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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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해전
(임진왜란의 일부)
옥포대첩기념공원에 세워진 기념비.해전이 벌어졌던 옥포만을 내려다보고 있다.
옥포대첩기념공원에 세워진 기념비.
해전이 벌어졌던 옥포만을 내려다보고 있다.
날짜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장소 거제시 옥포
결과 조선 수군의 첫 승리
(대규모의 병력이 맞선 전투로는
임진왜란 해전 첫 승리)
교전국
Coat of Arms of Joseon Korea.png
조선 왕국
Toyotomi mon.png
쇼쿠호 일본
지휘관
이순신
원균
권준
정운
이영남
이운룡
무의공 이순신
송희립
어영담
김완
한백록
우치적
기효근
신호
도도 다카토라Japanese Crest Tuta.png
호리노우치 우지요시Goshichi no kiri.svg
병력
판옥선 29척
협선 17척
포작선 46척
50척
피해 규모
1명 부상 26척 침몰
4,080명 전사
포로 5명
해전이 벌어졌던 옥포만에는 오늘날 대우조선해양이 건조한 배들이 지나간다

옥포 해전(玉浦海戰)은 1592년(선조 25) 음력 5월 7일(양력 6월 16일), 경남 거제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이 해전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룬 전승신화의 첫 승전이다.

전투 의의[편집]

이혼과 패잔병들을 모아 해유령 전투에서 왜(일본)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둔 것이나, 많은 사람들이 옥포해전을 첫 승리로 잘못 알고있다.

경과[편집]

총통(화포) 대 조총의 해전 한반도 남해안의 여러 섬과 포구를 장악한 일본 수군이 거제도 쪽으로 진출하자 원균은 전선과 무기들을 수장시키고 거느리고 있던 수군 1만을 해산시켰다.국조보감 그리고 옥포만호 이운룡, 영등포만호 우치적과 함께 남해현 앞바다에 머물러 있다 육지로 피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원균은 전라도·충청도 지방에 이르는 해로(海路)의 목줄인 옥포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율포만호 이영남을 시켜 이순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응하여 이순신은 대형 전선인 판옥선 스물넷 척, 중형 전선인 협선 열다섯 척, 소형 쾌속선인 포작선 마흔여섯 척으로 구성된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의 함대를 이끌고 음력 5월 4일(양력 6월 13일) 새벽에 여수 항을 출발하여, 음력 5월 6일(양력 6월 15일) 아침에 당포 앞바다에서 원균의 경상우수영의 함대(판옥선 네 척, 협선 두 척)와 합류하였다.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의 연함함대 91척의 총지휘는 이순신이 맡게 되었다.

거제도 송미포에서 밤을 새우고 낙동강 하구의 가덕도로 항진하던 연합함대는 음력 5월 7일(양력 6월 16일) 정오 무렵에 척후장 김완이 옥포에 정박 중인 일본 수군 함선 오십여 척을 발견하였다.

선봉장 이운룡을 선두로 돌격을 감행하며 맹렬한 화포 사격을 퍼붓자 기습을 당하고 전열을 갖추지 못한 일본 수군은 해안선을 따라 탈출을 시도했다.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퇴로를 봉쇄하고 총통과 화살로 무차별 공격을 퍼부으면서 일본 수군의 선단을 해안선 쪽으로 압박하였다.

일본 수군의 일부는 포위망을 뚫고 해상으로 탈출하였으나, 나머지는 배를 버리고 해안에 상륙하여 산 속으로 도주하였다. 호리노우치 우지요시는 이 전투에서 우치적이 쏜 기름칠을 해 놓은 불화살을 맞고 바닷물로 떨어졌는데 신호가 그의 시체를 건져 그의 목을 벤 후 그것을 높이 들어올렸다. 도도 다카토라는 탈출에 성공하였고, 이후 도도 다카토라는 이순신과의 전투에서 줄곧 패배를 거듭하게 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바깥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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