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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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출생 1881년 2월 28일(음력 1월 29일)[주해 1]
대한제국 조선 경상남도 동래도호부[주해 2]
사망 1950년 12월 10일(?)[주해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만포진
사인 병사(심장병, 천식, 폐렴, 동상, 뇌충혈 등의 합병증)
거주지

대한제국 조선 경상남도 동래군강원도 홍천군한성부
대한제국 대한제국 한성부미국 미국 버지니아 주 세일럼→뉴저지 주 프린스턴→
일본 제국 일제 강점기 경성만주몽골 몽골 울란바토르
중화민국 중화민국 난징 시톈진 시베이징 시쓰촨 성 성도, 충칭

미군정 서울특별자유시 종로정 삼청동 삼청장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삼청장
국적 조선 조선, 대한제국 대한제국, 중화민국 중화민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별칭 호 우사(尤史) · 죽적(竹笛), 별칭 변갑, 번개비, 가명 김성(金成) · 중문(仲文) · 일민(一民) ·여일민(余一民) ·왕개석(王介石)
학력 미국 로노크 대학교 영문학 학사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영문학 석사
직업 종교인 · 독립운동가 · 정치가 · 영문학자 · 교육자 · 작가 · 시인 · 교육자 · 외교관
종교 개신교(장로교)
배우자 조은수, 김순애
자녀 김진필(男), 김진동(男), 김진세(男), 김한애(女), 김민애(女), 김우애(女)
부모 김지성(父), 경주이씨(母)
친척 백부 김우성, 형 김규찬, 사촌 김은식, 처제 김필례, 당숙 김익남, 친족 김관식, 동서 최영욱, 인척 서병호, 김필순, 김염, 김마리아

김규식(金奎植, 1881년 양력 2월 28일(음력 1월 27일)[1][주해 4][2][3]~ 1950년[주해 5] 12월 10일[주해 6])은 대한제국의 종교가, 교육자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가, 학자, 시인, 사회운동가, 교육자였다. 언더우드 목사비서, 경신학교교수학감 등을 지내고 미국에 유학하였다. 1918년 파리강화회의신한청년당,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되어 이후 10여년간 외교무대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이 국제 승인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4]

파리강화회의 참가 중 1919년 3.1 만세 운동을 기획하였고, 파리회담에 참여하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노력하였으나 좌절당하였다. 1919년 3월 이후 임정 수립 이후 각지에서 세워진 임시정부로부터 전권대사와 외무부서장에 임명되었다. 4월 임정에 참여하여 외무 총장에 임명되고 파리대표부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됐으며,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부위원장, 학무총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21년 임시정부의 창조파와 개조파를 놓고 갈등할 때는 창조파의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 뒤 만주에서 대한독립군단의 지휘관으로도 활약하였고, 임정을 떠나 독립운동단체의 통합노력과 교육 활동 등을 하다가 1930년 다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재입각,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을 주도하고 당 주석직에 올랐으며, 좌우합작의 일환으로 임정에 다시 참여, 1940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으며 주로 외교활동을 전개해나갔다.

광복 후에는 김구 등과 함께 임정 환국 제1진으로 귀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주해 7] 에 나섰으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임시정부 수립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견해를 수정,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앞장섰다. 3상결정 부분 지지와 미소공위, 좌우합작 당시 테러에 시달려야 했다. 1948년 2월 남한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여 김구(金九), 조소앙 등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4월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으나 48년 5월 귀환 후, 불반대 불참가로 입장을 바꾸고 민족자주연맹 당원들에게 초대 제헌의원 선거와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병으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으로는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 외무총장, 파리위원장, 8월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부위원장, 1920년 학무총장, 1930년 8월 학무장, 11월 국무위원, 1932년 11월 국무위원 등을 지내고 1940년부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이었다. 대중정치나 선동정치를 경멸하였고 정당활동을 기피하였으며, 정당활동으로는 민족혁명당 주석, 민중동맹 위원장, 민족자주연맹 위원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교명(敎名)은 요한(Johann), 아호는 우사(尤史), 죽적(竹笛) 등이다. 본관은 청풍(淸風).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의 가명은 '김성'(金成) · '김중문'(金仲文) · '김일민'(金一民) · '여일민'(余一民) · '왕개석'(王介石) 등이며, 별칭으로는 '변갑'이라는 이름도 있었다.[5] 노론 중신인 김상로, 김재로, 김치인, 김종수 등의 방계 후손이었다. 경상남도 동래군 출신이나 강원도 홍천군 출신으로도 간주된다.[6]

목차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김규식은 1881년 2월 28일(음력 1월 27일)[1](족보에 의하면) 조선 경상남도 동래부사 종사관인 아버지 김지성(金智性)과 어머니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7][8] 김규식의 생년이 1881년으로 알려진 것은 펜실베니아 대학교 교수 이정식의 저서 《우사 김규식의 생애(신구문화사, 1974)》 이후로, 이 이전까지는 김규식의 생년은 정확하지 않아 1880년 생, 1877년 생 등의 설이 있었다.[9]

국립묘지의 무후선열제단 자료와 과목별학습대백과사전 14, 인명·색인사전(계몽사 편집국, 계몽사, 1987)에서는 1877년생이라 하며[10] 조선연감 (1947년)과 조선연감(1948년)도 1877년생이라 한다.[9] 이정식은 그의 책 우사 김규식의 생애와 사상에서 청풍김씨 족보를 출처로 하여 1881년 2월 28일생이라고 기술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880년생으로 보고 있다.[11] 생일 역시 불분명하여 2월 28일생 설(족보의 자료), 1월 29일생 설, 12월 10일생 설 등이 있다. 그의 맏형 김규찬은 큰아버지 김우성의 양자로 가기도 했다.[12]

태어나자 마자 아버지 김지성을 따라 그는 본가가 있는 강원도 홍천으로 갔다. 따라서 그를 강원도 출신으로도 간주하기도 한다.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에는 아버지 김지성과 할아버지 김동선 내외의 묘소가 소재하고 있다.[13]

김규식은 청풍 김씨 중방파(仲房派) 23세손으로, 전라도관찰사 의정부 영의정 김징(金澄)의 8대손이었다. 김구(金構), 김유(金楺)는 그의 7대 방조였다. 그의 가계는 김상로, 김재로, 김치인 등을 배출한 노론가의 방계였다. 노론 명문가의 후예로 노론 벽파의 거두였던 김상로, 김양로, 김재로, 노론 청명당의 지도자였던 김치인김종수 등은 그의 방계 선조들이었다. 김익로현감을 지냈지만 당대의 정치 거물인 김상로, 김양로, 김재로의 사촌 형제였다. 김익로는 김규식의 6대조였다. 그러나 노론 벽파로 분류된 그의 가계는 순조대 이후 몰락했고, 할아버지 김동선(金東璇)의 대에 다시 벼슬에 올라 참봉(參奉)을 지냈다.[13]

아버지 김지성은 인텔리로 일본에서 신학문을 익혔으며 선전관을 역임하였고[7], 15세 때부터 왕실의 시종무관으로 근무했다.[14] 개항 이후에는 외무관리로 일본, 러시아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왔으며[7] 당시 동래부사의 부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13]

유년기와 소년기[편집]

불우한 유년기[편집]
4~8세 무렵의 김규식, 경성부 언더우드 학당에서 촬영

당시 조선에 파견된 청나라위안스카이(袁世凱)가 내정간섭을 단행하고, 일본과의 불평등한 교역으로 인해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자 아버지 김지성은 민씨정권의 대일무역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 빌미가 되어 유배를 당하였다.[7] 형 김규찬은 큰아버지 김우성의 양자로 갔고, 그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7]

1887년 어머니(혹은 법적 어머니) 경주이씨마저 죽었기 때문에 어린 김규식은 숙부들의 집에 맡겨졌으나, 숙부들과 친척들도 생활 형편이 어려웠다. 1886년 5월 구걸을 하던 김규식이 언더우드 선교사를 찾아갔는데, 외모는 남루했지만 아이의 눈엔 총기가 있어 보였다고 한다. 김규식은 조선의 첫 고아원 겸 예수학당(경신학당)의 학생이 됐다.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고 해서 언더우드는 그를 '번개비'라고 불렀다.[15] 언더우드는 내한후 1년뒤 고종의 호의로 승인을 얻고 고아원을 설립했으며 처음에는 직원수가 부족하여 언더우드가 직접 고아원을 관리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5] 유아를 맡기 힘든 언더우드의 고아원은 다시 김규식을 그의 일가에게로 돌려보냈다.[16] 열병에 걸려 치료도 못받고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17]

중병에 걸려서 돌보는 사람이 없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언더우드 목사자신도 병환 중이었으나, 약과 우유를 들고 강원도 홍천으로 갔다. 당시 고열과 질병에 시달리던 어린 김규식을 포기한 숙부들은 병풍을 쳐놓고 그 뒤에 눕혀놓았고, 병과 함께 굶주림에 허덕이던 김규식은 벽지를 뜯어먹으며 먹을 것을 달라며 울며 애걸하였다 한다.[16]

언더우드 소학교 재학 시절[편집]
조선인 최초의 유아세례자 중 4인(뒷줄 좌로부터 서병호, 김규식, 앞줄은 김일, 원한경

병약한데다가 영양실조까지 걸렸던 그는 영양실조로 인해 여러가지 잔병치레를 하기도 했다. 후일 김순애(金順愛)에 의하면 그는 위장병이 심했고 오랫동안 간질병에도 시달렸다고 증언하기도 하였다.[18] 그러나 아이가 몹시 아픈데도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자기도 많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분유와 약을 들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너무 굶주린채 방치되었던 김규식은 먹을 것을 달라고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 삼키고 있었다.[5] 언더우드는 그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어려운 입장이었으나 그를 고아원으로 데려가고자 노력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아이가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하면서, 언더우드의 그러한 행동을 말렸다.[5]

그러나 언더우드 목사는 주변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김규식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언더우드는 간질과 위장병과 굶주림으로 쇠약해진 그를 돌보며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 아이를 극진히 간호했다. 간질과 위장병을 심하게 앓던 그는 언더우드의 지극정성과 간호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5] 그 뒤 언더우드는 그에게 기독교와 영어를 가르쳤고 그는 빨리 영어 단어와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였다.

당시 김규식은 아버지 김지성의 동의하에 언더우드에게 영어교육차 보내졌다는 설이 있고, 김지성 유배 후 방치된 그를 언더우드가 데려다 간호한 뒤, 언더우드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 이후 김규식은 언더우드의 집에서 그가 세운 학당을 다니며 소년기를 보냈다.[16][19]

청소년기와 방황[편집]

언더우드 학당 시절 (1888년경), 맨 앞줄 가운데가 김규식

1888년부터 김규식은 언더우드 학당에 다니면서 영어와 수학, 라틴어, 신학, 과학 등을 배웠다.

김규식은 영어를 빨리 배우고 정확하게 구사하였다.[20] 그러나 언더우드 몰래 가출하여 아버지를 찾는다고 경성부를 거리를 다니다가 교인들에 의해 잡혀서 다시 언더우드의 집으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하고는 하였다. 그 뒤 우연한 기회에 부친 김지성을 상봉하여 고향 홍천으로 돌아갔다. 이 일로 김규식은 언더우드목사의 눈밖에 나게 되었다. 그러나 1891년 할머니가 사망하고, 1892년 부친마저 사망했다.[21] 1894년 가을 할아버지 김동선과 큰형이 사망했고, 김규식은 완전히 고아가 되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숙부들 역시 그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21]

청소년기에 계속된 비극과 철없는 동네 소년들, 무정한 어른들이 보여준 멸시와 차별은 그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21] 성인이 된 뒤에도 다정한 인간이라기보다는 냉정하고 차가운 인간이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21] 이정식교수에 의하면 이러한 성격의 근원은 유년기와 소년기에 형성되었을 것이라 보았다.[21]

후일 그는 정치, 외교, 독립운동 활동을 진행하면서도 어떤 계파나 파벌에 연연하거나 스스로 엮이려 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대한민국의 사학자 도진순은 이처럼 김규식이 '가족, 집안, 씨족, 파벌 등과 같은 한국의 토착적 기반과 일찍부터 유리되었으며, 이것은 그가 평소 정치적 파벌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합작에 노력하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21]'고 보았다. 주변의 냉담한 시선과 고아라는 차별대우(혹은 서자라는 멸시), 그의 불우한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무정함 등은 후일 그를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시선을 갖게 만들었다.

청년기[편집]

청년기 활동과 도미 유학[편집]

언더우드의 세심한 배려와 지원으로 김규식은 서양문물과 근대교육을 폭넓게 접할 수 있었다.[5] 언더우드의 배려로 언더우드가 세운 사립학당인 예수교학당 혹은 민노아학당으로도 불리던 언더우드 학당에 입학하였다. 이후 신앙활동에도 투신하여 그는 한국인 교역자들 중에서 가장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의 하나로 인정을 받으며 성장하였다.[5] 언더우드의 극진한 배려와 친자식과 다름 없는 릴리스 여사의 간호와 양육에도 불구하고 주변인들의 멸시와 험담은 그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성인이 되면서 그런 상처를 극복하지만 그는 합리적이고 냉철한 사람으로 변모해간다.

1894년 언더우드 학당을 마치고 김규식은 1894년 3월 한성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에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한성 관립영어학교는 영국인 허치슨(Hudson)이 교장으로 있었다.[5] 병약하고 체구가 작았던 그는 연애나 운동을 하는 것 보다는 주로 그늘에서 독서와 사색을 즐겼다.

그 뒤 1896년 서재필이 귀국하자 그를 찾아가 면담하였다. 귀국한 서재필(徐載弼)이 독립신문사를 설립하자, 언더우드 목사와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으며 직업이 없어 고민중이던 그를 자신이 운영하는 〈독립신문〉의 취재기자로 받아들였다. 그가 경영하는 〈독립신문〉에 잠시 근무하다가, 미국 유학을 강권하는 서재필 등의 권유와 언더우드의 후원을 받아 1896년 미국에 건너갔다. 서재필은 청년들에게 나라의 개화를 위한 길은 서구의 문물을 배워오는 길이라며 미국 유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그에게도 미국으로의 유학을 적극 권고하였다.[22]

1896년부터 1897년부터 미국 버지니아 주의 목가적인 환경에서 공부하게 되었다.[23] 그곳에서는 그를 괴롭히거나 따돌리는 사람도 없었고 그의 출신 환경을 비웃는 사람이 없었다. 1897년 초 아르바이트와 막노동으로 스스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서재필 등이 학비를 고국에서 부쳐주었으나, 김규식은 고국에서 부쳐주는 학비에만 의존하지 않고, 등록금과 기타 학비를 스스로 마련하였다. 1897년 9월 버지니아 주에 있는 루터교 계열 인문대학 로노크 대학교의 대학 준비과정인 로노크 대학교 예과(예비 고등학교 과정)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23]

대학교 재학 시절[편집]

10대 때의 김규식 (1890년대 중반)

1898년 가을 정식으로 로노크 대학교에 입학, 1903년까지 로노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24] 이후 언더우드의 지원과 함께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로노크 대학교에 재학 중 그는 대한제국 고종서자(庶子) 의친왕(義親王)과 만나 교우관계를 형성하였다. 1900년 5월에는 학교 잡지에 한국어에 대한 논문을 실었고, 1902년 2월호에는 '동방의 아침'이라는 이름으로 연설논문이 실리기도 했다.[24] 한편 한국어에 관련된 논문을 발표할 때는 한국어영어, 불어, 독일어, 라틴어, 산스크리트어와도 비교하면서 쓴 글이라 한다.[24] 2006년 한국의 역사학자 이정식은 김규식의 글을 읽고 '그만한 글을 발견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며 찬탄하기도 하였다.[24]

1901년 1월에 개최된 연설 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을 받고 대학 잡지에 특집으로 실리기도 했다.[24] 로노크 대학교 재학 당시 김규식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등에 뛰어났고 [24][25] 동아리 활동으로는 웅변부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데모스테니언 문학회 라는 문학클럽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02년 1월 문학 동호회의 회장이 되었다.[24] 1902년 5월 로노크 대학교를 휴학하고, 미국 뉴욕 주의 어빙턴에서 취직하였다. 학창시절의 학력 평점은 92.2점을 유지하였으며 1903년 6월 로노크 대학교를 졸업하였다.[24] 대학 졸업 당시 성적은 전체 3등이었으며,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학사였다.

1903년 5월에는 로노크 대학교 교내 잡지에 《러시아와 한국문제》라는 글을 기고하였는데, 이 글에서 '한국의 정부는 천하고 무능력하며 정직하지 못한 정치가들의 정부이며 한국은 음모와 역 음모, 타성과 보수주의에 잠겨 있고 나라는 반역자들과 비겁한 겁쟁이들로 가득차있다'고 비판하였다.[26] 대안으로 '한국이 지금이라도 깨어난다면 머지않아 드리워질 침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며 한탄하기도 하였다.[26]

졸업식 당시 졸업 기념 연사 4인 중의 1인으로 선발되어 '러시아와 극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러시아 침략과 러일전쟁의 결과를 예견, 분석하였다.[26]

동아시아의 미래는 다가오는 러시아일본의 갈등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동아시아의 땅과 바다엔 한 번 더 전쟁이 울릴 것이다.

[26]

러일전쟁을 사전에 예언하였고, 1904년 러일전쟁이 발생하였으며, 1905년 9월 5일 전쟁의 최종 승리는 김규식의 예견대로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1903년 10월 28일 국내에서 조직된 황성기독교청년회의 간사로 선임[27] 되었다.

대학원 재학 시절[편집]

김규식의 모교 프린스턴 대학교. 김규식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03년 가을 그는 미국 뉴저지 주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 1904년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장학생으로 선발하고 학비를 지원한다 하였으나 러일전쟁이 전개됨에 따라 그는 '고국의 독립을 위해서' 라며 거절하고 귀국하였다. 1904년 가을 그는 YMCA 청년회 교육부 간사에 임명되었다.[28] 그 뒤 YMCA 이사회 이사 겸 서기를 거쳐 YMCA 교사로 임명되었다. 얼마 뒤에는 YMCA 중학교 교장에 임명됐다.[28]

1905년 8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개최된 강화회의에 참석하고자 청나라 상하이까지 갔으나 실패하고[26], 11월 7일 귀국하였다. 그 해 만주뤼순 항구가 일본에 함락되자 로노크 대학의 잡지에 여순항의 함락을 크리미아 전쟁에서의 세바스토폴의 함락과 비교한 '근대 세바스토폴의 함락'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26]

교육과 신앙 활동[편집]

1904년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가 되었다. 1905년 그는 상동 교회를 찾아, 전덕기·이동녕 등과 교류하는 가운데 한민족의 나갈 길을 의논하였다.[29] 1904년 윤치호와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1904년부터 1913년까지 언더우드의 비서로 있으면서 YMCA학교 학생부 담당 겸 간사, YMCA 학교 교사, 경신학교 교사, 기독교 주일학교 교장, 배재전문학교 영어강사, 연희전문학교 영어강사, 조선기독교 대학교 1학년 2개반 담당 교수 등을 지냈다.[20] 배재학당에서 그는 영어 과목과 수사학 과목을 가르쳤다.

