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바쿠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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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바쿠닌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акунин

출생 1814년 5월 30일
러시아 러시아 프레무히네
사망 1876년 6월 13일
독일 독일 베를린
직업 철학자, 혁명가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акунин, 1814년 5월 30일 ~ 1876년 6월 13일)은 러시아 출신의 아나키스트 혁명가이자 철학자로, "아나키즘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한다. 그의 주요 이론은 아나코-집산주의였다.

생애[편집]

미하일 바쿠닌은 프레무히네의 1,200여명의 농노를 가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포병 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활동하였으나 1835년 제대했다. 그는 독일 철학에 심취하여 철학 모임에서 활동하였다. 1840년 바쿠닌은 베를린에서 대학 강의를 들었다. 그는 1844년브뤼셀을 거쳐 파리에 도착하여 독일인 망명자들을 만났다. 그는 카를 마르크스와 친교 관계를 맺었으며 이때까지는 매우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많은 지식인들과 교류하였으며 특히 프루동과 친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스승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는 1847년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

1849년 드레스덴의 폭동에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참가하였으나 체포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요새감옥에 수감된다. 그는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일본과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탈출해 1861년 런던에 도착한다. 그는 마르크스를 만나 인터내셔널에 참가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바쿠닌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그는 세르게이 네차예프와도 깊은 관계를 맺었는데, 네차예프는 자신을 바쿠닌의 후계자로 자처했다. 바쿠닌이 《자본론》을 러시아어로 번역할때 네차예프가 그 "하찮은 일"을 관두라고 권했다. 그러나 바쿠닌이 출판업자로부터 선금을 받아 불가능하다고 하여 네차예프는 출판업자에게 죽이겠다고 협박을 한다. 바쿠닌이 이 일을 알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마르크스는 1872년에 네차예프의 편지를 구실로 바쿠닌을 인터내셔널에서 축출했다. 바쿠닌은 1875년 투쟁을 그만하겠다고 쥐라연맹에 통보하고 이탈리아로 떠났으나 그곳의 카를로 카피에로와 사이가 나빠져 자신의 친구인 포크트가 있는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바쿠닌은 그곳에서 사망했다.

사상[편집]

바쿠닌은 프루동과 함께 대표적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마르크스의 이론들에 긍정했지만 국가 권력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부정했다. 그는 마르크스의 이론대로면 반드시 독재자가 나오기 마련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예언은 소련이라는 이름으로 실현되었다. 바쿠닌은 마르크스엥겔스보다도 극단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개인에게 자유가 필요하다"고 말하였으나, 생산에 있어서는 단체가 함께 참가하고 그 재산을 공동 소유해야 한다고 하였다. <신과 국가>에서 무신론·권력 부정을 주장하여, 러시아의 니힐리즘에 영향을 주었다. 저서로 <노동 동맹과 사회 혁명> 등이 있다.[1]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