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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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표: 북위 35° 10′ 03″ 동경 128° 59′ 48″ / 북위 35.1675° 동경 128.9967° / 35.1675; 128.9967

신라대학교
Silla univ logotype.svg
화랑관 앞 전경
화랑관 앞 전경
건학이념 박애주의 실천의 영재교육
교훈 진리 · 창조 · 사랑
표어 글로벌시대를 창조하는 지역창조대학
비전 부산을 넘어 세계로, GREAT SILLA
설립 1954년(부산여자대숙)
개교 1964년(부산여자초급대학)
종류 사립 종합 대학(4 · 5년제)
캠퍼스 백양캠퍼스, 남해캠퍼스(예정)
설립자 박영택
총장 박태학(교육학과)
국가 대한민국 대한민국
위치 부산광역시 사상구 백양대로700번길 140
부산광역시 사상구 괘법동 산1-1
규모 8 대학, 4 대학원
학생 수 14,715명 (2013년)
학부: 13,994명 (2013년)
대학원: 721명(2013년)
교직원 수 전임교원: 300명 (외국인 52명, 2013년)
상징 용마, 철쭉, 소나무,
교색 청색      
학교법인 박영학원
이사장 박해곤
웹 사이트 http://www.silla.ac.kr/

신라대학교(新羅大學敎)는 부산광역시 사상구에 위치한 대한민국사립 종합 대학이다. 학부는 여덟 개 단과대학으로 구성되고 대학원은 일반대학원과 교육대학원, 특수대학원(사회복지대학원, 리더십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교법인 박영학원이 운영하며, 현재 총장은 교육학 박사 박태학이다.

1954년 설립한 부산여자대숙을 모태로 하며 1964년에 개교한 2년제 부산여자초급대학을 시작으로 1970년 4년제 승격, 1992년 종합대학으로의 승격 이후 1997년 남녀공학으로 전환 및 신라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여대숙은 한국전쟁으로 중구 광복동(신창동2가)에 위치하였으나, 이후 연제구 연산동(3만여평)으로 이전하여 운영되었고, 1994년사상구 괘법동으로(54만여평) 캠퍼스를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연혁[편집]

신라대학교는 재단법인인 박영학원1954년 부산여자대숙을 설립한 데 이어 1964년에 부산여자초급대학을 설립하면서 부산지역 최초의 여성 고등교육기관[1] 으로 시작하였다. 5년 후인 1969년에는 4년제 부산여자대학으로 승격하였고, 1992년에는 종합대학인 부산여자대학교로 승격하였다. 그리고 1997년에는 남녀공학으로 전환,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에서 사상구 괘법동으로 이전하면서 교명을 신라대학교로 변경하였다.

신라대학교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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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관에서 바라본 야경
1954년 11월 5일
-
부산여자대숙 개교
▷ 2년제 각종학교
1956년 9월 26일
-
연산캠퍼스로 이전
부산시 남포동연산동
1964년 1월 21일
-
부산여자초급대학 개교
▷ 2년제 초급대학
1968년 3월 5일
-
부일여자중학교 개교
▷ 현재 연산동 이마트 맞은편
1969년 12월 27일
-
부산여자대학 승격
▷ 4년제 대학
1981년 11월 25일
-
대학원 설립
-
1991년 3월 1일
-
백양캠퍼스로 이전
( ~ 1994년 12월 27일)
1992년 4월 1일
-
부산여자대학교 승격
▷ 4년제 종합대학
1997년 9월 4일
-
신라대학교 교명 변경
▷ 남녀공학 전환
2004년 3월 1일
-
신라중학교로 교명 변경
▷ 남녀공학 전환, 학교 이전

설립과 대숙 시절[편집]

신라대학교는 일제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부산면포합자회사, 부산대동연료공업사, 부산정미제분 등의 기업을 운영하던 박영택이 사재를 털어 설립한 부산 지역 최초의 여성고등교육기관[1]부산여자대숙을 시초로 한다.

박영학원의 설립 계기[편집]

설립자인 박영택은 20대 초반 1921년 부산진 ~ 동래 간 도로 확장공사와 1922년 부산부 ~ 온천장 간 운송사업에 참여한 부를 토대로 1924년부평동 공설시장에서 면포상회를 개업하였는데, 이를 토대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해 부산면포합자회사를 창립하였다. 이 회사를 기반으로 30대 초반에는 현재 초량을 비롯하여 부산진, 연산동 일대에 막대한 토지를 매입하게 되었다[주 1]. 또한 광복 이후인 1946년에는 범일동의 조선방직주식회사 자리에 부산대동연료공장을 차리고, 1950년에는 부산정미제분공장을, 1951년에는 대한산업주식회사와 청과물시장을 설립하는 등 박영택일제강점기한국전쟁 초반까지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2].

그런데 박영택은 평소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부산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일제강점기1910년대에 5년제 학교인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였고, 일제강점기 박영택의 아들이 유학하던 일본 강산현의 흥양관중학교를 학부형의 자격으로 시찰하게 되면서 선진적인 고등교육기관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근대교육에 대한 관심은 광복박영택이 자리잡은 부산지역이 임시수도가 되면서 서울에 있는 대학들이 일시로 들어와 대학운영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경험하게 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삼성의 창업 당시 이병철제일제당의 발기인을 모집하면서 공장부지를 제공할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고,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창립할 때에 이종희도 회사 대지를 제공할 것을 제의하였지만 박영택은 평생 모은 재산을 교육사업에 투자하기 위해 모두 거절한 바 있다[2].

한편 박영택1951년 8월에 대한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는 경남공업고등학교동주상업학교 등에서 교직에 있던 최두고와의 합자회사로 청과 및 일반 농산물의 중개 및 도매업을 주로 하였다. 그러나 농산물 유통업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 1년 만에 자진 폐업하면서 최두고의 요청으로 학교 운영을 구상하게 되고, 1952년 6월 20일 체육사범대학병설 중고등학교를 설치하게 된다. 여기서 박영택은 교사 부지를 제공하여 초대 이사장이 되었고, 최두고는 학교 운영에 전념하는 형태였는데, 1, 2회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합법적인 절차를 밟는 와중 교명 문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두 사람이 결별하게 되었다. 교명 문제로 박영택이 학교 운영에서 제외되었지만 박영택이 제공했던 부지는 1, 2년 동안 존속하기로 하면서 최두고가 설립하는 학교법인 동성학원의 설립이사가 된다. 그리고 박영택박영학원을 설립하여 독자적인 학교를 운영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부산여자대숙의 설립[편집]

부산여자대숙의 임시교사 위치
2014년 현재의 광복동 대각사 입구

한편, 1950년대 당시 부산에는 한국전쟁으로 피란 온 대학들이 천막이나 판자 건물을 세워 대학의 설치기준에도 맞지 않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중 동국대학교부산 신창동 대각사 경내에 가교사를 차려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와 함께 동국대학교 야간부 분교로 국화여자대숙이 무허가로 운영되고 있었고 부산지역 주위에는 경남여자대숙이 역시 무허가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 국화여자대숙은 김도명을 숙장으로 경영되고 있었고, 재학생이 69명(국문과 15명, 영문과 27명, 상과 27명)에 불과했으며 경남여자대숙은 재학생이 49명(약학과 24명, 보육과 6명, 가정과 6명, 국문과 8명)에 불과한 소규모 학교였다.

이들 학교는 박영학원이 부산여자대숙의 인가를 문교부에 신청할 때 함께 인가를 신청했는데, 김법린 당시 문교부 장관은 국화여자대숙과 경남여자대숙이 재단을 구성하기 어려운 상태이므로 이들을 흡수 · 통합하는 조건으로 박영학원과 부산여자대숙의 설립인가를 추진하기로 하였다. 즉, 국화여자대숙의 김도명 숙장과 경남여자대숙의 김순태 교무과장이 부산여자대숙의 설립이사가 되고, 또 기존 학교 건물과 학생들을 부산여자대숙이 흡수 · 통합하는 조건으로 인가 승인토록 합의한 것이다. 이로써 1953년 4월 1일에 재단법인 박영학원과 부산여자대숙의 설립신청서를 문교부장관에게 제출하였고, 1954년 11월 30일부 국화여자대숙과 경남여자대숙의 학생과 서류가 모두 부산여자대숙으로 이관됨으로써 12월 30일에는 실질적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1955년 2월 16일 부산여자대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다. 이렇게 설립된 부산여자대숙은 대학에 준하는 각종학교[3] 로서, 1955년 2월 16일 문교부로부터 정식 인가받아 운영을 시작하였다[4]. 당시 부산여자대숙은 2년제로 가정과[주 2], 보육과[주 3], 영문과[주 4], 상(경)과[주 5] 각 50명 정원으로 인가[주 6] 되었다. 다만 부설기관으로 부산여자대숙 부속유치원이 60명 정원으로 인가되었으나, 대숙 시절에는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박영택이 소유하고 있던 부산시 연산동 1528번지 일대를 박영학원의 재단 사무실과 부산여자대숙의 교정으로 활용하려 하였는데, 이 토지를 한국전쟁으로 에 징발[주 7] 당해 부산시 신창동1가에 위치한 대각사 경내에 가교사를 설치해 수업을 진행하였다. 가교사는 2층 목조건물로, 580평 가량이었으며 현재 남포동 시가지에 위치한 곳으로, 한국전쟁 당시 서울대학교 본부가 있었던 동주여자고등학교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이후 1955년 12월 16일연산동캠퍼스 부지 15,600평과 군용 건물 6동(2,400평)을 군수기지사령부 포로수용소로부터 환수받으면서 1956년 9월 26일에 부산여자대숙을 모두 연산동으로 이전하였다(부산시 연산동 1976번지 일대). 그러나 학교 이전 과정에서 1956년 2월에 신입생 모집을 하지 않았고, 재단의 재산 중 충일고무공업사의 공장이 1956년 1월 2일 화재로 소실되면서 경영상의 어려움이 발생했다. 이에 교사 이전 등 정상적인 학교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1957년 9월부터 1962년 5월까지 휴교하게 되었다. 휴교중에는 강의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대학부지에 계속해서 교사를 신축하였고 휴교중인 1962년 2월에는 대학본부 건물이 완공되어 1962년 5월 20일문교부로부터 개학 지시가 하달되었다.

