 제8군 미군사령부를 오가며 매그루더 장군과 이야기를 했다. 정변 다음날인 5월 17일, 매그루더는 박정희 소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나 박정희 소장은 절대적으로 군을 물릴 수 없다는 의지를 보였다. 당시 중령이던 김형욱이 장경순 준장을 폭력하는 일이 있었다. 중령 등 고급 장교들 중 5명의 위원만 뽑으라 하는 이유 때문이었다.

5월 18일, 박정희는 유원식(兪原植)을 데리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그러나 윤보선대통령은 반란군을 진압하기보다, 올 것이 왔다며 군사정변에 체념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박정희 축출’을 다짐했던 미국은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을 보장)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군부를 인정하지 않고 진압명령서를 들고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가 '사인만 하시면 쿠데타군을 진압하겠다'고 하였으나, 윤보선은 제 2의 미군정에 해당하는 내정간섭을 막기위해 체념적으로 군사정변을 받아들였다.

정변이 발생하자 당시 국무총리였던 장면은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에 나와 하야를 선언하였다. 5월 16일에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면서 박정희가 부의장으로 취임하고 육군참모총장이던 장도영을 의장으로 추대하였다. 5월 20일에는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고 장도영을 헌법에는 없는 “내각수반”으로 임명한다.

[편집] 윤보선 대통령의 역할

대통령 윤보선
(혼란과 체념, 장면 내각에 대한 적개심 등으로 사실상 군사정변을 묵인했다.)

1961년 5월 19일 대통령 윤보선은 햐야선언을 하였으나 5월 20일 번복하였다. 1961년 5월 19일 윤보선은 대통령직 사퇴를 발표했다. 그의 사퇴 성명은 오후 8시 30분 방송을 통해 공표되었다.[8]

금번 군사혁명이 발생하면서 나는 무엇보다도 귀중한 인명의 희생이 없기를 바랐으며 순조롭게 수습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다행히 하늘은 우리를 도와서 무사하게 이 나라의 일을 군사혁명위원회의 사람들이 맡아서 보게 하였으며 국민 여러분이 또한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지금 안심하고 이 자리를 물러나겠습니다. 아무쪼록 군사혁명위원회의 사람들은 그 소신과 충성을 다하여 이 나라를 발전시키고 이 국민을 하루속히 궁핍에서 건져내 주기를 바라며 나의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이에 협조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바입니다.[8][9]

윤보선의 사퇴발표가 있자 군정 측은 그의 사퇴를 만류하였다. 5월 19일박정희장도영청와대를 찾아와 윤보선의 사퇴를 만류했다.[10] 그러나 그 만류는 시늉이었다. 장도영에겐 윤보선이 좀 더 필요했던 것 같으나, 박정희는 윤보선의 사퇴를 속 시원하게 생각하고 있었다.[10] 이때 사퇴를 고사한 일로 후일 민주당 신파 계열에서는 그가 군사정권에 협력했거나 내통, 또는 매수했다며 공격하였다.

5월 20일 상오 외무부 차관 김용식이 윤보선에게 “유일한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이 시점에서의 하야는 국제법상 새 정부의 승인문제를 복잡하게 할 우려가 있다.[10]”고 설명했다. 김용식은 이 점을 박정희에게도 설명했다. 5월 20일 오후 2시 윤보선, 박정희, 장도영, 김용식 4자 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용식은 다시 “만일 각하가 사임한 뒤 이북이 남침하면 외국과 유엔에 호소하려 해도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호소할 기관이 없다.[10]”며 사임재고를 요청했다. 재고 요청에 박정희장도영도 가세했고, 미국의 만류도 있었다.[10][11][12]

결국 윤보선은 오후 6시 예정돼 있던 고별회견 대신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하야하겠다는 나의결정이 국제적․국내적으로 영향이 크다 하므로 나라 일을 해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만부득이 이 나라 형편을 생각하여 번의해야 할 것 같다.[10][11][12]”며 하야를 번복, 번의 회견을 하였다. 1961년 6월 6일 국가재건 최고회의현충일 행사에 참석하였다.

[편집] 결과

박정희

접견실에서 박정희, 장도영 등을 만난 대통령 윤보선은 “올 것이 왔구나” 라는 말로 입을열었다. 혼자 하는 말이었지만 소리가 워낙 커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들었다.[13] 현석호는 대통령의 입에서는 듣기에 민망한 혹독한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나왔다고 하였다.[출처 필요] 요약을 하면 장면 총리는 진작에 물러났어야 했으며 민주당은 무능했다는 얘기였다.[14]

국방부 장관 현석호를 비롯한 각 부서의 장관, 차관, 처장급 인사들이 줄줄이 가택에서 체포되거나 연행되는 형식으로 청와대에 끌려왔다. 이때 민주당 신파의 각료인 정일형, 현석호 등은 윤보선의 발언을 듣고 경악한다.

