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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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 대표들. 왼쪽부터 양유찬, 한표욱, 변영태, 임병직

한표욱(韓豹頊, 1916년 8월 17일 - 2003년 8월 25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외교관, 교육자이다. 함경북도 북청에서 태어나, 1938년 3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1]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외교학을 전공하였다. 졸업하고 1948년 후반에 귀국 준비를 하던 중, 이승만으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장면 박사가 곧 주미 대사로 가니 워싱턴으로 가서 장 박사를 보좌해 일해주기 바란다"는 당부였다.

한표욱이 일등서기관과 참사관을 역임하고 있을 때, 본국에서 장문의 편지가 도착했는데 "주미대사로 임병직을 생각했지만 장택상 외무장관이 곧 그만둘 것 같아 임병직을 후임으로 앉힐 작정"이라는 것이었다.[2] 주미 대한민국 대사관 초대 참사관으로 한국전쟁 당시 외교 활동에 참여하였다.

1949년 10월 11일, 최초의 대한민국 주미국대사관 외교관료들. 왼쪽부터 김세선 참사관, 장면 초대 주미대사, 한표욱 공사, 최운상 영사.

1949년 11월, 대한민국이 유엔 식량농업기구에 가입하게 된 것에 대하여 감사 연설을 행하였다.[3] 1951년 2월부터 4월까지 임시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로 있었다. 1952년, 제7차 국제연합 총회에 한국 대표단으로서 변영태 단장 외에 임병직, 양유찬, 이재항, 서재식, 전상진과 함께 참석하였다.[4] 1956년에 주미 한국대사 양유찬의 부재 중, 대사대리를 맡았다. 이후 시러큐스 대학교도 졸업하였다.[5] UN 대사와 주영국 대한민국 대사를 지내고 1980년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1948년 주한 미국 대사관 창설 준비요원으로 파견되어 주한 미국 대사관 건설에 노력하였다. 부인은 최정임이다.[6]

저서[편집]

  • 《한미 외교 요람기》 (중앙일보사, 1984)
  • 《이승만과 한미 외교》 (중앙일보사, 1996)
  • 《세계 속의 분단 한국》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7)
  • 《한국 통일의 문제》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0)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延專卒業式 各科合百四名”. 동아일보. 1938년 3월 15일. 연희전문학교 제二十회 졸업식을 작十四일 오후 二시반 동교에서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각과 졸업생 총계 百四명이오 장학상받은 학생은 다음과 같다. 文科 … 韓豹頊... ) 
  2. 이용원, 《제2공화국과 장면》, 범우사 (1999) 81쪽에서 인용한 한표욱의 회고록 참조.
  3. “韓國代表韓豹頊氏 民國樹立에 貢獻”. 경향신문. 1949년 12월 1일. UN食糧農業機構 韓國代表韓豹頊氏는 全體會議에서 韓國이 同機構에 加入하게 되는데 對하여 다음과 같이 謝意를 表하였다. 韓國은 本機構에 加入된 것을 名譽로 生覺한다 大韓民國創設에 있어 UN처럼 偉大한 役割을 한 것은 없었다 貴下들이 韓國에 賦與한 名譽는 韓國國民들이 國家建設을 爲하여 目標에 邁進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韓國은 本機構의 成功을 爲하여 熱心히 事業에 協力하겠음을 誓約한다 韓國은 本機構理事 「드리스ㆍ롯르」 將軍의 韓國援助에 感謝하는 바이다 ) 
  4. “歷代유엔總會韓國代表團”. 경향신문. 1962년 8월 8일.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5. “話題와 人物”. 경향신문. 1956년 4월 26일. 梁大使의 不在中 駐美大使代理의 役割을 맡게 된 韓豹욱氏의 이름은 國內에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氏는 第二次大戰直前 延專을 卒業하고 渡美한 後 十八年동안을 美洲에 滯留하고 있는 것이다. 氏는 戰前까지 「하버-드」大學大學院에서 主로 外交學을 專攻하였으며 解放後는 大韓民國臨時政府 美外交委員으로 出發하여 民國樹立後엔 一等書記官으로 任命되었고 其後 參事官을 거쳐 公使職에 이른 것이다. 人材의 貧困을 느끼는 우리나라 外交界에서는 첫째 氏가 多年間 外交學을 專攻하였다는 點 둘째 建國以來 가장 오랜 經歷을 가지고 있다는 點 세째 가장 많이 國際會議에서 參席하였다는 點 等으로 높이 評價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氏는 「칼날」같은 性格의 所有者로서 事務에 치밀하며 果斷機敏하여 過般 「韓國에는 言論의 自由가 없다」고 妄言한 IPI 議長 「모-즈」氏의 發言을 卽刻 反駁하는 聲明을 發表한 事實로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咸南北靑出身 美세라큐즈 大學卒業 當 四十三歲 ) 
  6. 전숙희 (1956년 7월 27일). “내가 본 美國⑦”. 경향신문. 비행기 사다리를 내려오자 出口쪽에서 긴치마자락을 날리며 손을 흐드는 이가 있었다. 그쪽을 향해 뛰어가보니 한표욱 공사와 그 부인 최정임 학형이었다. ) 

외부 링크[편집]

전임
장면
임시 주미한국 대사
1951년 2월 ~ 1951년 4월
후임
양유찬
전임
장성환
제4대 주(駐)타이 대한민국 대사
1968년 4월 ~ 1971년 3월
후임
임윤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