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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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표: 북위 37° 30′ 14.8″ 동경 126° 57′ 25″ / 북위 37.504111° 동경 126.95694° / 37.504111; 126.95694

중앙대학교
Chung-Ang University
Chung-Ang University logo.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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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의에 죽고 참에 살자!
설립 1918년
종류 사립대학교
총장 이용구
국가 대한민국 대한민국
위치 서울캠퍼스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로 84
안성캠퍼스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서동대로 4726
규모 3캠퍼스, 12대학, 17대학원
학생 수 학부: 32,017(2010)
대학원: 6,413(2009)
상징 느릅나무, 청룡상
학교법인 중앙대학교
웹 사이트 http://www.cau.ac.kr/

중앙대학교(中央大學校, Chung-Ang University)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경기도 안성시 대덕면에 있는 대한민국의 사립대학교이다. 1918년 4월 유치원 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서울 종로구에 있는 중앙교회에 중앙유치원을 설립하였다. 1932년 임영신이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하여 1940년 중앙보육학교에 부속유치원을 개원하였다. 1953년 2월 종합대학으로 개편하여 문리대학·법정대학·경상대학·약학대학 등 4개 단과대학과 대학원을 설치하였다. 1991년 법인명을 중앙문화학원에서 중앙대학교로 개칭하였다. 2008년 법인이 두산그룹에 인수되어 박용성 회장이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2009년 3월 법학전문대학원·의학전문대학원을 개원하였다. 서울캠퍼스와 안성캠퍼스는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통합 인가를 받아 단일 캠퍼스로 운영되고 있다. 평동(경교장길)의 평동캠퍼스와 동숭동(대학로)의 공연영상예술원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이 사용하고 있다. 현재 중앙대에는 2014년 기준 1개 일반대학원, 5개 전문대학원, 12개 특수대학원과 12개 단과대학 49개 학부(과)가 설치되어 있다. 약칭으로 중앙대 또는 중대라고 불린다.

위치[편집]

  • 서울캠퍼스

서울캠퍼스는 초대 총장인 임영신 박사가 부지를 구입한 흑석동에 위치해 있다. 2011년 현재, 서울캠퍼스는 389,228㎡의 부지에 25개 건물이 위치해 있다. 서울캠퍼스는 경영경제대학,사회과학대학,공과대학,자연과학대학,의과대학,약학대학,적십자간호대학이 위치해 있으며, 서울캠퍼스의 주변에는 중문 근처의 부속유치원과 정문 근처에 위치한 중앙대학교 부속병원을 비롯하여 흑석동에 있는 부속초등학교과 부속중학교가 있다. 또한 강남구 도곡동에는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가 있으며, 종로구 동숭동에는 공연영상예술원이 위치해 있다.

  • 안성캠퍼스

서울캠퍼스에 있던 예술대학, 농과대학(現 생명공학대학)등이 이전된 후 만들어진 이원화 캠퍼스로서 1980년 건립되었다. 안성캠퍼스는 962,669㎡의 부지에 40여 개의 건물 및 기타장소가 있다. 2014년 현재 안성캠퍼스에는 예술대학 공연영상창작학부의 일부 전공을 제외한 전 예술대 학부 학과가 위치해 있고, 생명공학대학과 체육대학이 위치하고 있다.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에 위치해 있다.

  • 평동캠퍼스

평동캠퍼스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교장길 8에 위치해 있다. 2013년 까지는 적십자간호대학이 사용하였고 2014년 이후로는 예술대학이 사용하고 있다. [1]

연혁[편집]

일제강점기[편집]

중앙대학교의 원류는 1918년 4월 중앙유치원의 설립이다.[2] 이후 중앙유치원의 "교육활동을 통한 실력양성으로 독립을 얻자"는 유치원 교육운동이 활발해지면서 1920년대에 여러 유치원이 만들어졌다. 중앙유치원에 사범과를 설치하여 유치원교사를 양성하는 등 전문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1922년 중앙유치원의 사범과는 중앙보육학교로 승격되었는데, 법령상으로는 전문학교가 아닌 각종학교였지만, 사회통념상으로는 전문학교로 여겨졌다.[3] 중앙보육학교의 운영은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1932년에는 개인집으로 옮기고 학생수도 10명에 그쳤다. 이러한 중앙보육학교를 1933년임영신 선생이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하였다. 임영신 선생은 1932년 미국에서 귀국하여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교육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위해 흑석동에 학교 부지를 샀고, 교장에 취임하였다.[4]

흑석동에 교지를 마련했지만, 교육장이 마땅치 않아 피어선(Pierson) 성경학교를 빌어서 교육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재정적 한계와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 운영상의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학교 발전을 위해 미국에 건너간 임영신 선생은 모금활동을 통해 중앙보육학교를 후원할 파이퍼재단을 설립하고 귀국하였다. 그리하여 1938년 5월, 흑석동에 영신관을 건립하고 학교를 이전하였다.[5]

이즈음 일본은 1937년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41년에는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더불어 1940년동아일보조선일보를 폐간하고, 1943년에는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령을 공포하였다. 중앙보육학교는 교장인 임영신 선생이 미국에서 유학한 점과 기독교 신자라는 점에서 탄압이 더욱 심하였다. 제2차대전 말기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중앙보육학교는 결국 1944년에는 신입생을 모집할 수 없었고, 폐쇄를 당하게 되었다.[5]

해방과 한국전쟁[편집]

1945년 8월에 해방이 되고, 임영신 선생은 같은 해 9월 28일에 중앙보육학교의 문을 열었고, “의에 죽고 참에 살자”라는 교훈과 교가를 제정하였다. 그 후 신생조국을 건설해 갈 인재를 양성하고 그들의 정신적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같은 해 10월 1일에 중앙보육학교를 중앙여자전문학교로 개편하였다. 또 1946년 11월에는 재단법인 중앙문화학원을 설립하여 학교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다시 1년 뒤인 1947년 4월에는 중앙여자대학으로 개편하고 다시 1948년 5월에는 남녀공학의 중앙대학으로 학칙을 변경하였다.[6]

그 후 1950년 5월에 제 1회 학사학위수여식을 가졌으나, 한국전쟁으로 휴교하였고, 9월 28일의 서울 수복 후에 학생의 재등록을 받다가 1.4후퇴로 학교의 모든 서류를 부산으로 옮기고 그곳에 중앙대학 임시사무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1951년 4월에는 부산 송도의 전시연합대학이 아닌 중앙대학의 단독개강을 진행하였고, 이어서 이리서울에도 분교를 설치하여 강의를 시작하였다.[6] 이러한 노력으로 1951년부터 1953년까지 2~4회 의 학사학위수여식을 부산에서 가질 수 있었다.

종합대학으로 승격 및 발전[편집]

1953년 2월, 중앙대학은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다. 그리하여 문리과대학, 법정대학, 경상대학, 약학대학 등 4개 대학 9개 학과 및 대학원을 설치하고, 총장에는 임영신 박사가 취임하였다. 그 후, 휴전으로 8월에 교사를 부산에서 흑석동으로 옮겼으나, 미8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교사에서 강의를 진행하였다. 1954년 4월, 미군으로부터 교사를 인수하였다.[7]

그 뒤 1955년부터 1959년까지 학과를 증설하여 4개 대학 19개 학과 정원 2,850명 규모로 대학이 성장하였다. 이러한 학과의 증설과 학생의 증가에 부응해 1956년에 파이퍼홀을 준공하였고, 1959년에는 중앙도서관도 준공하여 개관하였다. 동시에 연구활동을 강화하기 위하여 국제문화연구소 등을 두었고, 또 교육의 체계화를 위해서 교과과정을 끊임없이 보완·수정하였으며, 교육의 계열화를 위해서 자매학교로서 낙양중·공업고등학교, 영신여자중학교, 영신중학교, 부속유치원 등을 두고 체계적인 교육을 할 수 있도록 교육사업도 확장하였다.[7]

1960년3.15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4.19가 일어나 중앙대학교 학생들도 이에 참가하였고, 1961년에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는 등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61년에 제 2대 총장 임성희 박사가 취임하였으나, 1963년 5월 다시 임영신 박사가 3대 총장에 취임하였다.[8]