현석호는 회고록에서 윤보선은 이 말에 이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다." 면서 장면 정부에 비난을 퍼붓고 박정희의 거사에 찬사를 보냈다고 했다.[13]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습니다. 박 장군은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14]

군부에 의해 청와대로 온 현석호는 윤보선의 이 발언을 가리켜 ‘한마디 평생토록 잊지 못할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14]

5월 20일, 중앙청 광장에 선 장도영박정희

5월 16일 혁명위원회 포고 제4호로써 민의원 참의원 및 지방의원등 대의원 헌법기관은 해산되었고 5월 2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6호[15]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되어 정치활동이 완전히 금지되었다. 따라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장면 내각은 붕괴되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한 약 3년간의 군정통치가 이루어졌다. 군정기간 중 정변세력은 특수범죄{반혁명(정변), 반국가행위}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의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다. 또한 핵심권력기구로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공화당을 창당해 대통령제 복귀 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하였다.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의장 박정희는 조만간 원대복귀 하겠다던 애초의 혁명공약 제6조를 추후 번복하고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현직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을 물리치고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후, 박정희는 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윤보선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편집] 국가재건최고회의

이 부분의 본문은 국가재건최고회의입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반공·친미·구악 일소·경제 재건 등을 명분으로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하여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을 붕괴시켰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 나와 하야를 선언하였다.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개편한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 군사정변 이후 정변 주도세력이 5월 18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개편해 만든 통치기구이다. 입법·사법·행정 3권을 장악한 최고통치기구였으며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5월 20일에 첫 번째 군사내각을 발표하였으며 6월 6일에는 통치의 기반이 되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초대의장은 장도영이었으나 이른바 ‘텍사스 토벌작전’을 통해 7월 3일에 장도영이 축출되고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편집] 5·16 군사 정변 직후

5·16 군사정변 이후 구악 일소라는 명분으로 조리돌림 되는 이정재 외 폭력조직

정변 초기에는 일부 인사들의 지지 성명이 있었는데 장준하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정변을 지지하였고 언론인 송건호제3공화국 초기까지 민족적이라고 평가하여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16] 또한 정변 한달 뒤, 일제강점기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을 폭로한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1961년 6월 14일 ‘코리언 리퍼블릭’지에 ‘5·16군사혁명에 대한 나의 견해’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투고의 첫머리에서 ‘5·16군사혁명은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을 폭로하며 ‘한국에는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17]

박정희는 군사정변 직후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다 투옥된 독립운동가 김학규를 사면, 복권시켰다.[18] 김학규가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을 못 할 때, 박정희는 한학자인 최서면(崔書勉)에게 김학규를 입원시켜 드리고 돌봐 드리도록 부탁하여 국군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18] 그는 병석에서 입버릇처럼 항상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하였다.[18] 또한 군정 세력은 취약한 정통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제1공화국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포상이 없었던 점을 지적, 1962년 3월 1일8월 15일 독립운동가 2천여 명에 대한 포상을 대대적으로 단행한다.

[편집] 평가

[편집] 긍정적 평가

일각에서는 5·16은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에 의해 일어난 점, 남북간 대치 상태에서의 북한의 위협 등을 들어 5·16군사혁명 이라고 평가하기도 하며 이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진행중이다.[19][20]

[편집] 부정적 평가

4.19 정신은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상기시키고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정통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명확히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4.19 혁명을 민주 문화의 배양기로 보고 5.16 군사정변을 민주 문화와 상반되는 권력 유지를 위해 연속적으로 군부대를 동원하면서 대한민국 사회 전체를 사실상의 병영국가 체제로 만든 1인 장기독재의 길을 열은 사건으로 보는 비판이 있다.[21] 당시 군사정권은 4.19 혁명을 부정하여 4.19 의거라 칭하고 5.16을 혁명이라 하였다.[출처 필요]

일본 저술가 겸 사회운동가 정경모는 수녀원 피신을 두고 “도망한 지 5일째에 모습을 나타내어 학생들의 선혈로 얻어진 한국 사상 유일한 민주주의 정권을 너무도 간단히 박정희 앞에 내밀어 그것을 이양하는 서약서에 서명하였다”며 “피노체트에게 습격당해도 최후까지 저항하여 기관총을 쏘면서 죽어간 칠레살바도르 아옌데에 비해 그 말로가 너무도 교활해 한국인으로써 부끄럽다”[22]라며 총리 장면의 처신을 비판하기도 했다.

[편집] 기타

대통령 권한대행이자 내각 수반, 국무총리였던 허정(許政)은 'UN군 측의 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성공했고, 장면 내각의 총사퇴와 함께 혁명정부가 정권을 정식으로 인수했다.[23]'고 주장했다.