초급대학 시절[편집]

부산여자대숙은 개학하였으나, 재단 측에서는 각급학교에 불과한 대숙에서 고등교육 기관인 초급대학[주 8]으로의 설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부산여자대숙 시기인 1954년에는 80만에 불과했던 부산의 인구가 1960년에는 110만으로, 1963년에는 무려 130만 이상으로 폭증했는데, 이러한 이유로 부산, 경남 지역의 여자고등학교 졸업생이 날로 증가하고 있었음에도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이 지역 내에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부산 지역에 섬유공업, 제조공업 등이 활발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실무지도자의 양성이 절실한 시기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1963년 10월 5일에는 부산여자초급대학 설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63년 11월부로 부산여자(실업)초급대학의 인가승인신청서를 제출하게 되었다[5].

이러한 신청에 1964년 1월 20일에는 문교부로부터 설립인가서가 하달되었다[6]. 가정과, 보육과, 관광과, 국문과, 영문과 등 5개 과로 구성되며 주/야간으로, 각각 80명씩 총 320명 정원의 2년제 초급대학으로 인가된 것이다. 따라서 1955년 2월 16일자로 인가된 부산여자대숙은 1964년 1월 21일자로 자동 폐교 조치가 내려졌다[7]. 이에 따라 부산여자대숙이 폐교되고, 1964년 3월 1일부로 부산여자초급대학을 새로 설립하게 되었다. 입학식은 3월 10일 실시되었으며, 60년이 지난 현재까지 이 날짜를 신라대학교의 개교기념일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한편, 초급대학은 80명 정원의 보육과가 인가되면서 자체적인 부속유치원을 설립하게 되었는데, 원장 1명과 직원 2명, 정원 40명의 유치원을 우선 실험적으로 운영하면서 준비하기로 하였으며 뒤이어 1967년부터는 부산직할시 교육감의 인가를 받아 합법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보육과를 졸업한 인원에게는 유치원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수여하였으며, 가정과 등에는 중학교 실기교사 자격증을 수여하였다. 또한 이 시기 도서관이 연산캠퍼스 본관에 도서실로 시작하여 1966년에는 7,191권의 장서를 보유한 도서관으로 개관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1964년에는 인기 학과의 하나인 신문방송학과와 상과를 증설 건의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1964년 5월 6일 인가를 신청하였고, 1965년 2월 1일[8] 인가 승인되어 7개 학과로 증원되었다. 또한 신문방송학과의 설치로 교내신문인 부여대학보를 발간하고, 교내 방송실을 설치하는 등 매스미디어 분야의 실습까지 겸하게 되었다.

1967년 9월 5일에는 부일여자중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인가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이는 부산시 인구의 급격한 팽창과 초등학교 취학 아동의 급증으로 중등 교육기관의 설립이 필요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유치원 교육부터 대학까지의 종합적인 여성교육의 요람지 양성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9]. 따라서 1967년 10월 28일에는 문교부장관 명의의 인가서가 하달되었으며[10], 학년당 6학급씩 18학급, 학급당 60명씩 총 1,080명의 여자중학교 설립이 인가되었다. 당초 부산여자초급대학이 위치한 동래구 연산동 1521번지[주 9] 에 함께 설립되기로 하였으나, 학교 부지 내에 수영교차로연산교차로를 연결하는 간선도로(현재의 연수로)가 개설되면서 분리되어 동래구 연산동 825-5번지로 변경되었고 1968년 3월 5일 개교하였다[주 10].

여자대학 시절[편집]

부산여자대학교 시절 로고타입

부산여자대숙이 초급대학으로 인가된 지 4년 후인 1967년 5월박영학원 이사장은 이사회[주 11] 에서 "현재 이 지역사회를 위하여 초급대학은 4년제 대학으로 승격시켜야 한다"는 제의를 결의사항으로 받아들이면서 4년제 대학으로의 승격이 공식 발표되었다. 그 후인 1967년 11월 8일에 이수응 학장이 연산동 학교 부지에 유치원초등학교 , 중학교, 고등학교초급대학을 병설하는 여자대학을 창설할 계획을 발표하고, 이에 대한 부산여자대학 설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에 1969년 6월 21일에는 부산여자사범대학 설립인가 신청서를 제출하였다[11]. 4년제 대학으로의 승격에 있어 사범대학으로 설립인가를 신청한 것은 여성지도자의 양성을 위한 사범대학의 설립이 시급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또한 유치원과 초, 중, 고등학교를 아우르는 학교법인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립인가 신청서에는 "만일 사범대학 인가가 부적당할시에는 일반 4년제 대학으로 부산여자대학 설립을 인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으며, 당시 문교부에서는 교원 수급정책을 이유로(4년제 대학에서의 수급 외에 임시양성소 등으로 대량 수급) 사범대학으로 인가하지 않고 4년제 일반대학으로 인가하게 되었다[12].

1970년 3월 1일 개교토록 인가된 부산여자대학은 4년제 일반대학으로 가정학과(30명), 식품영양학과(30명), 미술학과(30명), 음악학과(20명), 체육학과(30명)의 5개 학과 140명 정원이 인가되었다. 이어서 1972년에는 사범계열 학과인 국어교육과가 30명 정원으로 개설되었으며, 1973년에는 사회교육과(역사전공)가 개설되었다. 또 1975년에는 일어교육과와 사회교육과(지리전공)가 개설되었으며 1976년에는 영어교육과가 개설되고 1979년에 경영학과가 개설되는 등 등 불과 8년 사이에 학년당 정원이 410명(총 학생수 1,360명)으로 대학 출범 당시와 비교해 2.5배 증가하였다. 그러나 경영이나 재정면에서 학생수가 3,000명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학생 증원과 증과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산업미술과와 산업공예과, 무용학과, 사범계열의 상업교육과와 국사교육과의 신설을 계획하였다. 더불어 학과별 정원을 증원하여 문교부에 증원, 증과 인가를 신청하였으며, 문교부에서 해당 증과, 증원안을 그대로 수렴하여[13] 7개 학과의 신설과 80명 증원이 실현되었다. 개설된 16개 학과 중 사범계열 학과가 7개로 개설 학과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준이었다.

1981년에는 대학원을 설치하기 위한 서류를 1981년 3월에 제출하여 11월에 국문학과와 식품영양학과의 설치가 인가[14] 되었으며, 최초로 1982년부터 석사과정 대학원생을 모집하게 되었다. 또한 1985년에는 미술학과, 음악학과, 체육학과의 대학원이 증설되었으며, 학부 과정에도 국어국문학과가 설치되는 등 다양한 학과들이 인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학생수와 대학 규모의 증가로 연산캠퍼스의 시설규모 및 부지 자체의 협소가 문제가 되었다. 여자대숙의 설립기인 1955년 당시에는 황령산 자락의 공터였던 지역이 이제 도시화가 진행되어 더 이상 교사나 시설 확충이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서동 산133 일대의 대지를 매입하여 대학 이전을 계획하였다가 주위가 주거지로 묶여서 실패하였는데, 다시 사상구 괘법동 일대 수백 명의 소유자로 되어 있는 토지를 매입하면서 점차 가시화되었다. 따라서 1985년 5월 7일, 이사회에서는 백양캠퍼스 및 종합대학 승격을 위한 1차 시안을 발표하였고, 1988년 8월 30일에는 백양캠퍼스의 신축 기공식을 열었다. 먼저 1990년경 백양캠퍼스의 미술관이 먼저 준공되어 1991년에 미술계열의 640명의 학생, 18명의 교수와 5명의 직원이 백양캠퍼스로 이전하고, 1992년 자연과학대학이 이전하면서 대학 이전이 본격화되었다.

또한 캠퍼스 이전의 와중에 종합대, 단과대 구분을 없애도록 법률이 변경되고, 교육부에서도 명칭을 변경하게 하여[15] 종합대학으로의 교명 변경을 합의하였으며, 법인 측에 정관 개정을 요구하여 1992년 4월 1일부 종합대학 명칭인 부산여자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종합대학으로서 단과대학 체제로 편성하기로 하고, 1993년 9월 6일자로 인문대학(8개 학과, 400여명), 자연과학대학(10개 학과, 400여명), 예술대학(5개 학과, 300명), 사범대학(8개 학과, 270명)의 4개 단과대학을 신설할 수 있도록 인가하면서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현재[편집]

화랑관에서 바라본 공학관 전경

남녀공학 전환 당시까지는 사범대학, 예술대학, 자연과학대학, 인문사회과학대학의 4개 대학으로 구성되었던 체제가 1997년 11월 5일부 경상대학과 공과대학이 추가되어 총 6개 단과대학 체제가 되었다. 이에따라 인사대 소속이었던 경상학부가 경상대로 소속이 변경되었고, 자연과학대에 있던 건축학과와 주거실내디자인학과, 컴퓨터정보공학부가 공과대로 소속을 변경하였다. 2002년에는 IT디자인대학이 신설되었으며, 공과대학에서 IT 관련 학과가, 예술대학에서 패션, 실내디자인 등 응용디자인 학과가 소속을 변경하였고, 유아교육과가 신설되었다. 2006년에는 간호학과와 물리치료학과가 신설되었으며 경상대학은 상경대학으로, 자연과학대학은 의생명과학대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또한 2002년교육부 지방대학 육성사업 재정지원대학에 선정되어 동북아비즈니스센터가 설립되고, 같은 해 교육부 외국인유학생 기숙사 신축, 증축 사업비 지원대학에 선정되면서 외국인 유학생 유치, 해외 대학과의 학술교류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 요동대학과 합작대학, 독일 파더본대학 및 중국 청도과학기술대학과의 합작대학을 설립하였으며 영국 웨일즈대학과 학술교류 협정을 맺게 되었다. 특히 2006년부터는 이러한 학술교류가 급증하여 아시아 권역인 중국, 일본,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등과 연결되었으며, 이 외에 영국, 캐나다, 호주, 터키 등과도 학술교류가 시작되어 학생들의 교류 수학이 원활해졌다. 1999년 3월 18일에는 경상관이 준공되어 경상대학이 입주하여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으며, 2001년 12월 7일에는 공학관이 준공되어 공과대학 학생들의 수업 여건이 양호해졌다. 2006년에는 학생회관인 화랑관이 준공되었다. 학생회관의 명칭은 학생들의 인터넷 홈페이지 투표로 선정되었으며, 선정 즉시 명명되었다.