1965년 1월에는 문리과대학을 분리하여 문과대학, 이공대학, 사범대학으로 개편하고 법정대학, 경상대학, 약학대학을 합하여 6개 대학으로 증설했다. 또한 자매 중·고교를 사범대학 부속중·고교로 개칭하고 부속국민학교를 설치하여 부속유치원과 함께 한 재단 아래에서 같은 교육이념 아래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일관된 교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67년 2월에는 사회개발대학원을 설치하였고, 1968년에는 문과대학, 이공대학, 사범대학, 법과대학, 정경대학, 경영대학, 농과대학, 약학대학 등 8개 단과대학으로 증설 개편하였으며, 1971년 12월에는 의과대학을 설치하고 대학부속병원으로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성심병원을 흡수함으로써 내실화를 기하였다.[8]

이러한 대학조직의 확장과 더불어 여건 조성도 함께 진행되었다. 1961년 7월에는 진선관과 대학극장이 준공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사회과학관을 준공하였다. 1968년 개교 50주년을 맞아 당시의 문서, 필적 등을 100년 후에까지 안전하게 보관·전달될 수 있는 청룡상을 건립하였다. 이때 승당관도 건립하였고, 다음 해인 1969년 12월에 봅스트홀을 준공하여 교육의 내실화에 기여하였다.[8]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임영신 박사는 고희를 넘기면서 총장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 체력이 되지 않았다. 이에 1972년임철순 박사가 제 4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때에는 국제교류가 점점 빈번해지고 사회도 다양화 되어가고 있어서 이러한 시대환경에 부응할 수 있도록 대학을 발전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따라서 기초학문의 발전 없이 응용학문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이공대학을 분리하여 공과대학을 설치하고 문과대학에 자연과학의 기초분야를 합쳐서 문리과대학을 두게 하였다. 예술분야를 위해서 1972년 6월에 기존의 학교법인인 서라벌예술학원이 운영하던 서라벌예술대학을 합병하였으며, 1974년에는 이를 예술대학으로 개편하였다. 또 2부 대학을 1978년에 병설하였고, 1979년 1월에는 국제경영대학원과 교육대학원을 설치하였다.[9] 대학 구조 확충에 따른 시설물의 확장도 진행되었다. 1972년 10월에 진선관을 증축하여 서라벌홀을 준공하였고, 1974년에는 의과대학 교사인 자연관을 준공하였다. 또 1976년 12월에는 학생회관을 준공했으며, 1978년 6월에는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의과대학 부속성심병원의 신관을 준공하였다.[9] 1977년 2월에는 중앙대학교의 설립자이자 많은 발전을 이룩한 승당 임영신 박사가 서거하였다.

안성 캠퍼스 건립[편집]

1980년 5월, 임철순 총장의 후임으로 문리대 철학과 교수였던 이석희 박사가 제 5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11월엔 신문방송대학원을 설치하였으며, 12월에는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별관을 준공하였다.[10]

이처럼 서울지역의 학교시설을 계속 확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안성의 교육기구 확충에 힘을 기울였다. 1980년 3월에는 제 2캠퍼스 건립을 시작하여 서울캠퍼스에 위치해 있던 예술대학과 농과대학(現 생명공학대학)을 안성캠퍼스로 옮기고 제1차 교사동과 제2차 기숙사 및 제1차 학생회관을 준공하였다.[9] 1981년 10월, 안성교사에 외국어대학, 사회과학대학 및 가정대학 등 3개 대학을 증설하였다. 1982년 3월부터는 서울에 있는 교육장을 제1캠퍼스로 안성에 있는 교육장을 제2캠퍼스로 명명하였다. 1982년 10월에는 예술대학에 있는 음악학과를 음악대학으로 확대 발전시켰고, 1983년 9월에는 농과대학을 산업대학으로 명칭 변경하고, 건설대학원도 두었다. 1984년 10월 안성에 있는 제2캠퍼스에 건설대학을 설치하여 제2캠퍼스에 7대 단과대학의 규모를 가지게 하였다.[10] 이 후 1998년에 체육대학을 증설하고 2001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국악대학과 국악교육대학원을 증설하였다.

이러한 제2캠퍼스의 기구개편과 대학증설에 따라 교육시설도 속속 확장하였다. 1980년 12월 안성교사에 제2차 교사동을 준공했고, 1981년에는 대운동장과 제2차 학생회관을 준공하였다. 이어 1982년에는 교수연구동을 비롯하여 농과대학 실험동과 예술대학 건물을 준공하였다. 1983년에는 음악대학 강의동 및 강당동, 야외 수영실습장, 체육관을 준공하였다. 1984년에는 음악대학 증축건물과 제3차 교사동을 준공하였으며, 1989년에 중앙도서관을, 1999년에는 수림체육관을 준공하여 현대적 캠퍼스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10]

제2캠퍼스에 대한 많은 시설투자는 학교재정에 무리를 가져와 재단의 부채를 가중시킨데다 학교법인 산하 사업체의 부실경영으로 대학운영에 전반적인 문제점을 야기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5년 3월, 문병집 총장이 6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문병집 총장은 대학운영의 합리화를 기하기 위하여 운영체제개편에 착수하였다. 기획업무를 비롯, 예산 및 재무행정체제를 개편하고 대학운영에 관한 각종 규정을 정비하여 행정체계의 제도화와 합리화를 위한 작업을 추진하는 한편, 교학담당 부총장제와 사무담당 부총장제를 도입하고 취업지도과를 신설하였으며 중앙문화연구원과 의료원의 운영체제를 개편하였다. 그리고 폐과된 문과대학의 불어불문학과와 일어일문학과를 복과시키고 산업정보학과를 신설하였으며, 제2캠퍼스에 현대적인 중앙도서관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누적된 학교재단의 부채는 재단의 존립을 어렵게 하였으며 대학의 운영에도 많은 어려움을 가져왔다.[10]

김희수 이사장의 취임과 새로운 전기 마련[편집]

대학을 경영하는 법인의 재정적 난관은 극복되지 못한 채, 1987년에 이르러서는 학교 법인과 학교법인 산하 기업체의 부채규모가 700억원에 달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11] 법인의 이러한 재정적 어려움은 사실로 나타나 법인은 이 재정적 위기를 극복할 능력을 상실하였고, 대학구성원들인 학생, 교직원, 동문들도 구교의 방안인 부채변제의 방안을 제시할 수가 없었다. 다시 국내의 유수한 기업인들에게 학교법인의 경영을 맡아 줄 것을 교섭하기도 하였으나, 이 막대한 부채액과 이로 인하여 일어날 수 있는 기업 내의 반발 등을 고려하여 아무도 나서지를 못하였다.

이때에 재일교포 실업가인 김희수 박사가 학교법인을 책임지기로 하고 새로운 이사진을 구성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경남 창원출신으로 13세이던 1937년에 일본에 맨손으로 건너가서 東京電氣大를 졸업하고 일본굴지의 기업인『金井』을 이룩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일제의 민족차별 환경하에서 공부하였고, 기업을 이룩하고 발전시키면서 많은 민족적 비애를 경험하였다. 동시에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애국심을 불태워오다 민족의 영원한 독립은 교육을 통하여 양성한 인재들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해 일본에서도 교육기관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본국에서 본격적으로 고등교육사업을 책임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재일교포 실업가로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동안 재일교포로서 국내에 기업을 창업하여 성공한 사례는 있으나, 교육사업에 참여한 것은 첫 사례가 된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金熙秀 박사의 법인 이사장 취임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김희수 이사장은 학교경영의 책임을 짐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혼란을 사전에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우선 법인이 교직원, 학생, 동문은 물론 국내의 유수한 기업인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부채를 지고 있다는 점도 그렇고, 한국사회의 일반적 관행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空手來 空手去』라는 인생철학을 갖고 있었다. 기업을 성공적으로 이룩해 모은 재산은 민족을 위해 보람 있게 사용하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 일 가운데 교육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바로 국가와 민족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일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학교법인의 운용책임을 맡은 것이었다. 그는 이사장에 취임하자마자 즉시 법인이 갖고 있었던 모든 부채를 청산하였으며, 새로운 총장에 李在澈 박사를 영입하여 학교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한편 으로는 제1캠퍼스에는 교수연구실과 법과대학건물을 증축 또는 신축하였고, 제2캠퍼스에는 도서관을 완공하였으며, 기숙사와 학생회관의 건설을 추진하여 새로운 발전의 활력을 불어넣어 갔다.

