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더글러스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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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편집]

출처를 명시하면 가치중립적위반 표현이라도 "어떤 권위있는 출처가 박지성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의 소개는 위키백과에서 유지될 수 있습니다."라는 규정이 있지만, 현재의 문서는 그 규정을 고려하더라도 균형감이 상당히 결여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참전의 "일본의 항복후에 일본점령군 사령관을 지냈다."는 사실의 기술이지만, "일본 역사 최초의 외국인 쇼군이기도 한 맥아더는"이라는 표현은 사실이 아닌 일종의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문장 전후 맥락으로 사실과 평가를 구분하기가 상당히 모호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점령군 사령관으로서의 맥아더의 권한에 대한 일종의 비유적 표현으로 알 수 있지만,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가정하에서라면 실제의 쇼군(즉 공식적인 직함)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전쟁의 "맥아더는 무차별학살을 하며 전투에 임했다. 전투기를 이용해 낮시간에 이동하는 사람들은 무차별공격을 하여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막았다. 이로 인해 수많은 피란민들이 희생을 당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학살 중 이승만의 보도연맹원 학살과 더불어 가장 큰 학살이였다. 이로인해 한국전쟁에서 군인보다 시민이 많이 죽었다."는 문장은 완전히 균형감을 상실한 문장으로 의도적으로 편향된 서술을 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맥아더는 무차별 학살을 하며 전투에 임했다."라는 사실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기술로서 그 당시 상황에 대한 기술이 없이 맥아더가 무차별학살을 고의적으로 의도했고 실행했다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학살 중 이승만의 보도연맹원 학살과 더불어 가장 큰 학살이였다."라는 표현 또한 검증되지 못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 기술로서, 이 기술대로라면 개전초기의 항공폭격에 의한 인명손실은 적군에 대한 공격이든 그렇지 않든 모두 희생자 수에 포함되며, 현실적으로 이 희생자 수에 대한 파악이 불가능하다는 점, 또한 북한이 전쟁중 행한 납치와 학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 희생자가 있음에 희생자수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굳이 "가장 큰 학살이었다"라는 표현을 쓰려면 전쟁중의 북한에 의한 학살에 대해서 규모비교를 해야 함에도 무시했다는 점, "이로 인해 한국전쟁에서 군인보다 시민이 많이 죽었다"라는 표현은 가치중립적인 표현의 여부는 고사하고 자체글의 논지전개상 논리적 비약이 심해서, 한국전젱에서의 시민의 인명피해는 맥아더에 의한 피해라는 등식을 성립시킬 수 있을 정도의 단정적 표현으로 상당히 문제가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가치중립적 표현과는 그다지 큰 관련이 없는 지엽적인 부분이지만, 기왕 여러가지 언급한 김에 한가지 사족인 의견입니다. 한국전쟁의 "중화인민공화국 정규군(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을 무시하다가 중국이 전쟁에 "라는 표현은 동일 국가 이지만 하나는 중화인민공화국 정규군이라는 표현을 또 다른 하나는 중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명시된 출처의 문장을 가져다 쓴 것이라면 출처의 수준이 의심되고, 그렇지 않다면 어느 한쪽으로 통일하는 것이 옳지 않나 생각합니다.
처음으로 위키에 문서를 작성해봤기 때문에 여러가지 사용매너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너그럽게 봐주시고, 혹시 고쳐야 될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특히 문서의 어느 부분에 중립적표현위반이라는 태그(POV이던가요?)를 써야할지 몰라서 제일위에 태그를 썼다가 문서 모양이 엉망이 되었는데 문서작성자에게 죄송하고, 혹시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 아시면 가르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맥아더에 대한 설명이 한국어 위키내에 따로 존재한다면 이 문서가 일종의 다른 시각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기에 굳이 이렇게 장문의 태클을 거는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구글검색시 이 문서가 가장 먼저 검색되고, 그렇게 검색된 문서가 편향된 시각에 의해 서술된 부분이 있기에 이렇게 태클을 걸게 되었습니다. 문서작성자에게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읽힐 수 있는 자료라면 가능한 한 균형감을 상실하지 않은 내용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Doorinoori (토론) 2008년 10월 31일 (금) 11:55 (KST)답변

미야자와 요시코[편집]

다음의 내용은 출처 표기가 오랫동안 요구되었으나 방치되어 있어 삭제한 내용입니다. 신뢰성있는 분명한 출처가 있지 않다면 아래의 내용을 문서에 포함하지 마십시오.Jjw (토론) 2009년 7월 20일 (월) 01:25 (KST)답변