상징[편집]

학교 상징물로는 용마를 주로 활용한다. 학교 정문에 용마상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용마 문양이 학교 이미지로 활용되고 있다. 용마는 전설 속에 나오는 상상의 말로 옛 신라인들이 상징으로 즐겨 사용하던 것을 차용한 것이다. 상징하는 동물은 독수리이다. 교색은 청색이며, 교색은 교표에 활용되고 커뮤니케이션 마크와 로고에는 주로 초록색을 활용하고 있다. 시내(사상역행)와 시외지역(울산, 창원행)의 무료 통학버스에도 커뮤니케이션 로고 전까지는 청색으로 도색되어 있다가 이후 초록색으로 변경되었다.

여자대학 시절 또 다른 이름으로는 수련(睡蓮)이 주로 활용된 바 있다. 수련은 연산캠퍼스 시절 교내에 수련이 가득한 연못이 있었던 것을 모티브로 한 것이며, 이에 따라 학내 구성원을 수련인으로 칭하거나 교지 이름을 수련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는 이후 백양캠퍼스로 이전한 뒤에도 한동안 활용되었다. 신라대학교로 교명이 변경된 뒤로는 신라인으로 활용하는 등 별칭 없이 교명인 신라를 그대로 활용한다.

로고는 최초 부산여자초급대학 시절 2차례 제정된 바 있으나, 널리 활용되지는 못했고 이후 부산여자대학으로 개편된 뒤 다시 제정하여 널리 활용되었다. 미술학과 조무광 교수가 제작하여 1977년 3월 20일에 공포[2] 되었으며, 대학 상징인 수련을 모티브로 대학교의 大자를 꽃잎과 조화롭게 변형하였고 꽃받침 부분은 부산자와 Woman(여자)의 W를 형상화하여 제작하였다.

이후 남녀공학인 신라대학교로 개편한 이후에는 로고를 새로이 변경하였는데, 천마도에서 나온 구름문양과 신라의 영문 이니셜인 S를 유려하게 조합하였으며 종합대학교라는 의미의 영문자 U를 결부시켰다. 또한 여자대학 시절부터 활용된 대학교의 大자를 포함하여 정통성을 계속적으로 유지하였다. 2000년대까지는 교표를 로고로 활용하였고, 최근에는 커뮤니케이션 마크를 새로 제작하여 로고로 활용하고 있다.

교명[편집]

여자대학이었던 1998년 이전에는 부산지역 최초이자 유일한 여자대학으로 부산여자초급대학, 부산여자대학, 부산여자대학교가 차례로 활용되었다. 이후 남녀공학으로 개편되면서 새로운 교명을 정해야 했는데, 교명선정위원회는 교명을 전국 공모하여 2,604건의 응모로 957종의 교명을 제안받았다. 제안받은 교명은 부일대학교(부산 제일의 의미로 159명 응모), 신라대학교(76명), 부영대학교(부산 번영의 의미로 59명 응모) 등이 있었으며 한국대학교, 부산제일대학교, 한민대학교, 낙동대학교, 우주대학교 등이 응모되기도 했다[2].

이들 교명 중 교명선정위원회는 진취성, 참신성, 친근감, 홍보성, 차별성 등에 중점을 두고 3차례의 회의를 거쳐 부영대학교, 동남대학교, 신라대학교, 부일대학교, 해동대학교 등 11점을 선정했다. 이후 해동대학교가 법인 이사회에서 선정되었으나, 다시 교명선정위원회는 해동대학교가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한다고 판단해 이사회에서는 신라대학교를 최종 선정하게 되었다.

신라대학교는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되었고, 찬란한 문화와 함께 국제적인 교류가 활발했던 나라였기에 신라에 지역적, 정신적으로 뿌리를 둔 대학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또한 화랑교육을 통해 훌륭한 인재 양성으로 삼국을 통일했던 전통으로 덕업일신 망라사방의 의미를 통해 전통과 진취적인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발돋움하고자 하는 명칭으로 적절하다고 판단[2] 한 것이다.

한편 종합대학 이전에 쓰였던 부산여자대학이라는 명칭은 신라대학교로의 교명이 변경된 이후 부산여자전문대학(옛 부산여전)이 활용하였으며, 현재는 여자 종합대학 시절의 명칭인 부산여자대학교로 교명을 다시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산여자대학교 문서 참고)

역대 학장·총장[편집]

초급대학 이전인 1964년까지는 대숙의 장을 숙장으로 하였으며, 이후 초급대학에서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기 이전인 1992년까지는 대학의 장을 학장으로 하고, 종합대학 승격 이후 총장으로 승격하여 임명하고 있다. 현재까지는 평교수 이상이 선거권을 가지는 직선제로 총장을 선출하였으나, 다음 치러지는 제7대 총장부터는 직선제가 폐지될 예정이다.

역대숙장 성명 비고
제1대 김도영 1954년 11월 취임
직무대리 김윤주 1956년 5월 취임
제2대 박찬현 1957년 3월 취임
제3대 박해곤 1962년 5월 취임
역대학장 성명 비고
제1대 김홍두 1964년 2월 취임
직무대리 오형근 1965년 7월 취임
제2대 이수응 1967년 6월 취임
제3대 오형근 1973년 2월 취임
제4대 오형근 1977년 4월 취임
직무대리 오형근 1979년 10월 취임
제5대 이윤근 1981년 4월 취임
제6대 한재금 1985년 3월 취임
직무대리 김대륜 1987년 8월 취임
제7대 오태균 1988년 11월 취임
역대총장 성명 비고
직무대리 오태균 1992년 4월 취임
제1대 김무남 1992년 11월 취임
제2대 김용태 1996년 11월 취임
제3대 이병화 2000년 11월 취임
제4대 정홍섭 2004년 11월 취임
제5대 정홍섭 2008년 11월 취임
제6대 박태학 2012년 11월 취임

캠퍼스[편집]

신라대학교의 캠퍼스는 본래 연제구 연산동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교정이 협소하고 도심지로 발달하여 더 이상의 확장이 불가능하여 1994년에 현재의 위치인 사상구 괘법동으로 이전해 왔다. 백양산에 위치한 현재의 캠퍼스는 54만평의 부지로, 약 27만평이 개발된 상태이다.

연산동 구캠퍼스[편집]

정식 학위가 수여되는 부산여자초급대학의 설립인가 당시까지도 연산동에 위치한 부산여자대숙의 시설을 그대로 인계받아 증축하여 활용하였다. 설립인가 당시에는 황령산 기슭에 교지 20,784평, 군 시설물을 개조한 1관에서 5관까지의 교사 996평(24실), 부일여자중학교 부지와 도서관 건물 일대의 운동장 5,250평 등이 학교 캠퍼스의 전부였다.

연산동에 위치한 캠퍼스는 도서관 건물의 기공이 1962년 4월 1일 시작되면서 조성이 시작되었고, 이후 많은 증축과 함께 조립식 건물인 전시관이 1989년 4월 4일 준공되기까지 약 30여년 간 조성이 이루어졌다. 당시만 해도 황무지와 소로길이 전부였던 지역이었지만 서면동래를 잇는 요충지로서 기능하기 시작하면서 연산동 캠퍼스는 도심 속 캠퍼스로 자리잡게 되었다.

연산캠퍼스는 백양캠퍼스로 이전하기 전까지 도서관을 비롯해 총 9개 동에 6,602평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백양캠퍼스가 조성되면서 1991년 3월에 미술계열의 3개 학과가 이전하였고, 1994년 2월 25일에 음악학과가 최종적으로 이전하면서 연산캠퍼스의 9개 건물은 현재 완전히 해체되었다.

백양캠퍼스[편집]

백양캠퍼스 위치
백양캠퍼스 요도

신라대학교는 현재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사상구 백양대로700번길 140(괘법동)에 위치한다. 이 지역은 덕포동과 일부 겹치며, 덕포동 시가지와 인접해 있다. 사상(괘법동) 시가지와는 떨어져 있으나 보행왕래권 내에 위치한다.

대학 이전[편집]

대숙과 초급대학이 막 생겨난 1950년대만 해도 황령산 기슭의 연산동 일대는 부산의 변두리 지역이었다. 온천장서면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운대로 연결되는 교차점이었지만 도로공사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 대학 부지에 가기 위해서는 냇물을 건너고 오솔길을 지나야 했다. 산기슭에는 여러 산마을이 산재해 있었고, 연못이 조성된 구릉지에 불과했다. 특히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전까지 제2관구 군수기지사령부에 소속된 제2보충대 포로수용소로 징발[16] 된 곳이었기 때문에 더욱 개발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연산동 일대에 도로망이 완성되고, 동래서면을 잇는 주 간선도로 등이 발달하면서 연산동 캠퍼스는 자연스럽게 도심지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대에 주거지가 밀집되고, 3만평 규모의 연산동 부지를 가로지르는 도로가 개설되어 장기적인 확장이 어렵게 되었으며 또한 대학의 규모와 학생수가 증가하면서 더 이상 증축이 불가능한 상황에 다다르자, 1970년대 이후 시설 확충을 위한 대학 이전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구서동 산133 일대로 이전을 계획하여 해당 지역 일부를 매입하기까지 했는데, 주위가 주거지로 묶이게 되면서 도시계획상의 차질로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지속적인 대학 부지 확보의 노력 끝에 1983년 11월 12일 현재의 사상구 괘법동 산 1-1번지에 534,074평의 부지에 대해 부산여자대학 이전 도시계획 시설 결정을 신청해 승인받았고, 1차 개발면적 27만평에 대해 1985년 1월 건설부 고시로 승인[17] 되면서 캠퍼스 이전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1985년 4월에는 부산직할시 고시로 도시계획이 승인되면서[18] 대학 이전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위치[편집]

현재 신라대학교가 위치한 백양캠퍼스는 부산광역시의 서쪽인 사상구 백양산 자락에 위치하며, 괘법동 산1-1번지를 위주로 덕포동에도 일부 속하고 있다. 서면 도심지로부터 서쪽으로 약 9 km 가량 지점, 구포역에서 남쪽으로 7 km 지점에 위치하며 부산역으로부터는 북서쪽으로 12 km 가량 떨어져 있다. 신라대학교의 북서쪽으로는 경상남도 김해시 인제대학교가 위치하고, 북동쪽으로는 금정구 장전동 부산대학교, 남쪽으로는 사하구 하단동 동아대학교, 남동쪽으로는 사상구 주례동 동서대학교가 위치한다.

