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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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표: 북위 40° 29′ 동경 127° 12′  / 북위 40.483° 동경 127.200° / 40.483; 127.200 (Chosin Reservoir)

장진호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장진호 전투 중 중공군 저지선을 뚫고 이동하는 미 해병대.
장진호 전투 중 중공군 저지선을 뚫고 이동하는 미 해병대.
날짜 1950년 11월 26일 ~ 12월 13일
장소 함경남도 장진호
결과 중공군의 승리
미국군의 전술적 승리
교전국
국제 연합 국제 연합
미국 미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영국 영국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
미국 더글라스 맥아더
미국 에드워드 알몬드
미국 올리버 스미스
송쉬룬
병력
미국 1 해병사단
미국 7 보병사단 예하 31 연대전투단(31RCT)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
피해 규모
전사 - 2,500여 명

실종 - 219명
부상 - 5,000명
동상자 다수

전사 - 25,000여 명

부상 - 12,500여 명
동상자 다수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겨울, 미국 1 해병사단함경남도 개마고원장진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간신히 성공한 후퇴 작전이다.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진행되었다. 본 전투의 이름의 장진(長津)은 영어로는 일본어 독음을 따서 Chosin(ちょうしん)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당시 한국어 지도가 없고 일본어 지도뿐이었기 때문이다.[1] 1950년도 사건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였다.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으며, 1 해병사단 외에 미국 육군 7사단 병력 일부도 함께 하였다.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공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공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흥남 철수는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사건을 말한다.[2] 흥남 철수의 작전시작한 날은 바로 대한민국평양에서 철수한 날이었다. 또한 흥남 철수 작전이 바로 1.4 후퇴의 시작이었다.

미 해병1사단의 이 퇴각작전으로 중공군을 저지함으로써 한국군과 유엔군, 피란민 등 20만명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으며, 서부전선의 미 8군이 중공군을 방어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로 인해 중공군의 함흥 지역 진출은 2주간 지연됐고 중공군 7개 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경과[편집]

장진호 전투 지도

극동사령부의 압착포위작전(Massive Compression Envelopment)[편집]

평양 수복 후, 맥아더 사령부는 중공군이 개입할 가능성이 없다는 전제[3]하에서 압록강을 향한 대대적인 포위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4] 극동 사령부는 한반도 북부의 험난한 자연과 기후[5], 그리고 중공군 개입에 대한 철저한 대비없이 이 포위작전의 북쪽 주공을 미국 1 해병사단에게 맡겼다.

1950년 10월 26일[편집]

미국 1 해병사단은 유엔군의 북진에 맞추어 서부전선부대와 접촉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장진호 방면 진출을 위해 원산에 상륙하였다. 처음에 동부에 있었던 미국 10군단미국 1 해병사단장진호쪽으로 어렵게 북상하게 된다. 미국 1 해병사단은 북한군의 정부가 도피중인 강계를 점령하기 위해 장진호쪽으로 북진하게 된다(하지만, 미국 10군단은 11월에 중공군의 습격, 강추위로 인해 철수했다).

11월 2일 수동(水洞) 전투[편집]

함흥 북방 수동 일대에서 미국 1 해병사단 7연대 1대대와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부터 후퇴한 인민군 344전차대대 잔존 병력과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 중 일부 중공군 포로가 발견되어 중공군[6]한국 전쟁에 개입하고 있다는 첩보가 사실로 확인되었다. 당시 동경의 극동 사령부 (FEC, Far East Command)는 CIA와 기타 정보기관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7] 압록강에서 160km 후방인 수동에서 발견된 중공군은 소수의 지원병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정보참모 윌로비 (Charles A. Willoughby) 소장을 통해 11월 3일 16,500명에서 34,000명 가량의 중공군이 북한 지역에 들어와 있다고 발표하였다.[8] 하지만 중공군은 그 시점에서 제 9병단의 12개 사단과 제 13병단의 18개 사단, 대략 30만명이 이미 북한에 들어와 있었다.[9] 제 7연대는 수동 전투 이후 진흥리까지 진출하는데 꼬박 닷새를 보냈고, 3,000 명의 연대 병력 중 전사 50명, 부상 200명의 피해를 입었고 중공군은 1,500명이 전사한 걸로 파악하고 있었다.

포위기동의 북쪽 날개[편집]

11월 7일 ~ 11월 26일[편집]

7연대 병력은 별다른 전투없이 11월 7일 황초령 문턱에서부터 15일에는 장진호 남단 하갈우리[10]를 거쳐, 25일에 장진호 서편 유담리에 진출하였다. 26일에는 7연대는 장진호를 중심으로 서쪽, 5연대는 하갈우리 북방, 1연대는 후방을 담당하는 형태로 배치되었다. 이 기간 동안 스미스 사단장은 하갈우리에 보급품을 비축과 야전활주로 건설을 지시하였다. 한편,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은 11월 24일에 제 4야전군 예하 13 병단(약 18만명)과 제 3야전군 예하 9병단(12만명)을 미 8군 전면과 미 10군단 1 해병사단 전면에 배치하였고 11월 25일에는 미 8군의 우측을 공격하여 한국군 2군단이 붕괴될 위기에 처하였다.[11] 또한 미 2 보병사단도 공격을 받아 당일에만 4,000 여명의 병력과 사단 포병장비 대부분을 잃었다.

