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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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德壽宮)
대한민국 대한민국사적

덕수궁 전경
종목 사적 제124호
(1963년 1월 18일 지정)
면적 67,048㎡
시대 조선 시대
소유 국유
위치
덕수궁 (대한민국)
덕수궁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좌표 북위 37° 33′ 57″ 동경 126° 58′ 29″ / 북위 37.565758° 동경 126.974801° / 37.565758; 126.974801좌표: 북위 37° 33′ 57″ 동경 126° 58′ 29″ / 북위 37.565758° 동경 126.974801° / 37.565758; 126.974801
연결 http://www.deoksugung.go.kr/
정보 문화재청 문화유산 정보

덕수궁(德壽宮)은 서울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조선 시대의 궁궐로서, 대한민국의 사적 제124호이며 면적은 63,069㎡이다. 원래의 면적은 현재보다 넓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축소되었다.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조선 초기 세조가 남편을 잃고 궁궐을 떠나는 맏며느리 수빈 한씨(인수대비)를 가엽게 여겨 개인 사저로 마련해주었고, 이후 한씨의 차남 자산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어 궁궐에 들어가자 장남인 월산대군이 물려받았다. 임진왜란 뒤 선조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는데,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1623년에는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또한,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곳이기도 하다. 1897년(고종 34)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큰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905년 즉조당(卽祚堂)·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다. 1906년 대안문(大安門) 이 수리된 뒤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고 정문으로 삼았다. 1907년(순종 1) 순종 즉위 후 고종은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1] 1611년 ~ 1615년에는 조선의 정궁, 1897년 ~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다.

이름[편집]

덕수궁이란 이름은 조선 시대 초부터 있었던 이름으로, 양위태조의 소어궁(所御宮)을 정종개성에 건립하여 덕수궁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태종서울로 재환도하여 지금의 창경궁 부근에 태조의 궁을 현재의 덕수궁은 본래 세조의 큰아들인 의경세자 장(懿敬世子 暲)의 큰아들, 즉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의 개인 저택이었다. 의경세자는 20세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부인인 수빈 한씨(인수대비)가 출궁하게 되자 나라에서 이 집을 지어 주고 두 아들과 함께 살게 하였다.

월산대군의 아우인 자을산군(者乙山君)이 성종으로 등극하면서 그의 어머니인 한씨도 입궐하게 되어 월산대군만이 거처하게 되었다.

행궁 시기[편집]

월산대군이 사망한 지 104년이 지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다. 의주로 난을 피하였던 선조가 1593년 음력 10월 한성으로 돌아와서 승하할 때까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 거처지로 사용하였다.

광해군 시대[편집]

광해군은 1611년(광해군 3) 음력 10월 11일 창덕궁으로 이거(移居) 하면서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 지었다. 원래는 흥경궁(興慶宮)으로 하고자 하였으나, 광해군이 “이것은 전대의 궁호이니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합당한 궁호를 여러 개 써서 아뢰라.”라고 하였으므로, 경운궁이라고 이름 지었다.[2] 광해군은 창덕궁에 약 2개월간 거처하다가 그해 음력 12월 경운궁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는 창덕궁에 거처하였던 노산군(魯山君)과 연산군(燕山君)이 그곳에서 폐위되어 불길한 궁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다시 창덕궁으로 이거 하게 된 것은 1615년 음력 4월이었으며, 창덕궁·창경궁 등의 중건은 크게 진척시키면서도 경운궁은 영건공사에서 제외되어 그저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1618년에는 그의 계모(繼母)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경운궁에 유폐(幽閉)하고 대비의 칭호를 폐지하였으며, 경운궁은 서궁(西宮)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는 경운궁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620년에는 건축되었던 궐내아문(闕內衙門) 등을 허물고 그 재목과 기와를 내사(內司)로 옮기니 이 궁은 더욱 퇴락하게 되었다. 1623년 음력 3월 서인(西人)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 등이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陵陽君)을 추대하고 반정(反正)을 일으켜 인목대비의 명으로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仁祖)이 등극하게 되자 인조는 경운궁 별당에 행차하여 인목대비를 찾아뵙고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이 궁에서 거처하지 않고 그로부터 8일 후 인목대비와 더불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그해 음력 7월에는 30년간이나 궁역에 속해 있던 여러 가옥·대지를 본 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경운궁은 한적한 별궁 정도로 축소되었다.