중앙고속도로 종점인 삼락 나들목으로부터 7 km 지점에 위치하며, 남해고속도로 종점 사상 나들목으로부터는 6 km 지점에 위치한다. 또한 경부선 사상역서부시외버스터미널, 도시철도 2호선김해경전철 사상역이 보행 왕래권에 위치하며, 김해국제공항으로부터는 10 km 가량 떨어져 있어 김해경전철을 통해 학교 인근으로 이동할 수 있다. 사상역, 덕포역과는 5 ~ 10분 간격으로 무료 운행되는 통학버스로 이동할 수 있으며, 이 통학버스는 캠퍼스 내부를 순환하여 운행한다. 또한 울산광역시, 양산시, 창원시, 김해시(장유)와는 역시 무료로 운행되는 시외 통학버스로 접근할 수 있다.

자연환경[편집]

백양캠퍼스 순환도로 자연관 뒤쪽에서 공학관 방향을 바라본 모습

캠퍼스는 주로 산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나무, 아카시아, 오리나무 등이 주종이다. 또한 능선 사이의 계곡이 위치하는데, 이 계곡은 백양산 등산로로부터 내려와 글로벌타운, 사범관, 오리연못으로 이어진다. 사범관과 상경관은 이 계곡으로 분할되며 무지개다리로 연결된다. 당초 캠퍼스 부지는 동서방향으로 경사도가 20% 이상의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으며, 남북방향으로는 15% 이하의 완만한 구릉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2001년2004년에는 한국대학신문이 주최한 아름다운 대학캠퍼스에 선정되기도 했다[19].

캠퍼스 조성[편집]

원형배치에서 가장 바깥쪽인 백양기숙사(제1기숙사)의 모습

백양캠퍼스는 원형을 기본으로 구상되었다. 1차로 조성된 미술관, 예음관, 자연관, 인문관, 사범관, 경상관은 중앙의 도서관과 소운동장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내부 · 외부에 순환도로가 조성되어 있다. 또한 사범관과 경상관은 직선으로 건축되어 있지만, 미술관과 예음관, 자연관, 인문관은 이러한 원형배치를 위해 건물 형태도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순환도로와 순환도로를 잇는 도로는 각각 순환삼거리로 연결되어 공학관 로터리, 자연관 순환삼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체육관과 백양생활관, 글로벌타운은 이러한 외부순환도로 바깥쪽에 위치하는데, 1차 조성시기와는 별도로 조성되어 당초 계획된 녹지공간을 건물로 조성한 사례이다. 미술관 뒤쪽의 외부순환도로를 통해서는 신라중학교로 진출할 수 있다.

2차로 조성된 공학관, 화랑관, 마린바이오센터, 의생명관(3호관), 대운동장, X-게임장은 1차 조성된 캠퍼스의 동쪽에 위치하며 화랑관 앞 동산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조성되었다. 현재 완성되지 않았으나, 화랑관 북쪽으로 역시 원형 배열의 건물이 추가로 조성될 예정이며 이를 통해 두 번째 원형 캠퍼스가 완성될 예정이다.

건물[편집]

백양캠퍼스에는 16개동의 건물과 3개의 운동장, X-게임장, 테니스장이 위치하고 있다. 1991년에 최초로 완공된 미술관 건물을 시작으로 자연관, 인문관, 사범관, 예음관 건물이 차례로 완공되었다. 이 때까지 연산캠퍼스의 모든 학과가 이전하였고, 대학본부는 인문관에 위치했다. 이후 종합정보센터(도서관)가 1996년에 준공되면서 대학본부가 종합정보센터로 이전했다. 이후에는 경상관(현재의 상경관, 1999년), 체육관(2000년)이 차례로 준공되었고 공학관(2002년), 백양관(기숙사, 2004년), 화랑관(학생회관, 2007년), 동북아비즈니스센터, 의생명관(3호관), 실습동, 글로벌타운(제2기숙사, 2009년)이 차례로 준공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사범관 뒤쪽으로 제3기숙사가 건립중이며, 신라대학교 캠퍼스 마스터플랜에 의하면 향후 화랑관 앞 뒤로 3개의 건물이, 의생명관 맞은편으로 2개의 건물이, 화랑관 위쪽으로 노천극장과 4개의 건물이 새로 신축될 예정이며 상경관 위쪽으로 박영관(재단본부), 공학관 맞은편 텔레토비동산에는 박물관이 건립될 예정이다. 또한 도서관 앞 소운동장에는 기념관과 중앙극장이, 정문쪽에는 다목적홀과 골프교육장, 전산디자인센터가 자리잡을 예정이다.

마스터 플랜[편집]

신라대학교는 캠퍼스 이전을 위한 토지매입과 동시에 장기적인 발전상의 확립을 위해 "부산여자대학 종합캠퍼스 마스터플랜"을 부산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에 의뢰, 1984년 12월에 발간하였다. 또한 2차 마스터플랜을 건축회사에 의뢰하여 1986년 8월에 발간하였다. 이에 따르면 연면적 53만평 규모의 캠퍼스 부지에 25개의 건물을 건립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는 연구, 강의 등 대학의 본질적인 측면을 강조한 시설의 조성이 대부분 완료되었으며, 학생활동과 대학활동의 진작, 대학기업을 통한 재정 확보 등을 위한 시설들이 계획되고 있다. 최근에는 아래 계획 외에 추가로 7개 가량의 건물이 추가되었다.

학내 기구·부서[편집]

신라대학교는 단과대학, 대학원, 대학본부, 부속기관, 부설기관, 부설연구소, 산학협력단으로 구성된다.

도서관[편집]

백양캠퍼스 중앙에 위치한 종합정보센터 내 신라대학교 도서관은 1층과 2층에 자유열람실, 2층에 정기 간행물실, 3층에 대출실, 4층에 참고논문실과 점자도서실, 신문사보실 등을 갖춘 연건평 3,600평 규모로 1997년 3월 완공되어 현재에 이른다. 2014년 현재 단행본, 학위논문 등 623,981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e-Book, 지도 등 비도서 21,520점, 국내/외 학술지 657종 등을 보유하고 있다.

신라대학교 도서관은 당초 부산여자대숙 숙장이었던 박해곤 숙장(현 박영학원 이사)이 사서삼경 등 한국 고전 2천여 권을 수집하여 기증함으로써 도서실로 시작되었다. 이어 1964년 4월, 초급대학이 출범할 당시에는 동양서 3,200권, 서양서 400권 등 3,600권 정도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연산캠퍼스의 도서관 건물(당시 대학본부 건물) 2층 강의실 1개를 활용하였다. 이어 1966년 3월 2일부터는 도서관으로 승격하여 개관하였고, 도서관장의 임명, 사서보를 채용 등 본격적인 도서관 업무가 시작되었다. 본관이 준공된 1969년부터는 대학본부를 본관으로 이전하고 도서관에 학생열람실과 서고, 참고열람실, 관장실을 분리하여 사용하였다.

박물관[편집]

신라대 박물관은 1982년 3월 1일 개설되어 1984년 12월 4일 창원 삼동동 옹관묘 발굴 유물의 전시와 함께 개관하였다. 박물관에서는 유적의 지표조사, 발굴조사, 학술연구보고서 발행, 유물의 전시 및 문화강좌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전시하고 있는 모든 유물이 구입한 것이 아닌 정식 학술조사를 통한 발굴유물이며, 중석기 시대 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각 시대별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중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의 유물로는 거창 임불리에서 출토한 중석기 시대 세석기 등 37점, 신석기 시대 즐문토기 등 49점이 각각 전시되고 있으며,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는 산청군 지표 수습 마제석검 등 73점, 삼한시대 유물로는 창원 삼동동 옹관묘에서 출토한 옹관 등 91점이 전시되고 있다. 또한 삼국시대 유물로는 산청 중촌리 고분에서 출토한 고배 등 78점,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ㄹ 금동보살입상 등 16점, 고려시대조선시대의 상평통보 등 44점 등 총 388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신라대 박물관에서 조사한 산청 중촌리 유적은 기원 후 4세기 중반에서 5세기 초에 걸치는 가야시대의 밀집 고분군으로, 가야 고분의 변천과정과 횡혈식 석실분의 전파경로 등 가야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창원 삼동동 유적은 기원 후 2세기 중반에서 3세기 말에 이르는 유적으로 마산만과 창원 분지를 터전으로 생활했던 삼한시대 사람들의 분묘 유적이다. 이 유적은 옹관묘를 주축으로 토관묘와 석관묘가 혼재하고 있어, 묘재의 변천과정 및 당시 사회 문화상을 이해하기 좋은 자료가 된다. 또한 거창 임불리 유적은 중석기 시대의 노천 유구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절터 등을 확인, 발굴한 곳으로 한국 고고학 사상 중석기 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유구가 한 유적에서 발견된 최초의 사례이다.

자치활동[편집]

신라대학교의 학생 자치활동은 부산여자초급대학 시기의 학생회 조직으로부터 시작된다. 초급대학 개교 직후인 1966년 5월 20일 학생회장 선거를 치렀으며, 학생회장과 부학생회장, 총무부장, 운영부장, 지도부장, 체육부장, 출판부장과 학예부장의 운영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현재는 전년도 11월에 선거를 치러 구성한다. 2000년대 이후에는 자유, 복지혁명 등의 선거운동본부가 구성되어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부침이 이루어졌으며 2006년경 이후로는 비운동권 학생회가 주도하게 되었고, 현재까지 49대의 학생회가 구성되어 명맥을 잇고 있다.