중공군의 포위[편집]

11월 27일[편집]

장진호 전투의 중공군 공격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의 명령으로 해병 1사단은 당일부터 5연대를 주공으로 포위기동의 북쪽 날개로써 미 8군을 포위하고 있던 중공군을 격퇴하고 미 8군과 함께 낭림산맥 서쪽으로 공격할 예정이었으나 계획과 달리 포위작전의 방어부대인 미 8군이 중공군의 공격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중공군은 9병단 8개 사단 약 6만여 명의 병력을 장진호에 집결시켰다. 이중 3개 사단은 유담리에 대한 공격을 준비 중이었고 1개 사단(80사단)은 하갈우리 포위를 위해 해병 1사단의 우측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미 7보병사단 31연대전투단에 대한 공격을 준비 중이었다.[12] 당일 연합군 병력은 해병과 해군위생병 13,500명과 육군 4,500명에 불과하였다.[13]

  • 중공군의 유담리 공격
27일 밤, 중공군 제79 및 제89사단은 유담리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고 이 공격으로 인해 미국 1 해병사단 7연대 E중대와 중공군 제 79사단 235연대가 서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14]
  • 중공군의 31연대전투단(일명:Task Force Maclean)에 대한 공격
27일 밤 11시경부터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장진호 동안에 산재해 있던 연대 산하 3개대대는 유무선 통신이 전혀 연결되지 않았아 제각기 중공군과 맞서야 했으며 해병대와 서로 협조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공격으로 32연대 1대대[15], 후동 지휘소의 제31연대 전차중대[16], 제31연대 3대대[17], 그리고 제57야전포병대대[18]이 큰 피해를 당했다.

11월 28일[편집]

중공군은 27일 밤부터 28일까지 미 해병 16개 소총중대 가운데 3개 중대를 격멸하고 많은 고지를 탈취하였다.[19] 이틀에 걸친 공격으로 중공군은 3개 사단(79, 89, 59사단)이 미국 1 해병사단을 세 개의 조각으로 분산시켜 각 부대를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로 각각을 고립시겼으며 부대 간의 연결도로도 차단하였다.[20] 제5해병연대와 제7연대는 신속히 방어로 전환하여 병력을 절약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해병 5연대 2대대는 오후부터 철수를 개시하여 밤8시에는 서남쪽 산으로 철수를 완료하고, 좌는 제7해병연대 3대대, 우는 제5해병연대 3대대와 연결하여 진지 편성을 마쳤으나 중공군 제58사단[21]이 미 해병 1사단과 보병 7 사단의 사령부가 위치해있고 주요 보급기지 역할을 하고 있는 하갈우리를 포위하고 유담리, 고토리와의 연결을 차단하여 포위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이틀에 걸친 공격으로 중공군 제79, 89사단은 전력을 재편성중이어서 미 해병 5, 7연대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실시할 능력이 없었다.

  • 극동사령부의 판단
에드워드 알몬드 미 제 10군단장은 이날 하갈우리의 미 사단사령부와 장진호 동안에 위치한 31연대전투단의 맥클린 대령을 방문하여 한반도 북부에 중공군 2개 사단은 존재하지 않으며 전날 공격한 부대는 패잔병들이므로 적에게 빼앗긴 고지를 탈환하고 북쪽을 향한 공격을 재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22] 알몬드는 흥남으로 돌아오는 도중 동경에서 열리는 전쟁대책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 회의에서도 10군단은 계속 진격해야 한다는 의견을 계속 피력하였으나 다음날 새벽에 끝난 회의에서 10군단은 함흥-흥남지역으로 병력을 집중하라는 지시를 받았다.[23] 극동사령부도 중공군의 개입을 워싱턴에 보고하였고 워싱턴도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하려는 맥아더 사령부의 계획을 승인하였다. 연합군 사령부 일부는 미 8군이 계속 후퇴함에 따라 흥남에서 미 10군단을 철수시키는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24]

11월 29일[편집]