1906년 5월 21일에는 전 군수 조순환(趙淳煥)의 무남독녀인 조은수(趙恩受, 당시 16세)와 결혼하였다. YMCA청년회 학관의 학감으로 재직 중일 때는 양반 출신 학생들은 스포츠를 천히 여기고 그 시간을 거부했다 한다.[30] 그러나 김규식 박사는 강제로 체조를 시키고 스포츠를 장려했다.[30] 이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30]

선교와 사회단체 활동[편집]

1907년 장남 김진필(金鎭弼)이 출생했으나 6개월 만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1907년 2월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의 초청연사로 초빙되어 강연하였다. 1909년 7월 한국문법 책을 펴냈고, 로노크 대학교 학보의 1909년 7월호에 실렸다.[28] 1910년 경신학교 교감에 선임되었다.[20]

종교 활동으로는 1907년 '제7회 세계기독학생연맹세계대회'가 일본 동경에서 열렸을 때 윤치호(尹致昊)·김정식 등과 함께 대회에 참석하였다.[31] 새문안교회 집사로 교회 예배당 건설을 추진하였고 1910년새문안교회 예배당 헌당과 함께 새문안교회 장로가 되었으며[32], 1910년 숭실중학교 교사로 출강하였다. 숭실중학교에서 그는 수사학(修辭學) 과목을 가르쳤다.[33] 조병옥에 의하면 김규식은 수업 시간에 종종 영어시를 읊어주곤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셀리, 키이츠, 테니슨, 바이런 등의 시들을 잘 읽어 주었다.[33] 조병옥숭실중학교 편입생 시절, 가장 재미있게 청강한 과목으로 김규식이 가르치던 수사학이었다 고 회고하였다.[33]

1911년 12월 경기·충청도장로교 연합회 서기로 뽑혔고, 1912년 2월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912년 9월 1일 김규식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평양)에 영문(英文)으로 보고하였다.[33]

1913년 봄 김규식은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장학금과 도쿄 외국어대학교 영어교수직, 도쿄 제국대학 동양학과 장학생 특별 입학(入學)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였고, 조선총독부는 다시 사람을 보내 도쿄 제국대학교 동양학과의 장학금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33]

독립운동[편집]

중국 망명 초기[편집]

새문안 교회 전별식

1911년 9월 조선총독부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한국의 독립운동가와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거 구속, 투옥한다. 김규식은 극적으로 투옥은 모면하였다.[34]

1914년 몽골 이동 중 (왼쪽이 김규식, 가운데는 차남 김진동, 왼쪽은 사촌 누이 김은식(金殷植)

1911년 105인 사건 이후로 일본기독교회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그는 1913년인삼장사를 할 목적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경상남도의 한 갑부는 그에게 1천원의 자금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중국으로 망명할 때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왜놈들이 하도 못살게 굴어서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 보기로 했다'고 표현하였다.[35] 중국 망명후 신규식·여운형 등의 주도로 창설된 동제사의 중견임원으로 선임되었다. 윤치호의 이복동생인 윤치왕이 군사훈련을 배우겠다고 상하이를 찾아왔으나, 그는 기회가 많으니 영국에 가서 의학을 배워볼 것을 권고하여 영국으로 보내주었다.[36] 또한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느 대학에 가서 문학 공부를 계속한다, 미국에 간다는 등의 뜬소문을 유포시키기도 했다.

그의 후원자였던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스 언더우드 역시 그의 이런 계획을 전해듣고, 그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느 대학에 진학하여 목회자가 될 것이라고 소문을 냈다. 그의 출국 소식을 접한 조선총독부에서는 국내 기독교계 인사들을 의심하였으나 미국인 선교사들 댁을 수색할 수는 없어 윤치호의 집을 수색하기도 했으나 그의 출국을 도왔다는 어떤 근거도 찾지 못하고 만다.

1913년 김규식은 베이징·상하이·난징 등지에 먼저 와 있던 여러 애국지사들과 접촉했다.[37] 13년 3월 쑨원, 친치메이, 황싱, 탕샤오이, 왕쳉팅, 웰링턴 V. 쿠중국의 혁명 지도자들과 만나 교분을 쌓았고, 혁명파의 제2혁명에도 관여하였다.[37] 김규식은 중국 혁명 당시 냉휼(冷橘) 장군의 군대에 합류하여 방부(邦阜)[37] 까지 올라갔는데, 이 부대는 서주부(徐州府)에서 내려온 복벽파 장훈(張勳)의 군대 앞에서 어지러이 후퇴했다.[38] 1913년 9월 중국 혁명은 실패하고 쑨원 등은 망명하면서 그는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오게 되었다.[39]

1918년때 김규식 박사.

1913년 11월 춘원 이광수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그는 단재 신채호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독립자금 모금, 무역상 활동[편집]

1910년대 김규식은 몽골에서 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했다.[40]

1914년부터 2년간 화북몽고 지방에서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며 동제사에 가입하였고[41] 신채호·홍명희·서병호(1885~1972) 등과 친분관계를 맺었다. 1914년 1월 독립자금을 모금하러 변복하고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신의주에 갔다가 일본경찰의 검거를 피해 되돌아가야 했다. 그해 가을 장래의 독립군단 또는 게릴라 부대를 양성할 목적으로 류동렬, 이태준과 청년들을 이끌고 몽골울란바토르로 건너갔다. 여기서 상업과 노동으로 비용을 조달하며 초보적인 군사학교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자금이 쉽게 조달되지 않았고 이태준은 병사하여 항일군대 결성에는 실패하고 말았다.[42] 이후 피혁 장사를 하다가 잠시 공장에 취직하였으나 맞지 않아 바로 그만두고 허베이 성(華北省)으로 건너가 성경기독교 용품을 판매하다가 상하이로 내려와서는 발동기계를 판매하였다.

두 번째 부인 김순애

1916년에 앤더슨&마이어회사(Anderson & Meyer Company)에 입사하여 몽골 접경의 장가구 앤더슨&마이어회사 지점에서 2년간 근무했으며, 1918년 3월에는 외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있는 앤더슨&마이어회사 울란바토르 지점장으로 부임했다. 1916년 아내 조은수 여사가 차남 김진동을 데리고 외몽골로 찾아와 상봉하였으나, 1917년 여름 폐병으로 조은수 여사와 사별하였다.[43] 1918년 12월서병호의 소개로 황해남도 장연군 출신 김순애와 재혼한다.

1918년 3월초 앤더슨&마이어 상사에서 몽골 울란바토르에 지점을 열기로 계획하였는데, 그에게 지점장으로 부임해줄 것을 전보로 보내왔다. 아무도 울란바토르로 가려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자청해서 가게 되었다. 이때 그와 동행한 이는 앤더슨마이어 상사 사원 몇 명과 둘째 아들 김진동, 사촌 여동생 김은식(金殷植)이 동행하였다. 그 뒤 장가구에서 만리장성을 넘은 뒤 자동차로 사막을 횡단하였다. 그러나 차량 고장과 심한 눈보라로 하루 만에 내린 뒤 11일간 산지에 고립되어 있다가, 몽골어를 구사할 줄 알았기에 지나가던 몽골인에게 도움을 청하여 낙타를 타고 37일간 몽골 초원을 거쳐 울란바토르로 갔다. 1918년 6월, 출발 3개월만에 몽골 울란바토르에 도착하였다.

어학 재능이 뛰어났던 김규식은 다국어를 구사하였는데, 한국어 외에 영어, 한자(漢字),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몽골어, 산스크리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다.[44][45] 중국은 지역마다 방언의 차이가 심하였으나 한자를 잘 구사하던 그는 방언의 차이에 상관없이 어려움을 겪지 않고 중국인과도 대화할 수 있었다. 1917년 12월 친러한족중앙총회의 조직에 참여하였다.[44]

신한청년당 창당과 재혼[편집]
파리강화회담에 참석한 김규식 (앞줄 오른쪽 끝)

1918년 여운형, 서병호 등의 초청으로 중국 톈진에서 상하이(上海)로 건너왔다. 1918년 8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 조직되자, 여운형, 서병호, 조동호(趙東祜)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의 창립에 참가하였다. 동제사와 신한청년당 등의 단체 설립 이후 한국인 청년들이 너도나도 자원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그들에게 일시적인 감정보다는 먼 길을 내다보고 유학을 하여 공부할 것을 권고하며 돌려보내거나 프랑스, 미국, 영국 등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1918년 12월, 신한청년당은 독립청원서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1919년 1월,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 대표단의 수석 대표로 임명하고[46] 프랑스로 파견하였다. 김규식은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깊이 공감하였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파리강화회의에서의 좌절 이후 절망으로 변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차 프랑스에 있을 때 (1919년 1월 ~ 3월 무렵)

프랑스 파리에서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제출하고, 《한국 민족의 주장》·《한국의 독립과 평화》 등의 인쇄물을 출간하여 각국 대표들에게 일제의 침략상과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당위성을 널리 홍보했다.[46] 이는 우드로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기대한 것이었다.

이때 그는 상처한 처지였는데 서병호김필순의 소개로 김순애를 만났다. 본래 김규식은 조은수와의 첫 결혼 이전에 김순애와도 혼담이 오갔다. 김규식은 결혼 직후 구식 여성이던 본처 조은수를 정신여학교에 입학시켰는데, 김순애는 조은수의 정신여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김순애의 사람됨을 알아본 조은수는 죽기 전 김순애와 재혼하라고 권고했다 한다. '당신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줄 것이니 꼭 김순애 양과 결혼하라'는 것이었다. 처음 그가 청혼했을 때 김순애는 받아주지 않았다. 김순애는 고된 결혼생활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독신주의를 고집했는데, 병중에 있던 친정어머니 안성은이 '너를 시집보내지 않으면 내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라고 애원하여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18년 12월난징의 한 선교사의 집에서 김순애와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린 뒤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활동[편집]

정치 및 외교활동[편집]

파리강화회의 대표자 파견[편집]
1920년대의 이화여전 교수이자 YWCA 창립자인 김활란과 그의 처제 김필례

김규식은 재혼 후 보름 만에 김탕, 여운홍 등의 대표단을 이끌고[46] 가명으로 중국인 여권을 발급받아 신분을 위장한 뒤 상하이를 출발하였다. 프랑스로 떠나는 김규식의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상하이에 있던 신한청년당원들은 자신이 갖고 있던 푼돈을 모두 김규식에게 희사하고, 독립운동가들 중 결혼 예복과 반지가 있는 지사들은 이를 팔아서 돈을 희사하였다. 신한청년당원과 전파통신으로 교신, 신한청년당원들은 로비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여 송금해주었다.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은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를 마련한다.[47] 여권을 얻지 못하던 그는 중국쑨원 정부에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려던 중화민국 대표단 중 정육수를 만났다. 그는 중국어와 한자에도 유창하였는데, 그들이 한국인이며 파리행을 계획한 것을 알아본 정육수 등은 자신들의 배표를 김규식 일행에게 건네주었다.

출국 전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독립 시위를 벌일 것을 주문하였다. 김규식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 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47]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된다. 파견되는 사람은 희생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다.[48]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13개조.

그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47]

김규식의 주장에 고무되어 신한청년당은 국내에 사람을 파견하여, 함태영, 조만식 등의 민족지도자를 만나기도 했다.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는 배를 타고 국내에 잠입하여 애국부인회 결성을 추진하였다. 함태영을 만나 국내 독립운동 방법을 의논하였으나 체포되어 투옥될 경우 해외에서 활동하는 남편의 활동에 타격을 줄수 있다는 함태영의 설득으로 김순애는 다시 상하이로 귀환하였다.[47] 그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47]

파리위원부 설치[편집]
파리위원부 발행 '꼬레아 리뷰'(La Coree libre) 제2호 (1919년 2월호)

1919년 2월 1일 김규식은 우편선을 타고 상하이를 출항하여, 그해 3월 13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49]

프랑스 파리 시내 파리 9구 샤토당가 38번지에 건물을 마련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대표부인 임정 파리위원부 사무실을 개설하였다. 이어 파리위원부 내 신한청년당과 조선공보국을 개설하였다. 이들은 계속 수작업으로 '한국의 독립과 환호'(LINDEPENDANCE de LA COREE LA PAIX) 등 계속 문건과 홍보 팜플렛을 만들고 모임을 개최, 조선의 현실을 알렸다. 이어 장택상 등 유학중인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파리위원부로 찾아와 그의 일을 도왔다. 1919년 1월 18일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다.[47]

김규식은 파리한국통신부를 설립해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임시정부 차원의 공식적 외교활동을 전개했는데 후일 그가 떠나고 이 활동이 중단된 이후 한인들은 자체 힘으로 비공식 외교 활동을 추진했다.[50]

국내·외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우드로우 윌슨민족자결주의 발표에 기대를 걸었고, 김규식 역시 윌슨민족자결주의에 기대를 걸고 회의장에 조선의 문제 역시 처리되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김규식과 그 일행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려다가 거절당하면서, 프랑스 외교부 측은 '회의 참석대상은 정부의 대표자 자격이어야만 참가할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해 왔다. 김규식은 이를 상하이신한청년당에 알려 왔다. 김규식에게 공식적으로 한국 임시정부의 대표라는 신임장을 보내주기 위해서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를 설립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47]

당시 이들이 사무실로 사용했던 파리 시내 건물은 파리 시내 '샤토등' 거리 38번지에 위치한 건물로, 2006년에 발견되었다.[51]

파리강화회담 참가와 실패[편집]

1919년 3월 17일 노령대한국민의회로부터 외무총장 겸 파리강화회의 강화대사에 선임되었다.[52] 이어 1919년 4월 상하이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4월 10일 부재중 상하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4월 11일 파리 현지에 체류 중 외무총장에 선출되고, 파리 현지 주재위원으로 임명되었다. 4월 13일 상해 임정으로부터 외무총장 임명장과 파리강화회의 전권대사 신임장을 전보로 발송받았다. 4월 23일에는 한성임시정부의 학무총장에 선출되었다. 1919년 4월 1일 기호지방에서 설립되려다가 취소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의정부장관에 피선되었다. 1919년 4월 17일 평안북도에서 설립된 신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외무부 차장(次長)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각지의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임명장을 받거나 전보로 소식을 접하였다.[53]

국내에서는 137명의 유림(儒林)들이 별도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탄원서를 작성, 그에게 보내려다가 실패한 일이 있었다.[54] 파리 장서사건의 실패로 일본의 감시는 더해갔다. 일본은 김규식 일행에 위협을 느꼈고,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탐문에도 계속해서 홍보책자 등을 인쇄하여 돌리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고, 일본의 부탁을 받은 프랑스 경찰들이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게 했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였고, 여러가지 외교문서를 계속 만들어서 프랑스 외무성에 보내고, 강화회의 의장이 프랑스 대통령 크레망스에게도 발송하였고 세계열강들 대표에게도 여러가지 문서, 한국의 독립을 촉구하는 내용,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그런 문서를 작성·발송하였다.[49][55]

질병과 도미[편집]

윌슨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기대를 하였고, 김규식도 1918년 윌슨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파리강화회의제1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함께 전범국 처리를 논의하던 것이었다.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강화회의에서는 답을 주지 않았고, 1919년 7월 14일 김규식은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 행사에 한국대표로 참석할 수 있도록 프랑스 외교부에다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서신을 보냈으나, 응답은 행사끝난 다음에 왔다. 이때 심한 두통으로 눈이 안 보일 정도까지 갔다.[49][55]

열강의 그 어느 국가나, 그 누구도 아무도 김규식 일행의 한국독립 청원을 호응해주지 않게되면서 김규식은 크게 실망하였고, 활동무대를 옮겨 8월 프랑스 파리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49] 8월 9일 김규식은 김복, 김탕, 여운홍, 장택상 등과 함께 뉴욕으로 향했다. 선실에서 김규식은 활동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쉬지 않고 타이프를 쳤다 한다.[49]

파리 강화회의 열강들의 외면에 실망과 회의감을 느낀 김규식은 파리위원부위원장직을 사직, 파리위원부를 부위원장 이관용(李灌龍)에게 넘기고 여운홍, 김탕, 장택상 등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와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였다.[56] 배로 도미하는 동안, 만성 두통과 소화불량, 배멀미에 시달리면서도 수반 이승만에게 보고할 보고서를 타이프로 작성하였다. 8월 6일 김규식 일행은 워싱턴 D.C한인위원회에 도착하였다.[55]

구미위원부 활동[편집]
구미외교위원부 시절 김규식과 이승만
구미위원부에서 발행한 코리아 리뷰

1919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에 임명 되었으며 이승만은 그에게 하와이멕시코 등지의 한국인 교포들로부터 공채금과 의연금을 징수하는 역할을 부여하였다.[57] 이후 애국공채표를 작성, 이승만과 공동명의로 발행,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상하이에 보내는 일을 하였다.[55] 이어 서재필을 부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재직하며 김규식은 '극동 정세'(Far Eastern Situation)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55] 여기서 김규식은 '극동에서 일본의 팽창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일본의 팽창이 그대로 허용된다면 영국미국(의 영향력)이 극동에서 제거될 뿐만 아니라 앞으로 15년 후 일본중국, 시베리아한국의 인적 자원을 이용하여 영·미 각국에 무력으로 대항할 수도 있을 것[55]'이라고 내다보았다.[55] 이는 한동안 묻혀져 있다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역사학 교수 이정식에 의해 발견되었다.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줄곧 국내외 언론에 칼럼과 기고문을 송고하여 싣기도 하였다.[55]

9월 임시정부의 개편때 구미위원부도 함께 개편되면서 그는 구미위원부 부위원장으로 물러났다.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하이 임정에 송부하는 한편 이승만과 함께 독립공채표를 작성하여 기금을 마련하였다. 독립 공채표의 금액은 독립 후 정부가 수립되면 정부에서 지급하기로 한 채권이었다. 10월 캘리포니아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여 한국인 교민들과 면담하였고, 10월 30일 캘리포니아 주 맥스웰, 10월 31일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트, 11월 1일 띠뉴바, 11월 2일 로스앤젤레스 등의 한국인 교포들을 순방하고 11월 3일 다시 워싱턴 구미위원부로 돌아왔다.[55]

구미위원부 활동 내내 미국의 정객들을 상대로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기도 했다.[4] 또한 미국 하원에도 한국독립문제를 청원, 3·1독립운동을 계기로 고조된 분위기를 활용하여 한국독립문제가 미국하원에서 상정 토의되도록 하였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미국과 상하이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윤치호, 조병옥 등과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다. 윤치호와는 주로 국내외의 정세와 임시정부의 동정을 서로 서신과 연락으로 주고받았다. 그러나 윤치호는 이들의 행적을 수시로 접하면서도 조선총독부일본 제국 정부 당국에 이를 발설하지는 않았다.[4]

두통 수술과 병원 입원 기간[편집]

1920년 3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3·1절 1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임정 구미위원부 간부들
(앞줄 가운데가 이승만 박사, 그 오른쪽이 김규식 박사)

계속된 두통으로 1919년 말 김규식은 미국체류 중 두골 전면 좌측부분을 절개하는 수술을 했다. 1919년뇌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부작용으로 그 뒤로 간질병이 나타나 고통을 받기도 하였다.[58] 그의 병원비는 이승만이 부담하였다. 그러나 구미위원부 활동 내내 그는 이승만과 갈등하게 되었고, 상하이에서는 이승만이 그의 속을 썩여서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이는 그의 부인 김순애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면서 가라앉게 되었다. 이후 중국 상하이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일을 하다가 1920년 상하이에 귀환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학무총장 등에 선임되었다. 중국에 도착한 후 김규식은 임시정부의 정무활동과 교육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4월 25일 구미위원부 부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58]

1919년초 그는 김구 등과 국내에 연락, 고종의 서자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인 의친왕의 탈출 사업에 참여하였으나 실패하였다.[주해 8] 1919년영친왕(英親王)의 왕비로 간택되었다가 파혼당한 민갑완(閔甲完)의 일족이 중국 상하이로 건너오자, 김규식은 민갑완 일족을 맞이한 후 이들의 생활비를 아낌없이 지원하였다. 김규식은 상하이 현지에 미국인이 운영하는 학교의 간부를 설득하여 민갑완을 입학시켜 공부하게 하였다.[59] 그러나, 민갑완은 신학문 공부에 한창 재미 들일 무렵, 일본영사의 압력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했다.[59] 김규식은 민갑완에게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민갑완은 '나 하나의 희생으로 만사가 평온하기를 바랄 뿐'이라며 그의 권고를 거절하였다.[59]

임정 구미위원부 발행 50달러권 대한독립공채표

그러나 미국에서의 진료 후에도 통증이 계속되어 다시 수술하러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상하이에 체류 중 갑자기 심한 두통과 원인을 알수 없는 전신 통증으로 고생하였다. 1920년 김규식은 신경통으로 오래 고생하던 끝에 뇌종양 의심을 받아 미국 월터리드 병원[60] 에서 뇌수술을 받았다.[61] 의사는 장기간 휴식을 처방하였으나, 그는 퇴원 3주 후에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육로미국 서해안을 따라 여행하면서 각지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 교민들을 찾아다니며 '독립공채'를 판매하였다.[61] 3주 만에 약 5만 2천 달러의 자금을 마련, 상하이로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장이던 이시영(李始榮)에게 송금하였다.[61] 그가 두뇌에 혹이 생긴 것과 두뇌수술을 한 것에 대해 이승만 때문이라는 소문이 상하이에 돌았다. 미국에서 김규식이 이승만에 의해 심한 스트레스와 심리적 고통을 받아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후일 김순애서병호는 회고담에서 김규식이 파리 체류 중 생긴 것이며 상해 인사들의 말은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라 하였다.