삭제한 내용

정부(情婦) 미야자와 요시코 총살[편집]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처음 그녀를 만난 것은 1945년 9월2일이었다. 65세와 23세의 만남. 그날 오후 ‘에도만보(江戶晩報)’에 실린 ‘미주리호 선상의 승리와 패배’라는 신문기사를 본 맥아더는 기사를 쓴 기자를 호출했다. 일부 내용이 언짢아서였다. 늦은 밤, 미야자와 요시코라는 젊고 아름다운 여기자가 맥아더 앞에 나타났고, 그녀를 본 맥아더의 가슴에 감정의 소용돌이가 쳤다. 맥아더의 요청에 따라 요시코는 비서가 됐다. 9월 20일 전 일본 총리 도조 히데키가 포함된 1차 체포 대상자 40명의 명단이 작성돼 언론 공표를 앞두고 있었다. 요시코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 집에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렸다. 친구는 도조 히데키의 딸이었다. 도조는 자살을 시도했으나 죽지않고 체포됐다. 2차 체포 명단에 포함된 전 관동군 총사령관 혼조 시게루는 자살했다. 요시코는 그의 조카였다.

맥아더는 연이은 자살사건을 수상하게 여겼지만 요시코가 관계된 일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맥아더의 집무실과 침실은 도쿄 제국호텔 10층에 있었는데 한편에 요시코의 침실도 마련되어 있었다. 맥아더는 자주 요시코의 침실을 찾았고 요시코는 그때마다 문을 열어주었다. 전범(戰犯)으로 구속된 요시코의 친척 8명이 석방된 것은 침실에서 건네받은 맥아더의 선물이었다. 사람들이 은밀히 요시코에게 접근해 보석 등을 주며 석방을 부탁하자 요시코는 배짱좋게 맥아더의 이름을 팔아 전범들을 석방시켰다. 맥아더가 연합국 몰래 1800여명의 전범을 풀어주는 틈을 갖고 이용한 것이다. 연합국이 거세게 항의하자 맥아더는 다시 석방된 전범들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전범들이 다시 수감된 날 수명의 중년여인이 요시코를 찾았으나 휴가를 떠나고 없어 다른 보좌관이 그들을 만났다. 여인들은 뇌물로 풀려난 자신의 남편이 다시 체포됐으니 뇌물을 돌려달라고 했다. 맥아더가 석방자 명단을 조사해보니 자신이 서명한 석방자보다 138명이나 더 많은 1985명이었다. 휴가에서 돌아온 요시코는 영문도 모른 채 예의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맥아더 품에 안겼다. 곧 사태를 눈치챈 요시코가 “용서해달라”며 매달렸지만 맥아더의 마음은 저 멀리 떠나 있었다. “이 여자를 당장 총살해!” 1946년 7월 4일이었다.

우상 맥아더[편집]

맥아더를 우상이라 표현하는 등 도통 이해가 안 가는 문장인 우상 부분에 대한 문서를 지웠습니다. 지울 때는 이렇게 하고 토론에 남기면 되는 것인지요. Exomu (토론) 2011년 4월 15일 (금) 15:12 (KST)답변

아울러 '미 공군의 무차별 공격'은 출처가 전혀 입증되지 않아 윗분이 반론을 제기하신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전혀 변화가 없어 제가 지웁니다. 괜찮은 건가요?,,,,.ㅜ.ㅜ

미군은 지상군의 화력을 만회하려고 공군을 사용하여 무차별 공습을 하였다. 이로 인해 적을 구별하지 못하는 미군 폭격기에 수많은 한국군과 피란민들이 희생을 당했다. 특히 이리 폭격, 청주 폭격은 항공기가 민간인에게 폭격한 사건이다. 이리에서는 국회의원 연설 행사에 참석한 수많은 학생들이 죽었다.[1] 한국전쟁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큰 이유는 인민군의 학살, 이승만 정권의 보도연맹 학살, 노근리, 이리, 청주 등에서 벌어진 미군 학살과 무차별 폭격이었다. 이 중 미군과 국군에 의한 학살이 가장 심했다.