  • 31연대전투단(페이스 특수임무부대)[25]
27일부터 공격을 시작한 중공군은 28일 자정무렵부터 중공군 80사단의 예하 부대로 새로운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전투로 연대장이 포로로 잡혀 전사[26]하였고 페이스 중령이 새로운 지휘관이 되었다. 10군단은 이른 아침에 해병 1사단 스미스 소장에게 해병 1개 연대를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이동시켜 페이스 부대를 구출하고 하갈우리-고토리 간의 도로를 개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오후 8시 27분 기준으로 장진호 지역의 모든 병력은 스미스 소장의 작전통제하에 두게 하였다. 미 7 보병사단 부사단장이 헨리 호즈 준장도 스미스 소장에게 구조요청을 보냈지만 제5, 제7 해병연대는 중공군 3개 사단에의해 유담리에서 포위 고립되어 있었으며 하갈우리에는 고토리까지의 주보급로를 개통할 병력은 물론 하갈우리 방어에도 병력이 부족하였다. 알몬드 장군은 아직 장진호의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미스 소장은 호즈 준장에게 페이스 부대는 병력을 모아 하갈우리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갈우리 방어작전[편집]

11월 28일[편집]

하갈우리 방어는 제1해병연대 3대대가 맡고 있었다. 하갈우리에는 육군, 해군, 해병대, 한국군 등 58개 부대 3,913명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10명 이하로 구성된 선발대나 파견대였기 때문에 통합 지휘가 필요하여 이날 오후 3시 경에 3대대장이던 리지 중령이 하갈우리지역 방어작전의 통합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하갈우리 방어 전면은 약 2,200m였다. 하갈우리 방어를 위해 제11포병연대의 2대대 D포대가 지원하였다.

  • 남서면 전투는 H중대와 I중대가 중요 전면을 담당하고 있었다. 밤 10시부터 시작된 공격으로 0시 경에는 중공군 172연대가 H중대 전면을 돌파하였고 사단장 숙소에까지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0시 30분경에 공병과 운전병으로 편성된 약 50명의 예비대가 역습을 감행하여 일부지역을 회복하고 저지진지를 점령했다. I중대는 진지강화를 한 덕분에 돌파는 당하지 않았고 아침6시 30분에 주저항선을 회복했다.[27]
  • 동부고지(이스트 힐)전투는 제1해병연대 G중대는 방어할 예정이었으나 고토리에서 하갈우리로 들어가다가 중공군의 강력한 공격 때문에 좌절되었다. 제10전투공병대대 D중대[28]를 주축으로 방어를 하였으나 29일 새벽2시부터 시작된 공격으로 미 제10군단 사령부 경계부대인 한국군 1개 소대를 돌파한 뒤 중공군은 하갈우리 방어진지 관측이 가능한 동부고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였다.[29]

포병과 박격포를 동원한 화력 지원으로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내었으며 이 전투 와중에도 방어진지 내에서는 활주로 공사가 계속되고 되었다.

11월 29일[편집]

하갈우리는 2개 중대 병력의 규모가 방어하고 있었으며 동부고지는 3개 소대가 겨우 진지를 유지하면서 중공군과 대치중이었다.

  • 죽음의 계곡
하갈우리 방어를 위해 오전9시 45분, 전차 29대와 일반 차량 141대 등 다수의 차량[30]을 보유한 드라이스데일 특수임무부대[31]가 남쪽 고토리로부터 북쪽 하갈우리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매복 중인 중공군 제 58사단의 강력한 저항으로 부대는 공격개시 후 4시간 동안 겨우 4km밖에 전진할 수 없었다. 오후 1시 50분, 눈보라와 강풍의 악천후 속에서 부대는 F4U 코르세어기 2대의 엄호 하에 전차부대를 선두[32]로 공격을 재개했다. 오후4시 15분, 부대는 고토리 북방 6.5km지점에서 도로 유실과 노면 상의 탄흔 등의 장애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33] 부대장은 스미드 사단장에게 보고하였으나 증원군없이는 하갈우리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스미스 사단장은 전진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극심한 전투 속에 드라이스데일 중령과 부관이 부상을 당했고 종대 중반에 위치한 탄약차량[34]이 공격을 받았다. 이 화재로 인하여 도로가 폐쇄되었고 부대의 절반 가량이 후방에 고립되었다.[35] 고립된 후방부대는 영국 코만도부대원 일부, 제31연대 B중대의 대부분, 그리고 사단 사령부 및 보급정비부대의 주력이었다. 최고 선임자인 사단 군수참모 보좌관인 아더 챠이데스타 중령이 차량종대에게 고토리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으나 고토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그룹의 전차와 트럭[36]을 제외하고는 4개의 그룹으로 분산되어 방어진지를 구축해야 했다. 다행히 후방 2개 그룹은 다음날 새벽 2시 30분 경에 고토리로 귀환하였으나 전방의 2개 그룹은 중공군에 항복하였다.[37] 선두 부대는 후속부대가 포위된 지 모르고 계속 전진하여 29일 저녁7시 15분 하갈우리에 도착하였다. 하갈우리에 약 300명의 보병과 100명의 전차병이 증강됨으로써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으나 드라이스델 특수임무부대는 전투력의 3분의 1을 상실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38] 이날은 드라이스데일부대가 하갈우리 남쪽에서 교전한 것 외에 큰 전투는 없었으며 중공군 제58, 제59사단의 일부가 다음날인 30일의 하갈우리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11월 30일[편집]