동시에 1989년부터는 문리과대학을 문과, 이과대학으로 분리시키고, 신문방송학과에서 광고·홍보분야를 분리하여 광고홍보학과를 설치하였다. 또 제2캠퍼스에는 노어학과와 생물공학과를 설치하였으며, 행정대학원과 산업기술경영대학원을 설치하는 교세의 확장을 착실히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다.[11]

교육철학 실현을 위한 제 포석[편집]

사회의 민주화운동은 대학 내에서도 전시대의 유물인 권위주의가 상당히 사라지게 하였고, 교수협의회, 대학노동조합의 설립 등 구성원들의 다양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게 하는 등 긍정적 토대도 제공하였다.[12]

그러나 이 다양한 의견이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 혹은 집단 이기주의적 발상에서 출발된 경우도 있어 대학의 발전을 위한 진정한 의견으로 수렴하기에는 다소 미흡한 측면이 있어서 대학에서 장기적인 발전방향을 제시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재철 총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퇴임하였고, 1989년 2월에 대학역사상 처음으로 교직원들의 투표과정을 거쳐서 하경근 박사가 제8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이때 직원들의 근무조건을 개선하고자 주 5일근무제를 도입하였고, 우수한 인재를 유치하려는 목적 아래 신입생을 전후기로 분할하여 모집하도록 하였다. 한편 제1캠퍼스와 제2캠퍼스의 균형발전을 위하여 제2캠퍼스에 교무처와 학생처, 그리고 총무처를 두었고, 어학원과 국제협력부를 통합하여 국제교육처를 신설하였다.

1991년 2월, 학교법인의 명칭을『학교법인 중앙문화학원』에서『학교법인 중앙대학교』로 변경하였고, 제1캠퍼스에는 슈퍼컴퓨터를 도입하여 전산센터를 건설하였고, 법과대학과 경영대학 강의동을 신축하였으며, 대학원 건물도 신축하였다. 그리고 제2캠퍼스에는 생활관과 건설대학, 산업대학, 교수숙소 등을 추가로 신축하여 교육여건을 개선하였다.

그러나 1991년 10월 교육부의 증원·증과 과정에서 정보산업대학원을 신설하였음에도 불구하고『공과대학의 교육여건이 타 대학과 비교하여 하위급』으로 평가한 결과와 관련하여 학내소요가 크게 일어났다. 이에 1992년 3월 각 분야별 전공교수를 중심으로『대학발전계획수립전문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장단기 대학발전계획 수립에 착수하였으며, 4월에는 학내 구성집단별 대표들이 모여『대학발전공동협의회』를 결성하고 법인과 총동창회의 회장단을 참여시킨 가운데 대학의 안정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였다.

한편 법인은 이사회를 통해 학내사태의 원만한 수습을 기하고자 1992년 6월, 김민하 박사를 총장직무대행에 임명하고 하경근 총장의 잔여 임기동안 총장직을 대행토록 하였다. 김민하 총장직무대행은 취임즉시『중앙가족에게 드리는 호소문』을 통하여 전중앙가족의 상호신뢰 회복을 통해 대학의 안정과 발전의 기틀을 다지자는 호소와 함께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제시하였으며, 대학발전공동협의회와 더불어 문제를 하나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그 가운데 대학은 차츰 안정과 질서를 회복해 갔으며, 특히 대학발전공동협의회 참가주체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노력으로 1992년 10월, 잠실종합운동장에서 2만여 중앙가족이 운집한 가운데『’92축전 범중앙인한마당』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중앙인의 단합된 모습과 발전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하였다. 더불어 교육시설 확충사업도 지속되어 예술대학 증축, 의과대학 부속필동병원 증축이 이루어졌고 이과대학 건물 신축이 추진되었다. 1993년 2월에는 교수, 직원, 학생 등 대학내 구성원들의 총장후보 선출방식에 대한 의견수렴을 통해『총장후보정책발표회』와 교직원들의 총장후보 선거과정을 거쳐 金玟河 박사가 제9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金玟河 총장은 개교이래 최대 위기로까지 불리웠던 학내 분규상황을 원만히 극복하는 역량을 과시함과 동시에 중앙의 오랜 전통으로 축적된 중앙가족의 지혜와 역량을 바탕으로『민족대학』 『민주대학』 『선진대학』 『건강하고 새로운 대학문화의 창조』라는 미래지향적인 대학의 4대 육성지표를 제시하고 이의 실천을 선언하였다. 1994년 11월 의약품 및 식품관련분야 전문인력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의약식품관리 대학원을 설립하였고, 1995년 3월에는 이과대학 건물인 수림과학관을 준공하였고, 4월에는 지하 1층 지상 6층 150여명 수용규모의 제1캠퍼스 여학생기숙사를 완공하였다. 또한 8월에는 공학계열의 대외 경쟁력 확보를 위하여 현 봅스트홀을 증축하였으며, 12월에는 전산센터를 증축하였다.

1995년 10월에 물리·화·생물·수학과를 자연과학부로, 기계공·기계설계학과를 기계공학부로, 전기공·전자공·제어계측공학과를 전기전자제어공학부로, 경영대학의 경영·무역·회계학과를 경영학부로, 사회과학대학의 경영·무역·회계학과를 상경학부로 하는 학부제를 단행하였으며, 이과대학을 자연과학대학으로, 산업기술경영대학원을 산업경영대학원으로 대학과 대학원의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예술대학원도 신설하였다. 1996년 1월에 제2캠퍼스의 상징인 교문을 신축하였고, 10월에는 제1캠퍼스 학생복지관과 제2캠퍼스 본관을 신축하였고, 1996년 10월에는 약학과와 위생제약학과를 약학부로, 의예과와 의학과를 의학부로, 토목공학과와 도시공학과를 지구환경시스템공학부로 학과 통합을 하였으며, 교육부의 대학원 입학정원제의 변경방침에 따라 입학 총정원제에서 연도별 입학정원제로의 변경과 함께 의약식품관리대학원을 의약식품대학원으로 대학원의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국제전문인력양성 국책대학원으로 국제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97년 2월에 제10대 총장으로 李鍾? 교수가 취임하였다. 이 총장은 대학이 본래 가지고 있는 교육과 연구하는 기관으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자는『신르네상스운동』을 전개 하였다.

1998년 3월 제2캠퍼스에 사회체육교육을 목표로 한 체육과학대학을 신설하였으며, 가정대학을 생활과학대학으로, 10월에 산업대학을 산업과학대학으로 대학의 명칭을 변경하였고, 1999년 11월 정부의『두뇌한국21(Brain Korea 21)사업』계획에 따라 첨단영상전문대학원을 신설하여 이 분야의 특성화에 기여함으로써 교육부에서 시행하는『교육개혁추진 우수대학 재정지원 사업』에 5년 연속 최우수대학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또한 대학의 교육과 연구환경 개선을 위하여 부속고등학교와 부속유치원을 이전·개교 하였으며, 본관의 정보통신문화관의 개관과 제2캠퍼스 대학교회·오수종합처리장을 신축·준공하였고, 문화예술의 요람지인 중앙문화예술관을 개관하였고, 중앙대학교의 귀중한 사료가 될『중앙대학교 80년사』도 발간하였다.