우상 맥아더와 미 공군의 무차별 폭격[편집]

맥아더 우상 논쟁은 맥아더가 한국 전쟁에서 무차별 학살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외국인 학살자의 동상을 세우며 자유공원이라고 썼기에 우상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독일에서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를 옹호하면 중범죄입니다. 더욱이 한국인이 한국인을 학살한 사람의 동상을 세우는 행태는 상식 밖의 일입니다. 미 공군의 무차별 공격에 관해 아래 참고를 썼는데 다 지웠군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웠어요? 한국군이 한국인을 학살 했다는 말이 마음에 안듭니까? 미군이 한국인을 학살 했다는 말이 마음에 안듭니까? 전쟁터에서 비일비재한 일입니다. 그래서 정확히 기록해야 하죠. 그런데 어떤 내용은 출처를 표기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학살자들이 이 나라의 지배자고 삭제되었기 때문입니다. 위키는 그런 빈 공간을 채워야 합니다.Kamgnu (토론) 2011년 4월 20일 (수) 06:47 (KST)답변


저기.. 제가 글을 지우거나 한 것은 이 토론 문서의 맨 윗분이 말씀하신 내용에 그대로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지적이 상당히 오래되었는데도 아무런 반론이 없기에 그냥 지운 것입니다.

'가장 많은 학살'을 했다면 그 내용을 정확히 표현해야 합니다. 몇 명이 어떻게 죽었고, 학살당했고, 또 '가장 많은'이란 표현을 사용할 만큼 북한군은 민간인 살상이 적었는지 정확한 팩트가 중요합니다. 출처를 표현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님의 견해인가요? 님의 역사관을 채우기 위한 공간이 위키백과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아울러 민간인과 한국군을 무차별 폭격했다고 하시는데, 민간인은 그렇다 치고, 아군까지 공격하는 폭격기가 있다는 얘기는 1차 대전 이후부터도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군사학적으로 전혀 말이 안 됩니다. 제 살 깍아먹는 군대가 당시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던(이건 사실이죠?) 미국 군대라는 말씀입니까?

출처 얘기를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나 '다시쓴 한국근현대사'만큼 출처를 표시할 수 있는 책들은 많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입니다. 그것이 없다고 부정하시면 앞서 제가 언급한 책들은 나오지도 못합니다. 명확히 출처를 표시해 주세요. 음모이론으로 출처가 있는데 밝힐 수 없다는 식은 아무에게도 공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조금 더 숙고해주시고 위키백과에 기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Exomu (토론) 2011년 4월 20일 (수) 09:27 (KST)답변

아군끼리 폭격한 사실이 없다고 하는데 2차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연합군 전사자들 다수가 아군의 공군기의 폭격으로 사망했습니다. 출처에 관해서는 어떤 출판사 출판물이어야 한다는 건 너무 종이 출판물에 의존하는 것 아닌가요? 더욱이 주요 사건들에 참조를 달았는데 음모이론으로 몰다니 말을 심하게 하는군요. 그리고 노근리 사건, 이리 폭격이 없는 일을 써 놓은 건가요? 왜 그런 것을 지우셨죠. 자료가 부족하면 밑에 반론을 다세요. 인민군이 민간인을 많이 학살했다면 그에 따른 근거를 반론에 실어 설득한다면 읽는 사람들이 충분히 공감할 것입니다. 한국전쟁에서 고아원을 만든 한 미군의 이야기를 다룬 미국 영화 전송가에도 미 공군기가 민간인을 기총소사 한 후에 슬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미군이 항공기로 기총소사 한 것은 맥아더가 낮에 움직이는 것은 모두 폭격하라는 지시에 따른 것입니다. 이렇듯 한국전쟁의 주요 학살 사건에 미군의 폭격에 의한 사망자가 분명히 있는데 그걸 무시하는 건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Kamgnu (토론) 2011년 4월 20일 (수) 11:19 (KST)답변

저는 폭격한 사실이 아니고 '공격'에 대한 부분을 지적했습니다. '실수'로 아군을 공격하는 경우도 물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의도적'으로 아군을 공격하는 군대는 없습니다. 표현을 정확히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노근리와 이리 폭격은 지운 바 없습니다. 저도 그건 분명 비극이라고 인정합니다.

제가 지운 것은 '미군정의 무차별 폭격'과 '우상 숭배' 논란만이었습니다. 명백한 사실은 그대로 놔두도록 했고, 가치판단이 들어간, '민간인 학살은 한국과 미국 탓이다' 류를 지운 겁니다. 예를 들어 '북한은 참 좋은 나라다.'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면 가치판단 아닙니까? 좋고 나쁘고는 사람 나름입니다. 그렇다면 지워야지, '그러나 나쁘다는 의견도 있다'고 해야 합니까? 그건 아닌 것 같군요. 그래도 정 아니다 싶어하실까 봐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학살 사건을 제가 이어붙였습니다. 개전 초기 북한군에 의해 1000여명이 죽은 사건입니다.

