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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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

 

1945년 9월 8일 ~ 1949년 1월 11일
US flag 48 stars.svg
국기
South Korea (orthographic projection).svg
수도 사실상 서울특별자유시
정치
공용어 사실상 조선어, 영어
정부 형태 군정
군정장관, 사령장관 존 리드 하지, 안재홍
역사
 • 군정
 • 대한민국 건국
 • 폐지
 • 1945년 9월 8일
 • 1948년 8월 15일
 • 1949년 1월 11일
인구
인구 밀도 113명/km²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在朝鮮美陸軍司令部軍政廳,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한 뒤 미군 육군 제24군단이 1945년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한국의 군정기)까지 한반도북위 38도선 이남을 다스리던 군사 통치, 행정 기관이다. 일명 미군정청(美軍政廳)이라고도 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어 대한민국 정부에 통치권이 이양된 이후에는 1949년 6월까지 정치고문 및 군사고문의 형태로 존속하였다.

배경[편집]

태평양 전쟁 후반 미국은 단독으로 일본과 싸울 계획이었으나 1944년 소련의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참전 후 1년도 되지 않아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하였다. 이에 소련은 자신들의 몫으로 한반도를 요구했고, 미국은 소련 세력의 팽창과 일본의 공산화를 우려하여 스탈린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나 소련은 자신들도 엄연한 참전국이며 소련군 사상자와 부상자의 존재를 내세워 한반도 통치를 요구하였다.

결국 미국소련은 1945년 8월 25일 북위 38°선 분할점령을 발표하고 미군의 한반도 상륙을 결정한다.

개요[편집]

주둔 초기[편집]

1945년 9월 2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항복 성명을 수용, 일반명령 제1호로 점령지역 연합군의 분할진주를 발표했다. 이어 바로 한반도 남부에 미군을 보내고 일본의 항복문서를 정식으로 받아냈다.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미국 육군 제24군단을 조선지역 관할 부대로 정한다. 이때의 남한은 점령지의 성격이었다. 다만 더글러스 맥아더는 일본인과 조선인들은 별개로 취급할 것을 특별 지시한다.

9월 8일 존 리드 하지 미육군 중장 휘하의 미국 제24군단은 배편으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조선인민공화국에서 파견한 여운홍 등은 교섭을 시도하였지만 하지는 이를 거절하고 정식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9월 9일 경성에 도착한 하지 사령장관은 포고령 제1호로 "38°선 이남의 조선과 조선민에 대하여 미군이 군정을 펼 것"이라고 정식 포고하고, 9월 12일 아치볼드 V. 아널드 미육군 소장을 미군정장관에 임명하여 군정을 선포하였다.

9월 12일 미군정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원들을 파직하고, 당일부로 미군 장교를 각 도의 장관에 임명하여 행정권을 장악했다. 이어 9월 14일부로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를 해임했으나 조선인 출신 조선총독부 고관들은 행정고문이라는 이름으로 등용하여 조선의 사정을 파악하게 하는 한편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이용했다. 이때 말단 일본인 관료들은 10월까지 단계적으로 인수인계 작업을 거친 끝에 해임시켰다.

한국인 관료 임명[편집]

9월 18일 미군 장교를 각 국장(局長)에 임명하고 9월 19일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원래는 점령군의 성격이었으나 조선인들에게는 점령군이라 하지 않고 일본군을 퇴치한 존재임을 집중 부각, 홍보했다. 미군정은 치안유지법·사상범예방구금법 등 일제강점기의 악법들은 폐지했으나 신문지법·보안법 등은 존속시켜 통치에 활용했다. 미군정은 처음에 김성수, 김도연, 윤보선, 조병옥, 김병로, 장택상 등 조선인 11명을 미군정장관 고문으로 임명했다가 뒤에 한국인을 행정에 참여시키고, 10월 2일에는 각 국장을 미군 장교에서 한국인들로 교체시켰다. 1946년 9월 12일에는 한국인 부처장(部處長) 20명에게 행정권을 이양했다.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불법으로 규정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측면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에서 1946년 1월 1일 신탁통치 반대 운동과 총파업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자 이를 불법 쿠데타로 규정하고 임정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그해 2월부터 여운형, 장건상 등의 온건 좌파와 원세훈, 안재홍 등의 온건 우파, 이순탁, 김약수, 노일환 등의 한민당 탈당파 일부를 중심으로 정권 이양을 계획한다.