한편 김희수 이사장의 취임시 1천병상 규모의 의과대학 부속병원(MEDICAL CENTER)을 신축하겠다는 약속의 이행이 지연되자 의과대학 재학생과 수련의 및 전공의가 이 약속의 이르게 되었다. 다행히 부속고등학교가 강남구 도곡동으로 이전·개교함으로써 신축할 부속병원행을 촉구하는 농성과 함께 수업거부와 파업으로 유급의 위기까지 가는 급박한 상황까지 이 부지가 마련되고, 1997년 10월에는 이 자리에 부속병원 착공을 법인과 대학이 함께 약속하고 의과대학생은 이 약속을 수용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12]

새로운 중앙 건설을 위한 DRAGON 2018 수립[편집]

새 천년의 시작과 함께 2001년 2월에 제11대 총장으로 박명수 교수가 취임하였다. 취임과 더불어 『변화와 발전을 통한 새로운 중앙의 창조』 를 위하여 『새로운 비전』 과 『새로운 문화』 및 『새로운 행동』 을 강령으로 제시하고, 종전과 다른 개념의 대학발전계획인 「DRAGON2018」 을 수립하였다.[13]

「DRAGON 2018」 은 중앙대학교를 상징하는 청룡과 개교 100주년이 되는 2018년을 합성하여 만든 용어로 이 계획은 21세기 교육환경 변화에 적극 부응하면서 교육·연구·학습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자 개교 100주년까지 달성해야 할 목표와 지표를 설정해 2002년 10월부터 체계적으로 집행하고 있는 중앙대학교 장·단기 종합발전계획이다. 이는 종전의 발전계획과는 달리 실현이 가능한 구체적 계획이고, 급변하는 환경에 적절히 대응해 계획을 수정·보완할 수 있도록 한 신축적인 계획임과 동시에 정량목표를 연단위로 설정해 달성여부를 확인하면서 수행하는 MBO 방식 추진계획으로써 학교법인, 학교, 교수협의회, 직원노동조합, 학생회, 동창회 등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여 수립한 다음, 수없는 수정과 보완을 거쳐 확정해 2002년 10월 11일 개교기념일에 대내·외에 공포하였다. 이러한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함에 따라 학교가 역동적인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맨 먼저 개교 이래 80여 년간 사용하여왔던 마크체계의 학교 상징물들을 디지털시대에 부응하는 대학이미지체계로 통합하는 작업(UI사업)을 수행하였다. 이에 녹색의 교색을 청색으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교체, 교표, 교기 등 학교의 이미지를 전면 새롭게 창조하였다. 더불어 폐쇄형 교문을 철거하고 상징 조형물로 대체하여 담장 없는 열린 캠퍼스를 대학 최초 실현하였다.

이와 함께 2000년 2월 국악대학, 2002년 12월 국악교육대학원, 2004년 9월 창업경영 대학원을 신설하게 되었으며, 「Dragon 2018」 ‘중앙인’ 양성의 핵심사업으로 ‘선도특성화’, ‘중앙팀’ 육성의 핵심사업으로 ‘전략특성화’사업을 추진하였고, 더불어 ‘중앙터’ 조성의 핵심사업으로 제1캠퍼스에 1만 8천여 평의 메디컬 캠퍼스 신축, 6천여 평의 교수연구동 및 체육관 신축, 1만여 평의 복합건물신축(대학극장 재개발), 제2캠퍼스에 3천여 평의 국악대학 신축, 2천여 평의 생활관 신축, 7백여 평의 선수숙소와 원룸을 각각 신축하는 등 학교의 비전과 전략, 교육과 연구제도, 행정수행 방식 및 시설여건 등 모든 분야의 제도와 여건이 종전과 다르게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확충되었다. 이러한 결과 학교가 새로운 모습으로 급변하게 되었으며, 중앙가족도 종전과 다르게 모교에 관심을 갖는 통합의 계기가 조성되었다. 발전기금 기부실적도 5년간 총 380억원이라는 역대 최고의 실적을 기록하게 되었다.

또한, 제11대 총장 재임 시의 대학경영 실적을 담아 백서의 형태로서 대학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소상히 보고하여 주어진 책무를 다함은 물론, 그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여 대학발전의 계기로 삼고자 "제11대 총장 대학백서(2001~2004)”를 발행하였다. 이 백서의 발간은 지난 4년간의 기록을 넘어 2018년 개교 100년사의 4년을 준비한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제11대 총장단의 대학종합 발전계획인 "DRAGON 2018”과 주요 경영실적을 중심으로 한 자료를 편찬하는데 중점을 두었으며, 대학운영 전반에 대한 설명과 이를 통한 성과를 통계, 현황표 중심으로 기술하고 추진과정에서의 문제점과 개선이 필요한 분야 등을 언급하여 대학발전을 위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이 백서는 "DRAGON 2018" 의 추진과정과 성과, 단과대학 중심 경영체제 운영을 평가한 학(원)장보고서(Dean's Report) 실적, 특성화 추진 실적, 교수·직원·학생들의 활동상황, 재임기간 4년간 총장의 주요활동 등을 담고 있어서 2018년 개교 100주년으로 가는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어 중앙대학교의 귀중한 사료로써 인정받고 있다.[13]

창조와 화합으로 개교 100주년을 향한 준비[편집]

2005년 2월에 제12대 총장으로 박범훈 박사가 취임하였다. 박범훈 총장은 “창조와 화합”의 새로운 중앙을 건설하고자 “세계적 수준의 지식창조 및 학습역량 보유대학”으로의 발전을 위한 7대 공약을 제시하고 선거 첫 과제인 대교협 평가, 수도권 특성화, BK21, 법학전문대학원 유치 등 4대 국가사업의 성공적 유치를 총장 프로젝트로 관장하여 비교적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최대 현안 과제인 교육과학기술부 구조개혁 선도대학으로 선정되어 1년의 유예기간에도 불구하고 주요 경쟁대학과 대등한 재정지원(91억원)을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14]

이는 1캠퍼스와 2캠퍼스에 중복되어 있는 유사학과와 2개 대학의 통합 등을 통해 대규모 구조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입학정원의 산술적 감축이 아니라 문화예술과 과학기술을 융합하는 내용의 특성화 전략이었다. 또한 학부 구조조정에 이어 3개 전문 대학원 및 11개 특수대학원의 신입생 충원 및 재학생 등록현황, 재정 상황 등 총체적인 운영현황을 분석하여 각 대학원별 운영상 문제점의 개선 및 교육품질의 향상을 도모하고자 전문 및 특수 대학원에서 총 42명을 감원하여 일반대학원에 32명을 증원하고 10명은 구조 개혁 선도대학 특성화 사업에 의한 대학원 전체정원에서 감원하였다. 일반대학원에 증원된 인원은‘연구우수집단(교수) 우선전형’등을 통해 연구중심대학 체제 구축을 위한 자원으로 활용하게 하였다.

11대 총장단의 개교 100주년 대학 청사진인 「DRAGON 2018」 (2001-2004)을 「CAU 2018」 (2005-2008)로 명칭 변경하여 2018년 개교 100주년을 준비하고 있다. 「CAU 2018」 은 각종 사업에 대한 평가 지표와 재원확보가 구체적으로 마련되어 있어 안에서 보다 밖에서 더 높게 평가 받는 계획으로 2018년 개교 100주년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Y-10주년 기념사업으로 「CAU 2018」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2단계 실천중심도약 단계로 추진하고 있다.

박범훈 총장 취임 후 4년간 교육·연구 기자재 등 교육환경개선사업을 위해 집중 투자하여 2007년 2월 국내 최대 규모의 법학관이 완공되었고 1캠퍼스의 정문 주변에 약대 및 자연계열 R&D센터와 대운동장 주변 공학계열 R&D센터를 건립하기 위한 마스터플랜을 마련 하였다. 2008년 법학관에 미디어실습동 완공,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400병상 증축 등 「CAU 2018」 발전계획의 중앙터 조성계획에 따라 ‘최적의 교육 및 연구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2007년 11월에는 하남시와 ‘하남캠퍼스’추진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였다. 하남캠퍼스는 약 8만 6천여평인 미 공군 공여지인 ‘캠프콜번’에 추진하고 있으며 분야별 사업 추진단을 구성 운영하여 우리 대학의 미래 비전에 도전하고 있다. 이러한 계획적이고 지속적인 「중앙터」 조성사업으로 우리 대학은 연구개발의 중심이 되는 것을 넘어 연구중심대학으로 가는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또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244명의 전임교원을 초빙하였으며, 2009학년도 1학기에는 전임교원과 별정제 외국인 교원을 포함 총 25명의 교원을 초빙하여 대학의 연구력 증진 및 획기적인 교육연구환경 개선이 예상되고 있다. 법학전문대학원 및 경영전문대학원, 의학전문대학원 등 전문대학원 체제를 구축하여 세계적 수준의 지식 창조 및 학습역량 보유대학으로 연구중심대학을 육성하고 있다. 2009년 3월 법학전문대학원, 의학전문대학원을 개원함으로써 기존의 국제대학원, 첨단영상대학원, 경영전문대학원과 더불어 급변하는 사회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시대적 추세에 선도대학으로서 도약의 계기가 되고 있다.