상하이 귀환과 미국 왕래[편집]

김규식

1919년 9월부터 1920년 9월 미국 서부지구를 왕래하며 워싱턴 위원부와 국민회의가 협력하는데 기여하였다. 1920년 10월 미국을 떠나 하와이를 거쳐 호주에 도착했다. 호주로 건너가 호주의 정치인들을 만났고, 10월 3일에는 호주 수상 월리엄 휴그(William Hughes)를 만나 한국의 독립을 후원해줄 것을 청원하였다.[62]

1920년 12월 서일을 총재로, 김좌진·홍범도를 부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의 총사령에 선출되었다.[63] 12월 22일 하와이 호놀룰루를 경유, 노백린을 만나 선박 난징 호(南京號)를 타고 상하이로 건너갔고 이는 일본밀정의 첩보망에 입수되기도 했다.[64]

1921년 1월 상하이로 돌아와 임정에 합류하였다. 이때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대통령 이승만과 전 국무총리 이동휘간의 알력으로 이동휘가 총리직을 사퇴하면서 발생한 내분 문제가 닥쳤다. 그는 문제 해결의 시일을 최대한 미루며 내분 수습을 위한 중재안 마련을 고심하였다.

1921년 2월 10일 김규식은 신규식, 안창호와 함께 임시정부 기초 변경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고 2월 21일에는 신규식, 노백린, 신익희, 안창호 등과 함께 외교위원의 한사람으로 피선되었다. 이때 대통령 이승만의 성토 문제가 나타났다. 이때 그는 말썽많은 대통령제 대신 한성 임시정부의 원래의 직제인 집정관 총재직으로 개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상하이에서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계속되자 상하이에 와 있던 이승만도 대통령직에서 사퇴할 수도 있다는 의사를 밝힘에 따라 그를 설득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조건을 거부하였고 자신이 워싱턴에서 김규식을 구미위원부 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등용한 사실과 수술 등의 곤란한 일을 겪으면서 활동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는데 이제와서 자신과 정적들 사이에 중립적 입장을 견지한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나 구미위원장을 임명해놓고도 이승만은 그를 거치지 않고 자신의 측근인 구미위원부 위원의 한사람인 임병직과 상의하는 등의 문제를 야기했다. 내분 수습책은 실패하게 된다.

국민대표회의 창조파 활동[편집]

1921년 중국 상하이에서 한중호조사의 임정 요인들.

21년 4월 26일 구미위원부 부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 1921년 4월 신익희, 이유필, 조동호 등과 중국의 독립운동가 심합작, 오산, 주검추 등과 한중호조사에 참여하였다. 4월 29일에는 임정 학무총장직과 의정원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그해부터 임정의 창조, 개조 등을 놓고 논란이 발생하자 그는 창조파에 가담하였다.[65]

9월 한중호조사의 한국인측 평의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66]

이후 임정의 해체를 주장하는 창조파의 영수가 되어 소련에 들어가기도 했다.[21] 독립운동가 사이의 갈등과 내분이 심화되자 그는 독립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교육 활동에 투신하려 했다. 그러나 1921년 1월 초 국민대표자회의에서 그를 모스크바에서 열릴 동방피압박민족대회의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선출하였다.

1921년 김규식은 소련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상설기구를 창설하고, 1922년 5월은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기 위한 국민대표대회주비위원회 주비위원에 피선되었다.[67] 1921년 11월부터 여운형, 나용균, 박헌영, 원세훈 등과 함께 장가구에서 자동차편으로 출발,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였다. 한파가 닥치지 않아 8일만에 차량으로 몽골 고륜(울란바토르)에 도착, 양털가죽과 낙타 가죽 장화, 모피 등을 구비, 6일만에 마차로 극동공화국(極東共和國)의 수도 우딘스크에 도착했다가 다시 3일만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12월 이르쿠츠크에 체류 중,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된 독립군들의 재판정에 배심원으로 참석했다. 이들 독립군은 그해 6월자유시 참변 당시 생포된 독립군들과 백러시아군에 가담해서 활동하던 조선인 등으로, 이들에게는 유형과 징역 등의 처분이 내려지는 것을 목격했다. 이르쿠츠크 체류 중, 이르쿠츠크에서 열리기로 예정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리니 모스크바로 가라는 소식이 통지되었다.[21]

임정 탈퇴, 민족유일당 운동[편집]

극동인민회의 참가[편집]

1922년 1월 김규식은 여운형, 원세훈, 박헌영 등과 함께 교통편을 이용하여 몽골을 지나 소련 모스크바로 갔다. 열차편으로 중국 국경지대에 도착한 뒤, 몽골에 가서는 말과 낙타로 소련의 국경지대로 이동했다. 이때 털로 된 가죽모피와 통조림 형태의 고기로 추위를 견뎠다. 소비에트 연방에 도착한 뒤 김규식과 일행은 열차편을 이용했다. 소련의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 노력자대회에 참석했다.[7]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했을 무렵 그는 공산당 후보당원에 명단이 올라 있었다.[68]

인민대표자 대회 회의장에서 그는 여운형 등과 함께 참석하여 한국인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선출됐고, 이어 인민대표자 대회의 5인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개회사를 발표하였다.[7] 대회에서 발표에 참가하였고 그는 '아시아 혁명운동과 제국주의'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였다.[69]

우리는 원동(遠東)에서의 혁명 과업과 관련하여 왕왕 '연합전선'과 '협동'의 필요성을 운위합니다. 최근에 우리는 이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서구라파와 미국자본주의 열강이 동아시아 전체를 공동으로 착취하기 위해 서로 어떻게 결탁하였는지를 목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국의 '이타주의'(利他主義) 지향성과 '민주주의' 원칙의 범세계적 적용을 그토록 떠들어온 미 공화국조차 워싱턴 회의에서 영국·프랑스·일본 등 악명 높은 3대 흡혈귀 국가와 가증할 4강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자신의 가면을 벗어던졌습니다.
 
— 김규식, The Asiatic Revolutionary Movement and Imperialism, Communist Review, 1922[70]

논문에서 그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국은 극동아시아의 문제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러시아, 중국, 일본의 누가 관련되어 있건 간에 한국문제가 올바르게 해결되지 않는다면 극동아시아 전체상황은 혼란 속에 있을 것이다.' 등 극동아시아의 제국주의 침략에서의 해방에 대한 지원을 촉구할 것과 "악명 높은 흡혈국가로-영국, 프랑스, 일본" 등을 지목하며 규탄하기도 하였다. 극동 노력자 대회가 끝난 후에는 레닌을 만나 면담하였다.[7] 이때, 그는 '일본의 침략이 중국 대륙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하는 내용의 논문인 '아시아의 혁명운동과 제국주의'를 영어로 써서 '한·중 양국 인민이 연합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7] 그러나 소련의 반응도 미온적이었고 강대국의 힘을 인정하고 그힘을 이용하려 했던 김규식의 실망은 우리손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바꾸게 되었으며, 그는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단체를 규합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임시정부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었을 때는 신채호, 서병호, 신숙, 윤해(尹海), 원세훈 등과 더불어 임정을 해산하고 재창조하자는 '창조파'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창조파의 영수로 추대되기도 했다.[71] 1923년 창조파에서는 임시정부 해산을 주장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임시정부를 세우고 그를 수반으로 하여 소련레닌에게 보고하였으나 승인거절당하였고, 6월 6일 임시정부 내무부 총장 김구(金九)는 국민대표회의의 강제해산을 명한뒤 개조파와 창조파를 추방하고 만다.[72]

개조파와 창조파가 축출되면서 상하이를 떠났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3년 자국의 독립운동과 사회활동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모교인 미국 로노크 대학교로부터 명예법학박사(LL.D.) 학위를 수여받았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1924년 김구, 김창숙 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주해 9]

교육지원 활동[편집]

상하이로 귀환한 1920년 2월 이후 김규식은 서병호와 함께 어학원 설립을 계획하였다. 이 어학원 설립 계획은 상하이에 오는 한국인 청년들에게 영어 등을 가르칠 계획이었다. 김규식은 서병호와 몇몇 중국인 자선사업가들과 함께 500원씩 투자하였다. 이 계획은 1921년부터 그가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대회에 다녀오느라 상하이를 떠나야 했으므로 일시 중단되었다.

1922년부터 1927년까지 상해 월리엄즈 대학교수로 초빙되었고 윌리엄즈대학 학장에 선임되어 학장 겸 교수가 되었으며 나중에 월리엄즈 대학이 4년제로 승격하면서 동 대학의 총장을 역임했다. 대학 출강 활동과 함께 김규식은 여러 활동을 동시에 병행하였는데, 1923년 서병호(徐丙浩) 등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 남화학원(南華學院) 설립을 추진하였다. 1919년 이후로 중국으로 유학오는 한국인 학생들이 급격히 늘어났지만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중도에 포기하는 것을 목격하고 교육기관 설치를 고심하던 김규식은 중국인 유지 및 서병호 등과 함께 중국학생과 한국학생을 대상으로 중학예과 2년제, 고등과 4년제, 특별상과 2년제, 대학 각과 4년제의 대규모 학교설립을 계획하여 1923년 9월 11일 중학과와 특별상과를 우선 개교하였다.[73] 개교후 남화학원 교장에 취임하고, 중국어교사 이외에는 전 교수용어를 영어로 사용하게 하여 영어전문학교 성격을 띄게 하였다. 구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중국인을 교사로 채용, 한국인 학생에게는 한국학생특별학급을 설치, 중국어와 영어의 집중적 교육을 실시하려고 하였다.[73]

1923년 푸단 대학 상하이 캠퍼스의 영문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푸단 대학은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나 영국 조계지가 아닌 시내에 있었다. 그가 푸단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가르친다는 사실이 일본 상하이 영사관 경찰에 제보되면서 상하이 시내에서 일본 경찰을 만나 간신히 벗어난 일도 있었다. 여러 번 쫓겨다니면서 그는 변장, 김성(金成), 김중문, 여일민, 왕개석 등의 가명을 사용하며 중국인으로 행세하면서 일본의 의심으로부터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질환이 있었고, 위통증 외에도 1920년 미국에서 한 뇌수술의 후유증으로 강의 도중 기절, 실신하기도 했다. 이 후유증은 1940년쓰촨 성에서 진통제와 약물을 구할 수 있을 때까지 그를 수시로 괴롭혔다.

1924년 6월 상하이 인성학교(仁成學校) 내에 중국에 유학 온 한국 학생을 위한 강습소(예비학교) 설립을 주관하였고, 1924년 9월 15일에는 최창식과 함께 상해고등보수학원을 개설하고 자신은 원장, 최창식은 원감에 취임하고, 여운형 등 강사들을 초빙하였다.[74]

1924년 상해고등보수학원을 승격시켜 삼일중학교(三一中學敎)로 개편하고 원장에 취임하였다. 삼일중학교는 1932년까지 존속되었다.[75] 삼일학교에서 원장이자 영어교사를 겸하던 김규식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의열단 단원들에게 영어와 한자를 가르쳤다. 1924년 8월 김규식은 상하이항에서 원세훈 등과 함께 조선인이 운영하는 선박을 타고 소련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소련 방문과 복귀[편집]
러시아 출발 직전에 촬영한 사진
(1925년 1월)

1925년 1월 1일 러시아 니콜리스크에 있는 문창범(文昌範)의 집에서 이청천, 윤해, 신숙 등을 만났다.

1925년 1월 니콜리스크에서 문창범·윤해·신숙 등과 회담, 소련의 지원을 얻는 문제에 대한 협의도 하였으나, 소련은 카라한(Lev. M. Karakhan) 외무상을 일본 외무상 요시자와 겐키치(芳澤謙吉)에게 보내 일본과 밀약을 맺고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을 축출, 체포할 것을 협약하여 소련공산당의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는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을 축출했는데, 원세훈, 조완구 등이 포함돼 있었다.[76] 김규식도 이때 소련정부로부터 강제로 축출되었다.[76] 소련에서의 축출 이후, 김규식은 실망감과 함께 미국·프랑스·소련을 비롯한 외세를 불신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도진순에 의하면 그의 외세에 대한 입장은 전반적으로 시시비비주의에 입각한 가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였다.[21]

2월초 일시적으로 승선하여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2월 7일 상하이의 삼일당에서 열린 '한인 유학생회'가 주최한 강연회에 참석하였다. 주요한의 웅변에 이어 그는 '한국과 동아의 관계'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77] 1925년 2월 8일 [78]2월 9일[79] 2월 10일[80] 3회에 걸쳐서 '반성과 단결의 필요'라는 주제로 칼럼을 발표하였다. 한편 그가 보습학원을 설치하고 독립운동가들을 가르친다는 정보가 1925년 5월 일본인 밀정에 의해 입수되어 조선총독부에 보고되기도 했다.[81] 5월 29일 상하이일본 총영사 명의로 발송된 이 문건은 6월 15일부로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되었다.[81]

3월 초 다시 상하이에서 배편으로 러시아 니콜라스크에 도착했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소련1925년 11월 외무상 카라한(Lev. M. Karakhan)을 일본 외무상 요시자와 겐키치(芳澤謙吉)에게 보내 일본과 밀약을 맺고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을 축출, 체포할 것을 협약하였다. 11월 원세훈, 조완구 등 독립지사들과 함께 선박 레닌 호에 강제로 승선당한 뒤 상하이로 추방되어 되돌아왔다. 소련일본과 비밀리에 거래한 것을 알고 분개한 그는 국제정세에 대한 이상주의를 버리고 냉소적으로 변하게 된다. 또한 원세훈의 약혼녀는 모스크바에 남겨두고 원세훈만 강제 추방당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소련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1926년 최창식(崔昌植)·김기형(金基瀅) 등과 함께 상해 천상리(天祥里)에 삼일공학(三一公學)의 설립에 가담하였다.[82] 한편으로는 1926년부터 1927년에 열린 민족유일당 운동에도 참여하였다.[83]

민족유일당 운동[편집]

임시정부 재입각[편집]
1930년 대학 교수로 재직 중

1926년 5월 임시의정원에서 양기탁의 후임으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하자, 기호파의 중심인 안공근, 김규식, 김구, 김보윤(金甫潤) 등은 서북파인 안창호가 국무령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84] 김규식은 기호파는 아니었으나 기호파와 함께 연대하여 안창호의 취임을 반대했다. 결국 안창호는 국무령에 선출된 지 13일 만에 사퇴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1926년 10월 김원봉, 의열단원 등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 조직하였다.

1927년 2월 난징에서 유자명·이광제(李光濟)·안재환(安載煥), 중국인 무광루(睦光錄), 인도인 간다싱·비신싱 등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했다. 유자명중국 국민당 중앙본부와 협의하여 적극 후원을 약속받은 뒤 그를 회장으로 추대했다.[85] 동방 피압박 민족 대회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기관지 《동방민족》을 창간하였다. 1927년 텐진(天津)으로 옮겨가 북양대학(北洋大學)의 영문학 교수로 초빙되어, 1929년까지 교수생활로 자녀와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나 교수 생활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한계가 있었고, 이것조차 일본영사관 경찰의 눈을 피해다니느라 일정하지도 못하여 생계는 어려웠다. 1927년에는 둘째 딸 민애를, 1930년에는 큰딸 한애를 병으로 잃었다.[6][39]

1930년 8월 4일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임시정부에 다시 입각, 동 4일 임정 국무위원 겸 학무부장에 선임되었다. 1930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재선되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만주 사변'이 폭발하자 김규식은 '중한 민중 대동맹'의 수석 전권을 위임받아 다시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86] 이것은 민간 외교 사절을 파견 하여 미국 정계와 일반 국민의 만주 사변과 일제의 침략상에 대한 공분을 불러일으키고자 한 것으로 선전 강연과 동시에 기부금 모집에 노력 하였다.[86] 1932년 1월 귀국한다. 한편 그는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다시 임시정부로 돌아가게 되어 국무위원을 1935년 10월까지 역임하게 된다.[86]

민족유일당 운동과 교관 생활[편집]

1932년 1월 이봉창 의거와 4월 상해 윤봉길 의거 직후, 김원봉이 '남경중앙정치학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자 김규식은 '남경중앙정치학원' 한인특별반의 군사교관이 되었다.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지명수배를 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대학 교수라는 신분 때문에 체포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었다. 또한 의정원 활동 보다는 재야에서 민족유일당 운동과 교육 활동에 더욱 치중하였으므로 동료들로부터 비협력자, 부도원의원 등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32년 11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송병조·양기탁 등의 요청으로 국무위원에 취임하였다. 1932년 겨울 '중·한 민중대동맹', 대일전선통일연맹, 한국광복동지회 등의 단체를 결성, 조직하였으며 이후 항일독립을 위해 민족정당의 통합을 역설하였다. 특히 '중·한 민중대동맹'(SKPL)은 지하조직으로, 미국에까지 지부를 두고, 워싱턴지부 책임자로는 재미교포 한길수를 임명했다.[87]

그해 10월 12일 상해 민국로 동방여사에서 한독당이유필, 송병조, 김두봉, 조선혁명당최동오, 한국혁명당윤기섭, 신익희, 의열단한일래, 박건웅 등과 함께 민족유일당 창당회담을 가졌다.[39]

1933년 '남경중앙정치학원' 영어교관이 되었다. 1933년 3월 6일의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88] 1933년 4월 5일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에서 500여명이 모인 구류노류 대학교에서 열린 한국독립에 관한 연설로 청중을 매료시켰다. 그것도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여 미국인을 탄복케 하였다 한다. 그해 6월 21일 임시정부 외무부장 신익희의 사퇴로 후임 외무부장이 되었다. 1933년 7월 중한민중대동맹 대표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7월 21일 하와이 한인 교포에게 서한을 보냈다. 김규식이 중국으로 떠난 뒤 본 동맹의 비밀요원인 리·한(이용직한길수)을 개인적으로 미주 대표로 임명하여 본 동맹과 정보교신을 담당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재선되었다.[39]

1930년대 중반부터 중국 국민당 정권은 김규식과 김구, 조소앙, 김원봉 등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단체 통합을 주문한다. 그러나 각자 의견의 대립과 김구의 임정 법통 고집 등으로 성사되지 못하였다.[39]

민족혁명당 주석에 선출[편집]

1934년 1월 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개보선에서 임시정부 외무부장으로 재선출되었다.[89] 1934년 최동오, 김두봉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의 단결과 규합을 부르짖고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조직, 발기하였다.[90] 193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으며, 여일민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였으나 그 정체가 탄로나 1935년 일본의 추격을 받게 되자, '남경중앙정치학원'에서는 비교적 안전한 사천성 성도(成都)에 있는 사천대학 교수 자리를 추천해 주었다. 1935년 중앙정치학원 영어강사직을 사퇴하였고, 이후 사천대학의 영문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1935년 11월 일시적으로 임시정부 국무위원직을 사퇴하고, 1940년까지 임정을 떠나 있었다. 임정에 몸담고 있으면서 임정 요인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가해질 때, 김규식은 대학교수의 신분으로 이 위기를 모면하곤 하였다. 그것이 청·장년층의 일부 임시정부 고수파로부터는 비협조자로 몰려 비판받기도 하였다. 사천성으로 피신했다가 1935년 2월 6일 재미국민총회 위임대표 자격으로 '대일전선통일동맹' 제3차 회의에 참석했다. 1935년 6월 난징으로 돌아와 지청천 등 민족정당 지도자를 소집하였고 7월 5일 통합 민족혁명당을 재창당, 조직하여 그 주석에 선출되었다.[주해 10]

1935년 7월 5일 민족혁명당이 발족되고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자[91] 그는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 국민부 부장에 선출됐다.[92] 그 뒤 민족혁명당 중앙상무위원 겸 훈련부장에 선출되었으나 1935년 10월 민족혁명당 훈련부장직을 사퇴했다.[93] 김원봉은 그에게 당수직을 양보했고, 당내 무력을 장악한 실권자이면서도 반드시 그의 자문을 구하였다. 10월 임정 국무위원 임기가 만료되자 바로 민족혁명당 주석에 취임하였다.