정변 직후 허정은 정부에 전화하였지만 연결되지 못했다. 허정에 의하면 UN군이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국에서 군사혁명이 성공할수 있을까 하는 안도감도 있었으나 군사혁명은 성공해 가고 있었다. 매그루더 UN군 사령관의 원대 복귀 호소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23] 정변 직후 허정장면 총리윤보선 대통령에게 연락하였으나 모두 연락이 불통이었다.

그 무렵 매그루더 사령관과 주한미국 대리대사가 허정을 찾아갔다. 그들의 말로는 군사혁명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혁명이 일어난 직후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시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23]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국헌 준수를 서약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만큼, 지금 병력 동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포기가 하닌가'하고 힐난까지 했다는 것이다.[23] 허정1963년 초의 야당 대통령 후보 단일화 경선에서 이 점을 문제삼아 윤보선을 공격하여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편집] 북한의 예측

북한은 5·16 군사정변 발생 이전부터 남한에서 군사정변이 발생할 것을 예측하고 상황을 예의 주시해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주재 중국 대사관이 정변 당일 작성한 <남조선 군사정변 정황>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김일 부수상이 대사관 측과 만나 김일은 김일성의 위임에 의해 5월 16일 오후 중국 측에 정변에 관한 정세를 설명하면서 "정변을 지지하는 성명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또 정변이 박정희와 진보적인 군인들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기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90%"라고 추정했다.

북한은 특히 정변 발생 직후, 정변 주도세력을 진보세력으로 보고 당일 지지성명까지 준비했지만 이틀 뒤인 5월 18일 조선로동당 중앙상임위원회 회의에“극심한 반동에 의한 정변이며, 정변 세력은 반동적인 친미 군인들”이라고 평가했다.[24][25]

이로 인해 북한은 당초 추진했던 경제개발계획인 <인민경제 향상을 위한 1차 7개년 계획>의 시작을 미루는 결정을 내린다. 당시 북한 당국이 중국 외교관에게 전한 회의내용에는 “우리는 경계를 강화하고 국방 강화에 힘을 집중해야 한다. 올해부터 1963년까지 인민경제계획의 발전을 늦추고 국방과 방어요새 강화에 집중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26] 5·16 군사정변 관련 보고서와 회의록은 한국의 북한대학원 대학과 미국의 우드로 윌슨 센터가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는 국제문서사업의 일환으로 입수돼 언론기관 등에 전달되었다.

[편집] 주석

  1. <<박정희, 한국의 탄생>> 253쪽, 조우석 지음, 살림출판사, 2009년 10월 9일
  2. 정대철 (1997년 9월 5일).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 초판, 동아일보사, 172~188쪽. ISBN 9788970901367
  3. 한영우, 《한국사 인물 열전》 (돌베개, 2003) 114페이지
  4.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사병이란 단어 대신 이들을 구별하여 부른다.
  5. 김진국, 《WWW.한국현대사.COM》 (민연, 2000) 129페이지
  6. 정대철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 (동아일보사, 1997) 214페이지
  7. 정대철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 (동아일보사, 1997) 215페이지
  8.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305페이지
  9. 김삼웅 《곡필로 본 해방 50년》 (한울, 1995) 112~113페이지
  10.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306페이지
  11. 한용원, 《한국의 군부정치》 (대왕사, 1993) 223페이지
  12. 김성진, 《한국정치 100년을 말한다:우리들이 꼭 알아야 할 한국 정치의 실상》 (두산동아, 1999) 211페이지
  13.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273페이지
  14. 정대철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 (동아일보사, 1997) 212
  15. 국가재건최고회의포고제6호 [시행 1961. 5.22] [국가재건최고회의포고 제6호, 1961. 5.22, 제정]
  16. 송건호 《송건호 전집:20 역사에서 배운다》(한길사, 1996) 295페이지
  17.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73801&sc=naver&kind=menu_code&keys=1
  18. 김희선 의원, 의성김씨 본관 찾다 실패 동아일보 2004-08-17일자
  19. 정인봉 '5·16 재평가' 논란
  20. JP 5·16쿠데타 정당성 강력 주장
  21. 박정희 5.16 쿠데타 우리에게 무엇인가
  22. 정경모, 찢겨진 산하 (기획출판 거름, 1986) 192페이지
  23.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289페이지
  24. 북한, 5·16군사정변 예측…당일 지지성명 준비했었다 동아일보 2009년 10월 16일
  25. 북한, 5·16 정변 '지지성명' 준비했었다...중국 외교문서 YTN 2009년 10월 16일
  26. ‘5·16 둘러싼 北의 잇단 오판’ 이 불량국가 불씨됐다 헤럴드경제 2009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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