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사회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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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독일 사회민주당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SPD-Cube.svg
약칭 SPD
당수 지크마르 가브리엘
창당 1863년 5월 23일
전 독일 노동자동맹(ADAV)
1869년 8월 7일
독일 사회민주노동당(SDAP)
중앙 당사 독일 독일 Willy-Brandt-Haus
D-10911 베를린
이념/정치노선 사회민주주의
제3의 길
진보주의
정치적 스펙트럼 중도 ~ 중도좌파
국제조직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유럽정당 유럽 사회당
유럽의회
교섭단체
사회민주진보동맹
상징색 빨강
하원 의석
192 / 630
유럽 의회
23 / 99
지방 의회
558 / 1,859
웹사이트
spd.de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어: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약칭 SPD, 에스페데)또는 독일 사민당독일사회민주주의 정당이다. 정치 성향은 중도좌파이며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독일 언론 등에서 빨간색은 사회민주당을 상징한다.

독일의 현존하는 정당 중 가장 오래 되었으며, 프랑스 사회당, 영국 노동당, 이탈리아 올리브나무동맹, 스페인 사회민주노동당 등과 함께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주도적 존재이다.

중도우파독일 기독교 민주연합 (CDU, 체데우. 한국에서는 기독교 민주당이나 약칭인 기민당이라고 부르며, 독일에서는 Die Union이라 부름)과 함께 독일의 2대 정당 중 하나이다. 2005년까지 독일 녹색당과 연합(적녹연합정권)하여 정부를 구성, 국정을 담당하였다. 제7대 연방총리(1998~2005)였던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당시 하원의장 볼프강 티에르제, 현 연방수도 베를린의 시장 클라우스 보베라이트(2001~)등이 소속되어 있다.

독일 연방하원 2005년 선거에서 222석(34.3%)을 확보, 기민당이 주도하는 대연정의 파트너로 계속 내각에 참여했으나, 2009년 총선에서 146석(23%)을 얻는 데 그쳐 지지율은 크게 낮아지고 의석수를 많이 잃으면서 기민당이 주도하는 연정에서 배제되었다.

당의 구성[편집]

독일 사회민주당은 미국 민주당과는 달리, 매달 일정금액의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철저한 기초당원중심)들이 운영하는 정통 유럽식 정당 운영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대한민국 민주노동당에 운영방식의 모델로서의 영향을 주었다. 참고로 통합진보당, 진보신당독일 사민당처럼 매달 일정금액의 당비를 자동이체로 납부하는 당원들에 의해 운영되는데, 진보신당을 비롯한 통합진보당, 녹색당 당원들은 매달 당비를 내는 의무가 주어지는 대신, 지역공동체에서 일할 공직후보자와 지역당원협의회 간부를 선출할 수 있는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현재 약 60만명의 진성당원들은 각 지역마다 의결권을 가지고 지역의 일꾼들을 지역전당대회에서 직접 선출하며, 여기서 선출된 대의원들은 연방(전국)전당대회에서 기초당원들의 의견을 전달하고 당의장선출 및 당의 강령과 핵심정책 등의 결정에 찬반의사를 표시한다.

또한, 독일 사민당의 주요 정치인들은 전통적으로 산업별 노동조합의 지도자도 겸하는데, 주요 지지층인 중산층 및 서민 노동자들과의 긴밀한 연대를 위한 조치이다. 일례로 23년동안 최장수 당의장을 역임한 빌리 브란트 제4대 독일연방공화국 총리의 경우, 제지언론노조 위원장을 겸직하였다.

당의장 지크마르 가브리엘(2009~)과 아울러,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상임중앙위원들이 현재 당을 이끌고 있다.

당의 정책[편집]

경제 : 사회민주적 시장경제

사회민주당의 역사[편집]

공화국 이전 (1863-1918)[편집]

독일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편집]

사회민주당은 1863년 5월 23일 페르디난드 라살레라이프치히에서 만든 전독일노동자협회아우구스트 베벨빌헬름 리프크네히트의 주도로 1869년 8월 아이젠나흐에서 만들어진 독일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두 조직은 "독일 문제"에 대한 의견차이로 갈라졌었다. 라살레주의자들은 소독일주의를 아이젠아흐 쪽은 대독일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독일제국이 성립되면서 그 차이는 의미가 없어지게 되고 1875년 5월 고타에서 합동 대회를 열어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으로 통합하게 된다.

