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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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익

출생 1854년
조선 함경남도 북청
사망 1907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국적 대한제국 대한제국
경력 내장원경

이용익 (李容翊, 1854년 ~ 1907년 2월) 은 조선 말기, 대한제국의 정치인·관료·외교관이며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교의 설립자이다. 대한제국 당시 대표적인 친러파 관료이자, 근왕주의 개화파인사이자 왕실의 금괴 주조 사업을 주관하기도 했다.

민영익의 천거로 감역으로 발탁되어 임오군란 이후 고종왕비 민씨를 도운 이후 근왕 개화파의 지도자로 활동하다 친러파가 되었으며, 북청부사, 단천부사로 재직시 수탈행위를 하여 북청민란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정부의 요직에 있으면서 왕실재정을 확충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이는 등 왕실 위주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1903년 러시아조선 침략을 목적으로 압록강 어귀에 있는 용암포의 조차권을 요구하였을 때에 그는 정부에서 이를 승인하도록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1]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조선 환조대왕의 아들인 완풍대군(完豊大君)의 후손이다. 자는 공필(公弼), 호는 석현(石峴),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초병덕(楚秉悳)의 문인이다. 함경남도 출신.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고산현감을 지낸 병효(秉斅)의 아들로 함남 북청에서 출생하였다. 선대는 왕실과는 먼 방계로 그의 선조들은 대부분 무과 출신으로 양반신분에 속했지만 중앙정계의 문신관료에 비교하여 가세는 매우 한미하였다. 5세 때부터 14세 무렵 서당에서 공부했고, 15세 이후 성리학자인 초병덕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나 가세가 너무 가난하여 과거 시험에 응시할 형편이 되지 않았고, 20세 때 그는 고향을 떠나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보부상·물장수로 전전하다가 우연히 투자한 금광에서 많은 금맥을 발굴하여 부자가 되었다.

임오군란과 근왕파 관료 생활[편집]

1882년 임오군란 때 장호원에 피신한 명성황후고종과의 연락을 재빨리 하였다. 이때 민영익의 천거로 감역으로 발탁되었다. 임오군란으로 위기를 넘긴 것을 높이 산 고종의 신임을 얻어 벼슬이 승진, 단천 부사가 되었다.

1885년 북청부사, 1887년 영흥부사로 부임했다가 함경남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단천부사와 영흥부사로 재직 중 단천 및 영흥에서 사금을 채굴하여 이를 고종에게 진상, 왕의 신임을 크게 얻었다. 그러나 지방관 재직 중의 1888년 불법적인 수탈로 인해 북청 민란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 해 북청민란이 일어나자 그는 함경남도병마절도사에서 파면되고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2]

그러나 곧 석방되어 복직, 함경남도병마사를 거쳐 강계부사로 임명되었다. 그 뒤 1894년까지 다시 함경남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1896년 평안북도관찰사로 부임했으나 민란이 일어나 다시 유배되었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편집]

1901년 지계아문총재관(地契衙門總裁官)이 되어 각지의 지주들을 조사, 토지대장을 만들고 토지소유자에게 지계(토지 소유권 승인증서)를 발행하여 지계 등록 사업과 양전 사업을 주도하였다. 1902년 탁지부 대신으로 이 준·민영환·이상재와 개혁당을 조직했으며, 친러파의 지도자로서 일본의 침투를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1903년 러시아조선 침략을 목적으로 압록강 어귀에 있는 용암포의 조차권을 요구하였을 때에 그는 정부에서 이를 승인하도록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1] 그 후 용암포의 조차권을 러시아에 넘겨주도록 적극 주장하였으며, 내장원경이 되어 화폐를 남발하고 광산 채굴권·인삼·전매 등의 사업을 잘못 감독하여 독립협회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1903년 러일전쟁으로 치닫고 있을 때, 조선의 수상이었던 이용익은 각료들 대부분과 관리들이 그렇듯 열렬한 친러파로서 그때에 막 여순항에서 돌아와 일본의 이익에 대해 일련의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다.[1] 친러파와 친일파와의 갈등 속에서 그는 친러파를 대표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는 금괴 주조 사업에도 참여했었는데, 윤치호는 그를 부패한 인물로도 지목했다.[3] '고종황제 개인의 금고를 위해 가난한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금괴를 주조했던 이용익은 충신으로 여겨졌다.[3] 그런데 그는 일본인들을 증오했다. 그렇다고 그가 애국자였다고 할 수 있나? 사실인 즉 이용익 같은 인간들은 조선인들 입장에서는 일본인들 보다도 더 위험한 적이었다[3]'며 비판을 가했다.