오전 8시에 미군이 소대와 배속된 공병 2개 소대로써 중공군이 점령한 동부고지를 공격했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밤 0시부터는 중공군이 전날보다 강력한 화력과 인원으로 남쪽의 I중대정면과 동부고지의 G중대 정면을 공격하였다. I중대는 비행장을 직접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뢰, 철조망, 조밀한 화망 구성으로 가장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39] 동부고지에 위치한 G중대는 중공군의 공격으로 중대장이 부상당하였으나 12월 1일 새벽에 영국 코만도부대를 동부고지에 투입하여 역습을 감행 아침 9시경에는 전날의 진지를 회복하였다. 11월 28일부터 시작된 하갈우리 공격으로 양측은 미군 전사상자 315명, 중공군 전사상자 8,500여 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포위망 탈출[편집]

11월 30일[편집]

장진호 서쪽의 160Km 지점에서는 미 8군단 보병 제2 사단이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후퇴하고 있었다.[40] 미 8군단의 퇴각과 미 해병사단의 위기로 인해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가 원자폭탄을 쓸 수 있게 허락할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41] 새로운 전황보고를 받은 10군단[42]은 이날 오후 7시 30분 군단을 함흥-흥남지역으로 집결하고 제1해병사단은 먼저 하갈우리-수동간의 도로를 확보하면서 하갈우리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사단은 제5해병연대가 유담리 방어를 담당하고 제7 해병연대는 하갈우리까지의 도로를 개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해병 7연대와 5연대는 하갈우리로의 철수를 위해 병력을 재 배치하였다.

12월 1일[편집]

이날 아침, 미 해병사단은 제5해병연대 3대대를 전위부대로해서 제 5, 7 해병연대를 유담리-하갈우리 간의 도로[43]를 경유하여 신속하게 하갈우리로 전진하도록 명령하였다.[44] 오전 8시부터 해병 5연대 3대대를 시작으로 철수를 시작하였다.

  • 전위부대
오전 9시에는 해병 7 연대 3대대는 도로상의 주력부대가 1542고지의 동쪽을 통과할 때까지 엄호하기 위해 1419고지, 1542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정상을 정복하지 못하고 그 동쪽 경사면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중공군 제79사단 235연대의 4개 대대도 이날 아침부터 다음 날 새벽에 걸쳐서 1542고지의 동쪽 경사면의 제7해병연대 3대대에 대하여 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G와I중대의 병력은 200명 남짓으로 줄어 들었다. 중공군은 12월 1일 심야부터 새벽까지 철수 부대와 전위부대인 제5해병연대 3연대에 대해서도 맹렬한 공격을 가해 I중대의 병력이 20명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타격을 주었다.
  • 측위부대
제5 해병연대 1대대가 북쪽을 향해 진지를 점령하고 유담리분지와 장진호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밤 9시 경부터 중공군 소수병력에 의한 침투는 밤새도록 지속되었다. 대대는 2일 정오가 지나서 진지를 철수하여 주력종대의 좌측방을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7해병연대 1대대는 영하 31도의 혹한과 적설을 뚫고 밤 9시에 1419고지로 출발했다. 이때, 1대대는 미군으로는 드물게 야간 산악행군을 감행하여 중공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45]제 1대대는 1520고지 동쪽 경사면에서 중공군 약 1개 소대를 격멸하고 12월 2일 새벽 3시 경에 재편성을 완료하였다. 부대를 정지 시키자마자 피로에 지친 [46]들은 그대로 눈 위에 쓰러져 추위도 적탄도 아랑곳 없이 잠을 자려고 하여 장교와 부사관들은 이들을 깨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갈우리의 야전활주로가 완성되어 부상자에 대한 후송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 페이스 특수임무부대
중공군은 12월 1일 자정무렵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31연대 3대대의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오전 9시 경에 가진 연대 참모들과의 회의에서 페이스 중령은 약 30대의 트럭과 3,000여 명의 병력을 하갈우리로 철수시키기로 결심하고 제 1해병단의 근접항공지원에 맞춰 오후 1시 경에 바탕으로 하갈우리로 출발하였다. 출발과 동시에 도로 양편에 위치한 중공군은 사격을 받았고 항공지원을 한 코르세어기가 네이팜탄을 너무 빨리 터트려 아군 행렬 내에서 폭발하였다. 이로 인해 부대의 전술적 통제가 무너졌고 퇴각 도중에 밤이 되어 항공지원이 끊기자 페이스 중령을 포함한 부대원 대부분이 사살당했다. 육군이 아닌 해병 전방 항공통제관인 스탬포드 대위가 남은 병력 1000여 명[47]을 인솔하여 하갈우리에 간신히 도착하였다.