당명의 개정[편집]

독일 제2제국 시기 독일 사민당은 독일제국의 내외 정책에 대해 아주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다. 1878년 비스마르크의 제국의회에서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제정되면서 12년간 어려움을 겪었으나, 독일에서 사회주의 정당의 집회를 가지지 못하게 하면 다른 나라에서 갖는 등 지혜를 발휘하여 극복하였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폐지되는 1890년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어: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으로 당명을 개정하였으며 마르크스주의를 공식적으로 지향하였다.[1]

이념의 변화[편집]

초기 사민당은 노동조합과 가까웠으며 19세기 유럽의 사회주의 또는 사회 민주주의당과 비슷하게 이념적으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했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 영국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은 베른슈타인에 의해 수정주의이론이 제기된다.[2] 민주적 선거를 통해 정권을 획득하여 사회주의로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이 주요 내용인 수정주의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야 받아 들여지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당은 정식으로 채택하기 이전부터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곳곳에 받아들이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전시 공채 발행 문제로 독일 사회민주당은 심각한 내분을 겪게 된다. 대부분의 당원 및 의원들이 전시 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졌고, 소수 세력들이 이에 반발했던 것이다. 결국 이 두 세력 간의 갈등의 골은 깊어져 한동안 두 개의 당으로 분열되기도 했다. 찬성표를 던진 다수파 세력들은 다수파사회민주당이라 불렸으며, 소수파는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이라는 당을 창설했다. 후자는 로자 룩셈부르크카를 리프크네히트 등이 주요 지도자였다. 그러나 독립사회민주당은 그들보다 더 급진적 좌파인 독일공산당(KPD)과 다수파 사회민주당 사이에서 모호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결국 다수파 사회민주당과 다시 통합하게 된다.

바이마르 공화국 (1918-1933)[편집]

11월 혁명의 결과로 사민당의 전통적인 요구사항들인 여성의 선거권, 비례대표제, 사회·정치의 개혁, 1일 8시간 노동제 그리고 민주공화제가 수용되었다. 사민당은 바이마르 공화국 출범과 더불어 공화제를 지지하는 다른 정당과 같이 정권을 유지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의 운영 방식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지도층은 점점 비대화-관료화된 당 조직의 파괴를 우려하고 신선한 추진력을 가져올 대담한 행동을 주저하여 사민당의 행동에는 조직의 현상 유지를 자기 목적으로 한 소극성과 정치적 근시안이 지배하였다. 이것은 선전 기술의 경직화 속에도 나타나 자기의 전통적 기반을 유지할 뿐으로 청년 노동자, 실업자, 중간층 등의 표가 나치스공산당에게로 대량 흡수되어 가는 것을 방지하지 못하였다.[3] 다만 오랜 전통을 가진 강력한 당 조직과 노동조합과의 친밀한 관계로 인해서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에 반체제 정당의 출현에 직면하여서도 그 기반까지 침식되지는 않았다.

나치 독재정권 시절 (1933-1945)[편집]

1933년 3월 23일 제국의회에서 사민당은 나치에 의해 구속 및 탄압을 받는 중에서도 히틀러수권법에 반대하였고 당수 오토 벨스는 의회 내 공포분위기 속에서도 유일하게 반대 연설을 하였다. 하지만 6월 22일에 사민당은 모든 활동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어 조직을 분쇄당하고 당원들은 추적·감금을 당했다. 이에 저항하는 지도부들은 5월부터 해외에서 반나치운동을 전개하고, 독일 내에서의 지하항거운동을 돕기 위하여 망명길을 떠났다. 이들 망명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중요거점을 초창기에는 프라하에, 1938년부터는 파리에, 그리고 2차대전중에는 런던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였다.[4] 히틀러의 강도 높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민당의 지도자들은 국내외에서 히틀러 폭정의 종식과 민주주의 독일의 재건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투쟁하였다.

바트 고데스베르크강령 전후 국민정당으로의 도약 (1945~1969)[편집]

2차 대전 직후,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국회의원이었던 쿠르트 슈마허는 하노버에 본부를 둔 사민당을 재창당하였다. 한편오토 그로테볼은 베를린에서 사민당 중앙위원회를 재건하고, 공산당과의 합당을 주장하였다. 반공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던 슈마허는 이에 반발하여 당 대회를 개최, 중앙위원회의 활동 범위를 소련 점령지역에 한정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결국 동독지역내의 사민당은 공산당과 합당하여 독일 통일사회당을 창당하고 그에 반대한 당원들을 숙청하게 된다. 한편 슈마허가 중심이 된 사민당은 서독 전 지역에서 큰 지지를 얻었으나, 49년 총선에서 29%의 득표율로 야당이 된다. 이후 독일의 초대 총리인 콘라드 아데나워의 지도하에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성장과 국제무대에서의 외교적 성공을 이끌어낸 기민당에 비해, 마르크스 사상이 잔류해 있던 사민당은 성공적인 경제 성장 속에서 국민들의 반감을 얻게 되고 오랜기간 야당의 위치에서 벗어나는데 실패하였다. 이처럼 계속되는 총선에서의 패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민당은 50년대 후반 이후 노동계급의 정당에서 좌파적 국민정당으로의 변모를 꾀하였다.[5] 1959년 바드 고데스베르크에서 열린 비상전당대회에서는 마르크스 사상을 내포하였던 하이델베르크 강령을 폐기하고 '법치국가', '사회적 시장경제', '인간의 자유로운'발전을 주 내용으로 하는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천명한다. 이후 사민당은 기존 아데나워의 시장경제체제, 서구에의 편입정책을 찬성하는 쪽으로 노선을 변경하였다. 63년 당수로 선출된 빌리 브란트는 진보적인 정책들을 펼쳐나가며 당의 지지율을 끌어올렸고, 이를 바탕으로 66년 총선에서 사민당은 오랜 야당생활에서 벗어나 기민/기사당과 대연정을 구성, 9개의 장관직을 맡으며 정권에 참여하였다. 대연정 시기에는 사민당이 주도한 경제정책등이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바탕으로 69년 총선에서 42.7%의 득표율을 획득한 사민당은 독일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통해 정권을 구성하게 되었다.