박범훈 총장 취임이후 4년간 총 400억원의 발전기금과 외부연구비 수주액 1,663억원, 그리고 정부재정 지원 사업으로 확정된 국고지원액 총 173억 등 우리대학 역사상 가장 많은 금액인 2,216억원의 재정을 확충하였다. 그리고 국내 대학최초로 성과중심 연봉제 인사제도를 도입하고 교수의 승진 및 승급 심사기준을 강화하는 승진, 재임용 제도개선으로 연구경쟁력에 있어서는 세계 명문대학에 진입하기 위한 글로벌 지표를 설정하여 추진하고 있다.[14]

한국의 중앙에서 세계의 중앙으로[편집]

2008년 5월 글로벌 기업인 두산그룹을 새로운 학교법인으로 영입하여 박용성이사장이 제9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두산그룹의 체질을 소비재에서 중공업 중심으로 변화시킨 박용성이사장의 취임은 과거의 중앙대가 사라지고 새로운 중앙대가 탄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5]취임 후 80여일 지난 2008년 8월 27일 전체교수회의를 통해 「CAU2018+」중장기 발전계획을 발표하면서 ‘선택과 집중, 실행력 강화, 선순환 구조 확립’이라는 새로운 전략방향을 제시하였고 내부 구성원들의 변화로 대학의 발전비전을 달성하기 위하여 국내 대학 최초의 100% 연봉제를 도입하였다. 이것은 철저하게 능력과 성과에 따라 임금을 결정해 교수진의 잠재 역량을 끌어올린다는 취지였다. 교직원의 임금제도도 호봉제에서 연봉제로 전환시켰으며 행정조직도 개편해 외부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학생들도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도록 학사관리제도를 강화하였으며, 졸업을 하려면 일정수준의 영어실력과 회계학 등 신설된 필수 과목을 이수하도록 하여 ‘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대학’으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연구와 교육, 학습을 보다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약학대학과 자연계열 종합 R&D센터 신축, 기숙사 신축, 중앙도서관의 리모델링, 300병상 규모의 병원증축 공사 등 법인의 자금력과 실행력을 통해 그동안 꿈으로만 간직했던 계획들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연구프로젝트 지원에도 연구경쟁력강화특별위원회를 신설하여 전략적으로 육성할 분야를 선정하고 집중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벌써 2단계 BK21 사업에 6개의 사업단이 새롭게 지정되는 등 성과가 나오고 있으며 60억원의 예산을 배정하여 선도연구단을 지원함으로써 ‘선택과 집중’에 의한 전략을 실행하고 있다. 90년 동안 쌓아 온 전통의 명문 우리 중앙대학교는 글로벌 기업 두산그룹과 함께 이제 ‘한국의 중심’을 넘어 ‘세계가 선호하는 명문대학’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목표로 힘찬 날개 짓을 하고 있다.[15]


대학 및 개설 학과[편집]

2014년 기존 5개 계열별 부총장제를 폐지하고 5개 직능별 기능형 부총장제를 신설하면서 단과대학을 각 대학장이 운영하도록 학교를 개편하였다.(2015년 기준 13개 단과대학, 50개 학과(부))[16]

대학원 과정[편집]

중앙대학교 대학원 과정의 경우 일반대학원과 전문대학원, 특수대학원으로 구분되어있다.

구 분 대학원 분류 소속 대학원
대학원
일반 대학원
전문 대학원
특수 대학원

캠퍼스[편집]

서울 캠퍼스[편집]

도서관[편집]

  • 204관 중앙도서관

중앙도서관은 현재의 위치에 1958년 10월 25일 도서관 신축공사를 시작하여 약 1년 후인 1959년 10월 23일 준공됐다. 외국에서 지원한 도서관건립기금과 이승만 전 대통령의 협조를 받아 도서관을 건립했기 때문에 초기 명칭은 우남기념도서관이었다. 우남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호이다. 4.19 혁명 이후 우남기념도서관은 현재의 중앙도서관으로 명칭이 개칭되었다. 2009년 8월에 14,258.2㎡(4,320평)으로 리모델링 및 증축을 완료하여 3,400여 석의 열람석을 비롯하여 다양한 이용자 편의시설을 갖췄다. 지난 60년간 교수와 학생들의 연구 및 학습을 지원하는 중앙 학문의 요람으로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 온 중앙도서관은 현재 100만여 권의 장서와 각종 비도서 자료를 보유하고 있으며, 2,500여 종의 연속간행물과 8만여 titles의 전자저널, 120여 종의 Web DB, 그리고 본교 학위논문 27,000여 권의 원문 DB, E-Book 4만여 권을 서비스하고 있다. [18] 중앙도서관 앞에는 4.19 혁명 때 산화한 6인의 열사를 기리는 의혈탑이 세워져 있다.[19][20]

  • 303관 1,2층 법학도서관

법학도서관은 1997년 (구)법학대학(현재의 제2공학관)의 4층에 413㎡ 규모로 법학도서실로 시작되었다. 그 후 2001년 같은 건물 6층으로 옮겼다가 2005년에는 법학도서관으로 승격되었다. 2007년 법학관의 개관과 함께 법학관의 1층과 2층에 위치해 있다. 법학도서관에는 현재 단행본과 참고도서, 정기간행물, 한국 안팎의 DB를 보유하고 있다

강의동[편집]

  • 303관 법학관

2007년에 신축된 법학관에는 법학도서관이 내부에 위치해 있고 사회과학대학과 경영경제대학 학생들이 사용중이다. 지하 1층에는 학생식당과 교직원식당, 컴퓨터실 등이 있으며, 2층에는 대강당이 있다. 6층과 7층에는 대학과 대학원 행정실이 위치해 있고, 10층부터 14층까지는 교수연구실과 각종 연구소가 위치해 있다.[19]

  • 203관 서라벌홀 (Seorabol Hall)

1961년 참되고 선하라는 의미로서 건립된 진선관(眞善館)이란 명칭이 서라벌홀의 시초다. 진선관은 법정대(법대, 정경대, 경영대)와 문리대(문학부, 이학부) 학생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1960년 당시에 이 건물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지금의 반쪽이었다(지금의 서라벌홀 엘리베이터를 기준으로 법학관 쪽에 위치한 부분). 1972년 서라벌 예술대학을 인수하면서 진선관 명칭을 서라벌홀로 개칭했다. 현재 서라벌홀의 모습은 해방광장쪽으로 놓인 건물과 원래 건물을 붙여서 연결하는 형식으로 증축한 것이다. 법대학생들과 예대학생들이 이곳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문리대와 정경대, 경영대 학생들은 지금의 교양학관 건물로 옮겨갔다. 현재는 인문대학, 사범대학, 사회과학대학 학생들이 사용하고 있다. 1,2층을 제외한 전층에 걸쳐 각 학과 사무실과 교수 연구실과 강의실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19][21]

  • 207관 봅스트홀 (Bobst Hall)

제 1공학관으로 1969년에 준공되었다. 현재는 사회기반시스템공학부(건설시스템 전공), 화학신소재공학부, 기계공학부, 전자전기공학부가 사용하고 있으며, 각종 연구실 및 실험실이 위치해 있다. 학생문화회관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19]

  • 208관 제2공학관

제1공학관 개념인 봅스트홀과 더불어 건축학부, 컴퓨터공학부 및 사회기반시스템공학부(도시시스템 전공), 융합공학부, 에너지시스템공학부가 사용하는 공간이다.[19] 다수의 PC실습실과 설계실이 있다.

  • 104관 수림과학관

1995년에 지어진 건물로 외벽의 빨간 색이 특이점이다. 현재는 자연과학대학이 사용하고 있다. 기초과학 교육 및 연구실이 다수 위치해 있다.[19]

  • 105·106관 의학관
102관(약학대학/R&D센터)

학생회관과 중앙도서관 근처에 위치해 있는 제1의학관은 1974년에 준공되었다. 각종 연구실과 실습실이 위치해 있고 현재는 의과대학이 사용하고 있다. 제2의학관은 2005년에 완공되었고 의학전문대학원과 강의실, 연구실이 있다.[19] 제1의학관과 제2의학관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건물이다.