그리고 '주요 사건들에 참조를 달았다고' 하시는데 문서의 '역사'만 보셔도 그런 게 없다는 건 아실 겁니다. 참조를 다셨다면 저는 차마 못 지웁니다. 정말 반론을 했을 겁니다. 추측, 가치판단이 너무 명백한 부분을 지운 것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종이출판물에 의한 것만 출처냐고 하시는데요. 그럼 어떤 게 참조가 되는 겁니까. 가장 과학성을 엄밀히 요구하는 학위논문의 경우, 어떤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음모이론이라는 단어에 대해 불쾌하신 모양인데요. 그렇다면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왜냐하면 학살자들이 이 나라의 지배자고 삭제되었기 때문입니다.라는 표현을 제 부족한 머리로는 달리 설명 못하겠습니다.

영화 얘기를 하셨는데요. '이렇듯'이란 표현까지 사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님은 그런 '픽션'에 의존해 '사실'을 해석하시려는 것인지요. 영화는 감독 마음입니다. 님이 영화를 만든다면 미군 폭격기가 아무나 죽이는 영화를 만들 것이고, 제가 영화를 만든다면 미군 폭격기가 실수로 떨어진 폭탄이 민간인들을 죽인 것을 알고 괴로워하는 영화를 찍을 것 같네요.

Exomu (토론) 2011년 4월 20일 (수) 19:10 (KST)답변

미군은 지상군의 화력을 만회하려고 공군을 사용하여 무차별 공습을 하였다. 이로 인해 적을 구별하지 못하는 미군 폭격기에 수많은 한국군과 피란민들이 희생을 당했다. 특히 이리 폭격, 청주 폭격은 항공기가 민간인에게 폭격한 사건이다. 이리에서는 국회의원 연설 행사에 참석한 수많은 학생들이 죽었다.[2] 한국전쟁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큰 이유는 인민군의 학살, 이승만 정권의 보도연맹 학살, 노근리, 이리, 청주 등에서 벌어진 미군 학살과 무차별 폭격이었다. 이 중 미군과 국군에 의한 학살이 가장 심했다.

윗 글을 보면 '적을 구별하지 못하는'이라고 쓰여있죠. 비엣남전쟁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습니다. 미군은 고엽제를 밀림에 뿌려 비엣남군이나 유격대가 숨지못하게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밀림 속에 있던 한국군은 작전 통보도 못받고 고스란히 그 독약을 뒤집어 썼습니다. 한국 전쟁 때 한국 군에는 군복도 제대로 없었고 일본군 옷을 입는 경우와 그냥 민간인 옷을 입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특히 미군은 한국의 문화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어 이리 폭격처럼 피아를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한국 전쟁에서나 비엣남 전쟁에서 학살이 많이 일어나는 이유는 정규군과 민간인이 구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 누가 수류탄을 던질 줄 모르는 상황이라 항상 긴장합니다. 그러니 히스테리에 학살이 일어납니다.

한국 전쟁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많은 이유는 맥아더가 초기 전황을 만회하려고 공군기를 이용해 낮시간에 움직이는 모든 물체를 피격하라고 지시 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피난민이 이 폭격과 기총소사에 죽었습니다. 저는 어려서 반공 영화에서 수없이 본 장면입니다. 다만 반공 영화에는 누가 쐈는지 보여주지 않았죠. 그리고 학교에서 한국전쟁 참전 용사 출신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이 분들은 맥아더의 결정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습니다.

한국 전쟁과 관련된 글들을 많이 접해보시거나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특히 리영희 선생님의 '대화'라는 자서전을 읽어보세요. 리영희 선생님은 한국전쟁 참전용사입니다. 이 책은 미국의 학살을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전쟁 당시의 한국군의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Kamgnu (토론) 2011년 4월 21일 (목) 03:48 (KST)--~~답변

잘 아시겠지만, 이 논쟁은 끝이 나지 않을 것임이 뻔히 보입니다... 그러하기에 저로서는 일단 정확한 출처를 조금 더 수집해서 팩트를 나열하려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 반박해 주십시오. '있었다더라'식으로는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위키백과의 올바른 방향일 것입니다. Exomu (토론) 2011년 4월 21일 (목) 14:26 (KST)답변