해오름식[편집]

신라대동제[편집]

2014년 신라대학교 축제에서 신라인의 노래를 열창하는 김연우

매년 5월 중순경에는 대학 축제인 신라대동제가 3 ~ 4일 가량 이어진다. 신라대동제는 총학생회가 주관하고, 단과대학과 학부, 학과가 참여하여 각종 프로그램을 실행한다. 매년 길놀이를 시작으로 실시되며 물풍선터뜨리기, 영상물상영, 사진전시, 가요제, 장기자랑, 각종 축하공연, 동아리 공연 등의 행사가 진행되며 해마다 유명 가수의 공연이 이어진다. 이어서 마지막 날에는 폭죽과 함께 어울림 한마당을 끝으로 축제가 마무리된다. 특히 학교와 인접한 지역에 대학이 많지 않아 유명 가수의 공연에는 많은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과의 경우 전공 특색에 맞춘 주점을 열어 각종 공연을 관람하며 즐길 수 있게끔 하고 있으며, 이에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다.

신라대동제는 부산여자초급대학 개교 당해인 1964년 12월 9일부터 3일간 치러진 것을 시초로 한다. 교직원이 불과 8명에 불과했고, 신입생 282명으로 치러졌던 첫 대동제는 개교 기념행사로 간소하게 치러졌는데, 가정학과의 조화 및 인형전시회, 국문학과의 교내 시화전과 시 낭송회, 보육학회의 음악회, 미술작품 전시회 등으로 치러졌다. 이후 학과 증설과 교직원의 증원으로 개교 기념행사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이 행사는 당초 부산 지역의 대학들이 10월 ~ 11월 경 학생활동에서 축적된 연구성과와 작품 들을 발표하는 학술제를 치렀던 것과 비교할 수 있는데, 신라대는 개교 첫 해부터 시작되면서 학술제보다는 개교 기념행사라는 이름으로 매년 11월 ~ 12월 사이에 이어졌다.

더불어 4회 개교 기념행사부터는 수련축전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행사를 치르게 되었다. 부산 · 경남 지역의 유일한 여자대학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동창회, 교수, 학생을 비롯하여 시내 학생, 시민들이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대대적인 행사로 발전하였다. 이후 수련축전은 축제로서의 행사가 대동제로 이어졌으며, 학술제로서의 행사는 현재 각 학과별로 다양한 프로그램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편집]

예비대학[편집]

예비대학은 각 단과대학별로 입학식 전 신입생들의 학교 적응과 단합을 위해 실시되는 2일 ~ 3일 간의 행사이다. 대개는 경상북도 경주시로 이동하여 행사를 진행하지만, 사범대학의 경우에는 사범관 건물에서 숙식을 하며 캠퍼스 내에서 포스트게임이나 동아리 소개 등의 행사를 진행한다. 지금까지는 주로 총학생회와 단과대학 학생회 주관으로 실시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체육관 붕괴 사고의 여파로 현재는 대폭 축소하여 진행된다.

하계 봉사활동 및 매미학교[편집]

학생복지 및 장학[편집]

복지시설[편집]

신라대학교에는 5개의 학생식당(인문관, 화랑관, 글로벌타운, 미술관, 기숙사)과 1개의 교직원식당, 4곳의 카페(화랑관, 글로벌타운, 국제교육관)와 1곳의 토스트점(국제교육관)이 입점해 있다. 또한 통학버스를 운영하는 여행사가 인문관에 위치하며 꽃집과 책방, 출력소, 화방, 안경점, 우체국, 팬시점 등이 각각 입점해 있으며 복사실은 국제교육관과 도서관에 위치하고 있다. 소비조합인 매점의 경우 인문관, 상경관, 공학관, 기숙사, 화랑관에 위치하고 있으며 편의점인 세븐일레븐이 국제교육관에 입점해 있다.

매점 등의 복지시설은 창학 초기부터 있어왔으나, 수익금이 장학금으로 적립되는 소비조합은 연산캠퍼스 시절인 1987년 9월 1일 오전 11시에 우체국이 있던 자리에 매점이 개설된 것이 시초이다. 당시에는 문구류, 일용 잡화류, 여성용품류, 전자제품류 등을 취급하였으며 졸업생 2명과 판매원 2명, 사무장 1명이 각각 위치하고 있었다. 이어서 연산캠퍼스 식당 자리에 연산캠퍼스 학생회관인 유월관이 신축되면서 소비조합과 휴게실이 새로 설치되었다. 백양캠퍼스로의 이전 후에는 넓은 교정의 각 건물로 분산 배치되었는데, 지금의 모습과 달리 2000년대까지는 사진관과 미용실이 자연관(국제교육관)에 입점해 있었고, 스넥코너가 사범관과 자연관에 위치하기도 했다. 이들은 각각 학내 복지시설 재배치에 의해 폐지되거나 공간을 이동(사범관, 자연관 스넥코너 → 미술관, 화랑관 식당)하게 되었다. 2007년에는 백양캠퍼스의 학생회관인 화랑관이 준공되어 동아리방, 총학생회실과 함께 식당, 매점, 카페, 영어카페 등이 입점하게 되었다.

통학버스[편집]

사상방면 통학버스

신라대학교는 인접한 도시철도 과의 거리가 2 km 가량으로 도보로 약 30분이 소요되며, 의생명관 기준 약 200m 고도에 위치하는 등 대중교통과의 접근성이 떨어져 통학에 어려움이 있다. 이에 학교측에서는 대학 정문 정류장에서 사상역까지 순환하는 통학버스를 45인승 버스로 1일 108회, 5분에서 20분 간격으로 무료로 운영하고 있으며, 특히 고도가 높은 공학관과 의생명관을 순환하는 내부순환 통학버스도 24인승 버스로 운영하고 있다. 사상행의 경우 부산 도시철도 2호선이나 김해경전철이 접속하는 덕포역사상역,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 인접하여 정류장을 마련하고 있으며, 학교 아래에 위치한 버스정류장에도 정차하고 있어 대중교통을 통한 학교로의 접근성을 보완하고 있다.

더불어 창원울산 지역 통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1일 3회의 시외통학버스를 무료로 운영하고 있다. 울산행의 경우 공업탑로터리에 위치한 신정고등학교를 출발하여 신복로터리, 경부고속도로상의 통도사휴게소, 석계정류장, 양산정류장에 정차하고 중앙고속도로를 통해 학교까지 1회 1대에서 3대의 차량이 운영되고 있으며, 창원행의 경우 마산역을 출발하여 창원 시내, 김해시 장유동을 거쳐 학교까지 1회 1대에서 2대의 차량이 운영되고 있다. 특히 창원 방향의 학생들은 학교 인근에 위치한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통해 이동할 수 있는 반면, 울산 방향의 학생들은 부산 도시철도 1호선 노포역까지 이동 후 좌석버스를 이용해 울산 방향으로 이동해야 해 비용이나 시간 측면에서(최소 2시간 이상 소요) 통학버스의 이용이 다소 많은 편이다.

한편 통학버스의 문제는 학교가 백양캠퍼스로 이전한 후 지속적으로 학생회 등을 통해 문제제기가 이루어져 왔다. 시가지에 위치한 연산캠퍼스에 비해 대중교통의 접근성이 미비한 것이 그 이유였는데, 129-1번  · 200번 버스가 교내로 진입할 뿐[주 12] 도시철도의 경우 도보로 20분 ~ 30분 거리에 위치해 이용이 불편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생회 및 학교 측에서는 사상구 마을버스 업체(신라교통)와 협의하여 신라대 학생은 50% 할인된 가격으로 마을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학교 정문 정류장에서 덕포역, 르네시떼, 경부선 사상역, 부산 도시철도 2호선 사상역을 순환하는 사상행 노선과 학교 정문 정류장에서 모라역 방향의 자유아파트까지 운행하는 자유행 버스를 운행하게 되었다. 또한 학교 아래에서 학교로 올라가는 순환 노선을 무료로 운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버스 업자측이 물가인상, 인건비 상승, 학생 이용률 저조 등을 이유로 배차간격을 늘리고 운행시간을 단축하는 등 점차 학생들의 불편이 따르게 되어[2] 운동권이었던 2004년 당시 총학생회에서는 총장실을 점거하는 등의 투쟁을 통해 학교 자체적인 통학버스를 운영토록 합의하였다. 이에 2005년부터는 학교에서 구입한 45인승 버스(사상행)와 24인승 버스(자유행)를 통해 통학버스를 운영하게 되었고, 전면 무료화되었다. 무료화 후에도 사상행은 경부선 사상역과 덕포시장 등을 경유하는 체제로 운영되다가 현재는 부산 도시철도 2호선 사상역만을 경유하는 체제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차량 유지 · 보수에 드는 비용의 과다로 2007년부터는 관광버스 업체에 차량을 임대하여 운영하는 도급 체제로 그 운영 형태가 변경되었다.

장학혜택[편집]

학교에서는 2014년 신입생 전원에게 1인당 100만원씩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수시 1차 모집 및 정시모집 50%이내 합격자에게는 1학기 수업료 3분의 1을 감면하기로 했다. 또한 국가장학금 190억원을 포함해 250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학교 측의 장학금 증가 노력으로 "0원 등록자"가 재학생의 49.8%에 달하고[20], 2/3 가량이 전액 · 부분 장학금 혜택을 받게 되었다.

학내언론[편집]

신라대학보[편집]

신라대학보의 모습

신라대학보사가 발간하는 신라대학교의 학보는 1966년 10월 20일, 부산여대학보를 제호로 하여 4면 국한문혼용체로 발간한 이래 지속적으로 발간해 왔다. 초창기 월간으로 발행되었으나, 1981년 5월부터 격주간으로 변경되었으며, 1985년 6월부터는 4면에서 8면으로 증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8년 3월에는 논설위원 제도를 도입하였고, 당시까지 한자로 표기되었던 제호를 1969년 4월에 한글로 변경하였다. 또한 1974년에는 편집부가 편집국으로 승격되었고, 1988년 9월에는 세로쓰기였던 편집체제를 가로쓰기로 전환하였다. 이어서 1998년에는 제호를 신라대학보로 변경하였다.