의열단, 사회주의자, 김원봉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하여 이승만과 그의 추종세력들은 그를 사회주의자, 과격파로 몰고 가기도 했다. 동시에 사천대학의 영문학 교수로 있었고 1942년까지 사천대학의 영문학 교수로 봉직하였다. 또한 사천대학의 외국어학과장, 외국문학과장 등을 지냈고, 동시에 교재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때의 김규식은 아호인 우사를 이름으로 써서 '김우사'(金尤史)로 활동하였다. 중국에서 대학교수와 교육자로 활동하며 김규식은 월급의 전부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했고, 부인 김순애는 삯바느질 등으로 식구들의 살림을 꾸려야 했다.[39]

임시정부 재입각[편집]

임시정부 주석 김구

1938년 쓰촨 성에 도착한다.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쓰촨 성에 도착한 뒤 진통제와 페니실린을 구할 수 있었다.

그 뒤 국민당 정부에서는 김규식, 김구, 김원봉에게 합작하라며 합작을 권고하였고 그는 합작을 결정한다. 김원봉의 반대와 김성숙의 입각 설득 등 내홍이 있었으나 임시정부 입각이 결정되었다.[94]

1943년 5월 중경에서 열린 '재중 한인대회'에서. 사진 왼 쪽이 우사 김규식. 그 옆에 안경을 쓴 사람이 윤기섭

1939년 임시정부에 재입각을 결정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95] 1940년 민족유일당 운동의 확장으로 김구 등과 협의하였으나 의견 차이로 유일당은 실패하고 대신 항일 공동연합전선 설립을 결정하여 임시정부에 다시 입각, 1940년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부주석이 되고, 1941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의정원 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42년 10월 25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선전부장에 선출되었다. 1942년 10월 11일 손과(孫科)·김구·김원봉 등과 중경에서 400명을 이끌고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를 조직하였으며, 문화와 혁명사업을 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1943년 1월 사천대학 영문학 교수직을 사퇴했다.

1943년 민족혁명당 주석에 재선출되었다.[68] 7월 26일 미국방송에 출연, 재미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방송에 출연했다. 방송에서 그는 7월 26일 김구, 조소앙, 이청천, 김약산, 김규식 등이 중국 국민당 총통 장개석과 가진 인터뷰의 결과 및 그에 대한 대책, 조선민족혁명당 LA 총지부와 하와이 총지부의 집행위원 임명 및 집행권의 소재를 밝히는 것, 조선민족 전선연맹의 해산을 공개적으로 언명하고 있다. 항일운동 중 사망한 석정김창화문명철의 업적을 기리며, 하와이 한인대표 황사용 목사의 중경 입국문제 등을 언급하였다.

일제 강점기 후반[편집]

1944년 충칭에서 실용영문작법(Hints on English Composition Writing)을 출간하였다. 1943년 3월 12일 김규식은 미주에 있는 동포들에게 중국 국제 방송 을 통하여 영문으로 임시정부의 활동과 광복군의 활동상을 소개하는 방송을 하였고, 1943년 10월 6일자로 신문 독립 지에 이를 한글로 번역 게재하였다. 1943년 8월 5일과 8월 24일에는 미국·하와이·쿠바·멕시코·기타 지역에 있는 독립운동 동지와 미국인 친구들 을 향해서 "조선 민족 혁명당의 전후 계획"을 발표하였다.

1944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부주석직이 한국독립당김구를 주석으로 선출한데 대하여 원내 두 번째로 다수당의 당수인 그가 부주석으로 안배되었다. 부주석 취임 이후 그는 국민당정부와 협의하며 임시정부를 국제적으로 승인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7] 또한 부주석의 지위 역시 국무위원 선출권한이 없는 '투표권도 없는 투명치 않은 자리'로서 선전·외교문제에 치중하였다.

그는 종종 영어와 불어 등으로 자신의 동창, 지인들과 편지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국내외와 중국에 파견된 일본 경찰들 중 영어를 해석하지 못하는 형사들이 많았으므로 중간에 유실되지 않고 전달될 수 있었다. 8월 11일 로노크 대학 동창인 알렌 그린랜드(J. Allen Greenland)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에서 그는 '나는 지금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있지만 이 자리는 투표권도 없는 투명치 않은 자리이다. 그래서 나는 대체로 선전사업과 임정 내부 문제에 주력하고 있고 늘 군사, 외교, 기타 사업의 계획을 세우는 데 주력하고 있소'라고 했다.

1944년 6월 1일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측의 오철성(吳鐵成) 등과 한국 측의 엄항섭(嚴恒燮)·안원생(安原生) 등을 설득, 기독교 한교복리회(基督敎韓僑福利會)를 조직하였다. 기독교 한교복리회는 한교의 생활증진과 독립운동의 진행을 촉진함에 기여하였다. 1945년 3월 임시정부는 김규식과 외무부장 조소앙·정환범(鄭桓範)·임의택(林義澤) 등을 미국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파견하려고 국민당 정권의 승인과 군자금까지 결재를 받았으나, 미국의 거부로 무산 당하였다.[96] 1945년 5월 25일 임정 김규식 부주석이 중국<大公報> 기자에게 얄타밀약이 허위임을 답변 함. 1945년 충칭에서 실용영문(Practical English)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대학생용으로 300여 페이지였다.

정부수립 활동[편집]

광복과 귀국[편집]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외무부장에 선임되었다.[97] 그러나 김규식은 인공 내각 외무부장 취임을 거절하였다. 8월말 광복과 2차 대전 전승을 기념하여 시집 《양자유경 (양자강의 유혹)》을 내다.

상해비행장에 내린 임정요인들이 공항에서 환영 나온 교민들과 기념사진

1945년 11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때 그는 민족혁명당의 대표이자 임시정부 부주석 자격으로 김구 등과 함께 임정 1진으로 귀국하였다. 임정 귀국을 놓고도 먼저 귀국해야 한다는 한국독립당계와 민족혁명당계 간에 싸움이 발생했다. 그러나 김원봉의 양보, 혹은 당수인 김규식을 귀국 제1진에 넣는 조건으로 귀국문제가 종결되었다. 11월 23일 군산비행장에 착륙하여 차로 서울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조국은 미국소련에 의해 분할되어 있었고, 김규식은 한탄하였다.

"우리가 피흘려 싸운 것이 고작 이런 대가 밖에 없다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98]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한편 그는 8.15 광복에 대해 이런 견해를 피력하였다.

"진정한 민족의 광복은 해방,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본래 하나였던 우리 한민족이 불편 없이 통일되어 교류하고 상호 신뢰와 보완성을 유지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다른 민족이 우리 민족을 일러 단일 민족이니 우수한 민족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우리의 단결된 완전 독립국가 달성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때 그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우리 이천만 동포는 애 일같이 주인 정신을 살려 단합과 통일을 이루기 위해 전력투구해야 할 것이다."[99]

1945년 9월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서 창설된 한국민주당에서는 민족지도자와 독립운동 지도자를 당의 영수로 추대했다. 그러나 한민당에서는 김규식을 우익성향이 아닌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한민당의 영수 추대에서 제외되었다.[100][101] 9월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그를 미국에 파견, 전후 대책과 함께 이승만과 다른 교민지도자들과 연대함과 동시에 미국 정부의 의중을 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출국 직전 중국 정부가 허가를 내주지 않아 출국이 무산되었다.

11월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을 방문, 임시정부 환송 송별회에 참석하였다. 국민당 관계자들과의 만찬 시 김규식은 승전축하 시를 한수 지어 헌정했다. 11월 3일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는 문제로 한독당계와 민혁당계 간 논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임정 요인 제1진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한독당계와 민혁당계 간 귀국순서를 놓고 싸움이 벌어지자 민혁당의 서기장이었던 김원봉은 한독당계에 1진을 양보했고, 민혁당계는 한독당에 양보하는 조건으로 부주석이자 민혁당 위원장인 김규식도 귀국 1진에 포함하라고 요구했다.[102] 11월 3일 상하이 비행장에서 김구, 장준하, 안미생 등과 비행기를 타고 경기도 김포 비행장에 귀국했다.[102] 11월 귀국 직후 김규식은 윤치호를 방문했다. 이후 여러 번 윤치호를 방문했으나 윤치호는 김규식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지는 않았다.[103][104]

해방후 정치활동[편집]

1945년 12월 19일 임시정부요인 환국기념회에서 (단상 첫줄 왼쪽 두 번째가 김규식, 좌측은 김구)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귀국하였지만 그는 임시정부에 대해 매우 소극적이거나 비판적인 입장이었다.[21] 귀국 초,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이 그에게 무슨 병을 앓고 있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내가 무슨 병을 앓고 있느냐를 묻지 말고 내가 앓고 있지 않는 병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하였다.[58] 1945년 11월 28일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요인 환영회에 이승만, 김구와 함께 참석하였다.

카이로 회담에 "적당한 시기에 조선독립을 준다"고 한 '적당한 시기'란 우리가 늦출 수도 있는 것이고 빠르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손에 달렸단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만 하면 미군소련군이 내일이라도 없어질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못 보내고 있는 것은 우리 조선사람 전체의 책임인 것입니다.

11월 귀국 후 그는 서울삼청장(三淸莊)에 여정을 풀었다. 귀국 초기 새문안교회를 찾아 새문안교회 인사들과 면담하였으며, 김구와 함께 의친왕을 방문, 면담하기도 했다. 중도파 혹은 온건우파 성향 때문에 좌익으로 인식되기도 했던 그는 김구, 이승만, 권동진, 오세창 등이 한민당의 영수로 추대되었을 때 배제되었다. 그러나 귀국 후 한민당으로부터도 꾸준한 교섭 제의를 받게 되었다.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 그는 군정청 최고지도자 존 하지와 친밀하였으나, 이승만김구는 하지와 수시로 마찰을 빚는다.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12월 1일 하오 2시 20분경 조선생명회사 2층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좌우에 이승만, 이시영, 김규식, 류동렬 등이 창을 일시에 열고 임정 환영행렬을 맞이하였다.[105]

삼청장에 기거하며 이시영, 조소앙, 류동렬 등과 함께 경교장을 수시로 방문하였다.[주해 11] 귀국 직후 인사차 임정을 방문한 여운형을 만났으나, 뒤이어 여운형이 경비원에게 끌려가 몸수색을 당하고 다시 들여보내지는 것을 목격했으나 이를 말리지 않았다.

1945년 12월 1일 돈암장이승만으로부터 초대받았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초대를 받고 12월 2일 돈암장을 방문, 2시간 동안 회담하였다.[106] 12월 9일 윤치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12월 경교장 임정 요인을 찾아온 청년 중 윤판석이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썼다. 그러자 김규식은 "일본 놈한테 배웠구먼, 왜놈들한테 배웠다...여보게 청년들 그런 짓은 하지 말게." 하며 만류하였다.[107] 1945년 12월 24일 한국 소년군 총본부 부총재에 추대되었다.[108]

신탁통치 반대와 모스크바 3상 결정 지지[편집]
삼청장에서 망중한을 보내는 김규식 (1946년)

1945년 12월 27일 미국프랭클린 루즈벨트, 소련이오시프 스탈린, 영국윈스턴 처칠 등 미영소 3개국 수뇌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김규식은 신탁통치 결정문의 원문을 즉시 입수하여 해석, 국민에게 발표하고 즉각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12월 30일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76명의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그 뒤 김규식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을 신중하게 검토하였으며, 그 내용이 현실적으로 남·북이 미소에 의해서 분할 점령되어 있는 상태에서 결코 우리에게 불리한 내용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자, 그는 반탁운동으로부터 이탈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모스크바 3상 회의 전문을 입수하고 읽은 이후에 부분적인 지지를 하였고, 반탁운동에서 탈퇴하였다고 하여 모스크바 3상 협정의 내용을 찬성하는 좌파들의 조직에도 가담하지는 않았다.[109][주해 12] 그러나 찬탁으로 노선을 전환하면서 김규식을 암살하려는 극우단체가 비밀리에 조직되기도 하였다.[110][111]

1945년 12월 말에는 미국에서 귀국한 김호 등 일부 재미인사들이 그를 도와 활동하기도 했다.[112] 신탁통치 반대 입장에서 찬탁으로 선회하면서 그는 우익측으로부터 매국노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1946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정되었다. 이승만김구는 미소공위 반대와 공위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공위 찬성의 입장에 서게 됐다. 장덕수이승만김구를 방문하여 이승만김구에게 미소공위 참가를 설득했으나, 이승만김구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미소공위의 불가피성을 이해한 김규식은 미소공위에도 찬성입장을 보였다. 미소공위에 찬성 내지는 지지 입장을 발표하자 역시 우익세력으로부터 비난받았다.[113][114]

1946년 1월 6일 기독교청년연합회서울 정동교회에서 주최한 강연회에 초빙되었다.[115] 1월 16일부터 2월 6일까지 미소공위 예비회담이 열렸다. 1946년 1월 27일 남한에 세워질 정부가 중앙정부로서 유엔의 인정을 받으며, 또 이북과의 통합 방도가 세워진다면 남조선에서의 단독선거 문제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했다.

후일 그의 비서실장을 지낸 송남헌은 그가 '김규식이 군중에게 말하기를 '정부가 제주도에 세워졌더라도 그건 중앙정부다'라고 하던 분이 후에 가서는 주장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116] 송남헌에 의하면 김규식이 초기에 반탁을 지지했던 것에 대해 그는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라고 했다.[116] 중국 체류 중에도 일본 영사관 경찰과 밀정의 테러와 암살 위협에 시달렸으나, 귀국 후에도 동포에 의한 테러, 암살 위혐은 그에게 비애감을 심어 주었다.

군정과 임정의 갈등 조절 노력[편집]
미군정 시기의 김규식

미군정기간 내내 김규식은 미군정과 한국인 지도자들 간의 협력을 위해 노력하였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의 호출을 불쾌해하며 미군정 방문을 거절하는 김구(金九)에게 '시대가 바뀌었다'며 미군정청을 방문하도록 설득한 것도 김규식이었다.

한편 그는 미군정의 각별한 호의를 받았다. 당시 한국 민간인 중 미군 군용 전화가 가설된 집은 이승만과 김규식의 집뿐이었으며[117], 이승만은 미군정과 갈등하다가 3월 20일 전화가 끊기게 된다.

민주의원 회의 진행 중인 김규식 (1946년 2월)

19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김규식은 이승만, 김구, 조만식, 권동진, 김창숙,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118]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비상정치회의 주비회 통합체)에서 최고정무위원직(총 28명)에 선출되었다. 2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약칭 민주의원) 개원에 참석했다. 민주의원이 개원 후, 김규식은 민주의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김규식은 이승만, 김구 등이 주도하는 우익의 반탁운동에는 소극적이었다. 미군정이 민주의원을 만들 때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온건한 좌파세력들을 포섭, 참여시키기 위하여 설득, 노력하였으나 여운형의 참여거부로 실패하였다.

미소공위에 참여해야 된다는 주장을 피력하면서 그는 매국노로 규탄당했고, 그를 암살하기 위한 백의사 조직원들이 삼청장을 쳐들어오려다가 제지당하기도 했다.

우익 정치인 활동[편집]
김규식, 이승만, 김구

1946년 3월 미소공위 참관 한인의 대표자로 선출됐다. 미소공위 참관 문안 작성 중 김준연(金俊淵)의 방문을 받았다. 그러나 타이프로 신탁통치 관련 문서를 작성하던 중 찬성이라는 단어를 보고 김준연(金俊淵)은 이를 문제삼기도 했다. 또한 미군정청의 사령관 존 하지 장군은 이승만의 동의를 얻어 김규식을 좌우합작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하였으며, 과도입법의원의 의장이 되게 하였다.[119] 1946년 2월 14일 민족혁명당 당수직을 사퇴하였다. 김성숙, 장건상, 김원봉 등이 임정을 떠나 민족주의민주전선에 가담하자, 민족혁명당을 탈당하였으며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진행하였다. 좌우합작 참여 배경은 미국 국무성의 요구로 실시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1946년 5월 미소공위가 열린 덕수궁 앞에서 개최된 신탁통치 반대 집회

1946년 3월 1일 '3.1.기미년독립선언 기념사업회' 고문에 취임하였고, 3월에 미·소공위가 개최 예정되자, 그는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기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3월 7일 소련 군정청 사령관 스티코프가 짠 초안에서 그는 향후 수립될 정부의 부수상으로 지목되기도 했다.[120] 1946년 3월 19일 민주의원 의장 직무대리에 선출, 3월 20일 미소공위 개최때 미국이승만의 반소반탁으로 인해, 이승만이 회의 전면에 나오는 것을 꺼렸고, 김규식이 대신 민주의원 의장대리로 미소공위에 참석하였다. 46년 3월 24일 미소공위에 대처하기 위한 민주의원내 미소공위 교섭단을 구성하여 단장에 취임했다. 3월 19일 이승만민주의원 의장직을 사퇴했다.[117] 하게 되어 김규식은 민주의원 의장 대리에 취임했다. 이승만의 사퇴 이유는 표면상 이유는 건강문제였지만, 사실은 미군정이 미소공위 개최를 앞두고 철저한 반소(反蘇)주의자이며 신탁통치안을 격렬히 비판해 온 이승만을 정치 일선에서 배제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은 의장 대리에 김규식을 앉혔던 것이다.[117][121][122]

1946년 3월 10일 서울시내 시천교당(侍天敎堂)에서 열린 대한노총(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결성대회에 참석하고 대한노총 고문으로 선임되었다.[123] 한편 하지는 한때 좌익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중도우파인 김규식(金奎植)을 이승만 대신 대통령으로 앉힐 생각도 했다고 한다.[124]

미소공위와 좌우 합작 노력[편집]

1946년 3월 20일에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은 미국측이 예상했던 대로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은 한국 임시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항을 거듭하던 미소공위는 소련측이 양보하여 반탁투쟁을 했더라도 이후에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125]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것에 토대를 두어 공동성명 5호가 발표되었다.[126] 김구는 미소공위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지 앉하 하지민주의원 의장대리 김규식은 김구에게 서명할 것을 종용하면서, 서명이 곧 신탁문제에 언질을 준 것은 아니라는 특별성명 등을 발표했다.[126] 그리하여 이승만, 한민당 측에 이어 김구가 서명에 동의하자 소련측이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5월 초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다.[126]

1946년 4월 26일 경성 정동교회에서 한국청년회를 결성하고 초대 총재에 선임되었다.[127] 한국청년단은 우익 청년단체이면서도 온건한 성향을 띄고 있었고, 주요한, 장준하 등이 한국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6월 10일 민주일보(民主日報) 창간때 명예사장에 추대되었다.[128] 그러나, 5월 10일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면서 이와 동시에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정읍에서 발언하는 사건이 터지자, 김규식은 이승만의 남한만의 단독정부론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단독정부수립운동은) 친일파,민족반역자 자본가들의 이익을 테러로 옹호하면서 민족분열을 내란으로 하고, 극소수의 이익을 위한 정권이라도 세워보자는 가공 가증의 음모이다. 지금이야 우리민족은 통일된 정부를 세워서 공존번영을 누리느냐, 분열된 전제정치를 세워 상잔상학의 비운에 빠지느냐 하는 가장 위험한 기로에 서있다.

우리 인민은 가장 냉정하게 이 두가지중 하나를 취하여야 할 것이다.

1946년 5월 경제보국회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 경제보국회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우익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는데, 이들 중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이승만이었다.[129] 1946년 5월 12일 이승만 등과 독립전취대회에 참석하였다.

5월 19일 이승만은 미소공위에 불참할 것을 공식 성명으로 발표했고, 김규식은 반박성명을 내고 전체 애국자는 적극 미소공위에 참가하라고 공식성명을 발표했다.[130] 그러자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박용만은 '김규식 박사의 주장에 따른다면 미소 공동위에 끝까지 불참을 표명했던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은 애국자가 아니고 자기만이 애국자라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이라며 비난하였다.[130]

미소공위 지지 선언[편집]

1946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에서 미소공위지지 선언을 발표했다. 김규식은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131] 그러나 그의 미소공위 지지는 우익 진영의 온갖 인신공격의 원인이 된다.

김규식은 좌우합작이 안될 것이라고 절망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길이라면 실패하겠지만 기꺼이 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한편 좌우합작위원회에 한민당에서는 대표를 보내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김규식의 설득으로 한민당에서도 좌우합작위원회에 대표를 보냈다.

