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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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독립문
(서울 獨立門)
대한민국 대한민국사적
종목 사적 제32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시대 1897년
위치
독립문 (대한민국)
독립문
주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941
좌표 북위 37° 34′ 20.64″ 동경 126° 57′ 34.52″ / 북위 37.5724000° 동경 126.9595889° / 37.5724000; 126.9595889좌표: 북위 37° 34′ 20.64″ 동경 126° 57′ 34.52″ / 북위 37.5724000° 동경 126.9595889° / 37.5724000; 126.9595889
정보 문화재청 문화유산 정보

서울 독립문(서울 獨立門)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1896년 11월에 준공되어 1897년에 완공되었다.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이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독립 한 것을 상징하기 위하여[1] 영은문을 무너뜨리고 그 터에 지은 문으로[2][3] 서재필의 주도로 건립되었으며, 서재필의 원작을 배경으로 세레진 사바친(Середин-Cабатин, 士巴津, Sabatin, 흔히 사바틴)이 설계·시공했고, 그 현판은 김가진의 작품이다.

조선중국에 대한 사대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그 뒷편에 건립되었으며, 독립문 전면에는 영은문이 서 있던 기둥돌이 함께 남아 있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

배경[편집]

신라시대에 당나라를 상국으로 받들고 조공을 바친 이후 고려시대의 송,원나라와의 관계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명나라를 상국으로 받들고 조공을 바쳤으며, 속국을 자처하였다. 이를 사대정책이라 한다. 조선 시대에는 명의 사신들을 맞이하기 위해 서대문 근처에 영은문을 건립하고, 근처에는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을 건립하였다. '영은'은 은혜로운 대국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이며, '모화'는 중국을 흠모한다는 뜻이다. 명에 대한 조선의 관계는 소중화사상으로 이어져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로 교체된 뒤에도 계속되었다.

병자호란정묘호란으로 인한 청나라에 대한 반감에 더하여, 예전부터 발해고려, 조선을 형님의 나라이며 상국으로 받들던 여진족에 대한 멸시 등이 복합되어 반청 감정은 고조되었고, 북벌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청나라에 대한 반감은 19세기까지 이어졌고 청나라가 유럽 열강과의 전쟁에서 패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해야 된다는 여론이 강하게 나타났다.

1890년대에 서재필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서재필은 직접 프랑스개선문 사진을 보고, 이를 참고하여 독립문의 모양새를 직접 스케치했다. 이는 1896년 스위스[4]계 건축가 세레딘 사바틴에게 보내졌다.

개요[편집]

건립 초기의 독립문과, 헐린 영은문 기초
독립문 기공식 초정장, 1897년 11월 14일

독립문의 건립은 1890년대 초 서재필 등 개화파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들은 영은문중국에 사대해온 치욕의 상징이므로 헐고,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의 상징을 건설하자고 고종에게 적극적으로 건의하기 시작하였다. 독립문은 영은문 맞은편이 예정지로 정해지고 시공되었으며, 1896년 11월 20일 건립되었다.

1895년부터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을 위해 백성들의 성금을 모금하였고, 스위스계 우크라이나인 사바친을 영입해왔다. 서재필은 직접 독립문을 스케치하고 이를 토대로 공사를 시작한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의 독립이 국제법상 확정[5]된 후, 건설이 시작되었다. 1896년에 공사를 시작해 1897년에 완공되었다. 높이는 14.28미터, 폭 11.48미터이다. 약 1,850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프랑스 파리개선문을 모델로 삼아서 만들었다. 현판은 김가진이 썼고, 현판 바로 아래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인 오얏꽃이 장식되어 있다. 앞쪽의 기둥 두 개는 옛날 영은문의 기둥으로서, 철거 후에도 남은 부분이다. 독립문의 기공식 때는 대한제국 고종을 비롯한 황족과 고관들이 모두 참여하였다. 이 중 김가진삼전도(정축하성)와 병자년(병자호란), 정묘년(정묘호란)의 굴욕을 이제서야 깨트렸다며 크게 기뻐하였다 한다.

1979년에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본래의 위치에서 북서쪽로 70미터 정도 이전하였고, 2009년 10월 28일서대문 독립공원의 재조성 공사가 완료되면서 동시에 독립문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기타[편집]

독립문은 t신채호가 특별히 초빙한 건축사 세레진 사바친이 설계하였다. 후일 사적 32호로 지정된 독립문은 서재필이 독립문의 윤곽을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를 담당했다. 토목·건축공사는 한국인 건축 기사 심의석이 담당하고 중국인 노무자들이 노역을 맡았다.[6] 공사비는 기부금으로 해결했다.[6]

후일 세레진 사바친의 출신과 관련, 서재필은 그의 자서전에서 독립문 설계자를 스위스인 기사라고 언급했다.[7] 후일 스위스인이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국제한국사학회 공동 연구자의 한사람인 러시아 국립인문과학대학 타치아나 심비르체바 박사는 사바친이 출신은 우크라이나이지만 폴란드,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 여러 국가의 혈통을 물려받은 국제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따라서 서재필 박사가 독립문 설계자를 스위스인 기사라고 언급한 대목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7]

관련 항목[편집]

주 및 출처[편집]

  1. "아마 죠션도 차차 되야 가나 보더라 엇지 하야 그럿쇼 죠션 사람들이", 《독립신문》, 1896년 7월 4일 작성. 2013년 8월 12일 확인.
  2. 이태진 (2000년 8월 30일). 《고종시대의 재조명》, 초판 2쇄, 서울: 태학사. ISBN 89-7626-546-7 04910
  3. 주진오 (1993). 〈교과서의 독립협회 서술은 잘못되었다〉, 역사문제연구소 편: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1》. 역사비평사, 33~34쪽쪽 “독립협회는 단지 독립문을 건립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추진위원회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33쪽) 그것은 바로 청국으로부의 독립을 의미한다.(34쪽)”
  4. 서재필의 일기에 따르면 그를 스위스인이라 했는데 그는 사실 우크라이나 출신의 러시아인으로 부계 혈통 중에 일부 스위스인의 피가 흐르고 있긴 하다.
  5. 이토 히로부미리훙장이 교환한 조약문 제1항, '양국은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에 근거함.
  6. 독립문 준공 (1897.11.20) 조선일보 2007.11.19
  7. 한국 서양건축의 비조 사바친 베일 벗어 조선일보 2009.10.23

참고 자료[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