창간 당시인 1960년대1970년대에는 언론 자율적 성격이 다소 부족한 학교 홍보지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21]. 학보의 내용도 교내 뉴스, 교수 및 학생 논단, 행사 특집, 학생 문예작품 등이 주류를 이루었고 투고하는 사람도 교수와 학생에 머물렀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교내를 벗어나 일반 사회나 정치 문제까지 기사로 등장하였고 외부 인사의 글도 학보의 일부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학보사는 매년 "전국 고등학생 문예작품 현상모집"을 실시중에 있는데, 최초 전국 여고생을 대상으로 하여 실시해 오다가 남녀공학으로 전환 후 고등학생 전체로 범위를 확대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학내 분위기에 맞추어 학우 대중에 가까이 다가가는 지면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이에 학내 복지, 진로, 대학 경쟁력 강화방안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 또한 남녀공학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후에는 신라대학보로 제호를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1999년에는 신라대학보가 교육부를 비판한 기사를 발행하려 하자[22] 학보가 배부될 경우 교육부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학보 7천여부의 배부를 중지시킨 일이 있었다. 이는 지방대학에 관한 교육정책과 학교측의 무대책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학교측은 학보 배부중지 문제를 학내 여론화 할 경우 주간교수 등 5명의 사표를 받겠다고 한 뒤, 대자보를 붙인 1999년 5월 19일, 주간교수인 송 모 교수로부터 사표를 수리해 새 주간교수로 유 모 교수를 임명했다. 학보사는 "문제의 기사가 명지대, 중앙대 등 타 대학 신문에 실린 내용과 같은 맥락인데도 학교측이 배부를 거부한 것은 학생들의 알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 주장했으며, 학교측은 "3면 기사의 내용은 그렇다치더라도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발행인인 총장이 배부를 중지시킨 것"이라며, "편집국장과 해당 기자 등 2명은 문책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23].

이후 학교측은 학보 배부중지 4일째인 1999년 5월 21일에 기사에 대한 아무 수정 없이 학보를 배부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학보 편집위원들의 뜻에 따라 총장이 결정한 사안으로, 7천부는 이상없이 배부되었다[24].

신라[편집]

신라대학교 교지 "신라"의 화랑관 로비 배부대

1966년 4월 최초로 발간된 신라대학교의 교지는 당시 학교에서 주로 활용되었던 수련을 제호로 하여 시작되었다. 연 1권 발간되었으나, 1993년부터는 두 권씩 발간되었다. 현재는 신라로 명칭을 변경하여 발간하고 있다.

1960년대에는 초급대학 시절의 교지로, 학생논단과 실습보고, 교수논단, 시화, 수필, 창작소설 등이 주류로 논단 및 문예창작 발표지의 성격이 강하였다. 이후 1970년대에는 "민족과 역사의 증인으로서 진리와 자유를 지켜나가고 참된 대학문화의 재건이라는 절실한 사명 또한 수련의 광장에서 이룩되는 지적 활동으로부터 출발하여야겠습니다."라는 수련 8집(1973년)의 발간사와 같이 대학 문화의 재건과 지적 활동, 사회의 문제의식을 담고자 했다.

이후 1980년대에는 인간, 문화, 사회의 각 분야로 관심을 넓혀 수련 14집(1980년)에는 인간회복을, 17집(1982년)에는 인간의 탄생을 특집으로 다루고 18집(1983)에서는 인간을 특집으로, 부산문화 진단을 기획으로 다루었다. 또한 20집(1985)에서는 자유와 도시, 농촌을 특집으로 다루는 등 점차 관심이 사회 각 분야로 넓어짐을 알 수 있다. 또한 1985년 학생회의 부활, 1987년 민주화운동 등을 겪으면서 인간, 노동, 여성해방, 통일, 학내민주화 등의 이슈로 시각이 다양해지기도 했다.

방송국[편집]

교내 교육방송국은 부산여자초급대학 신문방송학과가 개설된 1965년 2월 1일에 개국하였다. "뜨거움, 그리고 사랑"이라는 국훈 아래 실시되고 있으며, 호출부호는 SLUB(SilLa University Broadcast)로, 부산여자대학 시절 사용되었던 PWUB(Pusan Woman's University Broadcast)를 남녀공학 개편을 맞아 1998년 3월 2일에 변경한 것이다.

교육과정[편집]

신라대학교의 교육과정은 교양과정, 전공과정, 교직과정, 자유선택과목, 공학인증과정으로 구분하여 운영된다. 교양과정은 기본적 소양을 함양하기 위한 과정이며, 전공과정은 과목 특성과 과목 상호간의 이수 순차 등을 충분히 고려하여 편성된 교과과정이다. 교직과정은 중등학교 2급 정교사, 사서교사, 영양교사, 보건교사, 특수학교 교사 자격증의 취득을 위한 교과과정이며, 공학인증과정은 공학교육인증에 참여하기 위한 이수과목이다. 기타 관련이 없거나 자유선택으로 인정하는 과목은 자유선택과목으로 인정한다.

교양교육과정은 기초필수교양과 선택교양과목으로 구분하며, 기초필수교양은 세계화, 실용화, 인간화 영역으로 구분하여 이수한다. 세계화 영역에서는 학교에서 개발한 교육프로그램인 SEP(Silla ENGLISH Program), SJP(Silla JAPANESE Program), SCP(Silla CHINESE Program)을 이수하게 되며 각 언어별로 3개 단계가 개설된다. 또한 전공과정은 다전공(복수전공, 연계전공)을 하는 경우 복수의 학위를 인정하며, 부전공은 개설 과목 중 21학점을 이수하면 부전공으로 인정한다. 주전공으로만 졸업하는 경우에는 다전공, 부전공자보다 많은 학점을 이수해야 하며, 78학점 이상 이수할 경우 심화과정 이수자가 된다. 조기졸업 대상이 아닌 인원은 4년제 학과는 8학기 이상, 5년제 학과인 건축학부 건축학전공은 10학기 이상 등록해야 졸업할 수 있다.

학부 개설과정[편집]

2015년 학부 개편으로 9개의 단과대학과 1개의 독립학부가 운영되고 있다. 이번 개편으로 지리학과, 철학과, 공예학과가 폐지되었다.

석·박사 개설과정[편집]

대학원 석사과정은 4개 대학원으로 운영되며, 교육학사회복지분야 박사과정은 일반대학원에 개설된다.

특화 분야 및 각종 특성화 사업[편집]

부산 유일의 사립 사범대학 보유[편집]

신라대학교는 부산대학교를 제외하고 부산광역시 내 사립대학 중 유일하게 사범대학을 보유한 대학[25] 으로, 4년제 대학으로 시작한 1970년대 이래로 교육학 · 국어 · 영어  · 수학 · 역사 · 일본어 · 컴퓨터 · 유아교육의 각 전공이 두루 설치되어 있다. 부산여자대숙으로 개교 당시부터 보육에 관심을 가져 유치원을 개설하려 했었으며(초급대학 시기 개설), 여느 사립대와는 달리 일찍이 부속 중등학교를 설치하였고(초급대학 개교 4년 후인 1968년 부일여자중학교 개교), 부산여자초급대학에서 4년제로 승격을 신청할 때 일반대학이 아닌 "부산여자사범대학"으로 인가를 신청하기도 했다[2](교사 수급정책과 관련하여 계획대로 인가되지 못함).

또한 신라대학교 사범대학은 사립 사범대학 졸업(예정)자, 비사범계 학과 졸업(예정)자를 대상으로 1977년부터 실시된 중등교사 순위고사에서 초창기부터 우수한 성적을 보였다[2]. 이는 여대로서 교직을 선호함과 동시에 비사범계 학과 재학생 중 90% 이상이 교직과정을 이수하고 있었던 특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1977년에는 42명이 지원하여 90% 이상이, 1978년에는 29명이 합격, 1979년에는 경남 지역에서 지원자 40명 중 36명이 합격하였고, 당시 부산 지역에서 수석과 차석을 배출하기도 했다. 1980년에는 112명이 합격하는 등 1980년대 들어서는 교원수급 정책과 맞물려 신청자의 90% 이상, 100여명 이상의 합격자가 배출되기도 했으며, 선발예정 교원 인원 수가 급감한 최근에도 연 30, 40여명 이상의 합격자가 배출되고 있다[2].

수험 지원시설인 제1정진관, 제2정진관 등을 비롯해 사범대학에서 주관하는 각종 임용시험 대비 특강 등 학교측의 지원에 의해 80% 이상의 인원들이 2개 이상의 중등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있으며[25], 부산광역시 내 유일하게 설치된 일어교육과의 경우 부산지역 합격자의 대부분이 신라대학교 출신이다[25]. 또한 교육부가 실시하는 사범대학 평가에서 지속적으로 "우수" 이상의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 최근 평가에서는 A ~ C 등급 중 B등급(현행유지)을 받았다[26].

최근 취업률 하락에 따른 사범대학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국어교육과와 영어교육과, 수학교육과가 "신라 창의융합형 교육인재양성사업단"을 발족하여 국어, 영어, 수학의 교과융합형 교육자 양성과 다문화융합형 교육자를 양성하고 있으며, 교육부에서 주관하는 지방대학 특성화 사업에 선정되어 해외 교육탐방, 해외 교육실습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참여하는 학생들에게는 포인트제를 통해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27].

국제 교류-협력 사업[편집]

1985년 5월 25일 대만의 실천가정경제대학과의 자매결연을 시작으로 1987년 6월 23일에는 미국 린치버그대학과의 자매결연 등 많은 해외 학교와의 자매결연이나 학술교류가 이어져 왔다. 특히 2001년 이후 국제교류, 협력사업을 적극적으로 계획하여 2002년 9월에는 국제교류부(현재 국제교류팀)를 설치하여 구체적으로 실천해 왔다. 주로 해외 자매대학의 확대, 외국인 교수의 확충, 외국인 유학생의 유치, 다양한 국제교류 프로그램 개발 등으로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사건사고[편집]

교육학과 안상연 학생 구속 사건[편집]

1988년 8월 27일자 부산여대학보는 9면에 루이제 린저북한 기행문인 《또 하나의 조국, 주체사상의 나라 북한을 가다》의 서평을 200자 원고지 20장 분량으로 실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필자인 안상연(21, 교육학과 3학년) 학생이[주 13] 북한주체사상을 찬양 · 고무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9월 3일 오전 10시에 연행하였으며, 9월 7일 밤 11시 10분께 구속하였다[28].

