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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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졸업식. 학사모는 대학 수료의 상징이다

대학(大學)또는 대학교교육의 단계상 고등 교육기관에 속하며 전문적인 교육과 연구를 함께 하는 기관이다. 교육기관을 초등·중등·고등으로 나눠보았을 때 최고 교육기관이 된다. 국가제도에 따라 다르나 일반적으로 모든 과정을 수료한 경우 학위수료장을 수여하여 사회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학부 과정과 대학원 과정을 포함하는 용어이나 좁은 의미로는 학부 과정만을 이야기한다. 또한 4 ~ 6년제 종합대학, 2 ~ 3년제 전문대학, 기능대학, 교육대학 등을 모두 이르는 말이나 종합대학과 구별하는 전문대학을 대학으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대학의 역사[편집]

대학은 중국 주나라의 국학이나 플라톤의 아카데미아(B.C. 387년)를 기원으로 하기도 하나, 지금과 비슷한 형태의 대학은 중세 즈음에 와서야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한다.

현재 남아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대학은, 여러 대학을 세우고 후원했던 파티마 알피흐리라는 여성이 859년모로코 페스에 최초로 세운 알카라위인 대학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1]

유럽 최초의 대학[편집]

중세 중기의 십자군 원정을 통해 유럽아랍 문화와 접하게 되자 그 곳에 전수되었던 철학의학, 법학 지식들이 유럽으로 다시 전래된다. 또한 아랍인들이 직접 발전시킨 지식들까지 대량으로 접하게 되면서 지식인들의 지적 탐구심이 높아졌고, 자연스럽게 새로운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려는 학생교사의 집단이 나타나게 되었다. 학생과 교사의 집단은 스스로 각기 조합을 결성하게 되는데 대학은 이 조합의 결합으로 형성된 것이다.

중세의 대학은 여러가지 특권을 지니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잦은 부담을 면제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대학은 독립된 사회로 인정하고 병역, 복역, 세금 등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또한 대학 관계자의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학내에서 별도의 재판권을 인정받는 등 대학 내의 치외법권이 인정되었다. 이 외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며 자유여행권, 총학장 자치선출권 등이 인정되었다. 만약 외부에서 대학 사회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 지역사회 물품의 불매운동이나 대학을 해당 지역에서 이전하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여주면서 그 권리를 지켜나갈 수 있었다. 중세의 대학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볼로냐 대학(1088년) : 볼로냐 대학은 현대적 의미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며, 법학으로 유명했던 대학이다. 볼로냐 대학이 위치한 볼로냐이탈리아의 북부 중앙에 위치하여 법에 강한 로마의 전통을 이어오던 곳이었다. 도시의 세력이 성장하면서 교황황제의 세력과 부딪치게 되었고 이들 도시들은 법률에 대한 탐구를 행하면서 볼로냐 대학이 법학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 파리 대학(1109년) : 파리 대학은 신학철학으로 유명했던 대학이다. 파리 대학이 위치한 파리에는 노틀담 사원이 있었는데, 이곳은 일찍이 많은 신학자가 배출된 학문의 중심지였다. 이곳에 생겨난 파리 대학은 자연스럽게 신학과 철학으로 유명하게 된다.
  • 살레르노 대학(1231년) : 살레르노 대학은 이탈리아 남부에 위치하였던 대학이다. 이곳은 동부 그리스와 인접하여 요양지로 유명했던 곳인데, 그런 이유로 건강과 의학에 관심이 많아 살레르노 대학에서는 의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밖에 영국옥스퍼드대학(1167년)과 케임브리지대학(1209년)도 초기 대학 가운데 전형적 형태로 그 역사와 전통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미국에서 하버드대학(1636년)을 비롯한 초기의 대학은 영국대학의 모형을 본받아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양한 대학의 발전[편집]

최초의 대학들이 유럽에 설립된 뒤로 많은 대학들이 설립되어 많은 영역에서 다양한 연구와 학문의 발전이 뒤따르게 되었다. 다음은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독일영국, 미국의 대학에 관한 설명이다.

