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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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승(奇大升, 1527년~1572년)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다. 는 명언(明彦), 는 고봉(高峰)·존재(存齋), 시호는 문헌, 본관행주이다.

퇴계 이황과의 인심도심 논쟁과 이기논쟁으로 유명하였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목차

[편집] 생애

영남의 유학자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박승임, 유성룡은 그의 동문들이었다.

1558년(명종 13년) 문과에 급제한 후 사관(史官)을 거쳐 사정(司正)이 되었으나, 훈구파에 의해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후학 교육에 힘썼다. 1563년 명종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이 그를 정치적으로 제거하려 하였으나, 그의 6촌 형인 기대항이 이를 심의겸과 기대승에게 알려서 위기를 모면하고, 이량 세력을 역으로 제거하게 된다. 후학 양성에 전념하며 이 시기, 그는 스승인 이황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담론 중, 인심도심 논쟁과 이기논쟁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때 한 서신에서 그는 스승 이황이 도학에 치우쳤음을 지적하고 성리학의 정도로 수정할 것을 촉구하여 이황이 그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그뒤 선조 때 대사성이 되었다. 그 뒤 해직된 다음에 다시 부제학 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퇴하고 고향으로 가던 중 병을 얻어 전라북도 고부에서 죽었다. 저서에 《고봉집》, 《주자 문록》, 《논사록》이 있다.

[편집] 저서

  • 《고봉집》
  • 《주자 문록》
  • 《논사록》

[편집] 사상

어려서부터 독학하여 고전에 능통하였고 문학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황의 제자가 되어 김인후 등과 왕래하면서 새로운 학설을 많이 제시하였다. 특히, 이황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 8년 동안이나 논란을 편 것은 유명한 일이다. 이 일 이후로는 이황도 그의 이론을 많이 따르게 되었다. 그는 글씨에도 재주가 뛰어나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주문(奏文)을 써서 광국공신3등(光國功臣三等)으로 덕원군(德原君)에 추봉되었다.

[편집]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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