이에 대해 부산여대학보사 기자 17명은 9월 3일 오전 성명을 발표하여 "한국일보부산일보 등 언론에서 책을 소개하려고 쓴 서평을 마치 김일성주체사상을 소개하려는 의도로 몰아붙여 왜곡 보도했다"고 주장하였으며, 또한 "루이제 린저의 저서는 기본 사상이 북한을 바로 이해하자는 데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해당 입장을 논의 끝에 실었으며, 이 책에 대한 소개는 여러 대학신문에 나온 것"이라며 강력히 항의했다. 또한 전국 대학신문 기자 연합(전대기련)에서는 9월 8일 성명을 발표, "부산여대학보에 실린 서평 기사에 대해 필자를 구속한 것은 대학언론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항의하기도 했다[29] .

또한 서울대학교 학생 1백여명은 9월 15일 서울대학교 교내 도서관 입구 민주광장에서 "대학언론 탄압 분쇄 결의대회"를 갖고 대학신문에 주체사상에 관한 소개논문을 제개한 서울대학교 학생 최연구(22, 사회학과 4학년)와 부산여자대학교 학생 안상연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들은 "정부당국이 학문적 논의를 공권력으로 봉쇄하고, 민족 통일과 자주화를 위해 노력하는 대학언론을 좌경, 용공으로 매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30].

청소 용역 노동자 단식농성[편집]

2014년 2월, 신라대학교 청소 용역 노동자 40명은 '직접고용'과 '부당한 근로조건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대학 이사장실 앞에서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또한 사범관 옥상에서의 농성, 대학본부(도서관) 앞에서의 단식농성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전원은 새 용역업체로부터 근로조건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용계약 만료 통보를 받았다. 이 통보는 2월 27일에 이루어졌고, 휴대전화 메시지로 "연차, 동하계 휴가, 명절 및 여름휴가 상여금 60만원 반납과 청소업무 범위 확대 등의 조건을 수락하지 않으면 다시 고용하지 않겠다"고 전달되었다[31].

이에 부산지역 진보정당과 시민단체 등은 3월 31일 오전 대학본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신라대 청소노동자 직접고용 실현을 위한 부산지역 대책위원회"를 출범시켰다[32]. 이들은 "청소노동자를 직접 고용하지 않고, 용역업체에 위탁하여 1년 마다 용역업체를 바꾸거나 계약을 다시 해 고용불안과 근로조건 단절을 야기했기 때문"이라며 직접고용을 요구했다.

학교측은 "청소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면 예산이 늘어나고, 학생들의 등록금이 오를 것"이라고 주장했고, 대책위는 "관리자 역할만 하는 용역업체를 두는데 용역비의 27%가 들어가며, 약 1억 8천만원을 불필요하게 용역업체에 헌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신라대 사무처 관계자는 "직접고용은 정부가 분위기를 조성하면 학교도 정책적으로 추진하겠지만, 다른 대학들도 청소를 용역업체에 맡기는 실정에서 우리만 하기는 무리가 있다"고 밝혔다[33].

사태가 계속되는 중 농성 80여일 만인 2014년 5월 13일, 청소용역업체가 바뀌어도 청소노동자들의 고용과 임금 등 근로조건을 불이익 변경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합의가 이루어짐으로써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또한 노조와 대학 사이의 고소, 고발 등을 취하하고 장기농성 등 갈등 과정에서 만들어진 민형사상의 책임도 묻지 않기로 했다.

주요 행사[편집]

백양캠퍼스 구 자연관 앞 벚꽃(2007년 4월)
  • 신라대 벚꽃축제
2010년부터 매년 대동제에 앞선 4월에는 캠퍼스 순환도로를 따라 심어진 900여 그루의 벚꽃이 만개해 총학생회 주관으로 벚꽃축제를 진행한다[34]. 특히 이 날은 화전 만들기 등 외국인 유학생 위주의 행사들이 진행된다[35].
  • 거짓말 안 하는 정치인 BEST 5 선정
국제관계학과는 지난 2004년부터 매년 거짓말 안 하는 정치인 BSET 5를 만우절에 선발, 발표해 왔다[36]. 그러던 중 국회의원 총선거에 근접한 2012년 4월 1일 거짓말 안 하는 정치인을 발표한 이후 연제구에서 출마한 민주통합당 김인회 후보가 새누리당 김희정 후보를 허위사실유포로 고발하면서 더 이상 행사를 실시하지 않게 되었다. 새누리당 김희정 후보가 국회의원 시절이던 2008년에 거짓말 안 하는 정치인으로 선정되었는데, 이것이 국제관계학과 교수와 학생들이 선정한 것인데도 마치 전국의 대학생이 모두 참여한 결과인 것으로 오해하도록 홍보했다는 것이다. 이에 김희정 후보는 선거관리위원회에 질의 후 문제 없다는 결론을 확인한 것으로,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37].

대외 평가[편집]

  • 학부교육 선도대학(ACE) 부산·경남지역 유일 선정
소위 "잘 가르치는 대학"으로 불리는 학부교육 선진화 사업(ACE사업, Advancement of College Education)에 부산·경남 지역에서 유일하게 선정[38] 되었다. 학부교육 선도대학 선정은 정부가 연구에 치중한 재정지원사업의 한계를 극복하고, 학부교육이 우수한 대학을 집중 육성하기 위해 추진한 사업이다. 전국에서 11개 대학이 선정되어 소위 "잘 가르치는 대학 BEST 11"로 홍보하고 있는 신라대는 2010년에 1기로 선발되었으며, 4년간 120억원의 국고를 지원받았다.
  • 정부 재정지원 제한대학 선정
2013년 8월에 신라대학교가 정부재정지원 제한대학으로 선정되었다. 이에 따라 2014년 한 해 동안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지원사업에 참여할 수 없고, 보건의료분야와 사범계열의 정원 증원 자격이 제한되었다. 취업률과 재학생 충원률, 전입교원 확보율, 교육비 환원률 등의 4대 절대지표는 기준을 충족했지만, 나머지 평가지표와 정원 감축이 많지 않아 재정지원 제한대학에 선정된 것이다[39]. 하지만 신라대는 정부재정지원 제한대학으로 선정되었음에도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의 2013년 대학기관평가인증에 합격하고[40], 대학 특성화 사업(CK사업)에 2개 사업단이 선정[41][주 14] 되는 등 평가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 해외취업 특성화 대학
신라대학교는 "해외취업이 강한 대학"을 캐치프레이즈로 하고 있으며, 해외취업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방향으로 운영하고 있다[42]. 해외취업에 초점을 맞춘 학과들을 모아 글로벌비즈니스대학을 2015년부터 신설할 예정이며, 학부교육선진화(ACE) 사업 이후 중국, 호주, 일본, 인도네시아, 미국 등 17개국에 800여명의 인턴이 파견되어 있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정규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또한 총장이 직접 인도네시아 등을 방문해 상공인 단체와 기업체들을 찾는 등 전반적인 교육성과를 실질적인 취업률 향상으로 연결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42].

같이 보기[편집]

재단 소속 중학교로, 여자대학 시절 여자중학교(부일여자중학교)였다가 대학이 남녀공학이 되면서 중학교 역시 남녀공학으로 변경되었다. 신라대학교 부설 어린이집과 같이 개교 당시부터 사범대학의 부설 중학교 역할을 했다. 축구부는 부산 아이파크 유소년클럽(U-15)에 가입돼 있다.
학교와 가장 인접한 부산 도시철도 2호선전철역으로, 1999년 6월 30일 개통하였다. 착공 후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강선대(부산여대)로 가역명이 붙어 있었으나, 개통 전 덕포(신라대)역으로 변경하여 개통하였다. 학교측은 2009년 1월 10일 부산교통공사의 부역명 판매 정책[주 15] 에 반발해 동아대, 동서대, 경남정보대와 함께 병기에서 제외키로 결정하여 부역명이 삭제되었다[43].
2003년 10월 24일에 개봉한 용이 감독의 로맨스 영화로, 배두나김남진이 주연을 맡았다. 신라대학교 도서관이 배경으로 활용되었으며, 영화에 참여한 윤종신과의 인연으로 학교 캠퍼스송인 신라인의 노래(꿈, 사랑 그리고 한 가지)를 작곡하기도 했다[44].
2007년 7월 12일에 개봉한 손태웅 감독의 공포 영화로, 한지민오태경, 온주완 등이 주연을 맡았다. 신라대학교 공학관 엘리베이터 복도와 소운동장이 활용되었다.
부산전자공업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신라대학교 교육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총장으로 재직했다[45].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참여정부 기간 중에는 장관급 교육혁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임한 바 있다[46]. 교육혁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임하면서 3불 정책(고교 등급제 금지, 기여 입학제 금지, 본고사 금지)에 찬성하고, 교원평가나 성과급 차등 지원에 대해서도 찬성하는 정책을 유지했다[47]. 8년 간의 총장직에서 물러나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으로 귀촌하여 된장농원인 "돌담마을"을 운영하고 있다[48]. 2014년에는 부산광역시 교육감으로 후보 등록했으나[49] 중도성향 후보 단일화 후 사퇴했다[50].
2013년박근혜정부해양수산부 초대 장관에 임명되었으나[51] 국무총리의 해임건의안을 통해 해임된 장관이다. 부산여고와 부산여대 지리교육과(현재의 신라대학교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학교에서 지리학으로 석 ·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에는 한국해양수산개발원에 입사해 16년 동안 연구에 매진한 학자로, 연안관리와 해양환경에 대해 주로 연구했으며 경희대학교한성대학교, 충북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당초 출장비 허위청구 부분 말고는 별다른 논란이 없었고, 오히려 대통령인 박근혜의 총리, 장관 후보자 중 유일하게 인사검증의 무풍지대로 손꼽혔지만[52] 청문회 과정에서 불성실한 태도와 계속되는 "모르겠다" 발언으로 자질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53]. 그러다 여수 GS칼텍스 송유관 충돌 사고에서 늑장방문, 코를 막으면서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발언[54] 등으로 여론이 더욱 악화되었고, 1차 피해자는 GS칼텍스라는 발언과 답변 도중 웃음을 보이는 등의 태도 등이 문제가 되어[55] 결국 경질되었다[56].