  • 베를린 대학(1809년) : 베를린 훔볼트 대학(Humboldt-Universität zu Berlin)은 1806년에 설립되었으며 근대적인 대학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는 대학이다. 베를린 대학에서 추구한 자유와 학문 연구의 이념은 뒤에 세워지는 많은 대학들의 중추적인 이념으로 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다. 베를린 대학은 독일(당시 프로이센) 빌헬름 폰 훔볼트 종무·교육국장관의 제의를 받아들여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칙령으로 설립되었으며 대학 설립을 맡은 훔볼트는 '정치 권력에 제약받지 않는 교수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를 설립 이념으로 삼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동베를린에 속하였으며 1947년1948년 초에 동독의 통제와 학생운동의 탄압을 피해 일부 교수와 학생이 서베를린으로 넘어와 베를린 자유대학을 설립하게 된다.
  • 영국의 대학 : 영국에서 유명한 대학은 옥스퍼드 대학케임브리지 대학이다. 이들 대학은 예전부터 인격교육을 중요시하는 귀족 중심의 학풍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로써 신사도의 교육과 지도자 양성 등의 목적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에 런던 대학교(1836년)가 설립되면서 많은 대학들이 평민들의 높이에 맞춰지게 되었으며 교수-학습의 측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아직도 영국의 대학은 신사 교육, 지도자 양성 등을 중요시하는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縦肯走 企俳[편집]

縦肯走企俳精 薦厩爽税 厩亜亜 縦肯走拭辞 走壕端薦研 溌験拝 鯉旋引 沙厩税 走縦端域研 縦肯切税 切薦人 塘鐸肯聖 嘘整獣徹 是背辞 竺験廃 企俳聖 戚献陥.

置段税 縦肯走 企俳精 什凪昔戚 焼五軒朝 企建税 凪欠 軒原拭 竺験廃 至 原牽坪什 企俳(1551鰍 竺験)戚陥. 戚須拭亀 焼五軒朝 企建拭澗 紬繋搾焼税 失 塘原什 焼訂蟹什 企俳, 亀耕艦朝 因鉢厩税 至塘 亀講壱 企俳 去税 縦肯走 企俳戚 赤陥. 慎厩昔亀税 走壕拭辞 走縦昔級聖 庁慎督稽 畷脊獣徹奄 是背 5鯵税 企俳聖 竺験馬心陥(1912). 虞硲牽 企俳, 硝虞馬郊球 企俳, 超朕展 企俳, 原球虞什 企俳, 砂今戚 企俳戚 益依戚陥. 析沙亀 切重級税 縦肯走拭 企俳聖 竺験馬心陥. 繕識引 企幻拭澗 井失薦厩企俳展戚今戚 薦厩企俳聖, 幻爽厩拭澗 闇厩企俳聖 竺験馬心陥.

대한민국 대학의 역사[편집]

한국의 고등 교육 기관은 고구려태학, 신라국학, 고려국자감이 있었다. 조선은 국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성균관, 사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서원이 있었다. 성균관은 이후 1946년 재개교한 성균관대학교(당시 이름은 명륜전문학교)에 의해 계승되었다. 근대적 의미의 대학은 1924년 일제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이다. 까닭은 조선 말기부터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일어났지만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5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조선에는 경성제국대학 외에는 단 한 개의 민립 또는 사립대학의 설립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제국주의로 무장된 지배계층의 일본은 민중과 식민지 피억압 민족에게는 고등교육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차별의식에서 식민지 조선에 근대 대학을 설립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민립대학설립운동1920년 6월 이상재, 한규설, 윤치호 등 100명이 조선교육회설립발기회를 개최하면서 시작되었다. 모임에 참가한 인사들은 조선에 대학이 없음을 개탄하고 조속한 시일 내 민립대학을 설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듬해인 1922년 1월 이상재, 조만식, 윤치호 등이 모여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이어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3일간에 걸친 총회를 개최하였다. 총회에서 한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데 가장 선결 문제가 교육에 있으며, 문화의 발달과 생활의 양상이 고등교육 기관인 대학에 있음을 선언하는 '민립대학 발기 취지서'를 채택하고 대학 설립 계획서를 확정하였다.