월미도 학살설 논란이란 제목을 고치며[편집]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국제법을 어긴 범죄라고 한 사건을 "학살설, 논란"이라고 표기한 것은 분명히 부조리한 행위다.--Kamgnu (토론) 2011년 4월 21일 (목) 04:08 (KST)답변

진실화해위원회도 활동 당시 '좌편향적'이란 비판을 받아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학살설에 대해서 막상 월미도 주민들은 '참으로 가슴아팠지만 상륙을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라 이해는 한다'고 하던데, 그것을 굳이 '학살'이라고 하는 이유는. '시각'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논란'으로 다시 고쳐도 될 듯 합니다 Exomu (토론) 2011년 4월 21일 (목) 14:18 (KST)답변

진실화해위원회를 '좌편향적'이라고 썼군요. 국가기관을 좌편향적이라고 하다니 우편향적인 국가기관이 있거나 혹은 중도적인 국가기관은 어떤 것이 있는지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군요. 그리고 좀 더 본질적으로 좌편향과 우편향은 뭔가요? 월미도 주민의 말이라고 인용한 내용에 '이해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걸로 한밤에 곤히 자는 사람들의 머리위로 폭탄을 쏟아붓고 네이팜을 쏟아 태워죽인 일을 '학살'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100명 가까운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팩트'를 강조하시는데 '좌편향적','이해한다'는 단어로 '사실'을 '논란'으로 축소하려는 모습이 '팩트'를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인지 의심이 생깁니다. Kamgnu (토론) 2011년 5월 15일 (일) 06:47 (KST)답변

'좌편향적'이라는 말은 다른 누가 한 말입니다. 네이버에서 '진실화해위원회 좌편향' 이렇게 검색해도 엄청난 문서가 나올 거에요. 좌편향과 우편향이 뭐냐고 여쭈시는 건 쓸데없는 질문이라고 생각되서 대답할 필요가 없겠군요. 맥아더 문서 맨 위에 '중립성 문제 제기' 표시가 되어 있다는 걸로 그만 하지요. 학살설 논란이 그렇게 싫으시면 일단 그냥 두죠. 그렇게 하세요. Exomu (토론) 2011년 5월 17일 (화) 14:48 (KST)답변

Congressional testimony, May 3, 1951 <1951년 5월 31일 의회 증언>[편집]

이 떡밥은 우연히 보게된 일본인의 페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한 일본인이 맥아더의 고백 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습니다.

글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조금 장문입니다만..

모든 일본 국민들이 읽고, 그리고 계속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맥아더의 고백] 일본의 여러분, 이전의 전쟁은 미국이 잘못한것입니다. 일본은 어떤 잘못도 없습니다. 일본은 자위를 위한 전쟁을 했을뿐입니다.영국 처칠수상에게 요청받아서 대 독일전에 참전하기위한 구실로써, 일본을 대미전쟁(태평양전쟁)으로 몰아 넣은 것입니다. 미국은 일본은 전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괴롭히고 또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최후통첩으로 헐 노트(HULL NOTE)를 내밀었습니다.  중국에서나가라, 석유를 수입하지 못하게 하겟다. 미국이 무슨 권리가 있었단 말입니까.당시, 아시아의 대부분의 나라가 백인의 식민지였습니다. 백인은 일본인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죠. (아시아인인 일본인이 자신들의 식민지 이권에 개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듯) 헐 노트에 대한것은 나도 미국국민도 몰랐습니다.  저런 물건을 들이댈수 있다면, 아무리 작은 나라에서도 전쟁을 일으킬수 있겠지요.전쟁이 나면, 압도적인 무력으로 미국이 이기는 것은 싸우기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우리들은 전후, 일본이 다시는 백인에게 위협이 되지 않도록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미국은 알고 있었습니다. 국가를 약체화시키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그 나라로부터 자신감과 자부심을 빼앗고,역사를 날조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전후 미국은 그것을 충실하게 실행하고있었습니다.일본이 아시아를 백인의식민지상태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진짜 이유를 숨기기 위해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을 금지하고,대신 태평양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했습니다. 도쿄재판은 연극이었습니다. 미국이 헌법을 일본에 강요하고, 전쟁을 할수 없는 국가로 만들었습니다.공직에서 추방시키고 착실한 일본인을 쫓아내고, 대신 반일적인 좌익분자를 대학등 요직에 퍼트렸습니다.그 제자들이 지금 언론,정계에서 반일 활동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검열을 하여, 미국에대하여 좋지 않은 정보는 일본국민에게 알려주지 않도록 했습니다.라디오,tv를 통해서 전쟁전의 일본은 나쁜국가였다, 전쟁에 져버려서 다행인것이라고 일본국민을 속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정책이 잘 들어맞아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독립국으로써 자립할수 없는 상태가 계속되고있는 것입니다.(주의: 1951년의 시점에서 제정신으로 돌아온 맥아더가 계속 이 문제에 대해서 근심하고 있다. 나는 반성하고 있습니다.자학사관을 가져야하는 것은 일본이 아닌 미국입니다.전쟁종결에 불필요한 원자 폭탄을 두개나 사용하여 수십만명의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마지막으로 내가 살아있을 때의 증언을 담고 사과의 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나는 일본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전쟁목적은 침략이 아닌 자위를 위한것이었던 겁니다.태평양에서 미국이 지난 백년간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공산주의의 중국을 강대하게 만들어 준것입니다.도쿄재판은 잘못된것이었습니다." 일본의 8462만명에 가까운 방대한 인구를 가지고 있고, 그 절반이 농업에, 나머지 절반은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잠재적으로, 일본이 보유한 노동력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내가 접한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우수한 것입니다.역사상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일본의 노동력은 인간이 게으른 때보다, 일하고, 생산할때가 행복한것이다.즉, 노동의 존엄성같은것을 발견했습니다. 지금까지 거대한 노동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일하기 위한 재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들은 공장을 건설하였고, 노동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손에는 필요한 재료를 얻는 것이 불가능 했습니다. 일본산 동식물은 누에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면이 없고, 양모도 없고, 석유도 없다.주석이 없고, 고무도 없고, 그외에도 없는것 투성이었습니다.그 모두가 아시아에 존재했습니다.만약 이러한 원료 원료공급을 끊어 버리게 되면 천만에 천이백만 실업자가 일본에 발생하게 되는 것을그들은 두려워 했던것입니다.그리하여 일본이 전쟁에 뛰어든 동기의 대부분은 안전보장의 필요성을 쫓아간 결과인 것입니다. 미국 상원 군사 외교 합동위원회 청문회에서1951년 5월 3일