인조 이후[편집]

그 후 영조1773년(영조 49), 즉 선조의 환도어거(還都御居) 3주갑(三週甲: 60년이 3번, 곧 180년 지남)을 맞이하는 해의 음력 2월 1일 세손(후의 정조)과 함께 경운궁의 즉조당에서 선조의 고생을 회상하면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고종1876년(고종 13) 즉조당에서 전배(展拜)하였다.

이후 1897년부터 1907년까지 대한제국 시기에 황제가 정무를 보던 법궁(法宮) 역할을 담당하였다. 1904년에 불이 나 궁궐의 상당 부분이 소실된 후 중건이 시도되었는데, 당시 국가의 정치 상황이나 재정 여건상 궁궐 권역과 건물 규모에 맞지 않은 축소가 있었다.

1907년 12월에 헤이그 밀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일본의 강압으로 퇴위한 후 경운궁에 머물렀는데, 이때 고종의 궁호(宮號)를 “덕수”(德壽)라고 하였기 때문에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순종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이름에 대한 논란[편집]

2011년 4월 한 시민에 의해 "덕수궁의 본래 이름인 경운궁 명칭을 회복해야 한다."라는 민원이 제기돼 시작된 것으로 학계 일부에서도 덕수궁이 일제 침략의 잔재이므로 경운궁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문화재청이 주최한 공청회 등에서 "일제 잔재라는 근거가 없다."라는 반론이 강하게 제기돼 논란을 일으켰다.

결국, 문화재청은 2011년 12월 14일 오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 회의에서 덕수궁 명칭 변경 문제를 심의한 결과 경운궁으로 명칭을 변경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 못하고, 그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많은 만큼 명칭 변경 안건 심의 자체를 '보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신, 문화재위원회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덕수궁에 대한 광범위한 학술 연구 등을 거쳐 추후에 명칭 변경 재추진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3]

전각의 연혁[편집]

고종 순종 시대[편집]

1897년(건양 2) 2월 20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자 이 궁은 다시 궁궐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해에도 공사는 계속되어 선원전(璿源殿)·함녕전(咸寧殿)·보문각(普文閣)·사성당(思成堂) 등이 축조되었다. 고종이 이곳을 궁궐로 정한 이면에는 주위에 러시아·영국·미국 등 강대국의 공사관이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보호를 요청하기 쉬운 곳이라는 고려도 있었을 것이다. 1981년 발굴조사에 의하여 러시아 공사관의 종탑 밑에는 밀실(密室)과 비밀통로가 마련되어 있었고, 이것은 덕수궁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4]

9월 17일에는 고종의 황제 즉위식이 있어 우선 소공동(小公洞)의 원구단(圓丘壇)에서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이날부터 이 궁은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이 되었으며,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1900년(광무 4)에는 담장 공사가 완성되었고 선원전에 불이 났으며, 봄에는 발전소의 설비가 끝나 궁내에 전기의 공급이 시작되었다. 또 이즈음에는 중화전(中和殿)과 관명전(觀明殿)·함녕전·선원전·경효전(景孝殿)·흥덕전(興德殿)·사성당·준명당(浚明堂)·경운당(景雲堂)·덕경당(德慶堂)·함유재(咸有齋)·청목재(淸穆齋)·보문각(普文閣)·문화각(文華閣)·수옥헌(漱玉軒)·정관헌(靜觀軒)·구성헌(九成軒)·인화문(仁化門 : 正門)·돈례문(敦禮門)·회극문(會極門)·영성문(永成門) 등의 전문(殿門)이 완성되었다.

1901년에는 경희궁(慶熙宮)으로 통하는 구름다리가 가설·개통되었고, 이듬해 2월에는 법전(法殿)의 공역을 시작하였다. 이 법전을 중화전이라 이름 지었다가 즉조당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공사는 10월에 완공되고 중화문도 완공되었으며 관명전도 영건되었다. 이 당시의 중화전은 2층 건물로 규모가 장대하였으며 주위에 행각(行閣)이 있었다.