김규식은 한민당에서 온건한 분파의 지도자인 원세훈을 참가하게 하였다.[132] 1946년 6월7월 동안 좌우합작위원회의 비공식적이 회의는 계속되었다. 4사람의 만장일치에 의하여 하지중장의 정치고문이 초대되어 중재자로서 그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회의 초에 버치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들이 함께 화합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논평하였다.[132]

제2차 미소공위 당시 소련은 미소 양군의 철수를 주장했다. 소련측의 미소 양군 철퇴 주장에 대해서 김규식과 홍명희는 신중한 반응을 보였으나, 중도파 정당들은 민족자주의 입장에서 원칙적으로는 양군 철수를 지지했다.[133]

좌우합작운동 전개[편집]

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

1946년 5월 김규식은 원세훈여운형을 찾아가 좌우합작을 시도하였고 여운형이 이를 승낙함으로써 좌우합작운동이 시작되었다. 5월 15일 서울운동장에 모인 군중들 앞에서 '한구석에서라도 독립정부가 세워진다면 주권을 되찾는 것'이라고 연설하였다. 6월 전향한 조봉암이 중간운동 하던 리극로와 손잡고 조직한 민주주의독립전선을 만들었다. 그런데 독립전선이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려 하자 김규식은 이를 거부했다.[134]

조봉암은 공산당을 탈당한 후 김규식 박사를 만나려고 했는데, 김규식은 조봉암의 면담요청을 거부하였다. 강원용이 김규식 박사한테 “만나야지 왜 거부합니까” 했더니 “이 사람아, 한 번 공산당 한 사람은 바뀌지 않아. 조봉암씨는 믿을 수 없어. 공산당 하던 사람을 어떻게 믿어” 하는 것이었다.[134] 그 무렵 조봉암공산당을 탈당한 게 아니라 박헌영이승엽을 인천지구당 책임자로 앉혔기 때문에 반발했을 뿐이라는 소문이 돌았다.[134] 조봉암은 김규식을 지지하고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김규식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34] 김규식은 공산당이라고 하면 전향 여부를 떠나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았다. 강원룡에 의하면 그래서 조봉암이 좌우합작위원회에 들어오지 못하고 이극로와 민주주의독립전선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라 한다.[134]

좌우합작위원회 위원
(앞줄 가운데가 김규식, 오른쪽은 김붕준안재홍, 오른쪽 맨 끝은 원세훈)

1946년 7월 3일 김규식은 친일파 처단을 요구하였다가 안재홍과 함께 용공분자로 모는 삐라가 나돌고 벽보가 붙기도 했다. 기독연맹 모임에서 김구의 연설에 이어 김규식이 연설을 하였을 때 참석자들이 모두 귀를 막아 김규식은 퇴장하였다.[135] 거리에는 그들을 공격하는 내용이 잔뜩 담긴 전단이 살포되고 벽보가 나붙었다. 전단이 뿌려진 그날 괴청년들은 김규식의 집을 둘러싸고 김규식과 안재홍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안재홍의 사무실을 습격하여 반탁, '반(反) 과도입법위원회'의 내용을 담은 전단을 살포하였다.[135]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 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1946년 10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대의원에 선출되었고[119] 1946년 10월 민중동맹(民衆同盟)을 창당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 과도입법의원은 각 단위 마을 대표자가 단위 대표자를 선발하고 면 대표자는 단위, 군단위 대표자는 단위, 도단위 대표자가 입법의원 의원을 최종 선발하는 제도였다. 과도입법의원은 합작 7원칙에 따라 출범되었고, 김규식은 과도입법의원을 통해 좌우합작을 모색하였으나 여운형 일파와 장택상 일파가 과도입법의원 참가를 거부하여 처음부터 난항했다.[5] 또한 과도입법위원회 선거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당선된 한민당 일파를 낙선시켰다 한다. 이 일로 한민당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된다. 좌우합작에 적극 참여하는 그의 포용적인 자세를 높이 평가한 미 군정측은 이승만이나 김구 대신 그를 과도정부의 대통령으로 세울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5] 소련 역시도 조만식과 함께 그를 과도정부의 총리 혹은 수반으로 계획하기도 했다.[5]

과도입법의원 활동[편집]

1946년 12월 12일 김규식은 과도입법의원에서 위원장에 선출되었다.[119] 김규식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다.

...(이상 생략)...이 의원[주해 13] 이 결코 미 주둔군 사령장관이나 미 군정청의 자문기관이 아니며, 또 미군정을 연장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말하면 말하자면, 즉 남에 있는 미군정이나 북에 있는 어떠한 군정이나 그 존재를 단축시키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땅에서 완전한 자격을 얻어, 우리의 일을 우리의 손으로 하며, 우리에게 대한 법령제정도 우리의 손으로 하고 우리의 운명을 우리로서 자정하는데 매진할 것이다.

 
—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개원연설 내용 中
1947년 1월 과도입법위원회 신년사(가운데 털모자에 지팡이를 쥔 이가 김규식, 왼쪽 맨 끝은 서재필, 둘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는 여운홍, 세 번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는 장면)
김규식 (1947년 1월)

입법의원 의장이었지만 그는 소수파였다. 입법의원을 그의 사회로 개최하고 난 지 며칠 뒤 신탁통치 반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시켰다.[136] 홀로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던 김규식은 탁치 반대에 대한 99%의 찬성에 경악하여 발언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곧 과도입법의원에서 누군가 안재홍과 김규식을 찬탁 매국노라는 규탄 발언을 하면서 여러 번 곤경에 처하게 된다.

1946년 12월민중동맹이 공식 출범되었으나, 활동 중 김규식은 소극적 반응을 보였고 중도우파 내부도 복잡해 일부 세력만 남게 되었다.[137] 민중동맹이 창당되자 원세훈 등은 그를 당수로 추대했다. 그가 민중동맹의 위원장에 추대된 배경으로는 한민당의 토지정책 등에 반발하여 탈당한 원세훈·김약수·이순탁 등은 민중동맹을 조직하고 그를 당수로 추대했[138] 던 것이다. 1946년 12월민중동맹이 공식 출범되었으나, 활동 중 김규식은 소극적 반응을 보였고 중도우파 내부도 복잡해 일부 세력만 남게 되었다.[137]

12월 24일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에서 성탄절과 신년이 다가오므로 특별히 2주간 휴회하자는 안건이 들어오자 거절하였다. 그는 쉬지 말고 일하자고 간곡하게 호소하였다. 그는 독립운동 당시를 말하며 입법의원들은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해서는 희생해야 된다고 설득, 입법의원 회의는 성탄절 당일과 12월 30일까지 계속 개원되었다. 1947년 1월 4일, 김규식은 통일입법기구 수립을 위해 '북한측에 특사를 파견하겠다.'는 의사를 미군정에 밝힌다.

우리는 과거 1년간의 쓰라린 경험에 의하여 그릇된 노선의 지도를 청산하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광명한 전도를 전망하면서 가장 옳은 노선을 확립하였습니다. 이것이 즉 합작 7원칙의 노선입니다.
합작7원칙의 노선은 우리민족의 진정한 의사와 요구를 대표한 것이므로, 반드시 민중의 지지와 옹호를 받을 것이며, 편파한 일부노선은 필경 민족의 무자비한 비판에서 스스로 청산될 것입니다. 나는 몸이 비록 우익에 속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좌익동지들과 합작할 필요를 느낄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합작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오직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좌우합작위원회에 임하였으며, 또 남북통일의 임시정부 수립이 실현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 1947년, 신년사 내용 中

과도입법의원이 개설된 뒤 그는 아직까지 회의 절차에 참석해본 적이 거의 없는 입법의원들을 위해 직접 미국식, 유럽식 회의 과정, 원탁토의와 직선 회의 등 회의 방법을 일일이 설명하고, 동의와 제청, 재청, 삼청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계속 설명하였으며, 의원들이 투표 전후에 앞서 어떻게 해야 된다고 훈시를 하는 등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1947년 3월 과도입법의원 의장으로서 미군정청측 인사와 면담중인 김규식
1947년 4월 22일 김포공항에서 지청천 장군의 귀국을 영접하는 김구, 김규식, 이승만, 프란체스카 도너

1947년 1월 20일, 과도입법위원회에서 이승만 진영과 한민당계인사들이 반탁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수적으로 불리하여 김규식은 손을 쓸 수 없었다. 입법의원 회의장에는 우익 청년단체 회원들이 진입해 장덕수, 장택상 등의 지휘 아래 반대파들에게 야유를 보내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고 반탁결의가 통과되었다. 반탁결의안의 통과로 김규식의 위신은 크게 실추당했다.[139]

김규식은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이 지배하는 입법의원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며 시골로 내려갔다.[139] 1월 29일 휴양차 경기도 가평에 내려갔다가 2월 1일 휴양을 마치고 귀경했다. 1월~2월 이승만주도의 독립촉성중앙회는 김규식 중심의 좌우합작위원회를 '독립운동'의 반역집단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의 회색행동을 철저히 소탕할 것을 결의했으며[140], 김구가 위원장으로 있는 반탁투쟁위원회에서는 합작위원회를 유령집단으로 매도했다.[140]

1947년 7월, 서재필 박사와 김규식과 여운형.

1947년, 이승만을 견제할 목적으로 미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미국에 있던 서재필을 군정 고문관으로 초빙하려 하자 김규식 역시 서재필의 귀국을 원하였다.[141] 그는 군정청과 하지의 의견을 물어본 뒤 서재필 귀국에 적극 찬성, 지지한다. 그는 직접 서재필 귀국 환영 성명서를 지어 발표하였고, 서재필이 귀국하자 김규식은 여운형, 이승만, 김구 등과 친히 공항에 나가 서재필을 환영하기도 했다.[142]

우익 진영과 좌익 진영의 양면 공세에 시달림을 당하면서도 그는 조병옥, 장택상, 김준연, 김성수, 이순탁, 원세훈, 허정 등 우익 인사들을 상대로 미소공위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 설득하고 다녔다.

1947년 2월 남로당은 2.7파업에 들어가 3월 초까지 대규모 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을 친일반동이자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싸잡아 비난하며 사회 혼란을 더욱 가속화시켰다.[143]

1947년 3월 15일 조선적십자사 총재에 선출되었다. 적십자사 활동 중 그는 정식 대한적십자사의 부활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7년 조선적십자사의 국제적십자사 가입요청 서한을 미국적십자사를 통해 연맹에 보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44]

박헌영과의 관계[편집]

그는 여운형, 김원봉 등과의 대화·합작과는 대조적으로 박헌영을 몹시 싫어하였다. 미군정에 의해 좌우합작운동에 뛰어들게 되었음에도 그는 박헌영과의 합작은 거부하였다.[134]

적십자사 활동 중 조선공산당의 총수 박헌영조선적십자사(대한적십자사의 전신)에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자격으로 가입, 조선적십자사의 이사로 선출되자 김규식은 "나는 박헌영이 이사를 맡은 조직에 앉아서 일 못한다"고 반발했다.[134] 여운형의 측근이었다가 김규식 진영으로 넘어간 강원룡이 김규식에게 "그렇게 공산당을 싫어해서야 어떻게 좌우합작을 합니까"하고 항의하였다.[134] 그러자 김규식은 자신이 소련에서 겪었던 일을 소개하였다.[134]

내가 러시아에 자주 다녀왔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참 선량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레닌1917년에 혁명을 일으켜 1922년까지 5년 사이에 700만 명을 죽였다. 또한 알바니아라는 조그마한 나라에서 공산당혁명을 일으켰는데, 단 하루 만에 6만 명을 죽였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러시아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잔인하다. 만일 한국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잡게 되면 피바다가 된다. 그러니까 절대로 공산당이 들어와선 안 된다.[134]

그는 박헌영과 절친하게 지내던 조봉암 역시 혐오하였다. '조봉암 씨는 믿을 수 없어. 공산당 하던 사람을 어떻게 믿어?[134]'라면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김규식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잔인하고 비겁한 심성을 가졌고, 그때문에 공산주의가 들어오면 외국보다 더 심한 유혈사태나 학살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장택상과의 갈등[편집]

한편 존 하지장택상조병옥에게 김규식을 도울 것을 요구했지만 그들은 거절했다. 특히 장택상은 대놓고 거절하였다. 이에 김규식은 장택상에게 악감정을 품게 된다. 1946년 6월 경 하지 장군이 통역관 이묘묵을 통해 수도청으로 전화를 걸어 하지 중장이 할 얘기가 있으니 곧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사령관실에 들어서니 하지 중장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었으며 장택상이 앉자 김규식을 지지하라고 강요했다.[145]

중요한 문제가 있어 오늘 장 총감을 불렀소. 다름 아니라 앞의 정책을 의논하자는 것이오. 지금까지 미 국무성에서는 이승만 박사를 지지해 왔는데, 이제부터는 좌우 합작을 위하여 중립적인 김규식 박사를 지지하기로 바꾸었습니다. 장 총감도 앞으로는 김규식 박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일을 해주기 바라오.[146]

그러자 장택상은 '이러한 그의 말은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라며 지체 높은 사령관의 말을 제가 감히 어떻게 거역하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그 말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지만 참 잘하셨습니다. 잘 알았소 하고는 비꼬는 투로 말하였다. 그리고는 안주머니에서 봉투 한 장을 내어 그에게 주었다.[147] 하지는 이게 무어요 하고 의아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장택상은 펴 보시면 알 것 아닙니까?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봉투 속에 있는 것이 사표임을 알자 그는 얼굴이 굳어지더니 언성을 높여 "당신이나 조 부장이나 다 나쁜 사람이오."하면서 심한 욕설까지 했다. 장택상이 하지의 방을 나와서 조병옥을 만나 보았더니 그도 하지의 그같은 제의를 받고 사표를 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난 뒤부터 하지는 두 번 다시 김규식 박사를 지지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147]

군정의 좌우 합작 정책에 따라 두드러지게 된 사람이 김규식이었다. 그러나 김규식은 당시 치안의 책임을 지고 있던 조병옥과 장택상이 여전히 이승만을 지지하는 데 대하여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는 장택상이 김규식을 만났다.[148] 김규식은 장택상에게 "장 총감은 이제 사표를 내는 것이 어떻겠소? 그렇지 않아도 곧 갈리게 될 터인데?" 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장택상은 하지 중장이 김규식에게 무슨 말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하지 중장을 만났다. 그리고 하지 중장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더니 하지는 "당신과 조 부장은 우리 국무성에서 절대 신임하고 있는 사람인데 어찌 일개 사령관인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겠소?"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147] 고 하였다. 장택상은 '우리가 김 박사를 지지하지 않는 데는 적이 불만을 가지고 있던 하지 중장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다른 인물로 갈아치운다면 치안을 유지하기가 어려우리라는 사실을 구는 잘 알고 있었다.[148]'고 했다. 한편 김규식은 장택상더러 사퇴하라는 압력을 가했지만 장택상은 묵살해버렸다.

미소 공위 성사 노력과 좌우합작운동의 실패[편집]

1947년 이 무렵에는 미국 정가에서는 소련과의 협력무드가 깨졌고, 뒤이어 매카시즘 열풍이 불면서 미 국무성 안에 있던 일부 관리들이 '빨갱이'로 몰려 투옥되는 사태를 빚으면서 미국의 대한정책도 반공노선으로 급선회하게 되고, 여기서 미군정기 조선의 상황도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중도파 정치세력은 수차례 테러를 당하게 된다.[149]

이러한 상황에서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가 재개되었다. 김규식은 미.소공위의 성공만이 분단을 막을 길임을 역설했다.

우리민족이 공위의 무기휴회로 말미암아 지난 1년 동안 받은 온갖 불행과 상처는 형언할 수 없다.

금번에 재개되는 미소공위는 작년과 같은 복철을 밟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좌우남북이 일치단결하여 천재일우의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3천만겨레가 한가지로 결심하고 노력하기를 바라고 믿는다.

 
— 1947년 5월 13일, 담화문 중 일부[150]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위당시 사진. 오른쪽부터 여운형,김규식,이묘묵,말리크, 테렌티 스티코프(소련군정 사령관),허헌

미소 공위 참관 후 현 코리아하우스에서 앨버트 브라운 소장이 여는 만찬에 여운형, 이묘묵을 대동하고 참석했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위가 재개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의를 통해 통일정부를 세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처음 제2차 미소공위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었다. 6월 25일 공동위원회 참가를 청원한 남한의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 400여명과 미소 두 나라 대표의 합동회의가 개최됐고, 7월 1일에는 북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와 미,소 두나라 대표의 합동회의가 개최됐다. 그러나 7월 10일 소련 대표가 공동위원회 참가단체로 등록한 남한의 425개 단체를 118개로 제한하자고 제의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단체 참여수 문제를 놓고 미국소련 양측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국내에서도 좌파·우파 양 진영 역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 그러던 중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좌우합작위원회 좌측 대표 여운형백의사 단원 한지근외 4명 등이 쏜 권총에 맞고 피습 절명하자, 김규식은 여운형의 죽음에 매우 크게 충격 받았다. 김규식은 여운형 영결식에 참석하여 추모사를 남기면서 평가하였는데,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6]

우리는 한 위대한 혁명투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유일목표인 신국가 건설을 위하여 전 민족이 합작으로부터 완전 통일에 나아감으로 최후 목적을 달하기를 제창하여 이에 최종까지 노력하던 지도자를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몽양 동지의 영별에 대하여 정실상의 감촉보다도 우리 민족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공동진영의 한 용장을 상실하였다고 본다. 곧 민족 전체의 손실이다.[150]

 
— 여운형 서거 담화, 1947년 7월 22일, 김규식
1947년 12월, 좌우합작위원회 해단식.

1947년 7월 19일 IOC가입 축하기념으로 한국과 영국의 친선축구경기가 서울운동장(현재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린 날, 당시 미군정청 조선 체육부장이자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회장으로 좌우합작위원회를 이끌었던 여운형은 경기 참관을 하기 전에 옷을 갈아입겠다고 차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 혜화동 로터리 근방에서 배후를 알 수없는 한지근(韓智根, 본명은 이필형(李弼炯))에 의해 흉탄에 맞아 피습 절명하였다.[151] 여운형이 죽기 몇 시간 전에 또한 김규식도 '죽이겠다'는 협박편지를 받았다고 한다.[152] 김규식은 여운형과 사적으로 형님·아우님 하던 사이였고, 오래전 상해 임시정부 시절부터 해방이후 좌우합작운동까지 함께해온 동지였기에 여운형에 대한 그의 특별한 동지애는 1947년 12월, 좌·우합작이 실패로 끝난 뒤에 촬영한 기념사진에 손수 여운형의 얼굴이 든 사진을 오려서 붙이는 것으로도 표현되었다.[6]

우익 진영과의 갈등[편집]

당초 우익 진영에서는 그를 이승만, 김구와 함께 우익 3영수, 또는 김성수를 포함하여 4영수로 보았지만 그가 좌우합작에 뛰어들면서 그를 공격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1947년 7월 28일 서울에서 열린 기독교청년연합회 주최 강연회에 김구, 김규식은 연사로 참여하였다. 김구가 연설을 마치고 내려왔다. 다음 연사인 김규식이 장내에 소개되었다. 장내의 열띤 청중들은 김규식의 예정된 연설을 들어야 하는지의 여부를 두고 논란을 벌였다. 마침내 한 청년이 나와서 김규식과 같은 유물론자의 연설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 대안으로 모두가 귀를 막자고 제안했다. 청중들은 이 문제를 표결에 붙여버렸다.[153]

김규식의 연설을 듣지 말자는 주장은 바로 가결시켰고, 이어 김규식은 조용히 퇴장해버렸다.[154] 김구는 이를 보고 말리지도 않았다.

김규식에 대한 살해 협박은 계속되었다. 삼청장으로 수시로 협박 편지와 투서가 날아왔다. 1947년 7월 19일에는 여운형이 죽기 몇 시간 전에 김규식도 죽이겠다는 협박편지를 받았다고 한다.[155] 이는 'G-2 보고서[155]'를 통해 미국무성으로도 보고되었다. 그가 신탁통치와 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한 이래 수시로 그에게 협박 투서나 협박전화 등이 걸려왔다.

