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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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South Koreans at Pusan.jpg
날짜 1950년 8월 10일 ~ 8월 11일
장소 대한민국 경상북도 포항
결과 대한민국의 패배
교전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미국 미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대한민국 제3사단 후방사령부 김재규 소령

대한민국 제3사단 학도의용중대장 김용섭
대한민국 제25연대장 유해준 중령
대한민국 제9중대장 문일수 중위
미국 더글라스 맥아더
미국 월턴 워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5사단장 마상철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2사단장 최인두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766부대장 오진우 총좌



포항 전투(浦項戰鬪)는 1950년 8월 10일 부터 8월 11일 까지 포항으로 남하하는 조선인민군 육군 제12사단과 제5사단, 제766부대와 이를 방어하는 대한민국 제25연대 및 제3사단 학도병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1]

배경[편집]

1950년 8월 9일 조선인민군 제5사단[2]강구를 점령함으로써 한국군 제3사단은 장사동일대로 후퇴하였으나 8월 10일 기계를 석권한 조선인민군 제12사단의 1개연대 병력이 냉천동[3] 일대에 출현하면서 퇴로가 차단당하였다. 이 때 포항에는 한국군 제3사단 후방사령부와 보급 및 근무지원부대, 해군 포항경비부와 공군 포항지부대 1개 중대, 그리고 경찰과 청년방위대 등 3,000 여명의 병력이 있었으나 조직적으로 전투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지휘체계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4] 하지만 포항에 있던 대한민국 3보병사단은 학도병 71명과 무장하여 전투를 준비 중이었고, 포항 북부 냉천동에 집결한 조선인민군은 포항을 향해 남하하였다.

소티재 고개 전투[편집]

8월 9일[편집]

한국군 제25연대 제3대대는 열차편으로 대구를 떠나 09:00에 포항역에 도착하였다. 10:00에 한국군 제25연대장 유해준 중령이 제3사단 사령부를 방문한 후 기계로 가던 중, 포항역에 집결중인 제3대대 병력을 보고 대대장 이방우 소령에게 포항 방어임무를 부과하였다. 그리고 기계지구의 상황이 위급하다는 이유로 제9중대를 제외하고 제11, 12중대를 안강으로 이동시키도록 지시하였으며, 제10중대를 연대 예비로써 효자역에 대기하도록 통제하였다. 한국군 제25연대 3대대장은 대대 전술지휘소 요원과 제9중대[5]를 지휘하여 소티재로 진출하였다. 이 때, 제25연대 3대대는 통신장비의 미비로 제3사단 사령부와 통신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제9중대장 문일수 중위는 소티재에서 7번 국도감제가 용이한 105고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대대 관측소도 중대 방어진지내에 설치하였다. 당일 밤, 정찰대로 보이는 수 미상의 조선인민군과 가벼운 접전이 일어났으나 별다른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8월 10일[편집]

00:00가 지날 무렵, 증강된 1개 중대 규모의 조선인민군이 105고지 북쪽 기슭에 출현하여 소티재고개 도로상으로 접근하다가 한국군 제9중대의 기습사격을 받고 흩어졌으나 다시 대오를 갖추어 공격을 시작하여 2시간 가량의 교전이 전개되었다. 교전 이후 제9중대 병력의 반 이상이 손실되어 제3소대를 일선 산병호에 배치하고 방어선을 재조정하였으나, 조선인민군 주력의 공격으로 약 3시간에 걸쳐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105고지를 공격하던 조선인민군의 주력은 한 차례의 진내 육박전 이후, 고지에서 물러나 포항으로 남하하였고, 제9중대는 전투 결과 제1소대장[6]을 포함하여 소대장 전원과 대다수의 중대원이 전사 또는 실종되었다. 전투력을 상실[7]한 한국군 제25연대 3대대는 포항시내를 우회하여 어둠을 틈타 연일·운제산계곡을 경유하여 8월 11일오후에 경주에 도착하였다.

포항여중전투[편집]

8월 10일[편집]

07:00에 포항역에 도착한[8] 71명[9]수도사단학도의용대출신 학도병들은 임시 숙소로 지정된 포항국민학교로 이동했다. 이 곳에서 한국군 제3사단 작전처 보좌관인 김치련 대위와 만났으며, 이후 제3사단 후방사령부가 위치한 포항여자중학교[10]로 숙소를 이동하였다. 22:00에 학도병들은 M1소총과 개인당 실탄 250발을 지급받았고, 투표를 통해 중대를 편성한 이후 24:00에 이르러 취침에 들어갔다.