그러나 1904년 2월에 영선사(營繕司)에서 함녕전의 온돌을 수리하던 중 실수로 불이 나자 거센 바람을 타고 중화전·즉조당·석어당(昔御堂)의 중심곽 건물뿐만 아니라 신주(神主)를 모셨던 경효전과 어진(御眞)·예진(睿眞)을 봉안한 흠문각(欽文閣)도 불이 났으며, 화재를 면한 전각으로는 준명당·수옥헌·가정당(嘉靖堂)·돈덕전(惇德殿)·구성헌 등이 있었다. 고종은 그날로 피하고 전각에 대한 중건을 명하여 우선 즉조당·석어당·경효전·흠경각(欽敬閣)을 응급 복구하였다. 이 무렵 러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1905년 10월 21일 밤에는 일본의 압력으로 을사보호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는 등 혼란이 계속되어 공사가 활발하지 못하였다. 이런 와중에 중화전의 재건이 진행되었으므로 원래대로 2층으로 복구하지 못하고 단층으로 짓게 되었다.

중화전은 그해 1월부터 시작하여 경운궁의 정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기로 하고 문의 명칭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는데 이는 비서승(秘書丞)이며 풍수(風水)의 대가인 유시만(柳時滿)이 “국조연창(國祚延昌)하려면 ‘대안’을 ‘대한’으로 고쳐야 좋겠다.”라고 건의한 데서 비롯되었다. 대한문은 원래 높은 장대석의 기단이 있고 장엄한 돌계단이 있었으나 지금은 아스팔트 바닥에 묻혀 있다. 1907년 7월 일제의 횡포로 고종이 퇴위하고 태자인 순종(純宗)이 즉조당에서 즉위하였으며 연호를 융희(隆熙)라 개원(改元)하고 개원과 더불어 태황제궁(太皇帝宮)을 덕수궁이라 함으로써 경운궁은 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순종은 그해 9월 17일 즉조당에 이어(移御) 하였다가 11월 13일 창덕궁으로 이어 하였다. 태황제는 양위 후 일시 수옥헌으로 옮겼으나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기자 다시 함녕전에 환어하여 1919년 1월 서거할 때까지 이곳에서 주로 거처하였다. 1910년(융희 4)에는 석조전(石造殿) 등 서양식 건물이 준공되었으나 태황제인 고종이 승하하게 되자 덕수궁도 궁궐로서의 수명이 끝나고 일제 강점기에는 빈 궁궐로 남아 있다가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으로 되었다.

독립 이후[편집]

한국전쟁 전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석조전에서 개최된 바 있으며, 당시 석조전이 불타서 그 후 복구하여 국립박물관으로 사용하다가 왕궁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은 그동안 담장들이 뒤로 밀려지고 또한 목책에서 사괴석(四塊石)담으로 바뀌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고, 정문인 대한문도 여러 차례 뒤쪽으로 밀려서 성기(盛期)에 즐비하던 전각들은 상당수 철거됐지만, 세종대왕의 동상 등 새로운 시설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건물 및 유적[편집]

현재 덕수궁에는 정문인 대한문, 정전인 중화전과 중화문, 침전인 함녕전과 그 일곽(편전인 덕흥전과 동·서·남 행각 및 당시의 함녕전 정문이었던 광명문), 준명당·즉조당, 덕수궁 내에서는 유일한 2층 건물인 석어당, 그리고 정관헌·석조전 등의 건물이 남아 있는데, 덕수궁은 특히 서울에서 제일 먼저 근대 유럽의 고전주의파 건축 양식을 받아들인 진취적 궁궐로서 이채롭다.

대한문[편집]

외부에서 바라본 대한문

대한문(大漢門)의 덕수궁의 정문이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덕수궁 남쪽 중화문 건너편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1904년 화재로 1906년 중화전 등을 재건하면서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고치고 궁의 정문으로 삼았다. 시청 앞 광장 쪽으로 동향하고 있는 현재의 대한문은 잦은 도로 확장 등으로 위치가 수차례 옮겨졌다. 원래 위치는 지금의 태평로 중앙선 부분이었다고 한다.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다포식 우진각지붕으로 공포가 화려하다. 대한문은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과 함께 단층이다. 지금은 기단과 계단이 묻혀 있고, 소맷돌을 별도로 노출해 놓았다.

대한문 앞에서는 매일 세 번씩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 치러지며, 한국어를 비롯해 일본어, 영어 등의 외국어로 교대의식에 대한 설명방송이 진행된다.

금천교[편집]

정릉동천의 지류인 덕수궁 금천의 흐름을 약간 바꾸어 인공으로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놓은 돌다리이다. 2개의 나란한 홍예교로 되어 있다.

