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대공세

낙동강 대공세
6.25 전쟁의 일부

낙동강 대공세 당시의 보병대
날짜1950년 9월 1일 - 9월 15일
장소
낙동강 전역
결과

유엔군의 승리

  • 인천 상륙 작전의 발판 마련
  • 유엔군이 전세를 역전하는 계기가 됨
  • 북한군의 목표 달성 실패
교전국

유엔의 기 유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미국 더글라스 맥아더
미국 월턴 워커
미국 존 H. 처치
미국 에드워드 A. 크레이그
미국 윌리엄 B. 킨
대한민국 백선엽
대한민국 김백일
대한민국 유재흥

대한민국 김홍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용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무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리권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웅
병력
140,650명 105,800명
피해 규모

미국 미국

영국 영국

  • 3명 사망[1]
  • 17명 부상[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4,000명

낙동강 대공세 당시의 지도

낙동강 대공세(한국 한자: 洛東江大攻勢, 영어: Great Nakdong Offensive)는 한국 전쟁 당시 1950년 9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이어진 북한군의 공세로 대한민국유엔에 대한 공격이었다. 북한인민군국제연합 사령부가 구축한 부산 교두보를 돌파하기 위한 마지막 공격이었지만 이는 실패로 끝났다. 전쟁 초기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며 남진을 거듭했다. 8월부터 유엔군과 한국군은 230 km에 달하는 한반도의 남동쪽 끝인 부산 교두보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지만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된 이래 최대의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 방어선으로 북한군은 측면을 뚫거나 압도적인 수로 방어선을 돌파할 수 없었다. 교두보에 대한 북한군의 공격은 둔화되었고, 8월 말 모든 공격 축선이 상실되었다. 교두보를 따라 발생하는 장기간의 분쟁에 대한 위험을 발견한 이후,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9월에 대규모 공세를 준비했다.

북한군은 5개의 공격축을 바탕으로 교두보를 향한 동시다발적인 공세를 계획했다. 9월 1일 마산, 경주, 대구, 영천낙동강 돌출부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이후 부산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걸쳐 피아가 2주간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북한군은 병력과 장비수준에서 우세한 국군과 유엔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없었다. 이 공세에서 정체된 북한군은 이후 인천 상륙 작전에서 궤멸된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The Times, August 24, 1950.
  2. The Times, September 6, 1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