  • 103관 파이퍼홀 (Pfeiffer Hall)

파이퍼홀은 1955년 5월에 착공하여 1956년 4월 20일에 완공됐다. 1956년 5월 18일 성대한 준공기념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를 비롯한 수많은 내외귀빈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하지만 파이퍼홀이 처음부터 파이퍼홀로 불렸던 것은 아니다. 처음의 파이퍼홀은 약학대학으로 불렸다. 여기저기 건물을 옮겨 다니던 다른 단과대와는 달리 약학대학은 파이퍼홀에서 역사를 쌓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1968년 개교 50주년을 맞이해 파이퍼여사의 흉상을 건물입구에 부착하며 파이퍼홀로 불리기 시작했다. 파이퍼 여사는 임영신 여사의 측근이자 후원자로 파이퍼홀을 지을 수 있도록 금전적인 도움을 주었다. 미국의 제약회사 이사장이었던 E.H.Bobst가 파이퍼여사의 유지에 따라 10만 달러를 기증해 파이퍼홀이 지어질 수 있었다. 파이퍼홀을 함께 사용하던 농대(現 생명공학대)가 안성으로 이전하고, 자연과학대가 수림과학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1995년 이후엔 약학대학이 전체를 사용했다. 2012년 이후로는 적십자간호대학이 사용중이다. [19] [22]

  • 102관 약학대학 및 R&D센터

파이퍼홀의 정면에 위치한 약학대학 및 R&D센터는 지하4층, 지상11층 규모로 2011년 5월말 완공되었고 약학대학이 사용 중이다. 식당, 서점 등의 편의시설과 함께 교수연구실을 비롯하여 강의시설, R&D센터 등이 위치해 있다.[19]

그 외 건물[편집]

  • 101관 영신관
101관(영신관)

중앙대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영신관은 1938년 5월 완공되었다. 건물의 이름은 대학 설립자인 승당 임영신 여사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영신관을 짓기 까지 많은 재정적 어려움이 있었는데, 당시 일제의 개입이 커 기부금이나 모금활동이 불가능해 미국에 가서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미국의 유력지였던 ‘World Telegram’에 보도될 정도로 새 교사건립을 위한 모금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임영신 여사는 각고의 노력 끝에 워싱턴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을 통해 자동차왕 포드, 록펠러 2세, 발명왕 에디슨의 부처로부터 후원금을 받아 영신관을 지을 수 있었다. 1968년 8월까지 대학본부로 사용되었고 이후 사범대학, 농과대학(現 생명공학대학) 교사동으로 사용되었다. 1982년 부터 중앙대 교회가 사용 하다가 2013년부터 입학처가 사용중이다. [19][23]

  • 201관 본관

대학본부가 있는 곳으로 중문에 진입하면 바로 보이는 흰색 건물이다. 총장실, 학생지원처, 총무처, 홍보실 등이 자리잡고 있다.

301관(중앙문화예술관)
  • 301관 중앙문화예술관

중앙문화예술관은 1999년 10월에 개관하였다. 대극장과 소극장, 다용도 전시관, 실기실 및 세미나실, 강의실을 고루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 학교행사와 각종 공연들이 펼쳐진다. 예술대학원, 첨단영상대학원, 국제대학원 등이 사용하고 있다.[19]

  • 304관 미디어공연영상관

법학관 뒷편에 자리한 작은 건물로 연기 실습과 영상제작에 관련된 실습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영상시사실, 모델제작실 등이 있다.[19]

  • 107관 교양학관

1962년에 준공된 교양학관은 법학관이 생기기 전까지 이전의 정경대학이 사용했던 곳이다. 현재는 강의실과 실습실을 비롯하여 교양학부 교수 연구실이 위치해 있다. 교양학관의 원래 이름은 ‘4월 학생관’으로 당시 임영신 총장이 4.19 혁명 직후 학생 의거를 기념하기 위하여 신축한 건물이다.[19]

  • 205관 학생회관

학생회관에는 각종 동아리와 학생식당 ‘슬기마루’, CAU버거, 은행, 여학생휴게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 206관 학생문화관
305관(교수연구동/체육관)

학생문화관에는 우체국, 카페, 문구점, 서점, 중대신문사, UBS방송국, 녹지, 중앙문화 등이 있다.

  • 209관 창업보육관

봅스트홀 뒷편에 위치한 창업보육관은 창업에 대한 지원과 외부 연구과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19]

  • 305관 교수연구동 및 체육관

후문 방향에 위치한 체육관은 교수연구동과 함께 있다. 각종 운동경기와 매학기 마다 실시되는 취업박람회 등이 개최되는 곳이기도 하다.

기숙사[편집]

308관(생활관)
  • 308관 블루미르홀 (Blue Mir Hall)

블루미르홀 생활관은 2010년 8월에 완공되었다. 898명의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으며 식당과 편의점, 운동시설, 카페 등이 있다. 또한 각종 행사나 연구를 위해 단기 방문한 이용자와 외국인 교원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가 있다.[19] 현재 약 1,000여명 정원의 2차 기숙사가 2015년부터 학생 수용을 목표로 건설 중에 있다.

  • 307관 글로벌하우스

1995년에 완공되어 블루미르홀의 완공 이전까지 여자기숙사로 활용되었던 307관은 이후 고시반 학생들의 기숙사 및 숙소로 이용되다가 2014년 2학기부터 외국인 학생들과 더불어 한국인 재학생들의 기숙사로 활용되고 있다..[19]

  • 퓨처하우스

퓨처하우스(Future House)는 고시생반의 기숙 목적으로 지어졌으며 지하 3층 지상 7층 규모로 총 80실로 159명을 수용할 수 있다. 독서실, 스터디룸, 휴게실 겸 PC라운지, 매점 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기타 지역[편집]

청룡연못
  • 청룡상 & 청룡연못

중문에 위치한 청룡상과 청룡연못은 1968년 개교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8] 청룡상은 작은 용 7마리의 축복을 받으며 지구를 감싸고 승천하여 대기권 밖을 향한 우주에의 달관을 뜻하는 것으로 중앙대학교의 번영을 상징하고 있다. 청룡상을 제작하면서 동상 안에 임영신 박사의 유품 등 중앙대의 보물이 담긴 타임캡슐을 넣어두었다. 이 타임캡슐은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는 2018년에 개봉할 예정이다.

  • 해방광장

학교의 정가운데 위치해 있고 주변에 서라벌홀, 중앙도서관, 학생회관 등이 둘러싸고 있다. 위치적 이점 때문에 학생들이 이곳에 와 휴식을 취하고 축제 때 공간활용하기에 편리하다.

  • 대운동장

제2공학관 뒷편에 위치해 있으며 1981년에 만들어졌다.

  • 중앙마루 및 중앙광장

중앙마루는 2011년 1월에 만들어져 청룡연못과 중앙광장을 잇는 계단으로 교양학관과 영신관 사이에 위치해 있다. 중앙광장 또한 2011년에 완공된 녹지공간으로 영신관과 R&D센터 사이에 위치해 있다.