12월 2일[편집]

새벽 6시경, 해병 7연대 1대대는 5일동안 고립되어 있던 F중대 구출을 위해 1653고지(덕동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F중대와 합류에 성공하였다.[48] F중대는 5일동안 전사 26명, 실종 3명, 부상 89명의 총 11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대 장교의 7명 중 6명이 부상을 입었고 [49] 전원이 동상과 설사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 후위 부대
해병 5연대 2대대는 1276고지를 중심으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주력이 통과한 후에는 그 후위가 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날 0시경부터 중공군은 1276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해병 좌측 1개 소대가 포위되기도 했으나 전투기의 야간 근접지원으로 정오까지 중공군과 능선 쟁탈전을 되풀이하면서 차량종대의 통과를 엄호했다. 이후 대대는 코르세어 전폭기의 엄호를 받으면서 후위로 출발했다.
  • 차량종대
도로를 통해 후퇴하는 부대는 해병포병은 3개 대대(제1, 3, 4대대)로서 합계 48문, 차량 400~500대였다. 중공군은 주요 고지를 점령한 미군과 미 항공단의 공중지원으로 도로 주변에서 소규모 공격에 주력하였다. 이날 밤에도 포병 제3대대를 공격하여 105mm포 1문과 차량 여러 대를 파괴했다.

12월 3일[편집]

전선에 눈이 내려 약 13cm의 적설량을 기록하였다. 이날 아침 해병 7연대 1대대는 덕동고개의 동쪽 고지에 위치한 중공군 1개 대대를 공격하여 오전 10시 30분 경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오후1시, 해병 5연대 3대대는 덕동고개에 도착하여 해병 7연대 1대대와 합류했다. 11월 30일부터 시작된 작전으로 전위대대는 약 56%의 병력을 손실했다.[50] 덕동고개에서 하갈우리까지는 항공지원단의 엄호를 받으며 해병 7연대 1대대를 선두로 하여 철수하였다. 저녁 8시 경에 선두부대가 하갈우리에 도착하였다.

12월 4일[편집]

맨 후위인 해병 7연대 3대대가 하갈우리진지에 도착 완료한 것은 이날 오후 2시 경이었다. 해병대가 유담리에서 하갈우리까지 약 22km를 돌파하는데 선두는 59시간, 최후미는 77시간이 소요되었다. 한 시간에 약 286m 내지 370m, 즉 1km를 전진하는데 평균 2시간 40분에서 3시간 30분이 걸린 셈이 된다. 부상자는 약 1500명(이중 약 600명은 들것에 실려야하는 중상자였다)이었는데 한명도 남기지 않고 전원 후송했으며 그 중 3분의 1은 비전투 손실로서 주로 동상환자였다. 155mm야포 9문과 골짜기에 굴러 떨어진 지프차 몇 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장비를 철수 시킬 수 있었다. 한편, 같은 날인 12월 4일 대한민국 국군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실제 수도였던 평양에서 철수했다.

12월 5일[편집]

장진호에서 흥남으로 향하는 후퇴로

하갈우리에서는 1일부터 이날 밤까지 약 4,000여 명의 부상자가 일본으로 후송되었다.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평양-원산간의 방어선 형성이 불가능하여 이날 평양에서 철수하였다.[51]

12월 6일[편집]

이날 오후 2시 40분 경 하갈우리 통신 중계설비가 해체되었다. 오후 6시에는 야전활주로가 폐쇄되었다. 그때까지 4,312명이 후송되었으며 시신 173구도 함께 후송되었다. 미 수송기를 통해 보급품을 지원받은 미국 1 해병사단은 차량 1,000대를 이용해 중공군 9병단의 포위망을 뚫고 하갈우리에서 고토리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12월 4일에 가장 마지막으로 후퇴함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도 평양을 수복하였다.

12월 7일[편집]

자정 무렵에 1만여 명의 병력과 1천대 이상의 차량이 하갈우리를 빠져나와 약 40시간 만에 고토리에 모두 도착하였다.

12월 9일[편집]

미 10군단은 모든 유엔군은 흥남지역으로 철수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52]

1950년 12월 10일[편집]

USS Begor호가 흥남부두 폭파를 지켜보고 있다.

오전 6시, 미국 1 해병사단의 행군 행렬이 함흥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12월 11일 저녁까지 최종부대가 함흥에 도착했다. 흥남에서는 14일부터 24일까지 유엔군 12만명과 피난민 10만명이 해상으로 철수하였다.