8월 11일[편집]

03:00에 포항시내에서 총성이 울렸다. 한국군 제3사단 후방사령부 지휘책임자인 사단인사참모 김재규 소령은 사령부 잔여병력을 이끌고 시내 쪽으로 들어갔고 학도병에게 사령부 방어를, 작전처 보좌관인 김치련대위에게 행정요원 60여명으로 편성된 2개 소대를 지휘하게 하여 학교 뒷산에 배치하는 한편, 일부 병력으로 사단 보급품과 기밀문서를 후송하게 하였다. 학도병들은 학교 울타리[11]를 따라 제1소대는 학교 정문 우측으로 부터 강당 측면까지, 제2소대는 정문 좌측으로 부터 본관 측면까지 경계하였다. 04:00에 이르러 소티재 방향에서 녹색 신호탄이 발사되었고 학교 정문 100m 전방에 소속 불명의 병력이 나타났다. 당시 3사단 학도의용군 중대장 김용섭은 적군과 아군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암구호 질문[12]을 고민였으나 이내 시야로 들어온 병력이 인민군임을 판단하여 20m 거리에서 일제 사격으로 조선인민군 첨병대를 제압하였다. 06:00에 조선인민군은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학교 뒷산에 배치된 한국군 제3사단 행정요원 2개소대는 인민군의 공격으로 30여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 조선인민군 제5사단 제12연대는 09:00에 이르러 대량의 포격과 함께 공격을 재개하였고 15:00경에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분산되었다.


[[어머께 보내는 편지]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 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 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 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수의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어머니도 형제들도 못만나다고 생각하니 무서워 지는 것 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 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테니까요, 그럼...

학도병 목록[편집]

전사자[편집]

  • 김춘식(감포중학교)
  • 윤정한(양주 출신, 성남중학교)
  • 이상헌(대구 출신, 대구중학교)
  • 이상현(부안 출신, 중앙대학교)
  • 윤재정(김해 출신, 신흥중학교)
  • 이우근(양평 출신, 서울동성중학교)
  • 길안영(서울 한양중학교)
  • 정문호(사천중학교)
  • 김영환(대구 출신, 대구상업고등학교)
  • 김언구(평택 출신, 국민대학교)
  • 금병선(태백 출신, 태백공업중학교)
  • 윤 각(보은 출신, 청주중학교)
  • 서성룡(경북장천오상중학교)
  • 강기남(경북 출신)

외 35명(신원 불명)

생환자[편집]

  • 김용섭(서울대학교 사범대학 2학년, 학도중대장)
  • 김만규(당시 15세, 대구 성광중학교, 연락병)
  • 김일호(서울 중앙대학교 2학년, 2소대장)
  • 김 탄(서울교통학교)
  • 김호경(서울교통학교)
  • 유명욱(서울 배재중학교 5학년, 1소대장)
  • 윤병국(당시 18세)
  • 조성태(서울 중앙대학교)
  • 장진명
  • 주영남(부평중학교)
  • 황기태(대구 영신중학교)
  • 안영걸(서울 농업대학교 수의과)
  • 이병균(서울 배재중학교)
  • 조남수(태백중학교)
  • 황재호(태백중학교)
  • 정수득
  • 주정만(서울 중앙대학교)
  • 손주형(당시 17세)
  • 김환규(당시 대구 성광중학교 3학년)

같이 보기[편집]

작품[편집]

국내[편집]

주석[편집]

  1. 일반적으로 포항 전투는 한국군 학도의용단과 조선인민군 766부대의 전투로 알려져 있으나 이 문서는 포항 소티재고개를 방어하는 25연대의 전투도 포함한다.
  2. 사단장 마상철
  3. 흥해읍남쪽 3.8km 지점
  4. 국방부, 안강·포항전투 : 한국전쟁전투사, 1986
  5. 총원 180여 명 중의 대다수는 학도병이었으며, 전투경험이 없는 고참병은 극소수이고, 장교는 중대장을 포함하여 3명밖에 없었다.- 국방부, 안강·포항전투 : 한국전쟁전투사, 1986
  6. 유동준 소위
  7. 방어진지에 남아 있는 장병은 그를 포함한 15명 뿐이었고, 대대장과 대대지휘부 요원을 합쳐도 20여 명에 불과하였다.- 국방부, 안강·포항전투 : 한국전쟁전투사, 1986
  8. 도착 일자는 8일 부터 10일까지 증언 및 기록에 따라 다르다.
  9. 처음 87명 중 16명은 수도사단에 현역으로 입대하였다.
  10. 현 포항여자고등학교
  11. 증언에 따르면 울타리에는 오래 된 상록수가 우거져 있었으며 50여cm나 되어 방어하기 용이했다고 한다.
  12. 당시 암구호는 "별"과 "달"이었다.

참고[편집]

  • 국방부, 안강·포항전투 : 한국전쟁전투사, 1986
  • 동아일보, 신화 6.25 정일권 회고록 <24> 포항전선서 산화한 학사병, 1986. 6. 29
  • 경향신문, 6.25는 살아있다 (2) 공업입국이 고동친다, 1975. 6. 13
  • 연합뉴스, '포화 속으로' 학도병들..61년 만의 군번 수여식, 2011.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