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전투

대구 전투
부산 교두보 전투의 일부
4명의 병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강물을 향해 기관총이 발사된다.
미국 제1기병사단 장병들이 낙동강을 건너는 조선인민군을 향해 발포한다.
날짜1950년 8월 5일 ~ 8월 20일
장소
결과 유엔군의 승리
교전국

유엔 유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유엔 미국 더글라스 맥아더
미국 월턴 워커
최용건
김책
병력
4개 사단 5개 사단
피해 규모
200명 사망
400명 부상
3,700명 이상의 사망 또는 부상자

대구 전투(大邱戰鬪)는 6.25 전쟁 초기 유엔사령부(UNC)와 조선인민군(KPA)의 교전으로, 1950년 8월 5일부터 8월 20일까지 대한민국 대구시 일대에서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 전투는 부산 교두보 전투의 일부였고, 동시에 진행중인 몇 개의 큰 전투들 중 하나였다. 이 전투는 낙동강을 건너 도시를 공격하려는 조선인민군의 시도를 저지하면서 유엔의 승리로 끝났다.

조선인민군 5개 사단은 낙동강을 건너 서쪽과 북쪽에서 공격할 준비를 하고 시내를 에워싸고 있었다. 대한민국 육군 제2군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도시를 방어했다. 연이은 교전에서 각 조선인민군 사단은 낙동강을 건너 방어군을 공격하려 했다. 이러한 공격의 성공은 다양했는데, 국군 부문의 공격은 더욱 성공적이였던 반면에 제1기병사단 부문의 공격은 격퇴되었다.

전투 중에 조선인민군은 303고지에서 미군을 기습하여 포로로 잡을 수 있었다. 전투 후, 미군들은 303고지 학살에서 기관총에 맞았다. 유엔군은 조선인민군의 대부분을 몰아내는데 성공했고 볼링장 전투(영어판)에서 마침내 도시를 확보했다.

배경[편집]

전쟁 발발[편집]

1950년 6월 25일, 북한남한[a] 침공과 함께 6.25 전쟁이 발발했고, 이어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가 대한민국을 방어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로 의결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은 일본의 군정기가 여전히 유효했던 일본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기지에서 즉시 전력(미 해군미 공군(USAF)[1] 병력)을 한국 남동부에 배치했다.[2]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영국과 같은 나라들은 모두 유엔의 조치를 지원하기 위해 해군 함정을 신속하게 파견했다.[3]

미군의 초기 목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침략을 저지하는 데 있는 남은 대한민국 육군(대한민국의 남동부, 부산의 주요 항구 주변에만 있음)을 지원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의 완전한 붕괴를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대한민국 시찰 후 미 육군의 지상군을 투입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4]

남침 당시 가장 가까운 미 지상군은 일본에 주둔한 제24보병사단이었다. 이 사단은 일반 사단에 비해 병력이 적었고, 미 의회의 군사비 절감으로 인해 장비 대부분이 다소 낡아있었다. 어찌됐든 미군 제24보병사단이 유일하게 대한민국을 신속하게 증원할 수 있었다.[5]

대한민국에 도착하는 스미스 부대.

이에 따라 제24보병사단은 미 공군, 미 해군, 미 해병대 항공부대의 지원을 받아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둔화시키고 부산(부산 교두보 전투) 주변에 방어 경계선을 설치하는 임무를 갖고 한국에 파견된 최초의 미군 부대였다. 맥아더 장군은 1950년 이후 서울과 가까운 대한민국 서북해안의 인천에서 제10군단을 집결시켜 상륙전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미군과 대한민국 육군이 부산 일대를 파고들도록 하기로 결정했다.[6] 제24보병사단은 대한민국 육군과 함께 부산 방어선 안쪽에 버티고 대한민국 공군에 대한 증원 및 조선인민군에 대한 반격을 기다렸다.[7]

도착하자마자 부산 방어선을 강화한 미군 부대 중에는 제1기병사단, 제7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과 함께 물류, 의료, 정보 지원을 하는 미 제8군 부대도 있었다.[6] 7월 5일 오산 전투에서 미 제24보병사단 진격부대가 조선인민군과의 첫 조우에서 참패했다.[8] 오산 전투에서의 패배 후 한 달 동안 제24보병사단은 강력한 소련제 T-34 전차를 갖춘 더 많은 조선인민군 부대에 의해 거듭 뒤로 밀리고 남동쪽으로 밀려났다.[9][10]

제24보병사단의 부대는 전의 전투, 천안 전투, 평택 전투 등에서 조직적으로 남동쪽으로 밀려났으며, 소규모 전투에서도 교전하였다.[9] 제24보병사단은 대전 전투에서 조선인민군에 필사적으로 맞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지만,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7월 20일로 지연시킬 수 있었다.[11] 그 무렵 제8군의 전투 병력은 거의 매일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에서 새로운 유엔군이 도착하는 등 부산 주변을 공격하는 조선인민군과 대략 비슷했다.[12]

북진[편집]

지상의 동남쪽 끝에 있는 둘레 지도
1950년 8월 부산 방어선 전술지도. 포항 전투는 북동쪽 선상에서 대한민국 육군과 조선인민군이 벌인 전투였다.