중화문[편집]

중화전과 같은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원래 회랑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헐려 현재 동부에 조금 남아 있다. 중화문 앞에는 원래 정문이었던 인화문(仁化門)이 있었다.

중화전[편집]

덕수궁 중화전. 양편으로 품계석이 늘어서 있다.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의 정전(正殿)이다. 보물 819호로 지정되었고, 중화전이 세워진 월대는 상·하월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월대는 3단으로 되어 있다.

1902년에 처음 세워졌을 때는 본래 중층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1906년에 단층으로 다시 지었다.

투각곡병과 일월오악그림 병풍 앞에 어좌가 놓이고, 돌마당에는 문무백관의 지위와 위치를 나타낸 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원래 중화전 주변으로 회랑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으며 현재 중화문 동쪽에 일부가 남아 있다.

석조전[편집]

석조전은 정면 54m, 너비 31m의 장대한 3층 석조 건물이다. 대한제국기 동안에 지어진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 건물이다.

구한말 총세무사 브라운의 권유로 영국 사람 하딩(J. R. Harding)이 설계했다. [5] 심의석(한국인), 사바틴(러시아인), 오가와(일본인), 데이비슨(영국인) 등이 감독으로 1900년 기공하여 1909년 준공했다. 그리스 건축을 조형(祖型)으로 르네상스 양식을 가미한 이른바 콜로니얼 스타일(식민지 양식) 건물로서 같은 모양의 건물이 18세기 이후 영국 식민지의 여러 곳에 세워진 바 있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집무실과 외국사신들의 접견실로 사용할 목적에서 지어졌는데, 1층에서는 시종들이 대기하고, 2층은 황제의 접견실,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응접실로 사용되었다. 석조전의 정원으로 영국인 하딩의 설계로 같은 기간에 서양식 정원과 분수대가 세워졌다. [6] 석조전은 해방 후에는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궁중유물전시관이 있었으나 경복궁 자리로 이전하였다.

석조전 서관은 1937년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설계로 이왕직박물관으로 지어졌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전화(戰火)를 입어 석조의 구조만을 남기고 전부 소실된 것을 1953년 수리하였으며,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으로 활용하다가 경복궁 옆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을 옮기고 공사를 하고 있다.

준명당[편집]

준명당에서 바라본 석어당

준명당(浚眀堂)은 1904년의 화재로 다시 지어졌다. 원래의 준명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897년에 새로 지은 내전(內殿)의 하나로 한때 고종이 거처하며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후에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를 봉안하였다.

준명당은 서쪽과 북쪽으로 가퇴를 덧달아 내놓았으며, 뒤쪽에 온돌방 4칸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ㄴ' 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즉조당[편집]

즉조당(卽祚堂)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덕수궁의 침전이다.

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가 난이 수습된 뒤에 돌아와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하였다.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그곳에서 즉위한 뒤에 즉조당이라 불린다.

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겨온 뒤 1902년 중화전이 건립될 때까지 정전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화재 후 중건되었다. 이후 고종의 후비인 엄비(嚴妃)가 순종 융희 원년(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거처하였다.

즉조당 앞에 놓인 괴석들은 1984년에 창경궁에서 옮겨온 것이다.

건물은 준명당과 복도 및 난간으로 연결되어 복합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건물의 오른쪽과 뒤쪽에 각각 가퇴(假退)를 덧달아 내놓아 평면을 확장시키는 수법을 쓰고 있다. 정면을 기준으로 평면구성을 보면,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된 맨 오른쪽 한 칸은 한 단 높게 구성된 누마루이며, 오른쪽 두 칸은 방과 방에 부속된 퇴이고, 그 옆은 대청과 개방된 현관, 맨 왼쪽 한 칸은 방이다.

석어당[편집]

석어당(昔御堂)은 궁전에 지어진 건물 중 전각을 제외한 유일한 이층집이다. 1904년(광무 8년) 화재 후 중건하였고, 원래의 건물은 석어당은 선조 26년(1593년) 창건했었다.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며,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어렵던 일을 회상하며 선조(宣祖)를 추모하던 곳이기도 하다.

석어당은 정면 8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이 정면 6칸, 측면 1칸인 굴도리집 우진각지붕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서쪽 끝의 칸에 설치되었고, 2층은 칸막이 없이 넓은 공간으로 구성되었고, 사방에 창을 내었다. 궁내 건물임에도 단청을 하지 않아 가식이 없고 검소하며 소박하여 친근감을 준다.