생애 후반[편집]

정당 활동과 암살 위협[편집]

그 이후 김규식은 원세훈, 조소앙, 안재홍, 여운홍 등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김규식 역시 극우단체로부터 수시로 암살위협과 테러의 위협에 시달렸고, 조선공산당은 김규식의 주변에 프락치를 보내 교란했다. 1947년 10월 14일 한미문화협회(韓美文化協會) 총회에서 명예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여운형 암살 이후 극좌, 극우 양측으로부터 암살·테러위협과 협박 투서, 프락치 침투 등에 시달림을 당했으며 좌우합작운동의 구심점을 잃어간 상태에서 12월 5일, 그는 좌우합작운동을 포기를 선언하고 말았다.[156]

1947년 10월 1일 민족자주연맹 결성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157] 정당정치를 혐오하였지만 정치결사체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일부 중도좌파, 중도우파 정치인과 청년들의 정치조직 결성 건의를 받아들여 민족자주연맹 결성에 착수하게 된다. 민족자주연맹경성부 천도교 강당에서 결성되었다. 1947년 12월 20일 민족자주연맹의 의장에 선임되었다.[157][158] 결성식에서 그는 극좌-극우를 반대하고 민족주체성을 찾자고 역설하였다.[157]

1947년 미군정에서는 이승만이나 김구대신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임명하고자 생각하였고, 한동안 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소련 군정에서도 통일 한국의 수상으로 김규식의 임명을 고려하기도 하였다.[159]

김규식은 박헌영을 미워하여 조선적십자사 이사로 박헌영이 참여하자 박헌영이 이사로 있는 곳에서는 일 못한다고 항의하기도 했다.[160] 그러나 박헌영은 김규식에게도 프락치를 보냈다. 뒤에 김규식의 삼청장에 파견된 기자 이본영송남헌에 의하면 '일종의 박헌영 프락치'라 증언했다.[161] 민족자주연맹의 비서처장으로 있던 송남헌은 그에게 권태양을 추천했다. 송남헌은 뒤에 '권태양은 내 밑에 있던 사람으로 내가 추천해서 썼다', '(권태양은) 성시백의 바로 직계이다. 내가 감쪽같이 속았지, 성시백이 선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진술했다.[162]

1947년 6월 16일 8명의 괴청년들이 김규식의 삼청동 자택 침입을 시도했다[113] 가 실패하고 도주하였다. 김규식은 자신이 머무르는 삼청장 안에서도 테러단을 피해 침실을 자주 옮겨다니기까지 했으며, 측근들은 만일의 테러 사태를 염려해 강원도 홍천군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에 참배를 가는 것도 만류하였다.[163][164]

민족자주연맹 창당[편집]

1947년 10월 1일 창립발기회[165] 를 개최하고 민족자주연맹을 공식 창당하였다. 12월 20일 서울특별자유시 천도교당에서 민족자주연맹 결성식이 있었다. 15개 정당과 사회단체 25개가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민족자주연맹의 총재에는 김규식, 정치위원에는 홍명희, 원세훈, 이극로, 손두환, 윤기섭, 김성규, 김순애가 선임되었다. 민족자주연맹의 결성식에는 하지 미국 육군 중장, 윌리언 딘 군정장관, 브라운 미육군 소장, 헬믹 미육군소장, 장건상, 조병옥, 장택상 등이 축사를 하였는데, 장건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군정의 핵심인물들이었다.[166] 또한 남조선노동당의 당수 박헌영, 민족주의독립전선 측의 조봉암도 사람을 보내 개회사 직전에 참여하여 내빈축사를 낭독하고 돌아갔다.

미군정 수뇌들은 민족자주연맹 결성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함으로써, 이 당시 이승만에게 보낸 반응과 대조적으로 김규식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지만, 그러나 미군정측이 남북지도자회의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점에서 개인 김규식에 대해서 보인 호의와는 무관하게, 민자련은 미군정, 미국과 대립되지 않을 수 없었다.[166] 김규식을 정점으로 한 민족자주연맹은 미군정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원칙적으로 미소 양군의 철퇴를 지지하여 미국측 입장과는 차이를 보였다.[165]

북한과 교섭[편집]

1947년 11월 김규식은 남북 지도자 회의 소집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167] 12월 발생한 장덕수 사건으로 이승만 계열과 한국민주당 등과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진 김구 계열이 합류하면서, 김규식은 남북협상에 김구의 협력을 얻어냈다. 1948년 1월 김규식은 남북협상과 단독정부 수립 반대의사를 공식 피력하였다. 2월 4일 삼청장에서 민족자주연맹 지도부를 소집시키고, 이 자리에서 김구와 공동명의로 북측에 서신을 보내 김일성(金日成)과의 회담을 제의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김구와 함께 북행길을 결심하여 1948년 2월 16일 김구와 함께 공동명의로 단독선거 강행을 저지하고 통일국가수립을 위해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주장하는 내용의 서신을 북한김두봉에게 보내 남북 지도자 회담을 제안하였다.[109]

북한에서는 인편을 보내 남북협상 제의가 내려왔다. 그러나 북한의 제의가 당초의 남북요인 회담과는 거리가 있다고 추정하였다. 그는 김일성에게 보내는 서신을 통해 다음과 같이 5개항의 전제 조건을 먼저 수락할 것을 요구하였다.

  • 독재정치제도를 배격할 것
  • 사유재산제도를 승인하는 국가를 수립할 것
  • 전국적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중앙정부를 수립하는데 동의할 것
  • 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하지 말 것
  • · 양군의 철퇴 공포할 것

이에 김일성이 5개항 전제조건을 수락할 용의가 있다고 응답하자 김규식은 북행을 결심한다.[주해 14]

11월 4일 미국 육군 소장 윌리엄 딘미 군정청 군정장관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즉시 내빈으로 참석하여 축사를 발표하였다.

조선 속담에 초불득삼(初不得三)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것은 첫 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세 번째 노력했을 때는 반드시 성공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1대 군정장관 아놀드 장군 때와 2대 군정장관 러치 장관 때에 성공하지 못한 자주 독립을 제3대 군정장관인 딘 장군을 맞이함으로써 이 소망을 달성할 것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통 환영사에서는 되도록이면 오랫 동안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이나, 금일 이 석상에서는 장군에게 환영사를 드리는 나로써는 될 수 있는 대로 단시일에 군정장관의 자리를 물러가고, 제1대 주한미국대사나 특별대사의 자격으로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바입니다.
 
— 제3대 미군정청 군정장관 딘 소장 환영사

1947년 12월 말 그는 남북분단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다시 민족자주연맹과 중도파를 규합하여 남북협상을 추진하였다. 한민당 탈당파인 원세훈, 김약수, 이순탁 등이 그의 노선에 동조하였다.

1948년 2월 4일 김구를 방문하였다.[166] 1948년 2월 4일 민족자주연맹은 남북통일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남북 요인회담을 열 것을 요망하는 서한을 김일성김두봉에게 발송하기로 건의했다.[166] 이 결의에 따라 김규식은 장덕수 살해사건 관련설로 난처한 입장에 빠져 있던 김구를 방문하고, 김일성에게 보내는 서한은 신기언(申基彦)이, 김두봉에게 보내는 서한은 엄항섭이 기초하여 김구와 김규식 두 사람 연서의 사신 형식으로 발송할 것에 합의했다.[166]

남북협상에 대한 만류[편집]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168] 한편 한민당으로부터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이 남로당 주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느니, 그들이 "크레믈린 궁의 사자"라느니 하며 비난을 받았다.[168] 한민당은 총선거에 임하여 만천하 동포에게 고함 에서 김규식은 한때 공산당원이었으니 그 태도가 공산당과 동일할 것은 필연의 귀결로 볼 수 있고, 김구도 토지국유정책 등을 볼때 공산당과 통할 가능성이 있다.[168] 는 공격을 당했다.

김규식 (1948년 4월)

4월 3일 김규식은 서울 필동의 호국역경원에서 열린 통일독립운동자 협의회 결성식에 참석하여 훈화하였다. 김규식은 남북협상의 실패를 예견하였고, 자신이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실패하면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것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국민들이 심정적으로는 남북협상을 지지하겠으나 현실적인 선택에 있어서는 이승만을 선택하리라는 것도 인식하고 있었다.[169]

1948년 4월 평양 을밀대에서
왼쪽부터 선우진, 김규식, 김구, 원세훈

1948년 4월 김규식이 남북협상에 참여하려 할 때 주변에서는 그에게 북한에 가지 말 것을 여러번 권고하였다. 남북협상이 정치적 자살 행위임을 김규식은 잘 알고 있었다. 조병옥은 '남북협상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하등의 결론도 못 얻고 그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하였다.[170]' 그래서 조병옥은 김규식을 찾아가 북한에 가지 말 것을 설득하였다. 조병옥은 김규식을 방문하여 3시간 동안 면담하면서 현존 국제정세 하에 있어서 공산주의자들과 독립정부 수립을 협상한다는 것은 무익한 일이며 협상을 하기 위하여 북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허행(虛行)이 될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정치적 자살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170] 김규식도 그의 의견을 존중히 여기고 북행하지 않을 것을 말하였던 것이다.[170]

민족자주연맹과 좌우합작파, 우파 일각에서도 그의 남북협상 참여를 만류하였다. 김규식의 비서로 지냈던 송남헌에 의하면 장건상원세훈 등은 김규식이 남북협상에 참가할 때, 김규식의 직접 참여가 장차 정치계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김규식의 북행을 만류했다고 한다.[169] 장건상은 특히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박사님은 북행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였다.

1948년 4월 14일 서울에서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108인 성명'이 발표되었다. 한편 김규식은 김일성에게 5개 조항의 전문을 보내고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북한이 5개 조항을 수용할리 없다고 판단하였으나 김일성이 3월 초 답신을 보내 5개항을 수용할 의사가 있다 하였고, 그로서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문화 예술계 인사 108명이 남북협상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찬성 서명을 발표하자 그도 더이상 남북협상을 기피할 방도가 없었다. 그는 실패를 예상하고 3.8선을 넘어 북행하게 된다.[171]

남북협상 참석[편집]

김구1948년 4월 14일 북한으로 갔고, 김규식 일행은 4월 21일 남북연석회의가 열리는 북한으로 갔다. 남북협상의 실패와 민중들이 이승만을 선택하리라는 것을 각오하였으나 그는 4월 21일 기자들에게 남북협상의 성공을 예상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비서 송남헌을 대동하고 3.8선을 넘어 북행하였다.[169][172] 김규식의 남북협상 배경에 대해 리처드 로빈슨은 '이승만에 대한 두려움, 개인적 혐오감, 애국심이 복합된 것이었다.[173]'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평양에 도착한 뒤 평양의 특별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평양의 특별호텔에 있을 때 김원봉(金元鳳), 허헌, 박헌영(朴憲永) 등의 방문을 받았다.[174] 환영 피로연에서 그는 '우리는 우리 장단에 맞추어 우리춤을 추자'며 자주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한의 주요 정치인사들은 북행하였으나 연석회의에는 불참하였다. 이는 철저히 소련 군정청의 민정청장 레베데프가 세운 각본대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를 눈치챈 김규식과 김구4월 22일 회의에만 참석해 간단한 인사말을 했을 뿐이다. 4월 22일 평양시내에 도착한 김규식은 4김회동에만 참석했을 뿐, 이후 병을 이유로 숙소에 머무르며 한 번도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172]

1948년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구,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4김 회동'에 참석하였다.[175]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 김일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48년 5월 5일 김구와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175]

말년[편집]

제2차 남북협상 불참[편집]

김규식은 남북협상에 참석하기 전에 실패를 예상하였다. 성과 없이 돌아온 김규식과 김구5월 14일 북한 측의 제2차 남북협상 제의를 거절하고, 5·10 총선거에는 ‘불반대·불참가’의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건국기초작업에 대한 그의 정치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공식적으로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불반대, 불참가를 천명했으나, 그럼에도 그는 비밀리에 연락을 취해 민족자주연맹 당원들에게 5·10 총선거에 출마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단독정부의 수립에는 반대하였으나 그는 대한민국 정부를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였다.[176]

1948년 7월 21일 김구와 함께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였다. 김규식은 통일독립촉성회 부주석에 추대되었다. 축사에서 그는 '남한이라도 철같이 단결하여 통일 독립 쟁취에 매진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김구반공주의자였고[176] 김규식 또한 반공적이어서 두 사람은 통일독립촉진회에 친북인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크게 경계하고 북의 정부수립을 배신행위로 단죄하고 북한·좌익과 선을 긋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176]

1948년 6월 29일 북한에서 황해도 해주에서 열리는 제2차 남북지도자협의회 개최에 초청하였으나 거절하였고, 8월 한국민주당에서 뒤에 그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 하였응나 그는 한민당의 이 요청 역시 거절하였다. 9월 북한 단정이 확정되자 7월 19일 김구와 함께 북한의 선거는 4월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서의 약속위반이라고 비난 성명을 발표하였다.[177] 1948년 10월 잡지 학풍(學風)이 창간되자 필진으로 참여하였다.[178]

1948년 12월 일부 남북협상파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제3차 국제 연합 총회에 단정 반대 입장을 발표할 대표자로 그를 선정하였으나, 그는 파리에 가기를 거절하였다.

정치적 몰락[편집]

단정 수립 당시 김규식은 이승만박사에게 '나중에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되지 않느냐?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라고 충고를 하기도 했다. 이에 이승만은 '역사의 심판은 내가 다 받겠다. 그건 걱정은 말라.'라고 대응했다.[179]

유엔의 승인 이후 그는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했고 현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180]

1949년 5월 15일 서울 조선정치학관(건국대학교의 전신) 개교 3주년 기념식에 내빈으로 참석하였다.

통일독립촉진회에서 활동하던 중 1949년 6월 26일, 김규식과 함께 통일정부 수립운동에 같이 활동한 김구가 암살되었다. 김구의 장례를 놓고 정부와 장례위원회의 갈등이 발생하였다. 김구의 장례는 7월 5일 김규식이 절충하여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정부 측이 국장을 제의하자, 장례위원회 측이 너희들이 죽여 놓고선 무슨 국장이냐?며 반발하며 민족장을 추진하려고 했다. 결국 김규식이 양자의 의견을 조정, 조율하여 국장과 민족장을 합친 국민장(國民葬)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181] 김규식은 조소앙과 함께 김구의 장례식을 주관하였고,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남북협상 당시 끊지 않겠다는 송전을 끊어 그의 정치적 입지를 궁지로 몰고 갔다. 송전이 마비된 뒤 미군에 의해 전기 공급이 복귀되기는 하였으나, 송전 중단의 원인을 김규식의 탓으로 몰고 가는 비난 여론이 나타났었다.[182]

이후 우파 청년들이 드나들던 그의 사저 삼청장은 썰렁하게 변모해갔다. 1949년 7월 3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결성준비위원회(약칭 민강위)에 참석하였다.[183]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184][185] 이어 김규식은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의장에 피선되었다.[186] 그러나 9월 20일 '민강위' 의장직을 사퇴하였고[187], 민강위 연석회의에 참석했다.[187]

또한 49년 북한에서 송전을 끊어버림으로서 남북 협상에 참여했던 정치인들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대한민국 단독 정부 승인과 말년[편집]

49년 8월 15일 정부수립 기념 1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기념사를 발표하였다.

"UN"과 열국이 승인한 대한민국의 1주년을 맞이함에 있어 누구나 다 경하할 바이다. 그러나 오늘까지 국토의 완전 통일을 보지 못하고 해방된 이 나라 백성들이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는 현장은 목불인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럼으로 민국은 앞으로 진정한 독립국가로서의 명실상부하게 완미한 발전이 있어야 하겠고, 자주통일된 국가로서 국가주인공인 전체 인민의 생활 안정과 행복을 제일로 획득하기에 전력을 다할 것이며 따라서 인류평화에 공헌하여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188]

1950년 4월 서재필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에는 자신이 좌파로 몰리는 것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하였다.

'(중략)...우리가 누구인지 하느님과 우리가 아는데, 왜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근심해야 합니까? 사람들이 저를 보고 빨갱이라 부른곤 합니다.'(하략)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예정되자, 김규식의 지지자들은 그의 총선 참여를 권유하였으나 김규식은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반발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족자주연맹 내 다른 당원들의 출마는 허용하여, 2대 총선에도 불반대 불참가 성명을 발표하였다.[189][190]

공식적으로는 불반대 불참가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전국 각지로 은밀히 사람을 보내 당선 가능성이 높은 민족자주연맹 당원들에게 입후보를 권유하였다.[189] 민족자주연맹 공천으로 출마한 후보자들은 원세훈(서울 중구 갑), 최동오(서울 중구 을), 김붕준(서울 성동 갑), 박건웅(서울 용산 을), 김성숙(金星淑, 경기 고양), 조일근(전북 전주), 박종운(경남 의령), 송일환(경남 울산 갑), 최관수(경남 창원 갑), 김성숙(金成璹 제주도 남제주) 등이었다.[189] 그러나 "북측으로부터 선거자금을 받아썼다"는 따위의 누명을 씌워 반이승만 성향의 입후보자들을 구금하는 등 관권개입과 폭력, 금력이 판쳤던 게 5·30 선거였다. 그런 탓도 작용해 민족자주연맹 후보 가운데 금배지를 단 이는 원세훈 하나뿐이었다.[189]

최후[편집]

6월 25일, 한국 전쟁 직후 공산 치하의 서울에서 김규식을 마지막으로 본 강원룡에 의하면 여전히 건강이 안좋은 상태였으나 자신의 신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한다.[191] 이승만의 정치적 반대자이고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평양에까지 다녀온 자신을 설마 북한 정권이 어떻게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91] 그 해 6월, 김규식은 한국전쟁때 조선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으며[192], 이때 아무도 그에게 피신할 자동차를 보내주지 않았다 한다. 북한 인민군이 소환을 재촉하자 아들 김진동이 동행하려 하였으나 비서인 권태양이 그와 함께 나갔다.[주해 15]

한편 김규식을 인도한 권태양은 조선로동당에서 침투시킨 첩자였다. 송남헌강원룡권태양을 첩자로 지목했다. 김규식의 측근이었던 강원룡공산 치하의 서울에서 권태양이 박소붕이라는 사람에게 '당신 지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함부로 떠들지 말아.' 라고 하는 말과 그 뒤에 박씨에게 뭐라 하자 박소붕의 태도가 싹 달라지는 것을 보고 권태양의 정체를 의심하였다.[193] 김규식은 북에 가지 않을 목적으로 그를 보냈으나, 그가 김규식이 북에 가도록 일을 만든 것은 아닌가 하고 의혹을 제기하였다.[193]

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권태양성시백이 보낸 프락치라고 증언하였다.[194] 송남헌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도처에 공산당의 프락치들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 없었다고 증언하였고[194] '권태양은 내(송남헌)가 속을 정도로 은밀히 활동하였'다고 진술했다.[194] 송남헌은 또한 '권태양성시백의 직접선'이라 하였고[194] '8월 25일 공산당에서 하는 해주회의에도 갔다'[194] 고 진술했다.

그는 북한 인민군이 유엔군의 공세에 밀려 평안북도 만포진 부근 압록강 한 귀퉁이까지 끌려갔다가 1950년 12월 10일, 오랫동안 앓아왔던 심장병, 천식 등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70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192] 강원룡은 그가 만포진 부근 별오동에서 사망했다고 보았으나[25] 사망 장소도 만포진의 민가에서 사망하였는가 북한 인민군 군병원에서 사망하였는가 여부도 불확실하다. 1950년 12월에 사망했다는 설은 북한에서 공식 주장한 것으로 확실하지는 않다. 1952년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주해 16]

사후[편집]

이승만의 정적이자 납북자인 까닭에 금기시되다가 제2공화국 시절에도 부정적인 평가는 계속되었다. 1960년대 후반 관련 서적 출간 이후 1970년대 후반 이후 재조명 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91년 11월 21일 광복회는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선열제단에 그의 위패를 모셨다.[7] 12월 31일 우사연구회 발기인총회가 열리고 우사연구회가 창립되었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김규식이 미군정에 의해 수립된 민주의원과도입법의원의 의장직에 있을 때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지만, 그의 소중함을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그를 소위 ‘애국열사릉’에 안장했다.[195]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196]

연보[편집]

기타 노력[편집]

외교적 노력[편집]

그는 국제사회에 있어서 각국가는 자국의 이익에 의해서 서로 동맹도 되었다가 적이 된다고 확신했다. 1919년 4월파리강화회의 참여 이전까지는 이상론자였으나, 파리 참석이 좌절되고 소련조차도 조선의 독립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는 좌절, 보편적인 정의가 존재한다는 믿음에서 자국의 이익에 의한 합종연횡론으로 세계관을 바꾸게 된다.