바깥 고리[편집]

각주[편집]

내용주
  1. 당시 박영택이 소유했던 초량 주변 토지 1만 5천평, 부산진시장 남쪽 토지 2만평은 이미 개발된 지역이었고, 자성대 인근에 소유했던 1만평은 해안 요지였다. 또한 범일동에 위치했던 조선방직회사 부지 1만평도 구입하였으며, 당시에는 산간벽지와 같았던 연산동 일대의 땅 2만평을 헐값에 매입하였다. 이들 토지는 시대의 흐름과 함께 개발되어 지가가 상승하였고, 후에 부산여자대학의 재정적 기반이 되었다.
  2. 가정과는 1학년 때 국어, 영어, 문화사, 철학, 자연과학, 제2외국어, 체육, 가사개론, 경제원론, 법학개론, 심리학개론, 미학, 영양학, 음악 등을 교육하였고 2학년 때 미학, 영양학, 식품학, 가사경제, 논리학, 피복학, 주택, 육아법, 위생학, 간호학, 가정관리, 교육방법, 요리실습, 수예 등을 교육하였다.
  3. 보육과는 1학년 때 국어, 문화사, 자연과학개론, 철학개론, 아동학, 제2외국어, 체육 등을 교육하였고, 2학년 때 아동심리, 보육일반, 교육학개론, 교육사, 위생학, 심리학, 아동발달사, 의학일반, 가정학, 음악, 창법 등을 교육하였다.
  4. 영문과는 1학년 때 일반영어, 제2외국어, 문화사, 철학개론, 영문법, 영작문, 영어회화, 국문학특강, 생활영어 등을 교육하였고, 2학년 때 현대영어산문, 영문학사, 영문학개론, 영어강어, 문학개론, 영어회화, 현대영문학, 고전영문학, 희곡 등을 교육하였다.
  5. 상과는 1학년 때 일반국어, 일반영어, 문화사, 자연과학개론, 철학개론, 제2외국어, 체육, 상업일반, 영작문 등을 교육하였고, 2학년 때 상업개론, 경제원론, 미학개론, 법학개론, 심리학, 회계이론, 경제사, 부기이론, 통계학, 무역론, 상업영어 등을 교육하였다.
  6. 학교설립계획서에는 가정과, 보육과, 영문과, 상과 각각 2개 학급씩 400명 정원으로 신청하였으나 200명으로 감해 인가되었다.
  7. 한국전쟁 당시 부산 거제리 지역에 만들어졌던 포로수용소가 확장되면서 연산동서면까지 그 영역에 포함되었다. 이 때 박영학원이 부산여자대숙의 캠퍼스로 활용코자 했던 지역이 군에 징발되게 된다.
  8. 현재는 전문대학이 그 기능을 하고 있다.
  9. 현재의 연산동 이마트 위치이다.
  10. 당시 부일여자중학교는 현재의 연산동 경동메르빌아파트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2004년에 현재의 괘법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해당 지역에 위치했다.
  11. 1967년 5월 15일에 있었던 박영학원 이사회
  12. 현재 학교로 진입하는 62번 시내버스의 경우 학교 아래 버스정류장까지만 운행하다가 2004년 5월 9일부터 교내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13. 안상연 학생은 1967년 7월 27일생으로, 시민단체활동가로 활동중이다. 86학번으로, 4학년으로 복학하여 1994년 2월에 졸업하였다. 현재 민주노동당 중앙위원이고 빛고을생활협동조합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2004년광주 동구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후보가 되었으나, 낙선하였다.
  14. 신라대는 "글로컬 일자리 창출을 위한 창의, 융합형 교육인재 양성사업"(국어교육, 영어교육, 유아교육), "동남권 현장밀착형 바이오헬스산업 전문인력 양성사업" 등 2개 사업을 통해 12억을 지원받게 되었다.
  15. 부산교통공사는 당시 가격으로 부역명 병기에 4,000만원 ~ 5,000만원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주역명으로 사용되고 있는 부산대역, 교대역, 동의대역, 경성대부경대역 등에는 요구하지 않고, 하단역(동아대), 냉정역(동서대 경남정보대), 덕포역(신라대) 등에 붙은 부역명만 판매하였다.
참조주
  1. 신라대 창학 50주년 23일 학생회관 기공, 동아일보, 2004년 9월 20일
  2. 신라대학교 50년사, 2004년 11월 6일 발행
  3. 각종학교재단, 실태조사 시작, 동아일보, 1957년 4월 16일
  4. 문고대 제393호, 부산여자대숙 인가서, 1955년 2월 16일
  5. 부산여자(실업)초급대학 인가승인신청서, 1963년 11월 16일, 이사장 박해곤
  6. 문교대1041.1-156호, 부산여자초급대학 설립 인가(지령)서, 1964년 1월 20일
  7. 문교대1041.2호, 지령서
  8. 문교대10413-130호
  9. 부일여자중학교 설립 인가신청서, 1967년 9월 5일
  10. 문보행1041.1-884호, 부일여자중학교 설립 인가서, 1967년 10월 28일
  11. 박영 제133호, 부산여자(사범)대학 설립 인가 신청, 1969년 6월 21일
  12. 대관104101-1462호, 지령서, 1969년 12월 27일, 문교부장관
  13. 1979년 1월 18일, 문교부장관
  14. 대학 제1041-1710호, 1981년 11월 25일, 문교부장관
  15. 종합대, 단과대 구분의 폐지에 관한 교육법 개정에 따른 후속조치, 1992년 3월 11일, 교육부장관
  16. 징발부동산 반환지시 전화통지문, 1955년 12월 16일 15:00, 제2관구 군수사령부 정재두 중위 → 심영배 소위
  17. 건설부 고시 제21호, 1985년 1월 17일
  18. 부산직할시 고시 제74호, 도시계획 결정 지적고시, 1985년 4월 12일
  19. 아름다운 캠퍼스 10선 선정, 2002년 5월 27일, 한국대학신문
  20. 신라대 재학생 2명중 1명 전액장학생, 2013년 12월 19일, 파이낸셜뉴스
  21. 신라대학교 50년사, P425
  22. 교육부의 지방대학 죽이기 정책, 1999년 5월 18일, 신라대학보 제391호 3면
  23. 신라대, 교육부 비판한 학보 배부 중지, 1999년 5월 20일, 연합뉴스
  24. 신라대 '교육부 비판' 학보 배부 결정, 1999년 5월 21일, 연합뉴스
  25. [부·울·경 대학 유망학과] 신라대학교, 부산일보, 2008년 12월 16일
  26. ‘사범대학 평가’ 고대·동국대등 8개大 ‘A’, 파이낸셜뉴스, 2010년 8월 27일
  27. <총장에게 듣는 대학 강점과 입시 전형> ⑨신라대
  28. 루이제린저北韓(북한)방문기 독후감 쓴 女大生(여대생)구속, 동아일보, 1988년 9월 9일
  29. 서평 쓴 여대생 연행, 1988년 9월 4일, 한겨레신문
  30. '필화 구속학생' 석방 요구, 1988년 9월 16일, 한겨레신문
  31. 신라대 청소노동자 농성사태 극적 타결, 2014년 5월 13일, 한겨레신문
  32. 신라대 청소노동자 철야농성 30일째…대책위 출범, 2014년 3월 31일, 뉴시스
  33. 신라대 청소노동자 대량해고, 꼬여가는 갈등, 2014년 3월 31일, 오마이뉴스
  34. 신라대 4일 벚꽃축제…총학 출범식도, 2013년 4월 2일, 연합뉴스
  35. 신라대, 외국인유학생 화전놀이 등 ‘벚꽃축제’, 2014년 3월 31일, CNB뉴스
  36. 신라대 교수 및 학생, '거짓말 안 하는 정치인 BEST5' 발표, 2012년 3월 29일, 뉴시스
  37. "허위사실 유포했다" 정의화, 김희정 후보 피소, 2012년 4월 7일, 뉴시스
  38. 김영식 ACE대학협의회장, "잘 가르치는 대학 50개로 늘려야", 2014년 3월 9일
  39. 신라대 정부 재정지원 제한…"학생 혜택 노력", 2013년 8월 29일, 연합뉴스
  40. 정부지원제한 4개 대학 대교협 인증은 통과라니, 2013년 12월 28일, 서울신문
  41. 정원감축이 가른 대학특성화 사업, 연고대 탈락의 수모, 2014년 6월 30일, 베리타스알파
  42. 신라대, 해외취업 특성화 대학으로 발돋움., 2014년 3월 19일, 한국대학신문
  43. 부산지하철 ‘역명 확보’ 전쟁, 2009년 7월 14일, 파이낸셜뉴스
  44. [가을 캠퍼스 명소]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지금, 난 학교로 간다~", 2004년 10월 9일, 부산일보
  45. <연합인터뷰>신라대 제4대 정홍섭 총장, 2004년 12월 18일, 연합뉴스
  46. 신임 교육혁신위원장 정홍섭 신라대 총장, 부산일보, 2007년 2월 9일
  47. 교육혁신위원장, "3불정책 반대는 대학의 이기심", YTN, 2007년 3월 25일
  48. 인간의 선한 본성·가능성 일깨워 성장 돕는 게 참교육, 법보신문, 2014년 2월 19일
  49. 정홍섭 전 신라대 총장, 부산시 교육감 출마 선언, 경향신문, 2014년 2월 12일
  50. 부산교육감 중도그룹 후보 3인 단일화…과정도 결과도 '신선', 2014년 4월 1일, 국제신문
  51. 해양수산부 장관 내정자 윤진숙 누구인가, 2013년 2월 17일, 연합뉴스
  52. 윤진숙, 유일한 '검증 무풍지대', 2013년 2월 25일, 서울신문
  53. 윤진숙 청문회 논란…누리꾼 갑론을박, 2013년 4월 3일, 지디넷코리아
  54. 윤진숙, '여수 기름띠' 현장 방문 논란…누리꾼 '부글부글', 2014년 2월 3일, 머니투데이
  55. 윤진숙 장관 발언, “여수 기름 유출 피해자 GS칼텍스”...네티즌 비난 봇물, 2014년 2월 5일, 조선일보
  56. 눈시울 젖은 윤진숙 퇴임사… 후임 '속전속결 인사', 채널A, 2014년 2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