피해 및 전투 환경[편집]

  •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미국 1 해병사단은 전사상자 3,637명 비전투전사상자 3,657명을 기록했고 비전투사상자 대부분은 동상환자였다.[53] 중공군 9병단은 장진호 전투로 무력화되었는데 10월 15일부터 12월 15일까지 전사 25,000명, 부상 12,500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54]
  • 양쪽 군대 모두 절반 이상 심한 동상에 걸렸다. 당시 개마고원 장진호 일대는 고도 1000미터의 산악지형으로서, 낮기온 영하 20도, 밤기온 영하 32도였다.[2]
  • 당시의 혹독한 추위로 인해 중기관충은 반드시 부동액을 채워야 했고 경기관총은 불발을 방지하기 위해 목표가 있건 없건 주기적으로 사격을 해야 했다. M1총은 윤활유가 얼어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엷게 발라야만 했다. 공중에서 투여되는 보급품도 땅 표면에 부딪혀서 깨지는 바람에 탄약의 경우는 25% 정도만이 사용 가능한 상태였다. 차량도 일정간격으로 가동을 시켜주지 않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땅 표면도 두껍게 얼어있어 참호를 파거나 축성을 하는 일은 극심한 노동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동상 방지였는데 전투나 작업 후에 땀을 흘리고 나면 발과 발싸개 사이에 얇은 얼음막이 생겨 양말을 갈아신지 않을 경우 대부분 동상에 걸렸다. 부상자를 위한 수혈관이나 모르핀도 얼어버려 사용이 어려웠으며 부상자를 위한 붕대로 함부로 갈 수 없었다.[55] 전투식량도 일일이 녹여 먹을 수 없어서 얼음조각이 있는 상태로 먹었기 때문에 전투 기간 내내 [56]들은 심한 장염과 설사에 시달렸다. 계속되는 전투로 침낭에 들어가 잠을 자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는데 적의 기습에 대비해서 침낭 속에 잘 때에도 지퍼를 잠그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 미 해병대는 전사한 전우의 명예를 생각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부상자와 시신을 회수하는 전통이 있다. 동료 전사자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또다른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57]
  • 당시 전시에 동원된 중공군 사단은 6,500명에서 8,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포병은 미군의 공습 때문에 대부분 후방에 둔 채 투입되었다. 당시 중공군 9병단의 임무는 서부전선에서 미 8군단과 대치 중인 제 13병단의 측면을 방어하는 것과 장진호 부근의 미 10군단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중공군은 11월 초 미 제1 기병사단과의 전투 이후에 미군 보병은 보급이 끊기면 전투의지가 약화되고 후방과 연결이 차단되면 후퇴하며 야간 공격에 취약하다고 분석하였다.

기타[편집]

장진호(Chosin) 전투의 이름을 붙인 타이콘데로가급 이지스 순양함 CG-65 USS Chosin
  • USS 초신 : 장진(長津)을 영어로 Chosin 이라고 부른다. 일본 발음이다. 타이콘데로가급 이지스 순양함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미 7함대 소속이다. 한국말로 하면 "장진함"이다.
  • Chosin Few : 장진호 전투의 생존자 모임. 1983년에 발족되었다.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전우"라는 뜻이다.
    • 초신 퓨(Chosin Few)가 조직한 "장진호 전투 동상 위원회"의 노력으로, 장진호 전투의 생존용사 가운데 4,000여 명이 47년 만인 1997년에, 비로소 미국 원호청의 동상 후유증 보상을 받게 되었다. 그동안 동상 후유증은 보상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58]
  • 미국에서 출간된 한국전쟁에 관한 다수의 책 가운데는 반드시 장진호(Chosin Reservoir)전투가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심지어 장진호전투 자체에 관한 단행본만도 3권이나 된다.[59]
  •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이 전투와 미국 해병대를 칭송했다.
한국전 당시 미국 1 해병사단은 북한의 장진호 부근에서 중공군 10개 사단에 포위됐지만 적의 7개사단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둬 해병대의 위대한 전통을 세웠다. 2004년 12월 7일, 진주만 피습 63주년 기념, 미국 부시 대통령의 미국 1 해병사단 방문연설

관련도서 및 참고자료[편집]