자료에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국립대학으로는 서울대학교[2], 여자대학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사립대학으로는 숭실대학교[3]연세대학교 등이 대한민국 근대적 대학교의 시초이다. 한편 연혁을 높여 놓은 여러 대학들이 대학 형태가 아닌 성경학교나 강원 (강원도와는 별개), 강습소, 학당, 실업학교, 중등학교의 연혁까지 포함하여 집어넣고 있지만 거의가 1945년에 광복된 후 정상적인 학사운영이 이뤄졌다. 이같은 사실은 광복 후 당시 문교부에 등록된 한국 내 《대학설립인가의 현황[4]》에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대학 50년사[5]를 보면 대학설립의 비사를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는데 해방후 새롭게 정립한 '민족정기'로 1946년 8월 22일서울대학교의 '개교일'로 잡아 지금까지 기념해 오고 있듯이 설립 인가서를 기준으로 2년제 전문대학 형식이던 이화여자전문대가 신청일자가 1946년 6월 24일로 기록된 제1호 인가서를, 연희전문대1946년 7월 31일부로 기록된 제2호 인가서를 미군정청 학무국으로부터 받았고 보성전문대는 신청일자가 1946년 8월 5일부로 기록된 제3호 인가서를 받아 8월 15일, 고려대학교라는 종합대학 승격의 법률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역시 전문대학의 형태로 운영되던 종로구 혜화동혜화전문(惠化專門)이 1946년 9월 20일, 동국대로 설립인가를 받았고 종로구 명륜동명륜전문(明倫專門)은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로 설립인가를 받았는데, 종로구 낙원동단국대1947년 11월 1일광복 최초 4년제 대학으로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 1948년에는 숙명여대, 중앙대, 한양대, 국민대, 1949년에는 건국대, 홍익대가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1949년에 가인가를 받았던 경희대1952년에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고 일제때 평양에 있다가 폐교되었던 숭실대1954년 4월 15일, 당시 문교부로부터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 (한국대학신문광복이후 정규대학 설립인가 현황(1946년~1954년) 참조)[5][6][7]

6.25전쟁 중이던 1952년에는 미국 하와이 교포 이주 50주년 기념사업으로 뒤떨어진 대한민국의 공업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 박사의 발의와 하와이 한인기독학원(Korea Christian Institute) 처분 대금과, 교포들 및 국내 유지의 성금, 국고 보조를 바탕으로 인천시로부터 교지를 기증받아, 1954년 4월 광복 후 최초의 국립 대학으로서 인하공과대학이 개교를 하였다.

대학입학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광복1954년 한해만 실시한 대학입학연합고사[8]를 제외하고 대학 단독으로 출제한 입학고사(1945~1953, 1955~1961, 1964~1968)를 시작으로 대학입학자격국가고사(1962~1963)를 거쳐 1969년부터 실시하여 온 대학입학을 위한 대학입학예비고사(大學入學豫備考査)[9]1981년까지 실시하였고 1982년부터‘대학입학학력고사[10]’로 바뀌었다. 대학에서 결정하는 입학사정제를 포함한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수시(隨時)에서 원하는 자격대로 지원하여 합격여부로 대학입학을 결정하지만 1994년부터 실시되고 있는 대학수학능력시험[11]에서 정시(定時)[12]로 지원하는 것을 원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치러 수능점수에 따라 점수에 맞게 지원하여 합격여부로 대학입학을 결정하고 있다.

주석[편집]

  1. 내셔널지오그래픽 편, 《1001가지 발명 -이슬람이 남긴 위대한 유산-》, 18쪽.
  2. 서울대학교 관련 기록
  3. 숭실대학교 숭실史
  4. 한국대학신문, "미 군정기 대학 설립 봇물 (한국어)", 《한국대학신문》, 2004년 1월 15일 작성. 2009년 2월 25일 확인.
  5. 한국대학신문, "미 군정기 대학 설립 봇물 (한국어)", 《한국대학신문》, 2004년 1월 15일 작성. 2010년 3월 1일 확인.
  6. 곽래건 기자, ""1953년 戰禍 속 졸업생에게" 김창숙 선생 친필 훈사 발견 (한국어)", 《조선일보》, 2011년 6월 25일 작성. 2011년 6월 25일 확인.
  7. 손효주 기자, "成大 창립자 김창숙 선생의 1953년 졸업훈사 공개 (한국어)", 《동아일보》, 2011년 6월 25일 작성. 2011년 6월 25일 확인.
  8. 줄여서 연합고사
  9. 줄여서 예비고사
  10. 줄여서 학력고사
  11. 줄여서 수능
  12. 이 정시는 "가"군, "나"군, "다"군 3개 군으로 나뉜다. (과거에는 "라"군도 있었다.)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