한국인 부처장[편집]

  • 민정장관 : 안재홍, 1947년 신설, 군정장관과 동격임
  • 경무국장 : 조병옥 ->1946년 경무부로 승격한다
  • 수도경찰국장 겸 경기도경찰청장 : 장택상 -> 경무국이 경무부로 승격함에 따라 경무부 수도경찰청장으로 승격한다.
  • 경무국 수사과장 : 최능진 -> 경무부로 승격하면서 경무부 수사국장이 된다.
  • 법무부장 : 이인
  • 운수부장 : 민희식
  • 재무부장 : 김도연
  • 재무부 재산처분국장 : 윤치영
  • 농림부장 : 윤보선
  • 인사처장 : 정일형
  • 군정청 대법원장 : 김용무
  • 통위부장(국방부장) : 류동렬, 1945년 12월 신설
  • 감찰위원장 : 정인보

의회와 삼부 구성[편집]

1946년까지 미군정은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고 다만 사법부장 겸 검찰국장에 이인, 대법원장에 김용무를 임명해 사법권은 한국인들이 자치적으로 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한국인들에게 치안권 이양 및 정권 인계를 위해 1946년 10월 과도입법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여기에 군정청이 임명하는 46명과 각 도에서 주민이 선출하는 민선 의원 46명 등 총 92명의 인원을 과도입법위원회 의원으로 선출했다. 이들은 대한제국 중추원이 폐지된 후 본격적으로 활동한 근대적 의회였으며, 초대 의장은 김규식, 부의장은 신익희, 윤기섭이었다. 서울에서 과도입법의원이 개원할 때는 애국가가 공식으로 처음 사용되었다.

1946년부터는 형식적으로 한국인 민정장관 안재홍을 임명해 행정권을 행사하게 하였다.

좌우합작 정책[편집]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신탁통치문제를 국내의 좌우합작으로 해결하고자 시도, 미군정 고문 L. 버치 중위의 주선으로 김규식·여운형 등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운동이 추진되었다. 여기에 조선공산당에 타격을 주고자 조봉암 등의 1차 탈당, 여운홍, 장건상 등의 2차 탈당을 유도하고 이들을 좌우합작세력에 가담하게 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등의 계속된 암살과 학병동맹원 피살 사건, 정인수군 피살 사건, 윤명선 피살 사건, 대구 10월 사태, 조선공산당 테러 사건, 인민일보 테러 사건 등으로 조절은 어려워졌고,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도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 좌우합작을 통한 신 정부에 정권을 이양하려던 미군정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또한 미군정에서 극우파로 배격하던 이승만 역시 미군정을 무시하고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과 직접 상대하거나 미 국무부 내의 프린스턴 대학교 인사들, 하버드 대학교 인사들을 이용하여 좌우합작을 좌파에 유리한 정책으로 공격함으로써 미군정을 압박하였다.

대한민국 수립과 철수[편집]

1947년 10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됨에 따라 미국은 한국문제를 국제 연합에 상정해서 UN총회의 결의하에 해결하려는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1948년 1월 UN의 한국임시위원단이 한반도를 방문, 미군정은 방문을 수용했으나 소련 측에서는 방문을 거부함으로써 그 해 2월 한국의 가능한 지역(남한)에서만 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의 제안이 UN에서 가결되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어 국회가 구성되었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후 9월까지 윤치영, 조병옥 등의 실무자들을 통해 정권을 이양했고, 10월부터는 대한민국 정부의 군사 고문 겸 정치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49년 6월에 철수하였다.

역대 지도자[편집]

사령관[편집]

군정장관[편집]

안재홍(安在鴻)은 1947년 10월 30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민정장관을 맡았다.

관련 항목[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