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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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개혁(光武改革)은 1897년부터 1904년까지 열강의 세력균형기에 자주적으로 단행한 내정개혁이다. [1][2]

개요[편집]

1897년 성립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완전한 자주적 독립권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까지 열강의 세력균형기에 자주적으로 단행한 내정개혁이다. 국가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지향하여 외세 의존적이고, 외국제도의 모방에서 비롯되었던 갑오개혁·을미개혁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었다. 먼저 황권을 강화하고 통치권을 집중하는 데 목적을 두어 군제(軍制)에 대한 전면적이고 근대적인 개편을 하였는데, 황성(서울)의 방비와 황제의 호위를 담당하는 친위대(親衛隊)·시위대(侍衛隊)·호위대(扈衛隊)의 개편과 창설은 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1][2]

군사 분야 개혁[편집]

각국의 대원수례(大元帥例)에 의하여 황제가 육·해군을 친히 통솔하고, 국방·용병(用兵)·군사에 관한 각종 명령권과 군부 및 중앙과 지방의 군대에 대한 지휘 감독권을 가진 원수부(元帥府)가 창설되었다. 또한 헌병대·포병·공병·치중병(輜重兵:군대의 화물을 담당하는 병사)·군악대에 대한 새로운 관제가 마련되었으며, 육군법률(陸軍法律)·육군법원(陸軍法院)·육군감옥(陸軍監獄) 등이 창설되었다. 지방군제 역시 전국의 지방군을 진위대(鎭衛隊)로 통합 개편하는 한편, 무관학교 관제(武官學校官制)를 새로이 반포하여 1898년 무관학교가 개교되었다. [1][2]

대외정책 및 대한국제 반포[편집]

최초의 헌법인 대한국제(大韓國制)가 반포되었고, 훈장제도(勳章制度)가 창설되었으며, 국가(國歌) 및 각종 기(旗) 등이 제정·발표되었다. 청국을 비롯한 각국과의 통상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국제적 지위가 향상되었으며, 북간도관리(北間島管理)를 설치하여 북간도의 이주민을 보호하고, 토문강(圖們江) 이남 지역을 영토로 편입시킬 것을 꾀하기도 하였다.[1][2]

사회 및 경제 개혁[편집]

사회 경제적인 개혁으로서 농상공부에서 주관하던 홍삼(紅蔘)의 제조 및 광산사업과 탁지부 주관의 둔토(屯土)가 궁내부(宮內府)로 이관되었고, 내장사(內藏司)는 내장원(內藏院)으로 개편되어 황실 재정수입이 증가하게 되었다. 재정상의 적자를 보완하기 위하여 시작된 백동화(白銅貨)의 주조는 화폐제도가 문란하게 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전결(田結)의 정확한 파악을 위하여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여 양전사업(量田事業)을 실시하였으며, 지계제도(地契制度)를 채택하여 지계아문(地契衙門)에서 토지문권(土地文券)을 발급하였다.[1][2]

식산흥업 진흥책[편집]

한편 개항 후 20년간 외국 자본주의 상품의 생활필수품화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근대적 상공업을 진흥·육성시키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 직접 공장을 설치하기도 하였고, 주요 회사에 투자를 하거나 보조금을 지급하여 상공업 진흥에 힘썼다.

또한, 민간 제조장의 근대기술수용을 장려하고 기술자 장려책을 강구하는 등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기술교육 정책으로서 해외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근대산업기술을 습득시켰다. 그 결과 인공양잠전습소(人工養蠶傳習所)·직조권업장(織造勸業場)·한성제직회사(漢城製織會社) 등 많은 근대적 회사들이 설립되었고, 철도·운수 부문에서도 근대적인 기술과 기계가 도입되었다.

상업의 진흥책으로는 한성은행(漢城銀行)·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대한은행(大韓銀行) 등의 금융기관이 설립되었다. 교육면 역시 실업교육을 위주로 하여 체신사무 요원의 양성을 위한 우편학당(郵便學堂)·전무학당(電務學堂)이 설립되었고, 상공인 양성을 위한 상공업학교와 의사양성을 위해서 경성의학교(京城醫學校)가 설립되었다.[1][2]

사법 기관 정비[편집]

한편으로 재판소의 위치와 관할구역이 재조정되었으며, 재판소 구성법(裁判所構成法)을 개정하여 고등재판소를 평리원(平理院)으로 고치고, 황족의 범죄를 다스리기 위한 특별법원(特別法院)과 순회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의료사업으로는 광제원(廣濟院)이 설립되고 전염병 예방규칙이 반포되었으며, 진휼기관(賑恤機關)으로 혜민원(惠民院)과 총혜민사(總惠民社)가 설립되었다. [1][2]

의의와 한계[편집]

그러나 이와 같이 추진되던 광무개혁도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재진출함에 따라 중단되었다. 보수파에 의해 추진된 갑오·을미개혁을 답습한 것이었으나 국가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지향하여, 비교적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1][2]

배경[편집]

민족주의 사학계는 일제의 ‘조선사회 정체론’을 반박하기 위해 조선 후기에 이미 자본주의가 내재적으로 싹트기 시작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 또는 ‘내재적 발전론’을 제기해왔다. 이에 맞선 것이 한국 학자들에 의한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이는 한국의 근대화는 일제강점기부터 본격화됐다는 시각이다. 이는 구체적으론 진보 성향 한국 사학자들과 ‘안병직 사단’으로 불리는 일군의 경제학자들이 벌이고 있는 논쟁이기도 하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조선왕조의 멸망이 어떤 강력한 외세의 작용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 정도로 체력이 소진된 나머지 스스로 해체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심각했다고 주장한다. 조선 후기는 ‘내재적 발전’이 아니라 ‘내재적 파탄’ 상태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고종은 근대적 계몽군주라기보다는 무능한 역사의 패배자였다는 결론을 도출해내고 있다. 앞으로 좀더 당시의 개혁이 늦을 수 밖에 없었던 정황을 고려하여 관심을 갖고 연구가 필요한 과제로 보여진다.[1][2]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근대를 다시 읽는다」, 왜 회색지대인가, 윤해동 저, 역사비평사(2006년, 39~77p)
  2. 「인문학 콘서트」, 내재적 발전론 vs 식민지 근대화론, 이어령 저, 이숲(2011년, 219~321p)

참고 문헌[편집]

  • 「광무개혁론(光武改革論)의 문제점」(신용하, 『창작(創作)과 비평(批評)』, 1978 여름호)
  • 「광무연간(光武年間)의 개혁(改革)」(송병기, 『한국사』19, 국사편찬위원회, 1976)
  • 「광무개혁연구(光武改革硏究)」(송병기, 『사학지(史學志)』10, 1976)
  • 「대한제국시기(大韓帝國時期)의 상공업문제(商工業問題)」(강만길, 『아세아연구(亞細亞硏究)』50, 1973)
  • 『한말근대법령자료집(韓末近代法令資料集)』Ⅰ·Ⅱ·Ⅲ(송병기 외, 국회도서관, 1970·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