덕홍전[편집]

덕홍전

덕홍전(德弘殿)은 1911년에 건립된 덕수궁 내 현존 전각 중에 가장 나중에 건조된 전각으로 내외 귀빈이 황제를 알현하던 곳이다. 함녕전 서쪽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이익공 팔작지붕으로 기단은 장대석을 3단으로 돌려 쌓고 알맞은 기둥 높이에 간결한 익공을 얹어 처마를 받게 하였다. 용마루에는 양성(양쪽으로 회반죽을 바름)하고 귀 마루에는 용두와 잡상을 얹어 잡귀와 화재에 대비하였고 지붕은 측면에 합각부를 가지고 있다.

함녕전[편집]

함녕전(咸寧殿)은 광무 1년(1897년)에 지어진 목조건물이다. 대형 건물로, 보물 제820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 4칸이 더 붙은 'ㄱ' 자형을 하고 있으며, 익공으로 결구된 간결한 건물이다.

고종(高宗)이 왕위를 물려준 다음 순종(純宗)이 창덕궁으로 옮기자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寢殿)이다.

함녕전 남쪽으로는 행각(行閣)이 있고 치중문(致中門)과 봉양문(鳳陽門)이 있으며 정문은 광명문(光明門)이다.

정관헌[편집]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된 서양식 정자인 정관헌(靜觀軒)은 1900년경에 건립되었다. 고종이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으로, 한때는 태조·고종·순종의 영정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벽돌을 쌓아 올린 조적식(組積式) 벽체에 석조기둥을 세우고 건물 밖으로 목조의 가는 기둥을 둘러 퇴를 두르듯이 짜인 건물이다. 덕홍전 뒤편과 정관헌 사이에는 작고 아담한 후원이 있고 예전에는 러시아공사관으로 통하던 문이 있었다고 한다.

광명문[편집]

광명문(光明門)은 함녕전의 정문으로, 1904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문만 남아 있다. 현재 이곳에는 흥천사 범종, 자격루의 일부, 화차가 전시되어 있다.

인화문[편집]

인화문(仁化門)은 본래 덕수궁의 정문이었는데 대안문(大安門)(현재의 대한문)주변으로 도로가 나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고 그 후 1905년의 화재로 타버렸다. 그 자리에 건극문(建極門)이 새로 세워졌었다. 대안문의 현판은 이왕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건극문도 없는 상황이다.

양이재[편집]

정관헌 너머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옆에는 예전에 황실 교육기관으로 쓰이던 양이재가 있다. 현재는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중명전[편집]

평성문 밖에는 이 층 서양식 건물로 접견실 또는 연회장으로 쓰였고 을사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던 중명전(重明殿)이 있는데, 그 북쪽에 만희당(晩喜堂)·흠문각, 서쪽에 양복당(養福堂)·경효전 등이 있었다. 이 주변 일대의 건물 전체를 수옥헌(漱玉軒)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건물이 개인 소유가 되면서 사무실 등으로 이용되면서 심하게 훼손되었었는데, 2010년 복원 공사를 마쳤다.

없어진 건물[편집]

선원전이 있던 지금 덕수초등학교와 전 경기여자중고등학교 일대에는 선원전 외에 사성당(思成堂)·흥덕전(興德殿)·흥복전(興福殿)·의효전(懿孝殿)이 있었다.

기타 유물[편집]

  • 광명문 자리에 국보 229호인 보루각 자격루(自擊漏)가 전시되어 있다. 이는, 세종 때 만들어진 것을 중종 29년(1536년)에 보완한 것이다. 흥천사 범종과 신기전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찾아가는 방법[편집]

사진[편집]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글로벌 세계대백과》〈덕수궁
  2. 광해군일기 46권 신해년 10월 11일 조.
  3. 허윤희, '덕수궁→경운궁' 명칭 변경 보류…사실상 무산, 조선일보
  4. 안현희, 아관파천, 옛 러시아공사관 3층탑, 뉴스한국
  5. 계간 시대정신 - 【건축】 석조전은 대한제국의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열쇠
  6. 1937년에 조성되었다고 설명되기도 한다.

참고 문헌[편집]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양반관료의 문화, 석조전, 즉조당, 함녕전"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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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유적총람》, 문화재관리국,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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