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빈 쿨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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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 쿨리지
John Calvin Coolidge, Jr.
캘빈 쿨리지
캘빈 쿨리지
미국 미국제34·35대 대통령
(30번째 대통령)
임기 1923년 8월 2일 (승계) ~ 1929년 3월 3일
부통령 찰스 G. 도스
전임: 워런 G. 하딩(제33대)
후임: 허버트 후버(제36대)

미국 미국의 제34대 부통령
임기 1921년 3월 4일 ~ 1923년 8월 2일
대통령 워런 G. 하딩
전임: 토머스 R. 마셜(제33대)
후임: 찰스 G. 도스(제35대)

매사추세츠 주 매사추세츠 주의 제48대 주지사
임기 1919년 1월 2일 ~ 1921년 1월 6일
부주지사 채닝 H. 콕스
전임: 사무엘 W. 맥콜(제47대)
후임: 채닝 H. 콕스(제49대)

출생일 1872년 7월 4일
출생지 미국 미국 버몬트 주 플리머스
사망일 1933년 1월 5일 (60세)
사망지 미국 미국 매사추세츠 주 노샘프턴
정당 공화당
학력 애머스트 대학교
종교 조합교회
배우자 그레이스 굿후 쿨리지
자녀 존 쿨리지
캘빈 쿨리지 3세
서명 C Coolidge signature.svg

존 캘빈 쿨리지 2세(John Calvin Coolidge, Jr., 1872년 7월 4일 ~ 1933년 1월 5일)는 미국의 제29대 부통령과 30번째 대통령(1923년 - 1929년)이다. 버몬트 주 플리머스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머스트 대학을 졸업한 후 변호사가 되었다. 그 후 매사추세츠 주 상원 의원과 주지사 등을 거쳐 워런 G. 하딩 대통령 때 공화당 부통령을 지냈다. 1923년, 하딩 대통령이 죽자 34대 대통령직을 승계하였으며 이듬해에 다시 재선되어 35대 대통령으로 재직하였다. 그의 시대에는 미국이 번영한 때였으며, 저서로 〈자서전〉이 있다.

미국 대통령 중 최초이자 유일하게 미국 독립기념일(7월 4일)에 태어난 대통령이기도 하다.

생애[편집]

취임 전[편집]

새뮤얼 곰퍼스 당시 미국노동총연맹 위원장의 1911년도 모습

그는 1872년 7월 4일 버몬트 주 플리머스의 잡화상 주인 아들로 태어났다.

애머스트대학을 졸업하고 공화당에 입당하여 매사추세츠 주 노샘프턴 시 시장과 주지사를 맡았다.

그가 주지자를 지내던 1920년대 초반은 노동운동이 격렬하여 파업이 줄을 잇고 자본가와 노장자의 갈등은 물론 정부와 노동조합의 대립 또한 심각한 상태였다.

매사추세츠에서 미국노동총연맹(AFL)의 파업이 시작되자, 쿨리지 지사는 즉시 주방위군을 동원하여 파업노동자를 강제 해산시켰고, AFL의 새뮤얼 곰퍼스 위원장을 향해 엄숙하게 선언하였다.

Your assertion that the Commissioner was wrong cannot justify the wrong of leaving the city unguarded. That furnished the opportunity; the criminal element furnished the action. There is no right to strike against the public safety by anyone, anywhere, any time! ... I am equally determined to defend the sovereignty of Massachusetts and to maintain the authority and jurisdiction over her public officers where it has been placed by the Constitution and laws of her people.

이 선언문 중 There is no right to strike against the public safety by anyone, anywhere, any time!(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파업을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어느 곳에도, 어느 때에도 있을 수 없습니다!)라는 한마디는 그를 하룻밤 새 전국적인 영웅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시민들이 계속되는 파업에 싫증을 느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1920년 선거에서 그는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선거에서 하딩의 러닝메이트로 승리를 거두었다.

1923년에 하딩이 재임 900여 일 만에 임기 중에 서거하여 대통령이 되었는데, 이때 그는 고향의 아버지 집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잡화가게 계산대에서 취임선서를 하였다.

대통령 재임기간[편집]

1920년 선거 때의 하딩 부부와 쿨리지 부부

그가 취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부패관리 축출로, 먼저 전 대통령 워런 G. 하딩의 포커친구로 내무부 장관까지 오른 앨버트 B. 폴과 하딩의 후원자로 정치 중개인에서 법무부 장관 까지 오른 해리 M. 도허티를 해임했다.

도허티는 단순 해임으로 끝났지만, 폴은 석유업자와의 부정 거래죄로 고발되어 직권남용으로 구속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국민의 공직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켰다는 점을 그의 최고 업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평가를 업고 1924년 선거에서 무난히 당선되었지만, 경제에 무지했다는 약점이 드러나 쿨리지는 결국 다음 선거에 불출마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퇴임하였다.

퇴임 후[편집]

그는 대공황이 일어나기 전에 대통령 자리를 퇴임하였고, 퇴임한 후 자서전 집필을 끝냈다.

쿨리지는 1933년 1월 5일, 아내가 시장에 간 사이에 심장마비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61세.

참고 문헌[편집]

  • 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 제12권 미국 3 대통령편

바깥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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