그는 친미(親美) 인사이면서 친중국(親中國)인사였고, 소련과도 우호적인 노선을 유지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활동하였고 주로 미 군정청과 교섭하였으므로 친미적 성향이 강하였다. 그러나 미국문명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미국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197] 김규식은 외교 관계를 중요시 하면서도 자주성, 자립성과 경계를 강조하였다. 1919년 4월~7월의 파리강화회담에서 외면당한 것에 대한 미국, 프랑스, 영국 등 구미 유럽 각국의 민주주의(民主主意) 정책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되었고, 미국, 프랑스, 영국흡혈귀들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구미유럽에 대한 대안으로 김규식은 사회주의를 택하였다. 소련의 레닌과 스탈린이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줄 것을 확신한 그는 사회주의자들과 손잡고 소련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에서 조차도 1924년 10월 추방당하면서 불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미국흡혈귀와 같은 제국주의 침략국가로 보기도[198] 했다. 친미국인사이면서도 미국을 신뢰할 수 없었던 김규식은 해방 직후 미국과 가까이 지내면서도 항상 미국을 경계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무장 투쟁 노력[편집]

무장투쟁론과는 거리가 있었으나 무력부대 육성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1913년부터 류동렬, 이태준 등과 몽골로 건너가 무장투쟁을 위한 한인부대 육성을 목적으로 한 군사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199] 그러나 일본 경찰의 감시와 방해, 마적단의 출현, 적은 월급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19년 1월에는 모금을 위해 만주를 거쳐서 압록강을 건너 비밀리에 국내에 진입했다가 되돌아가기도 했다. 1922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고려혁명군 조직에도 관여하였다.[199]

그밖의 활동[편집]

교육가와 학자로서의 활동은 1913년 12월 17일 상해의 박달학원 영어 교수, 1923년 만주 복단대학 상하이 분교 영문학 교수, 1923년 모교인 로노크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1927∼1929년 톈진(天津) 북양대학(北洋大學) 영문학 교수, 1932년~1937년 난징(南京) 중앙정치학원의 정치교관, 1937년~1940년 쓰촨대학(四川大學) 영문학 교수 강의및 외국어과장, 외국문학과장 등과 같은 강단생활을 하였다.[200]

사회단체 활동으로는 온건 우파 청년들로 구성한 한국청년단 총재로 청년단을 이끌었고, 1947년에는 조선적십자사 총재에 임명되었다. 정치 활동으로 실제 활동은 부총재 백상규가 대리하였으며 48년 8월 정부수립 이후부터는 49년 대한적십자사가 정식으로 부활할 때까지 임시로 적십자사를 이끌었다.[201]

일화[편집]

국어와 함께 영어한자, 독일어, 라틴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몽골어, 산스크리트어 등 다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김규식은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원, 대한민국임시정부 직원, 의열단 단원, 한국인 공산주의자 등을 모아놓고 영어한자(漢字)를 가르쳤다. 상하이에 도래한 초기에 그는 단재 신채호의 요청으로 그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신채호는 영어단어 뒤에 하였을람 이라는 접속사 등을 반드시 붙여서 읽었다. 김규식은 문법과 철자를 꼼꼼히 보고 틀린 점을 지적한 반면, 신채호는 단어의 뜻만 알면 되지 않느냐며 반발하였다. 김규식은 신채호영어 발음, 철자 문제를 놓고 크게 싸웠고, 신채호는 뒤에 이광수를 찾아가 다시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202]

목사 강원룡에 의하면 '그의 영어 실력은 미국 사람이 앞에 나와서 하는 영어를 듣다가 영어발음이 틀렸다며 그의 말을 바로잡아줄 정도로 뛰어났다' 한다.[25]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그는 매일 주말이면 그는 꾸준히 교회 예배에 출석하기도 하였다.

이승만과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했다.[주해 17] 그는 이승만한글, 한자, 영어 등으로 자유롭게 대화를 구사할 수 있었다.[203]

평가[편집]

당대의 여론[편집]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5%가 김규식을 지목하였다.[204]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52표를 얻었다.[204]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694표로 전체의 10.3%를 확보했다 한다.[204]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89표로 4위를 하였다.[204]

소련군정 사령관 테렌티 스티코프의 비밀수첩에는 '장차 한국의 통일 임시정부가 세워졌을시 내각의 총리는 김규식이다.'라고 적어놓았다. 미군정 사령관 아처 로치 소장은 1947년 3월 6일에 작성한 '한국 대통령 임명에 관한 메모'란에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추천했다. 그만큼 그는 좌우세력에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했다는 평가가 있다.[205]

미군정당국의 한 장교는 "임정의 부주석 김규식 박사를 대하고 보니 그처럼 세련되고 견식이 높은 분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를 보고 임정 요인에 대한 그간의 인식을 다시 하게 되었다. 특히 국제적인 정치 감각과 세련된 매너, 달변, 그리고 훌륭한 영어 회화 실력은 놀랄 만한 일이다."[206] 라고 평가하였다.

조병옥은 그가 영어에 능란하였으며, 또 한문도 쉽게 습득해 종횡으로 구사하였는데 그 재주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회고하였다.[33] 조병옥은 그가 파리 강화회의에까지 가서 국제적으로 활약을 눈부시게 하였던 고로 그가 귀국하였을 때는 많은 기대를 가졌으나 중간노선을 걸어 퍽이나 실망했던 것이다.[33]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원, 대한민국임시정부 직원, 의열단 단원, 한국인 공산주의자 등을 모아놓고 영어와 한자를 가르쳐서 명망이 높았다. 그러나 1920년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폐를 놓고 창조론과 개조론, 임정고수파로 분열했을 때 창조파에 속했고, 1930년대 이후 임시정부가 일제의 탄압으로 중국 관내를 옮겨 다니고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일본 영사관 경찰에 피체되었을 때에도 그는 대학 교수라는 신분을 통해 위기를 극적으로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33년 남경군관학교 당시에는 이봉창, 윤봉길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그도 난징에서 피신해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위기를 피하게 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측으로부터는 한때 비협조적인 인사로 몰리기도 했다.[207]

영리하고 야심만만한 인사였다는 시각도 있다. 미국 기자 마크 게인은 그도 대통령이 되려는 뜻이 있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김규식은 영리하고 야심적인 인간이었고, 그의 주변에 있던 미군 중위 버치는 전능자의 역할을 하는 것을 즐기는 동시에 자기 친구인 김규식을 수반으로 하는 한국 정부의 고문관이 될 것을 꿈꾸고 있는 듯하다.[208]

평가와 비판[편집]

1990년대 이후의 평가[편집]

남북협상에 실패한 후 납북되어 잊혀졌다가 2000년대 이후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209] 이승만 정권에서 금기인물로 지정되었다는 주장까지도 있다. 2000년 8월 김규식의 생애와 사상 5권이 출간되었으며[209], 그 해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부산대학교 교수 이철순는 "명분에만 집착한 정치가가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정권에는 의심을 가지고 신중하게 접근했고 정세에 따라서는 현실에 적합한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며 "김규식은 이상주의 일변도의 정치가가 아니라 현실주의적 측면도 있는 정치가로 본다"고 밝혔다.[210] 1921년~1922년 모스크바에 갔을 때 그와 동행했던 나용균에 의하면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어학에 능통했으며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깨끗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211] 합리주의자라는 평가도 있다.

이철순 교수는 그를 현실적인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남북 협상에 참여하면서도 북한 정권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했던 것도 그런 모습 중 하나다. 그는 유엔의 승인 이후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했고 현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180]'며 '상당히 현실적인 면모를 보였다.[180]'고 평하였다.

부정적 평가[편집]

강원룡은 그는 깨끗한 학자가 적격이었는데, 어쩌다 혼란스러운 정치판에 떠밀려 정치가로서 힘든 길을 걷다가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된 비운의 인물이라 평가하였다.[212] 권모술수를 쓰지 않은 몇 안 되는 정치인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정치적 카리스마가 부족하고 성격이 우유부단하다는 비판이 있다. 성격이 냉정하고 차갑다는 비판과 편협하다는 지적도 있다. 나용균에 의하면 그는 (성격이) 약간 편협한 편이었다고 평하였다.[211] 한편 김준연(金準淵)은 그가 배짱이 없었고 마음이 약했다고 보았다.[211] 윤보선은 그가 '한 번 적이 되면 영원한 적이 된다'고도 평하였다.[211] 강원용은 그가 직선적이고 날카롭고 냉정했다고 보았다.[211] 여운홍은 그가 성격이 급했고 고집이 세고 집착이 강하다고 평하였다. 그런가 하면 배짱이 없었다. 여운홍은 그가 '이승만의 배짱의 10분의 1만 가졌더라면' 하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211] 허정은 그가 상당히 냉정하다고 평가하였다. 명분론에 치우쳤다는 비판도 있다.

제주 4·3 학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점도 부정적 평가의 하나로 지적된다. 한편 그는 선동에 호소하는 대중정치를 싫어하였고, 달변으로 국민들을 선전, 선동하는 정치인을 경멸하기도 했다. 대중정치와 여론선동을 기피하는 점을 그의 정치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실패요인으로 보기도 한다.

신복룡은 그가 '학자 타입에 건강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당초부터 정치를 해선 안될 사람'이라고 비판하였다.[213]

기타 평가[편집]

김규식의 비서로 있었던 송남헌에 의하면 이상주의자라고 평가하였다. 강원룡은 그가 직선적이고 날카로웠으며 냉정하고 세심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통찰력이 있고 지식이 풍부하였지만 비관적이었다고도 보았다.[171] 한편 둘째아들 김진동은 그가 규율에 엄격한 사람이었으나 모순투성이였다고 평하였다.[171] 한편 광복 직후 45년 12월 경교장 방문 청년 중 윤판석이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썼다. 그러자 김규식은 이를 만류하기도 하였다.[107] 당대의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조국의 독립과 애국, 헌신을 강조한 것에 반해 그는 한국인은 잔인한 심성을 가진 민족[134] 이라는 평을 내려 맹목적인 애국심에서는 거리를 두기도 했다.

매국행위를 찬양하지는 않았음에도 맹목적인 애국심을 거부한 것에서 그는 일부 한국인들로부터 거부감과 배척을 당하기도 했다.

1919년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부위원장으로 미국에 체류할 때 두골절제수술을 받았다. 머리 뒷부분에 혹이 있었던 그는 동료 독립운동가들로부터 우사(尤史, 혹있는 양반)라는 별명을 받았고, 그는 '우사'라는 이름을 아호이자 필명으로 썼다. 유년 시절에 얻은 병으로 적은 키에 체구는 작았고, 약간 배가 나온 이미지였다고 한다.

2008년 1월 7일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의 '이천 냉동창고 화재'로 사망한 중국인 김군은 그와는 동명이인으로 만주에서 활동하던 '노은 김규식'의 후손으로 알려졌다.[214][215][216][217]

몸이 약해서 항상 아팠다고 한다. 간질 증세가 수시로 일어났고 뇌종양 수술도 받고 신경통,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미군정 쪽에서 그에게 붙인 별명은 'sickly'(약골)이었다. 광복 후 어느 기자가 그와 인터뷰를 하는데 '어디가 편찮으신 것이냐?'고 물었더니 김규식은 "차라리 안 아픈 곳이 어디냐고 묻는 게 더 빠를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한편 그는 대화를 할 때 '학자풍', '선생이 학생을 가르칠 때 쓰는 화법'을 썼다고 한다.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만난 이래로 여운형과 '형님', '아우님' 하며 계속 여운형과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고 한다. 로노크 대학교에서 만난 고종 황제의 서자 의친왕과도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귀국 직후 김규식은 김구와 함께 의친왕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의 부인이 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할 만큼 생계가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한민당공산당에서는 '그가 일본인에게 뇌물을 받았다.', '일제시대의 적산회사의 재산을 착복했다.'는 등의 근거없는 헛소문을 내서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고 한다. 강원룡은 그에게 이런 비방을 가하던 사람 중의 한사람으로 한민당계의 한 정치인을 지목했다. 이 정치인은 김준연으로 일제시대에 ML파 공산당에 가담했다가 해방 후 한민당에 가담했던 정치인이었다.[218] 한민당원 김준연은 특정 정치인에 대한 악의적인 내용의 벽보를 잘 붙였는데, 강원룡에 의하면 '김규식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적산을 팔아 돈을 벌었다.[218]'는 글을 써붙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성격[편집]

차갑고 냉정한 학자풍 성격이라는 평가가 있다.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준엽(金俊燁)은 김규식이 인간적으로 가깝게 하기는 어려운 성품이라 지적했다. '김규식은 우리들을 혁명 후배라기 보다는 학생으로 간주하려는 듯하였다. 그는 백범과는 달리 이론적이고 서구적이었으며 인간적으로 좀 가깝게 하기는 어려운 성품으로 느껴졌다'고 하였다.[219] 다른 사람을 쉽게 신뢰하지 않았으나, 한편으로 한번 신뢰한 사람은 끝까지 신뢰하는 성격이었다.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난히 호의를 베풀고 사소한 것도 잊지 않고 챙겨줄 만큼 각별하였다 한다.

윤치호1921년 신흥우를 통해 접한 소식을 통해 그가 다른 임정 요인들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신흥우군의 말로는 김규식이 상하이 임시정부 인사들과 불화를 겪고 있다고 한다.[220]'는 것이다.

아들 김진세에 의하면 그는 단호한 면이 있었다고 한다. 김진세는 “아버지는 '항일'에 대해서는 정말 철두철미 하신 분이셨다”면서 “중국에서 활동하면서는 물론 귀국 이후에도 일본 사람 만나는 것도 싫어하셨고 일본 음식조차 드시지 않았다.[221]”고 하였다.

대한민국대통령 권한대행국무총리를 지낸 허정(許政)은 김규식의 성격을 차갑다며, '무척 냉정한 분[222]'이라고 지적했다. 김규식은 그가 미주에 있을 때 뉴욕에서 만났다. 허정이 본 그의 첫 인상은 무척 냉정한 분이라는 것이었다. 김규식을 처음 만난 날 허정은 김규식과 저녁을 함께 하면서 프랑스에서 고생하는 한국청년들을 데려와야 한다고 말했다.[222] 허정미국과 유럽에 유학하는 고학생들의 학비를 지원해줄 것을 김규식에게 부탁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허정에 의하면 "김규식은 내가 워싱턴에 있을 때, 한국인 유학생들이 나를 찾아와 괴롭혔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좋아서 미국에 왔으면 노동을 하든 공부를 하든 자신의 역량껏 할 것이지 왜 구미위원부를 찾아와 괴롭히느냐?’ 라고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222] 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격이 합리주의에 기인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의 교수 이정식은 무정한 어른들과 또래들의 차별대우가 그의 성격이 차갑고 냉정한 성격으로 만든 원인으로 보고 있다.

사상과 신념[편집]

한국인의 민족성[편집]

김규식은 자신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배경에는 한국인의 민족성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국인의 민족성은 잔인하다[134] 는 것이다.

공산주의 자체가 잔인한 사상이지만 한국인은 민족성이 잔인한 민족이다. 따라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보았으며 그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을 극도로 미워하였다. 그는 박헌영을 극도로 혐오하였고, 박헌영과 절친하게 지냈던 조봉암 역시 미워하였다.

자유주의관[편집]

허정 등이 임정 요인에게 인사하러 경교장을 방문했는데, 임정 요인들 옆에서 김진동은 흡연을 했는데 아무도 그가 담배피우는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허정에 의하면 아들 김진동은 아버지 김규식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했다.

허정은 '나는 지금도 그 때의 임정 요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위엄이 넘치는 김구 선생, 서양 신사와 같은 풍채의 김규식 박사, 체구가 작으면서도 퍽 늠름해 보이는 이시영 선생은 퍽 인상적이었다. 이시영 선생은 임정 요인들 중에서는 가장 나이 많은 분이었지만, 피로의 기색이나 늙은 티가 조금도 없었고 눈이 번쩍번쩍 빛나 위엄이 있었다.[223]'며 '나에게 기이한 느낌을 갖게 한 것은 김규식 선생의 아들 김진동이 아버지 옆에서 파이프담배를 피우고 있는 광경이었다.[223]'고 했다.

몸이 병약하면서도 애연가였던 김규식은 아들 김진동이 자신의 앞에서 담배피우도록 허락하였다. 당시의 한국 사람들은 그런 김규식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국제정세에 대한 관점[편집]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격했고 국제사회의 도덕적 이상주의를 확신했던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의 실패 이후 미국프랑스, 영국, 독일 등에 대한 혐오감과 냉소를 갖게 되었다. 파리강화회의의 실패 이후 그는 도덕적 이상주의를 버리고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에 따라 약소국을 이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서유럽과 미국자본주의 열강이 동아시아 전체를 공동으로 착취하기 위해 결탁[70]'했다,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 악명 높은 3대 흡혈귀 국가와 가증할 4강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자신의 가면을 벗어던졌다.[70]'며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 뒤 그는 임시정부 시절과 미군정기를 통해 미군정 및 미국과도 친하게 지내며 친미인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는 미국을 신뢰하지 말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그는 민중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연설을 기피하였으며, 대중을 선동하는 정치인을 경멸하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시각[편집]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외면당한 뒤 그는 미국, 영국, 프랑스를 제국주의 집단[70] 이자 '흡혈귀'라고 비판하였다. 구미위원부를 거쳐 상하이로 돌아온 김규식은 1918년에 만난 여운형 등을 통해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을 소개받았고, 1920년부터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과도 교류한다.

1922년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했을 무렵 그는 공산당 후보당원[68] 으로도 명단이 올라 있었다.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독립운동가나 지식인들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오해받았던 김원봉과도 연대해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에는 반대하였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집권을 반대하였다.

김규식은 공산주의자가 집권해서는 안되는 이유로 '내가 러시아에 자주 다녀왔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참 선량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레닌이 1917년에 혁명을 일으켜 1922년까지 5년 사이에 700만명을 죽였다. 또한 알바니아라는 조그마한 나라에서 공산당이 혁명을 일으켰는데, 단 하루 만에 6만명을 죽였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러시아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잔인하다. 만일 한국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잡게 되면 피바다가 된다. 그러니까 절대로 공산당이 들어와선 안 된다.[134]'는 것이었다.

남북협상의 실패 예견[편집]

48년 3월 그는 남북협상의 실패를 예측하였다. 그리고 남북협상의 실패 이후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였다. 그에 의하면 국민들이 감정적으로는 남북협상에 동조하나 현실적인 이익 앞에서는 이승만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3월초 그는 5가지 원칙을 내세워 북행길을 피할 계획이었으나 김일성이 이를 수락하면서 북행길에 오르게 되었다.[171]

김규식이 북행길에 오를 결심을 하자 장건상 등 남북협상차 방북하는 인사들 중에서도 삼청장을 찾아와 그의 북행길을 만류하기도 했다. 송남헌장건상원세훈 등은 김규식이 남북협상에 참가할때, 김규식의 직접 참여가 장차 정치계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김규식의 북행을 말렸[169] 다고 증언했다. 중도파의 영수이며 남북협상으로 정치적 몰락이 예상되니 남북협상은 자제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8년 4으월 14일 문화 예술계 인사 108명이 남북협상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찬성 서명을 발표하자 그도 더이상 남북협상을 기피할 방도가 없었다. 그는 실패를 예상하고 3.8선을 넘어 북한을 다녀왔다.[171]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전 국민들이 감정적으로는 남북협상에 동조하나 현실적인 이익 앞에서는 이승만을 선택한다고 예상했던 그는 1948년 5월 10일 공식적으로는 5.10 단독 총선거에 불반대 불참가(반대하지는 않으나, 참가하지도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는 비밀리에 전국 각지의 민족자주연맹 지역 지구당에 비밀리에 연락하거나 전보를 보내 당원들에게 5.10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171]

김규식은 미군정의 권고에 따라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한다.[224] 1946년의 좌우합작운동에도 그는 '좌익과의 합작이 쉽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에 회의적이었으며, 좌우합작의 실패를 예상하였다. 그는 좌우합작에 참여를 권하는 미군정 측의 요구를 끈질기게 거절하다가 1946년 4월 경에 이를 수락한다.[225] 좌우합작에 부정적이었던 것에는 좌익기피증도 작용하였다.[171][226] 한편 김규식이 남북협상에 참여하게 된 배경에는 이승만에 대한 공포감과 이승만에 대한 인격적인 불신도 함께 작용하였다.