을사 늑약 이후[편집]

1905년 보성학원 (고려대학교)을 세워 소학·중학·전문학교 과정을 두어 교육사업에 힘썼다. 이 해 체결된 을사조약을 반대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연금당하였다. 그 후 친일파 세력이 강해지면서 친러파인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일본의 세력이 한반도에 미치자 점차로 지위가 떨어져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1]하여 병사하였다. 일설에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김현토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한다.

사후[편집]

그의 부음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일본의 영향력을 내심 경계하던 왕실에 의해 충숙(忠肅)의 시호가 내려졌다. 사후 그는 일본의 세력이 강대해지면서 애국자의 전형으로 추모되었으나, 일각에서는 친러파라는 점과 부패 문제 등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평가[편집]

그는 친일파와 시종일관 대립한 점 때문에 일제 강점기 동안 그는 애국자로 널리 평가되었다. 1982년 9월에는 MBC 문화방송에서 총 26부작으로 그의 일대기를 다룬 월화드라마 이용익이 방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친일파와 비슷한 친러파로 지목하는 시각과 부패 행위에 대한 의혹도 존재하고 있다. 구한말의 개화파 정치인인 윤치호는 그를 이지용, 민영철 등과 함께 '악당'이라고 비판했다.[4]

윤치호는 그를 친일파와 같은 인물로 평가했다. 윤치호는 그를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인물의 한사람[5]으로 지목하여 비판하였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민영휘 씨가 자기가 설립한 휘문의숙에 10만 원 가량을 내놓기로 했다고 한다.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민씨가 도덕, 명성, 재력면에서 조선 최고라고 평했다. 이는 당치 않은 소리다. 민씨를 두고 도덕적이라고 평가하는 건, 아무리 극악무도한 방식으로 돈을 벌더라도 그 중 일부를 공익사업에 투자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면죄부가 된다 라고 조선 쳥년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5] 민영휘와 이용익, 전자는 청일전쟁, 후자는 러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인간들이다. 학교 하나를 후원한다고 해서, 아니 제 아무리 많은 학교를 후원한다 하더라도 이런 작자들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가 없다.[5]

가족[편집]

  • 증조부: 이수춘[6]
  • 할아버지: 이광집(李光集, 다른 이름은 이광휘(李光輝), 1783-1854)
  • 아버지: 이병효(李秉斅, 1817-1875, 字는 학신(學新))
    • 형 :
      • 조카 : 이윤재(李允在, 1860년 ~ ?)
  • 아들:
    • 손자: 이종호(李鍾浩, 1887년 - ?)

기타[편집]

친러파였던 그는 후일 이동휘로 하여금 러시아에 우호적인 입장을 갖도록[7] 영향을 주었다.

주석[편집]

  1. 릴리어스 호톤 언더우드, 《조선 견문록》 (김철 옮김, 도서출판 이숲, 2008) 283페이지
  2. 이용익:Daum
  3. 윤치호, 윤치호일기:1916~1943 (김상태 편역, 역사비평사, 2001) 153페이지
  4. 윤치호, 윤치호일기:1916~1943 (김상태 편역, 역사비평사, 2001) 199페이지
  5. 윤치호, 윤치호일기:1916~1943 (김상태 편역, 역사비평사, 2001) 231페이지
  6. 사후 사복시정에 추증되었다.
  7. 서정민, 《이동휘와 기독교》 (연세대학교출판부, 2007) 33페이지

관련 항목[편집]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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