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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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회
출생 1532년
전라남도 능주
사망 1593년
진주성
사인 전사
거주지 화순
국적 조선
별칭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 일휴당(日休堂), 시호는 충의(忠毅).
학력 1567년 식년시 문과 을과 장원
직업 문신, 의병장
배우자 김씨, 주논개
부모 최천부 / 평택 임씨
친척 형 최경운(崔慶雲), 최경장(崔慶長)

최경회(崔慶會, 1532년 ~ 1593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 또는 일휴당(日休堂),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목차

생애 [편집]

1532년 전라남도 능주(綾州)(현 화순군)에서 해주 최씨 최천부(崔天符)의 아들로 태어났다. 양응정(梁應鼎), 기대승(奇大升)에게 수학하였으며, 1561년 명종 16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1]

벼슬은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에 이어 옥구, 장수, 무장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후처인 주논개는 장수현감을 할 때, 논개의 숙부가 민며느리로 팔아버린 것을 논개의 어머니가 다시 찾아온 송사를 통해 알게 되었으며, 이들 모녀가 거처할것이 없음을 말하자 관청에서 지내게 배려하였다. 이후 무장현감으로 임명될 때 이들을 데리고 갔다. 그는 이어 영암군수와 영해, 담양부사를 역임하였다.

1590년(선조 23년) 모친 평택임씨가 임종하여 상을 치우기 위해 벼슬을 내어놓고 고향인 화순으로 낙향하였다. 1592년 모친의 삼년상 기간 중인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큰 형 경운(慶雲)과 둘째 형 경장(慶長)과 함께 고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화순 삼천리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한다. 그는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500여명의 의병을 규합하고, 조카 최홍재로 하여금 고경명 장군의 휘하에 합류하여 싸우게 했다. 그러나 금산전투에서 고경명이 전사하자 그의 휘하였던 문홍헌 등의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합류함으로써,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금산과 무주에서 전주와 남원으로 진격하는 왜병과 싸웠고, 금산에서 퇴각하는 왜적을 추격하여 우지치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로 인해 진주로 집결하는 왜군을 방어함으로써 진주대첩을 가능하게 하였다. 최경회는 이 전공으로 이듬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했다.[2]

1593년 경상도병마절도사로 진주성에 주둔 중 6월 가토 기요마사 등이 다시 진주성를 공격해오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黃進), 복수의병장 고종후(高從厚) 등과 분전했으나, 9일 만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결국 남강에 투신자살하였다.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을 지키고 있던 지휘관과 병사를 비롯하여 양민들까지 대부분 전사하였다.

사후 1753년 영조 29년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리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능주(화순)의 포충사(褒忠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장수 월강사(月岡祠)에 배향되었다.[3]

가족 관계 [편집]

  • 부친: 최천부(崔天符)
  • 조부: 최윤범(崔尹範)
  • 증조부: 최혼(崔渾)
  • 형제: 형 최경운(崔慶雲), 최경장(崔慶長)
  • 처: 김씨
  • 후처 : 주논개

유적지 [편집]

  • 최경회 사당-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다지리 206-2 문화제 자료 64:: 조선 순조 때 세워졌다.

주석 [편집]

  1. 최경회 - 한국학중앙연구원
  2. 화순군 역사인물 소개. 화순군청. 2008년 11월 16일에 확인.
  3. 영조실록 29년 79권, 4월 23일

바깥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