경제관[편집]

1946년 10월 마크 게인, 레오너드 버치 미육군 중위 등과의 대담에서 그는 경제관에 대해 밝혔다. 그는 주요 기반 산업의 국유화와 농지 개혁, 그리고 사회 보장을 주장하였다.[227]

논란과 의혹[편집]

출생 연도 논란[편집]

그의 정확한 출생 년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단독정부 지지설[편집]

1947년 12월 17일 김규식은 한 인터뷰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12월 17일 기자가 만일 소련측에서 유엔위원단 입경을 거부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묻자 김규식은 "그 경우 유엔대표단은 총회에 보고하여 그 결재를 요청할 것이고, 설혹 남조선단독정부가 수립된다고 할지라도 나의 견해로는 그 명칭만은 남조선단독정부라고 아니할 것이고 한국 중앙정부라던지 한국정부라고 부를 것"이라고 답변하였다.[228]

12월 19일 김규식은 "(자신의 답변은) 객관적으로 예언한 데 불과하며 내가 그러헥 하겠다는 것의 아님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여 해명하였다.[228]

아들의 일제 밀정 논란[편집]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군관으로 있다가 광복군으로 귀순했던 둘째 아들 김진동의 전력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조병옥은 그에게 '일제때 상해에서 일본의 해군 스파이로 8년간 활약한 책임을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229]'라며 아들의 일본 해군 복무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였다. 대구 10월폭동 직후 대구폭동의 원인이 친일파 경찰을 등용한 것이라는 중간파들의 비판[230]조병옥은 일제시대의 경찰관 실무 등용을 두고 군정청에서 비판 여론이 나오자 청문회에 참석한 군정청 고위 관료들과 그 가족 측근들의 친일 전력을 비판하면서 그의 아들의 일본군 복무 경력을 지적하였다.

선생님은 내가 1년 동안 배재전문학교에서 배운 까닭에 사제지간입니다. 그리고 선생은 학식이 풍부하고 인격이 고매한 분으로 저는 중경의 임정 요인들 가운데서 박사님을 가장 존경하였으며 국제정세에 해박한 분이라 가장 촉망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이 해방 이후 귀국해서 정치활동을 하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중간노선을 걷는다고 하여 한국민의 노선을 애매하게[ 하고 혼란을 일으키게 만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생의 자제자신(子弟自信)은 일제시대에 무엇을 하였습니까? 일제때 상해에서 일본의 해군 스파이로 8년간 활약한 책임을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애국자요 영도자를 자처하고 계시는 서생이 이런 모순된 생활태도를 가지고 있었거늘 하물며 나와 다른 많은 한국의 보통 범부들이 어찌 태평양 전쟁이 미리 일어날 줄로 알고 일제 협력을 용감히 거부할 수가 있었을 것이며 또 나 자신은 항일투쟁을 한 일원이지만 역시 범부인지라 내 자식의 운명을 내 운명과똑같이 할 수가 없어서 일본 동경에 있는 경응대학(게이오기주쿠 대학)에 유학시킨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학병에는 단연코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나이면서도 경무부의 인사방침은, 고의로 자기의 영달을 위하여 민족운동을 방해하였거나 민족운동자를 살해한 자 이외에는 일반경찰에 전직경험이 있는 경찰관 출신자들을 Pro Jab(프로 잡, 전문 직업인)으로 인정하고 국립경찰관으로 등용하였던 것입니다.[231]

한편 김규식은 이에 대한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원래 경무부장 조병옥 박사는 내가 가르친 사람이요. 그리고 미국에 가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훌륭한 학자로서 지식이 풍부하고 인격과 덕망이 있는 사람이며 주마가편격(走馬加鞭格)으로 군정 행정에 있어서 더 잘 해달라고 부탁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더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229]' 하고는 퇴장하였다 한다.

상훈[편집]

학력[편집]

저서[편집]

가계[편집]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김징의 8대손이다. 김상로, 김약로, 김재로, 김치인, 김종수 등은 모두 그의 방계 선조들이다.[233][234] 그의 부인 김순애(金淳愛) 는 제중원 의학교 1회 졸업생이자 독립운동가인 김필순의 동생으로 그녀 역시 독립운동가였다.[233] 귀국 후 교육사업을 하였으며 정신여자고등학교의 재단 이사장이었다. 둘째 아들 김진동은 아버지 김규식의 비서와 언론인 등을 지내다가 도미 미국에서 사망하였고, 딸 김우애는 미국에서 교수로 살다가 사망하였다.

셋째 아들 장로 김진세미국 텍사스 샌안토니오로 이주하였다.[234] 사촌 여동생 김은식은 김규식 등을 따라 몽골행에 동행하기도 했다. 김관식 역시 그의 친척으로 김관식의 사위 목사 엄요섭은 그가 김규식의 사촌이 된다[235] 고 했다. 한편 김관식프린스턴 대학교 동문인 윤치영김관식이 김규식의 재종(6촌)이라 진술했다.[236]

  • 고조부 : 김종민(金鍾敏)
    • 증조부 : 김정연(金正淵), 노론 문신 김종수의 재종손
      • 할아버지 : 김동선(金東璇, ? ~ 1894년, 참봉 역임)
      • 할머니 : ?(? ~ 1891년)
        • 백부: 김우성(金祐性)
        • 숙부: ?
          • 사촌 여동생 : 김은식(金銀植)
          • 사촌 매부 : 이태준(李泰俊), 독립운동가, 의사
        • 아버지 : 김지성(金智性, ? ~ 1892년)
        • 어머니 : 경주김씨(慶州金氏, 아버지 김지성의 본처[주해 19])
        • 어머니 : 경주이씨(慶州李氏, ? ~ 1887년?[237][주해 20])
          • 형님 : 김규찬(金奎贊, ? ~ ?, 백부 김우성의 양자로 감)
            • 조카 : 김진성(金鎭成, ? ~ ?, 세브란스 의전 출신, 독립군 군의관, 의사)
          • 형님 : 이름 미상, 요절
          • 본처 : 조은수(趙恩受, 본관은 한양, 1890년 ~ 1917년)
            • 장남 : 김진필(金鎭弼, 1910년 ~ 1910년, 요절)
            • 차남 : 김진동(金鎭東, 독립운동가(1912년 ~ 1997년))
              • 손자 : 김건필(金健必, 김건영(金健永), 1941년[238] ~ )
              • 손자 : 김영국(金永國, 김국영(金國永)
              • 손자 : 김한영(金漢永)
              • 손녀 : 김수산(金洙山), 김수옥(金洙玉), 김수진(金洙珍), 김수영(金洙英), 김수림(金洙林), 김수정(金洙貞), 김수송(金洙松)
          • 후처 : 김순애(金淳愛, 1889년 음력 5월 12일 ~ 1976년 5월 17일, 독립운동가)
            • 장녀 : 김한애(金漢愛, 1923년~1930년)
            • 차녀 : 김민애(金敏愛, 1924년~1927년)
            • 삼녀 : 김우애(金尤愛, 1925년 ~ 2001년 1월, 대학교수)
            • 삼남 : 김진세(金鎭世)
            • 자부 : 원정애(元貞愛)
        • 당숙 : 이름 미상
        • 당숙 : 김익남(金益南, 1870년 ~ 1937년, 의사)

작품속에서 김규식[편집]

같이 보기[편집]

기타[편집]

미국 유학시절(1897∼1903)부터 빼어난 영어 실력으로 정평이 났었고 중국 상하이 윌리엄즈대 교수로 재직할 때(1922∼27)는 셰익스피어 권위자로 이름이 높았다.[239]

그는 외부의 일을 집안에 알리지 않았고, 내부의 일을 외부에 알리지도 않았다. 아들 김진세에 의하면 아버지는 중국에서 활동할 때나 한국에 돌아왔을 때나 일에 대해서는 말씀을 잘 안 하셔서 아버지가 어떤 활동을 했는 지를 나중에 책보고 알 정도였다”면서 “사실 우리 가족들이 모두 모여 산 적이 거의 없었다”고[221] 한다.

참고 자료[편집]

  • 김규식, 《양자유경 (전승을 기념하여)》(The lure of the Yangtze) (황건 역, 한울, 2000)
  • 송남헌, 《송남헌 회고록(김규식과 함께한 길)》 (심지연, 한울(한울아카데미), 2000)
  • 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 1 (엑소더스, 국판)》 (한길사, 2003)
  • 우사연구회,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도서출판 한울, 2000)
  • 강만길 외,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1세트 전5권)》 (한울, 2000)
  • 강만길, 《항일독립투쟁과 좌우합작》 (한울, 2000)
  • 강만길, 《한국민족운동사론》 (강만길, 서해문집, 2008.10.17)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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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편집]

  1. 1877년생 설도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서는 1880년 12월 18일, 음력 10월 생으로 본다.
  2. 동래도호부는 아버지 김지성의 집이 아니라 부임지였으므로 김지성의 집인 강원도 홍천을 고향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3. 1952년 사망설도 있다.
  4. 국립묘지의 무후선열제단 자료와 과목별학습대백과 사전 14, 인명·색인사전(계몽사 편집국, 계몽사, 1987) 등에는 1877년생이라 한다.
  5. 사망년은 1952년생 설도 있다.
  6. 사망일시에 대해서는 11월 10일 사망설도 있다.
  7. 처음에는 신탁통치에 반대의사를 표했으나, 뒷날 모스크바 3상회의 전문을 입수하고 읽은 후 부분적인 찬성을 했다. -김규식의 비서로 지낸 독립운동가 송남헌의 증언中..-
  8. 임정 수립 초기까지만 해도 고종과 순종, 혹은 고종의 서자들을 망명시켜서 수반으로 추대하려는 시각을 가진 인사들이 있었다. 당시 임시정부의 헌법에는 황실을 우대한다는 내용이 써 있었다.강만길. 《한국민족운동사론》. 서해문집, 412쪽 이때 여운형, 이승만은 왕실 추대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의 입장은 어떠하였는가는 불명확하다.
  9. 그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직원 외에 의열단 단원들에게도 영어한자, 중국어를 가르친 인연이 있었다.
  10. 민족혁명당 주석직은 1946년 2월 탈당할 때까지 유지한다.
  11. 다른 임정요인들은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에 각각 숙소를 정했다.
  12. 모스크바 3상회의는 신탁통치안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하면 한국에 새로운 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느냐? 이것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주요 원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쏙 빼먹어 신탁통치안 부분만 부풀려놓았다.
     
    — 김규식의 비서로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근현대사 연구자인 송남헌의 증언

    실제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 1항은 임시정부의 구성과 임시정부의 성격과 임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김규식은 신탁통치가 임시정부를 구성한 다음에 생각할 사안이라고 보았었다.서중석 (역사학자).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304쪽

  13.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지칭.
  14. 김규식은 공산주의의 특성 상 북측에서 자본주의적 사유재산 요구를 포함한 5개항을 수용하지 않을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북한의 김일성이 수용하자 어쩔수 없이 북행하게 되었다.
  15. 김규식의 3남인 김진세의 증언에 의하면 "그쪽에서 '차를 대기시켰으니 우리가 모셔가겠다.'라고 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되실지는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KBS 인물 현대사, 김규식편 참조.
  16. 국립묘지의 무후선열제단 자료와 과목별학습대백과 사전 14, 인명·색인사전(계몽사 편집국, 계몽사, 1987) 등에는 1952년 사망으로 되어 있다.
  17. 이승만과 쉽게 대화할 수 있는 인물, 혹은 이승만 앞에서 5분 이상 대화 할 수 있는 인물은 김규식, 김구, 서재필, 이시영 등 극소수였다.
  18. 박사학위는 모교 로노크 대학교에서 수여한 명예박사였다.
  19. 경주김씨의 아들로 보는 설도 있다. 따라서 그의 남자 형제인 김익승을 김규식의 외삼촌으로 보는 설도 있다.
  20. 경주이씨가 아니라 첩의 소생이라는 견해도 있다.
  21. 최영욱의 누나 최영온이 정율성(정부은)의 어머니이다.
  22. 그러나 좌우합작운동 해설소개 장면이 나올 때 잠시 등장하나, 대사는 없다.

주석[편집]

  1. 1877년생이라는 설과 1880년 12월 28일생이라는 견해도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견해로는 1880년 12월 18일, 음력 10월 생이라 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426692
  2. 조선연감
  3. 조선연감 (1947년)과 조선연감(1948년)은 1877년생이라 한다. 참고
  4. 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 (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501페이지
  5. [허명섭 칼럼]김규식과 언더우드 선교사의 만남 크리스찬투데이
  6. KBS방송 인물현대사 김규식편 방송내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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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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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손인수, 《원한경의 삶과 교육사상》,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p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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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허명섭 칼럼]김규식과 언더우드 선교사의 만남 :: 1등 기독교신문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 Today
  17.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1쪽 참조.
  18.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33쪽 참조.
  19. 갓피아 사랑이야기
  20. 경신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1. 도진순, 《분단의 내일 통일의 역사(당대총서 15)》 (당대, 2008) 265페이지
  22. 《8.15의 기억》,한길사. p420
  23.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3쪽 참조.
  24.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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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 그러나 1947년부터 한민당은 김규식을 대선 후보로 내보내려고 당수직을 제의해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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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21페이지
  109. 웹진 민족화해 > 통일의 발자취 > 우사 김규식, 민족주의자인가! 미국식합리주의자인가!
  110.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정병준, 역사비평사, 2006)
  111.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 친일파 청산 그 좌절의 역사》, 허종 저. 선인
  112. '김호' - 네이트 백과사전
  113.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정병준, 역사비평사, 2006) 663페이지
  114.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 친일파 청산 그 좌절의 역사》,허종 저. 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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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 이정식,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참고.
  150. 좌우를 넘어 민족을 하나로- 제 3편 김규식
  151. <<여운형 평전>>,이기형 지음. p479
  152. 《G-2 정보참모부 일일보고서》, 1947년 7월 24일자 p101
  153. 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미군정과 남조선》 (정미옥 역, 과학과 사상, 1986) 200페이지
  154. 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미군정과 남조선》 (정미옥 역, 과학과 사상, 1986) 201페이지
  155.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2) 586페이지
  156.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p590~593
  157.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민음사, 2007) 173페이지
  158.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역사비평사, 1991),545쪽.
  159. KBS '인물현대사'방송 내용中.
  160.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②) 이승만·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 - 신동아
  161.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저, 선인, 2001) 37페이지
  162.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저, 선인, 2001) 36페이지
  163.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52쪽
  164. 김재명, 《김규식:한 온건 지식인의 실패한 이상주의》〈한국현대사의 비극-중간파의 이상과 좌절〉(선인, 2003) 331쪽
  165.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2) 590페이지
  166.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2) 593페이지
  167. 서중석, 《한국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06) 57쪽.
  168. 역사비평편집위원회, 《역사용어 바로쓰기》 (역사비평편집위원회, 역사비평사, 2006) 172페이지
  169.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2006, 일조각) 414페이지
  170.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9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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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3. 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 (정미옥 역, 과학과 사상, 1988) 275페이지
  174.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저, 선인 2001) 37페이지
  175. 1948년 4월 21일~서울로 돌아왔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15~118쪽.
  176.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2》 (역사비평사, 1996) 23페이지
  177.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2》,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p158
  178. 정진숙, 《출판인 정진숙》 (을유문화사, 2007) 180페이지
  179. KBS 한국사전 <이승만 2부> 편. 2008년 8월 30일자
  180. "대한민국은 알고 있나, 대한민국의 아버지들을"
  181.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253쪽
  182. 《통일운동론》,전상봉. p47
  183.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역비한국학연구총서 13)(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 2008) 301
  184.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역비한국학연구총서 13)(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 2008) 302
  185. 서중석,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 (역사비평사, 2006) 378페이지
  186.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역비한국학연구총서 13)(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 2008) 302페이지
  187.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188. "인류평화에 공헌", 동아일보 1949년 08월 15일자 1면, 정치
  189. 김재명, 《한국현대사의 비극-중간파의 이상과 좌절》 (김재명, 선인, 2003) 83페이지
  190.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191. 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 2:전쟁의 땅 혁명의 땅》 (한길사, 2006) 65페이지
  192. [책갈피 속의 오늘1950년 우사 김규식 사망
  193. 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 2:전쟁의 땅 혁명의 땅》 (한길사, 2006) 71페이지
  194.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저, 선인, 2001) 34페이지
  195. 좌우통합 노력 좌절 … 납북당한 뒤 북한에서 숨진 김규식
  196. 북한,조국통일상에 임양ㆍ운동권 학생도, 한국일보 1990-08-17자, 02면
  197. 강규형, 《청소년을 위한 우리 역사 바로 보기》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18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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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 《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일조각. p73
  200. 《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일조각. p69~87
  201. 韓赤 100년.."평화위해 헌신할 것"
  202. 《역사의 언덕에서 2:전쟁의 땅 혁명의 땅》,강원룡 저. 한길사. p68
  203. 《역사의 언덕에서 2:전쟁의 땅 혁명의 땅》,강원룡 저. 한길사. p68
  204.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26~22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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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6. 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 (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500페이지에서 재인용
  207. 《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 p79~82. 일조각
  208. 마크 게인, 일본일기 (筑摩書房, 1952) pp.357~358
  209. 尤史선생기념사업회 이안성 초대회장 - munhwa.com
  210. 해방공간 수놓은 9명의 정치 지도자들
  211.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32~233쪽 참조.
  212. 강원용, 《역사의 언덕에서 2:전쟁의 땅 혁명의 땅》 (한길사, 2006) 66페이지
  213. ‘한국분단사연구’ 출간 신복룡 교수 조선일보 2001.09.14
  214. 희생 中동포에 ‘독립군 후손’도 있었다 경향신문 2008-01-09일자
  215. 이천 화재로 숨진 김군씨는 독립운동가 후손(종합2보) 연합뉴스 2008-01-09일자
  216. 이천 화재 참사, 유가족 안타까운 사연들 한국일보 2008/01/09일자
  217. 이천냉동창고 화재가 준 교훈 성남뉴스 2008-01-08일자
  218.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②] 이승만·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 신동아 2004년 01월호(통권5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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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1. "반세기 넘어서야 성묘라니…" 조선일보 2001.09.28
  222.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81페이지
  223.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도서출판 샘터사, 1979) 118페이지
  224. <7>복간과 함께 대한민국 기초를 닦다 동아일보 2010.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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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9.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64페이지
  230.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63페이지
  231.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64~165페이지
  232. 북한, 조국통일상에 임양ㆍ운동권 학생도, 한국일보 1990-08-17자, 02면
  233. 연세의료원 뉴스, 490호 6쪽
  234. 신념(信念)의 사람 우사 김규식, 이승종
  235. 성갑식,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선교》 (대한기독교서회, 2004) 13페이지
  236. 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237. 청풍김씨 세보
  238. 매일경제 1989년 3월 1일자 기사
  239. [학술신간]올 광복절 더 그리워지는 우사 김규식 동아일보 2000.08.04

바깥 고리[편집]

전 임
-
제1대 조선적십자사 총재
1947년 3월 15일 ~ 1948년 8월 15일
후 임
김규식
전 임
김규식
(조선적십자사 총재)
대한적십자사 임시 총재
1948년 8월 15일 ~ 1949년 10월 27일
후 임
양주삼
(대한적십자사 총재)
전 임
초대
제1대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위원장
1919년 4월 2일 ~ 1919년 8월
후 임
황규환
(직무대리)
전 임
초대
제1대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1919년 8월 ~ 1919년 9월
후 임
이승만
전 임
초대
제1,2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
1940년 10월 1일 ~ 1948년 8월 15일
후 임
이시영
전 임
-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장
1942년 ~ 1944년
후 임
엄항섭
전 임
초대
제1대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위원장
1946년 12월 12일 ~ 1947년 6월 3일
후 임
신익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