공사 중인 시설[편집]

  • 제2기숙사
  • 310관 경영경제관

안성 캠퍼스[편집]

도서관[편집]

  • 중앙도서관
902관(중앙도서관)

1980년에 147평, 204석의 열람석으로 역사를 시작한 안성캠퍼스 중앙도서관은 1988년 3월에 신축하여 전체면적 17,027㎡으로 1,700 여석의 열람석을 갖추고 교수와 학생들의 학문 연구 및 학습을 지원해 오고 있다. 1995년 10월에 도서관 전산화 시스템(CALIS)을 Open하였고, 2003년 2월에는 서지, 원문 정보를 비롯하여 강의·연구 정보, 인터넷 정보 등을 제공하는 통합형 디지털 도서관 시스템(CoDL)을 Open하였다. 2009년 3월에는 유니코드를 기반으로 한 다국어 인터페이스를 제공하며, 디지털 콘텐츠 연계기능이 강화된 차세대 유비쿼터스형 전자도서관 시스템(DLiⅡ)과 함께 이용자 중심의 도서관 홈페이지를 Open하였다. 스터디룸, 전자신문등 이용자 편의시설과 국회 전자도서관의 자료와 중앙도서관의 소장자료를 검색할 수 있는 온라인 정보검색실, 그리고 인터넷 복합공간인 전자정보실을 갖추고 있다. 지난 30년간 교수와 학생들의 연구 및 학습을 지원해 온 안성캠퍼스 중앙도서관은 현재 40만 여권의 장서와 2,000여 종의 연속간행물, 4만여종의 전자저널, 50여 종의 Web DB, 그리고 27,000여권의 본교 학위논문 DB, 4만8천여 종의 E-Book, 각종 비도서자료를 보유하고 있으며, One-Stop 서비스, 찾아가는 대출서비스, 도서관 회원제 서비스, 원문복사 배달서비스 등 이용자 중심의 서비스와 맞춤형 도서관 이용 교육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1996년 7월부터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열린도서관」을 운영하여 지역주민에 대한 정보 봉사와 지역 기업에 대한 정보 제공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중앙도서관의 지하 1층에는 제3열람실, 서고(지하)이 있고 1층에는 제2열람실, 복사실, 박물관, 서고(1층), 도서관장실, 학술정보팀이 있으며, 2층에는 참고자료실, 미디어실, 전자정보실이 있고, 4층에는 강의실이 5층에는 제1열람실, 개인별 열람실이 위치해 있다.[24] 중앙도서관 옆으로는 생명공학관2관과 교양학부대학관이 있다. [25]

강의동[편집]

  • 미술관 지역
808관(미술관 지역)

미술관 지역은 조형관, 공연영상관, 공예관, 조소관 총 4개의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공연영상관은 사진전공, 무용전공 학생들이 사용하고 있으며, 조소관은 미술학부의 조소전공 학생들이 사용한다. 공예관은 디자인학부 공예학과 학생들의 실험실습실로 사용되며, 조형관은 한국화, 서양화, 공예, 산업디자인 전공 학생들이 사용하고 있다.[25] 이 4개의 건물에서 여러 학과들이 장르간 강의를 개방하는 교차교육은 물론, 멀티미디어 시설을 활용하는 입체교육체제를 지향하고 있다. 공예관 옆에는 무대장치제작소와 외국어문학관, 교수연구관이 위치해 있다.[25]

  • 음악관 지역

음악관 지역은 음악관 1동, 음악관 2동, 영신음악당의 총 3개의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음악관 건물은 작곡과, 성악과, 피아노과, 관현악과 학생들이 주로 사용하는 건물이며, 창작, 이론, 연주를 바탕으로 대학에서 충분한 실습을 가질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음악관 옆으로는 교수회관 세 동이 위치해 있으며, 조금 떨어진 곳에는 생활과학관이 위치해 있다. 과거 생활과학관은 디자인학부 패션디자인전공, 실내환경 디자인전공, 시각디자인전공이 사용하였으나 2014년 이후로는 사용하고 있지 않다. 생활관 옆에는 학생회관과 학생복지관이 자리하고 있다.[25]

  • 국악관
608관(국악관)

국악관은 영신음악당과 음악관 사이 도로를 따라 ‘수상연못’쪽을 향해 걷다보면 연못에 이르기 전 왼편에 위치한 고풍스러운 건물로서 예술대학 전통예술학부가 사용하고 있다. 국악관은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된 ‘민족음악대학’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외관에서부터 우리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게 건축되었다. 널찍하게 자리잡고 있는 건물 중앙의 지붕은 우리 고유의 기와지붕 모습을 연상케 한다. 계단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외관과는 대비되는 도회적인 느낌의 내부 구조로 이루어져있으며 국악관의 모든 공간은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된다. 2층은 공연장인 ‘국악당’과 로비인 ‘덧마루’등으로 구성되어있으며 3층은 학생들의 개인 연습실이 있다.

  • 원형관
810관(원형관)

원형관은 1985년에 준공된 지하1층 지상 7층의 8차 교사동 건물로 생명공학대학 행정실과 각 학과 사무실, 교수연구실, 강의실이 위치하고 있다. 원형관 옆에는 생명공학대학 대학원과 연구동 그리고 GMO 연구실이 위치해 있다.[25]

  • 수림체육관

수림체육관은 2001년에 준공된 지상4층,연건평 2,400여평 규모의 건물로 체육대학 행정실,대체육관,소체육관,유도/레슬링실,에어로빅/댄스스포츠실과 강의동이 위치해 있다. 수림체육관 외부 앞뒤로 실내농구장, 축구장, 야구장이 위치해 있다.[25]

이외의 건물[편집]

  • 본관
901관(본관)

중앙대 안성캠퍼스의 중추인 본관은 1997년에 준공된 지상 6층 규모의 건물로서 안성캠퍼스 부총장실, 대학본부, 산업창업경영대학원이 자리하고 있다.

  • 기숙사
706관 (명덕동 기숙사)

안성캠퍼스의 기숙사는 남자 전용기숙사는 예지동, 여자 전용기숙사는 명덕동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기숙사 주변으로 생활복지관과 학생후생관이 있으며 대운동장, 테니스장, 골프장이 자리잡고 있다.[25]

기타 지역[편집]

  • 정문 (등용문)
정문(등용문)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의 정문은 '등용문'(登龍門)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정문과 캠퍼스의 거리가 멀어 학교순환버스가 정문부터 운행하고 있다.

  • 수상무대 & 청룡연못
청룡연못&수상무대

청룡연못 위에는 부채꼴 모양의 ‘수상무대’가 있어 야외공연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청룡연못' 내부에는 분수대와 청룡상이 마련돼 있다. 연못가 주변에 잔디와 나무 벤치가 아름답게 어우러져 휴식을 취하기 좋으며, 안성캠퍼스 경관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지역의 명소다.[25]

의료원 및 학교[편집]

의료원[편집]

중앙대학교 부속병원은 1968년 서울시 중구 필동에서 한국의과학연구소 부속성심병원으로 처음 시작되었다. 1971년 12월 28일,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성심병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그 후 1984년 7월 1일, 중앙대학교 부속용산병원의 개원으로 부속병원이 2개로 늘어났다. 필동의 부속병원은 2004년 12월 18일에 흑석동에 위치한 현재의 부속병원으로 옮겼고, 2005년 1월 18일에 흑석동에서 개원식을 갖고 중앙대학교병원이란 명칭으로 개원하였다.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은 2011년 3월 25일에 진료를 마감하고 중앙대학교병원으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26]

부속학교[편집]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서울시 강남구 도곡동에 위치해 있다. 1934년에 조선직업강습학원으로 설립되어 1951년 낙양공업고등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61년의 낙양상업고등학교, 1962년의 서울명수대상업고등학교에 이어 1965년부터 학교법인 중앙문화학원으로 합병되면서 현재의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1997년에는 중대부속여자고등학교와 통합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27]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는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에 위치해 있다. 부속고등학교와 함께 1934년에 설립되어 1956년 낙양중학교로 개명되어 고등학교와 분리되었다. 그 후 1965년에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으며, 1997년 중대부속여자중학교와 통합하였다.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에 위치해 있다. 1964년 12월에 설립인가를 받아 1965년에 개교하였다. 1969년에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96년부터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유치원은 1916년 9월에 정동교회부설 중앙유치원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1922년에 유치사범과가 설치되고, 1928년에는 유치사범과가 중앙보육학교로 승격되었다. 광복 후 1946년에 중앙여자전문학교 부설유치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56년에 중앙대학교 부속유치원으로 명칭 변경하였다. 1965년부터 현재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에 위치해 있다.

주요 학생단체[편집]

총학생회[편집]

  • 연중 학생회 주요 행사

- 대학별 신입생 예비학교 - 4.19 기념행사 - 스승의날 행사(5월 15일) - 농촌봉사활동(봄, 여름, 가을) - 개교기념 축전행사 - 학생회 신·구임원 간담회 - 신입생 환영행사 및 특강 - 중앙인 체육대회 - 환경운동 - 학생간부 수련회 - 기타행사

언론단체[편집]

  • UBS
1957년 4월 12일 개국한 중앙대학교 교육방송국. 경제의 격변기 속에서 우리 사회와 대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민과 함께 개국된 UBS는 한국대학 방송의 선두에서 대학언론과 사회를 선도하고 진정한 대학문화의 창달과 지성인들의 인격향상을 위해 해써왔다. 이 시대 대학과 대학방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항상 모색하며 매년 수습요원 선발로 미래의 방송인을 양성하기 위해 힘쓰고 있으며 각종 교내 행사와 동아리 활동등에 협조함으로써 진정한 대학방송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있다.
  • 중대신문사
1947년 9월1일에 ‘중대학보’라는 제호를 달고 최초의 대학신문으로써 대안언론의 문을 열었다. 1948년 한국 언론사상 최초로 순한글판 가로쓰기 편집체제 도입.1989 대학신문 최초로 주 2회 발행등의 대학신문의 역사를 꾀할 만한 시도들을 해나가고 있다.