함께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지명 장진은 en:Changjin과 같이 한국어로 불리고 있다.
  2. 기고 / `장진호 전투` 를 기억하자 문화일보 2001-01-12
  3. 1950년 웨이크 섬에 가진 트루먼 대통령과 회담에서 중공군의 개입은 없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4. 11월24일, "유엔군의 포위작전은 계획대로 개시되었다. 적 전선의 후방과 압록강을 잇는 전국경선을 정찰한 결과 별다른 적의 군사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는 미국본토에서"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5. 미 7사단 31연대의 경우 방한복이 거의 지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에 투입되었다.
  6. 중공군 제 13병단 소속 제 124사단으로 파악된다. 피의 낙동강 얼어붙은 장진호 - 한국전쟁과 미 해병대 / 272쪽]
  7. CIA / `Two Strategic Intelligence Mistakes in Korea, 1950' 2007년 4월 14일
  8. 브레이크아웃 86, 87쪽
  9. 그들이 본 한국전쟁 1 - 항미원조 - 중국인민지원군, 중국 해방군화보사 (지은이), 노동환 (옮긴이) | 눈빛, 14쪽, "마우쩌뚱은 1950년 10월 14일에 10월 19일에 참전하기로 결정하였다."
  10. 하갈우리는 장진호 남단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교통의 중심였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구릉지대로 둘러싸인 분지로서 제1해병사단의 작전지역 내에서는 가장 평탄한 장소여서 11월 27일 이후로 미 1 해병사단과 미 7 보병사단의 지휘소가 운영된 곳이다.
  11. 전쟁기념관 / `제2차 청천강지구 전투' 2004년 10월 18일
  12. 제31연대전투단(Regimental Combat Team)연대장 맥클린(Allen D. Maclean)대령의 특수임무부대는 미 육군 제7사단 부사단장 헨리 하지(Henry Hodes)준장 지휘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부대는 탄약, 연료, 전투식량, 그리고 동계피복 등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북진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다. 또한 3,000명의 연대 병력 중 700명의 한국군 카투사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논밭에서 일하던 농부를 징집하여 부대를 구성하여 전투력이 극히 미약했다.
  13. 브레이크아웃 174쪽
  14. 제235연대 1대대의 사상자는 약 400명. 미군측의 피해는 E중대가 총원 176명 중 사상자가 120명, 증원부대인 제5해병연대 A,C양 중대는 전사 15명, 부상 67명이었다. 이중에는 후송이 불가능하여 추위로 얼어죽은 자도 많았다. 브레이크아웃 225쪽
  15. A중대장이 전사하여 급강하 폭격기 조종사 출신의 해병 전방 항공통제관인 스탬포드 중위가 중대장 임무를 수행하였다
  16. 22대 중 4대의 전차를 잃었다
  17. 대대장 부상
  18. 대대장 부상, 부대대장 전사
  19. 중공군 제136연대가 새벽부터 7연대가 지키고 있는 1240고지를 공격하여 오후에 고지를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제7해병연대 D중대원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하였고 증원 부대인 C중대의 제3소대는 약 반수가 전사또는 부상당했다.
  20. 유담리와 덕동고개를 지키고 있던 7연대 F중대는 이 공격으로 고립되었다. 당시 F중대는 유담리와 하갈우리를 잇는 유일한 보급로인 1차선 도로를 지키는 임무를 위해 27일 밤 덕동고개 부근으로 투입되었다. 이 도로를 잃을 경우 유담리의 2개 해병연대의 보급로는 차단될 위기였다.
  21. 제172연대가 남쪽, 제173연대가 동쪽, 그리고 제147연대를 예비부대로 야간 전투를 벌였다.
  22. 당시 군단장의 깨끗한 용모와 다림질이 잘 된 옷, 새 파카 등의 전투 상황과는 동떨어진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 브레이크 아웃 281쪽
  23. 브레이크아웃 285쪽
  24. 미 극동 지역 해군 사령부 C. 터너 조이 중장은 상륙작전사령관 도일 제독에게 철수 작전이 필요할 지 모른다는 경고를 했고 제독은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25. 맥클린 대령이 전사함에 따라 32연대 1대대장인 돈 페이스 중령이 새로운 지휘관이 되어 부대명칭이 맥클린 특수임무부대에서 페이스 특수임무부대로 바뀌었다.
  26. 미군과 전투 중인 중공군을 아군으로 착각하여 사격중지를 요청하다 포로로 잡혔다 나흘 뒤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27. 이 전투로 H중대는 16명 전사, 배속부대를 제외한 중대 부상자가 39명. I중대에서는 2명 전사, 16명이 부상당하였다.
  28. 중대장 필립 컬비스(Philip Kulbes)대위가 지휘. 미군 77명, 한국군 90명으로 편성되었으며 28일 12시에 고토리에서 하갈우리에 도착했다. 방어할 동부고지 진지에 도착한 것은 저녁 8시 30분이었으며 들이 피로에 지쳐 대부분은 호를 파지 못하고 공격을 받았다.
  29. 제10전투공병대대 D중대는 부대원 77명 가운데 전사 10명, 부상 25명, 실종 9명의 피해를 당했으며 한국군은 90명 중 사상자 및 실종자가 50명이었다.