이 안에는 사실에 가까운 말도 있지만, 대부분 우익들이 주장하는 자신들의 전쟁 정당성을 옹호하는 논리로 가득차있습니다. 대동아 전쟁은 일본이 백인들에게 지배받는 아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라는 것.. 그리고 태평양전쟁은 일본을 전쟁에 휘말리게 하기 위한 미국의 음모라는 것 고로 일본은 자위를 위한 전쟁을했다는논리.. 그리고 일본에 대한 백만년은 우려먹는 일본민족의 우수성.. 물론 일본이 미국의 견제에 궁지에 몰려 전쟁을 시작한것 역시 사실이긴 합니다. 일본의 아시아 정복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죠. 지극히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일본이나 미국이나 큰 차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궁금했던것은 맥아더 장군이 의회에서 자국이 일본을 뭉개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으며, 일본은 죄가 없고, 자신들이 원폭을 이용해서 일본국민을 학살했으며, 일본을 말살시키기 위해 좌익들을 용인하고 언론을 통제(미 군정 치하에서 그런 정책을 시행한것 자체는 사실입니다만) 하였고, 일본의 전쟁은 정당한 자위전쟁이었고, 도쿄재판은 연극에 불과한 잘못된 것이었다. 사죄한다. 라고 고백했냐는 것이죠. 그래서 구글로 Congressional testimony, May 3, 1951로 쳐서 공개된 미국 문서를 찾아서 읽어 보았으나.. 제목은 [PDF] The MacArthur Hearings of 1951: The Secret Testimony입니다.

여기서 제 영어 실력의 한계를 느껴서 이 문서안에 그런 종류의 증언이 담겨있는 가를 확인 못했습니다. 그러나 키워드를 통해서 검색해본 결과.. 맥아더는 (이 문서안에서) 일본에 대해서 그렇게 길게 언급한 내용을 찾지 못했습니다. 원폭에 대한 이야기도 없었고 대부분은 한국전쟁에 관한 증언들이었죠. (시기도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후의 이야기입니다)

혹 영어실력이 뛰어나신 분이 이 문서를 번역하시는 분이 있다면, 답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이것을 그냥 우익들이 자기들을 합리화 하기 위한 낚시글일 확률이 높았으나, 이런식으로 자신들을 합리화 시키는 일본인들이 (정확히는 일본 우익들!! 개인적으로 일본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싫어서 오밤중에 이런 글을 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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