2003년 한국대학언론 사상 최초의 공식방북취재 성사등 21세기 대학신문의 선구자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 중앙헤럴드
1957년 5월 20일에 한국 대학교 영어 언론사 중 최초로 정부로부터 학교 언론 매체로 인정 받으며 설립되었다. 2013년 9월호가 510호로 다른 대학교 영어 언론다체보다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며 오랜 기간 동안 학교 소식과 한국 안팎의 소식을 교환학생이나 외국 교수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커버 스토리, 학교 소식, 문화, 국제, 정치, 사설을 다루고 있으며 총 33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학을 제외한 매달마다 출판된다. 그 밖에 학교 내에서 영어 라디오를 담당한다.
  • 중앙문화
'의혈과 함께하는 진보언론'이라는 기조로 학내 교지편집위원회 소속에 있다. 1952년 첫 발행 뒤 군사정권하에서 오랫동안 휴간을 하다가 80년 대 다시 발간을 시작하였다. 2009년 총장을 비판하는 만화를 실었다는 이유로 58호 교지가 강제회수당하는 일이 있었다. 그 이후 학교로부터 예산지원이 끊겼고, 현재는 학생들로부터 교지대금을 직접 걷고 있다.

사건 및 사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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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생 학생회실 방화 사건[편집]

2007년 4월 27일, 본교 졸업생이 문과대 7층에 있는 일어일문학과 학생회실에 불을 질러 내부 33㎡와 집기 등을 모두 태워, 소방서 추산 500만 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냈다. [28]

총장 부적절 발언 사건[편집]

2009년 2월 23일, 박범훈 총장은 이명박정부 출범 1주년 기념 한나라당 초청 강연회에서 여제자에게 이날 강연 도중 마이크 앞에 선 여성 제자를 가리키며 "토종"이라고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요렇게 생긴 토종이 애기 잘낳고 살림 잘하는 스타일이죠. 이제 음식도 바뀌고 해서 요즘엔 키가 큰데 이쪽이 토종이고, 우리 때와 음식이 달라 길쭉해지고 했는데 사실 (조그만 게) 감칠맛이 있습니다. 이렇게 조그만데 매력이 있고, 시간상 제가 자세하게 여러 가지 내용을 설명 못 드리겠는데….".[29]

한편, 중앙대학교 대학 본부에서는 "국악하는 사람들은 키 큰 사람이 없고 작은 사람, 토종 체형을 가진 사람의 소리가 감칠맛이 난다는 의미였다"고 해명하였다.[30]

비판 교지 전량 회수 후 재배포 사건[편집]

2009년 11월 29일, 학교 측이 구조조정과 관련된 비판이 담겨있던 특집 기고문과 박범훈 총장에 대한 비판이 담긴 만화를 문제삼아 교지 《중앙문화》 58호 3000여부를 전량 회수한 후 하루 뒤 재배포하였다.

이에 대해 학교 측은 원고가 늦어 기사를 확인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절차상의 문제가 있었다고 밝혔으며, 재배포 여부는 알아서 결정하되 추후 학교가 문제 삼을 경우 모든 책임을 발간처인 교지편집부가 져야 한다고 밝혔다.[31]

사건 3개월 뒤인 2010년 1월, 대학 본부가 《중앙문화》의 발간처인 교지편집부 예산의 전액삭감을 통보하여 언론 탄압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32]

퇴학생 미행감시 사건[편집]

2010년 7월 24일 오후, 서울특별시 동대문 두산타워 주변에서 두산중공업 소속 직원이 중앙대 학생들과 두산중공업 해고노동자들이 집회하는 장면을 몰래 촬영하다 학생들에게 붙잡혔는데, 중앙대에서 퇴학당한 학생의 이날 행적과 동선, 다음날 일정 등 기록한 A4용지 3장 분량 문건을 소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독어독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퇴학생은 두산그룹이 중앙대를 인수한 뒤 학과 통폐합 및 구조조정을 본격화하자, 이에 항의하여 학내 활동을 벌이다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중앙대 총학생회 측은 학생사찰과 관련, 7월 27일에 두산그룹과 학교법인을 고소하였다.[33]

출처[편집]

  1. 예술대 일부학과 평동캠에 강의 개설한다 《중대신문》
  2. 중앙유치원의 설립. 《중앙대학교》. www.cau.ac.kr. 2011년 8월 7일에 확인.
  3. 전문교육기관으로 발전하는 중앙. 《중앙대학교》. www.cau.ac.kr. 2011년 8월 7일에 확인.
  4. 任永信 교장과 중앙의 꿈. 《중앙대학교》. www.cau.ac.kr. 2011년 8월 7일에 확인.
  5. 발전과 탄압의 시련. 《중앙대학교》. www.cau.ac.kr. 2011년 8월 7일에 확인.
  6. 해방과 중앙의 역할. 《중앙대학교》. www.cau.ac.kr. 2011년 8월 7일에 확인.
  7. 종합대학으로 승격. 《중앙대학교》. www.cau.ac.kr. 2011년 8월 7일에 확인.
  8. 종합대학의 내실화. 《중앙대학교》. www.cau.ac.kr. 2011년 8월 7일에 확인.
  9. 미래에 대한 포석. 《중앙대학교》. www.cau.ac.kr. 2011년 8월 7일에 확인.
  10. 제2캠퍼스의 건설과 확장의 시련기. 《중앙대학교》. www.cau.ac.kr. 2011년 8월 7일에 확인.
  11. 김희수 이사장의 취임과 새로운 전기 마련. 《중앙대학교》. www.cau.ac.kr. 2014년 2월 25일에 확인.
  12. 교육철학 실현을 위한 제 포석. 《중앙대학교》. www.cau.ac.kr. 2014년 2월 25일에 확인.
  13. 새로운 중앙 건설을 위한 DRAGON 2018 수립. 《중앙대학교》. www.cau.ac.kr. 2014년 2월 25일에 확인.
  14. 창조와 화합으로 개교 100주년을 향한 준비. 《중앙대학교》. www.cau.ac.kr. 2014년 2월 25일에 확인.
  15. 한국의 중앙에서 세계의 중앙으로. 《중앙대학교》. www.cau.ac.kr. 2014년 2월 25일에 확인.
  16. 기능형 부총장제 도입 … 기능별로 선택과 집중한다 <<중대신문>>
  17. 2015학년도부터 학과명칭이 신문방송학부에서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로 변경됨
  18. 중앙도서관 소개.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중앙도서관. 2011년 8월 7일에 확인.
  19.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캠퍼스맵
  20. 중앙대학교의 역사 [중대신문 ]
  21. 중앙대학교의 역사 [중대신문 ]
  22. 중앙대학교의 역사 [중대신문 ]
  23. 중앙대학교의 역사 [중대신문 ]
  24.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중앙 도서관
  25.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캠퍼스맵
  26. 중앙대학교의료원 역사. 《중앙대학교의료원》. 2011년 8월 7일에 확인.
  27.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학교소개-학교연혁.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2011년 8월 7일에 확인.
  28. “중앙대 졸업생 모교 학생회실에 방화”- 조선일보, 2007.04.27
  29. 중대 총장 "조그만 토종이 감칠맛 있어"”- 오마이뉴스, 2009.2.23
  30. 女제자에게 “조그만 게 감칠맛 있다””- - 경향신문, 2009.2.26
  31. 비판 교지 회수 ‘시끌’… “학내 민주주의 위기”- 경향신문, 2009.11.30
  32. 교지발간 놓고 갈등”- 한국대학신문, 2010.04.26
  33. 총학 `사찰의혹' 두산·학교법인 고소”- 연합뉴스, 2010.07.27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