  30. 1전차대대 D중대(2개 전차소대), 제5해병연대 대전차중대의 전차소대(M26 퍼싱전차 17대), 제1해병연대 G중대(차량 22대), 영국 해병제41코만도(차량 31대), 미 육군 제31연대 B중대(차량 22대), 제1해병사단 사령부 본부대(차량 66대), 제1전차대대 B중대(2개 전차소대 M26퍼싱전차 12대).
  31. 부대장은 영국 해병 제41코만도부대를 지휘한 더글라스 드라이스데일(Douglas Drysdale)영국 해병 중령
  32. 부대장은 전제대를 엄호할 수 있도록 전차를 분산 배치하려 했지만 전차중대장 클라아크 대위의 강력한 반대로 전차부대를 선두에 세워 전진하기로 했다. 하지만 선두의 전차부대가 일일이 대응사격하느라 방어가 취약한 후방 차량들은 신속히 기동하지 못하고 계속 뒤쳐지게 되었다.
  33. 부대는 종대 배열로 선두에 제1전차대대 D중대(2개 전차소대)와 제5해병연대 대전차중대의 전차소대(M26 퍼싱전차 17대), 두 번째 제1해병연대 G중대(차량 22대), 세 번째 영국 해병제41코만도(차량 31대), 네 번째 미 육군 제31연대 B중대(차량 22대), 다섯 번째 제1해병사단 사령부 본부대(차량 66대), 여섯 번째 제1전차대대 B중대(2개 전차소대 M26퍼싱전차 12대)였으며 이 무렵 차량종대 후미의 전차대대 B중대는 겨우 고토리를 출발했다.
  34. 영국 제41코만도부대 후미의 탄약차량에 박격포탄이 명중
  35. 화재가 발생한 탄약차량보다 전방에 있는 부대(선두의 D전차중대, G중대, 제41코만도부대 병력의 4분의3)와 후방부대가 분리.
  36. 별다른 피해없이 밤9시가 지나서 고토리 방어진지에 도착.
  37. 새벽4시 30분경, 중공군은 중상자를 고토리로 보내는 것을 허가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요구해왔다. 맥롤린 소령은 항공지원이 가능한 여명까지 시간을 벌 목적으로 교섭을 끌다 결국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중공군은 약속과는 달리 중상자들을 고토리로 후송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중공군이 전리품을 챙기는 동안 일부 는 탈출하였다.
  38. 병력 중 대략 150명 전사하였고 150명이 부상이나 포로가 되었다. 141대의 차량 중 74대가 파괴되었다.
  39. I중대의 피해는 전사 2명, 부상 10명이었는 데 비해 중공군은 전사자만 500~700명으로 추측된다.
  40. 평양남도 군우리와 숙천 사이의 도로에서 미 보병 2사단은 중공군의 공격으로 사단장(로렌스 카이저 소장)이 휘하 연대장에게 비공식적 대피명령을 내렸고 이날 오전에만 3,000여명의 병력을 잃었다. 브레이크아웃 355쪽
  41. 11월 30일 기자회견. "원자폭탄도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무기들 중의 하나입니다."
  42.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에드워드 포니 해병대령이 고토리에서 본 장진호의 전황을 군단장에게 보고하였고 충격을 받은 알몬드는 하갈우리에서 군단 회의를 개최하였다.
  43. 23Km
  44. 이 명령에는 철수 도중에 덕동계곡에 고립된 F중대를 구출하라는 명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45. 중공군은 일반적으로 미군은 주간에 도로를 따라 행군한다고 믿고 있었다.
  46.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이라 한다.
  47. 칼러로 보는 한국전쟁 CD2
  48. 덕동고개는 하갈우리로부터 11km정도 떨어져 있었다.
  49.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이라 한다.
  50. 일자별 손실 병력은 12월 1일 437명, 2일 394명, 3일 256명, 4일에는 194명이었다.
  51. 당시 미국의 증원 가능한 병력으로서는 본토의 제82공수사단뿐이었다. 또한 당시 유럽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은 1개 보병사단과 3개 기갑연대뿐이었다. 한편 공산측의 병력으로는 1백만명 이상이 중공군 외에 극동에만 약 30개 사단의 소련군이 있었다. 또한 유럽정면에는 수백만명의 소련군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프랑스, 영국 등에 주둔하고 있는 미 지상군은 극히 미약했다.
  52. 피의 낙동강 얼어붙은 장진호 - 한국전쟁과 미 해병대 / 446쪽
  53. 피의 낙동강 얼어붙은 장진호 - 한국전쟁과 미 해병대 / 450쪽. 브레이크아웃에서는 해병대에서 700명 이상의 전사자, 200명 가량의 실종자, 3,5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6,200명 이상의 비전투 사상자가 발생(대부분은 동상환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611쪽
  54. 브레이크아웃 611쪽
  55. 붕대를 갈기 위해 장갑을 벗으면 손이 바로 동상에 걸릴 위험에 있었다.
  56.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이라 한다.
  57. 하갈우리에서 일본으로 후송된 전사자 유해도 있었는데 미 10군단 참모장은 시신후송을 반대하였으나 스미스 소장은 그 반대를 무시하였다.
  58. 6·25 장진호전투 참전 미군/동상 후유증 47년 만에 보상 한국일보 1997-04-08
  59. 포럼 정부가 외면한 납북자 문화일보 2002-09-23
  60. 책/브레이크 아웃/마틴 러스 지음 한국일보 2004-05-22
  61. DailyNK 파워인터뷰 출판인 고정일 '장진호 전투' 대서사를 말하다
  62. 알라딘 "불과 얼음"

바깥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