대전이 함락됨에 따라, 조선인민군은 부산 주변을 분쇄하기 위한 시도로 북부와 서부의 부산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조선인민군 4사단(영어판)6사단(영어판)은 남하하여 측방 공략 전술(영어판)로 진격했다. 이 두 조선인민군 사단은 부산을 남서쪽에서 점령하기 위해 유엔군의 왼쪽 측면을 공격하려 했으나 이 과정에서 분산되었다. 그들은 또한 미 공군과 미 해군의 거듭된 공습에도 노출되었다. 조선인민군은 처음에는 수적 우세, 못하여 T-34 전차와 함께였지만, 연이은 지역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유엔군, 항공, 해군 단위의 도움으로 동중국해에서 부산 남쪽 부근으로 가는 도중에 부산을 향한 모든 조선인민군 공격을 무디게 할 수 있었다.[13] 부산 방어선에 대한 미국의 제공권은 유엔 지상군이 위치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요소였다.[14]

유엔군은 거듭 후퇴하다가 마침내 부산 방어선 가장자리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조선인민군은 진격을 중단했다. 7월 27일 하동군에서 새로 입국한 제29보병연대(영어판) 제3대대가 조선인민군의 매복 작전으로 전멸되어 부산 지역으로 가는 통로가 열렸다.[15][16] 곧이어 조선인민군이 진주시 서쪽으로 이동해 미 제19보병연대(영어판)를 밀어내고 부산으로 가는 길을 개방해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더 많이 받게 했다.[17] 이후 미국의 편대는 8월 2일 노치 전투(영어판)에서 측면의 조선인민군을 격파하고 밀어낼 수 있었다. 점차 송실이 늘어나면서, 서부 지역의 조선인민군 부대는 며칠 동안 철수하여 재정비를 하고 증원군을 지원받았다. 이로 인해 양측은 부산 방어선 공격에 대비할 수 있었다.[18][19]

대구[편집]

그 사이 월턴 워커 중장(영어판)대구에 8군 사령부를 창설했다.[20] 대구는 부산 방어선 바로 중심에서 조선인민군이 근접 지원을 받으며 대거 진격할 수 있는 지역인 낙동강 계곡 입구에 있었다. 남쪽으로는 낙동강이, 북쪽으로는 산이 많은 지형이 대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대구는 부산을 제외하고 유엔의 손에 남아 있는 주요 교통 중심지이자 마지막 도시였다.[21] 남쪽에서 북쪽으로 기병 도시는 제1기병사단과 대한민국 2군단 제1보병사단제6보병사단이 방어를 하고있었다. 제1기병사단은 왜관읍 남쪽 강변에 제5기병연대제8기병연대(영어판)가 서쪽 면으로 늘어선 채 남쪽으로 낙동강을 따라 24km정도 길게 늘어서있었다. 제7기병연대는 포병과 함께 도하를 시도할 수 있는 지점이라면 어디든 증원할 준비를 하고 동쪽을 향해 진지를 유지했다. 대한민국 제1사단은 시내 바로 북쪽에 있는 산에서 서북향 전선을, 대한민국 제6사단은 동쪽으로 진지를 유지하며 군위군을 끼고 있는 좁은 계곡을 경계했다.[22]

대구에서 조선인민군 5개 사단이 유엔군에 맞서기 위해 모였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제10사단(영어판),[23] 제3사단(영어판), 제15사단(영어판), 제13사단(영어판),[24] 제1사단은 특성동에서 왜관읍 부근까지 대구를 에워싸고 왜관읍부터 군위군까지 넓은 영토을 점령했다.[25] 조선인민군은 상주에서 대구까지 이어지는 낙동강 계곡의 자연회랑은 다음 남하를 위한 주요 공격의 주요 축으로 삼을 계획이었으므로 결국 사단은 모두 이 계곡을 통과하여 저지대를 따라 각기 다른 지역에서 낙동강을 건넜다.[26] 제105기갑사단의 부대원들도 공격을 지지했다.[22][27]

전투[편집]

8월 4일부터 5일까지 밤, 조선인민군 제13사단은 대구에서 북서쪽으로 64km 떨어진 낙동리에 있는 낙동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 도하는 8월 5일 대한민국 포병대의 박격포 사격이 있을 때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사흘 밤 동안, 사단 3개 연대의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무기와 장비를 머리에 이고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다. 8월 7일까지 모든 사단이 건너가 한국군 1사단의 준비된 방어선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모였다.[22]

각주[편집]

주해[편집]

  1. 이하로 남한과 북한이라는 단어는 두 국가가 같이 서술되었을 때만 사용됨.

인용구[편집]

  1. Stokesbury 1988, 14–15쪽.
  2. Stokesbury 1988, 40–41쪽.
  3. Stokesbury 1988, 42쪽.
  4. Stokesbury 1988, 44쪽.
  5. Varhola 2000, 3쪽
  6. Alexander 2003, 52쪽
  7. Stokesbury 1988, 47–48쪽.
  8. Catchpole 2001, 15쪽
  9. Varhola 2000, 4쪽
  10. Alexander 2003, 90쪽
  11. Alexander 2003, 105쪽
  12. Fehrenbach 2001, 103쪽
  13. Appleman 1998, 222쪽
  14. Stokesbury 1988, 57–58쪽.
  15. Appleman 1998, 221쪽
  16. Alexander 2003, 114쪽
  17. Catchpole 2001, 24쪽
  18. Catchpole 2001, 25쪽
  19. Appleman 1998, 247쪽
  20. Fehrenbach 2001, 135쪽
  21. Appleman 1998, 335쪽
  22. Appleman 1998, 337쪽
  23. Appleman 1998, 253쪽
  24. Appleman 1998, 254쪽
  25. Leckie 1996, 112쪽
  26. Appleman 1998, 336쪽
  27. Catchpole 2001, 31쪽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