브란트-슈미트 정부 : 중흥기 (1969~1982)[편집]

1969년부터 1982년까지의 13년의 집권 기간 동안 사민당은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극좌파 무장단체인 적군파에 의한 70년의 위기상황 극복, 사회보장제도 확장, 장기간에 걸친 국제경제의 침체 속에서의 경제안정 유지, 2차 대전 이후 악화된 동구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동방정책, 72년 동독과 체결한 동서독 기본조약 등 수많은 성공들을 이루어 내었다. 74년에는 귄터 기욤의 스파이 사건으로 브란트 총리가 사임하고, 주요 장관직을 역임한 헬무트 슈미트가 총리직을 이어받게 된다. 오랜기간 유지된 정권은 70년대 말부터 지지율이 하락하기 시작하였고, 80년 연방의회선거이후에는 당내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82년, 사민당과 경제 정책 부분등에서 갈등을 겪고 있던 자유민주당이 그들의 연정파트너를 기민/기사당으로 바꾸면서 13년간의 사민당 집권시기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독일 통일전후의 암흑기 (1982~1998)[편집]

빌리 브란트가 당수직을 유지하였으나, 실권은 경제부와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헬무트 슈미트가 수상직을 맡으면서 가지게 된다. 그러나 사민당은 그 후 16년간 야당에 머무르고, 연방 수상에 도전하나 계속 실패한다. 1998년 마침네 연방의회 선거에서 니더작센의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연방 수상 후보가 되고, 이 선거에서 사민당은 40.9%의 득표를 하며 녹색당과의 연정에 성공한다.[6]

슈뢰더정부와 제3의 길, 그리고 현재 : 도약기 (1998~)[편집]

슈뢰더 총리의 독일 사민당 개혁 우파는 신중도 노선을 표명하는데, 이는 영국 노동당이 추구하는 제 3의 길과 매우 유사하다. 이는 신자유주의케인즈주의를 모두 거부하는, 중도 급진개혁을 추진해서 심각한 사회 경제를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존 연정을 계속 실패했던 사민당이 기존 전통주의자들이 추구한 케인즈적 총괄조정을 포기하겠다는 건데, 이는 전통주의자들의 반발을 사서 내부적인 갈등을 초래했다. 총리인 슈뢰더는 과거 라퐁텐을 중심으로 한 전통주의자들과 대응해서, 좌우 이데올로기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당의 현대성을 강조했다.[7] 슈뢰더는 2005년까지 집권하고 이 기간에 사민당은 녹색당과 연정을 했다. 슈뢰더는 이 기간 아젠더 2010 이라는 다소 논란이 있는 노동시장 개혁을 시도했다. 2005년에 있었던 조기선거에서 흑적 연립정부를 통해 부수상을 배출했다. 2009년에는 23%의 득표를 얻으며 야당 및 연정에 실패했으나, 최근 메르켈과의 연정을 위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2013년 11월 기준)[8]

주요인물[편집]

제1차 세계대전 전의 주요 지도자[편집]

역대 당수[편집]

사회민주당 출신 역대 독일 총리[편집]

바이마르 공화국[편집]

독일 연방 공화국[편집]

역대 독일 대통령(사회민주당 출신)[편집]

바이마르 공화국[편집]

독일 연방 공화국[편집]

역대 독일연방공화국 부총리(사회민주당 출신)[편집]

역대 선거 결과[편집]

사민당 연방하원 선거 결과
(1949-2013)
40%
30%
20%
10%
0%
49
53
57
61
65
69
72
76
80
83
87
90
94
98
02
05
09
13


선거 당선자 득표율 당 대표
1949년 총선
131 / 402
29.2% 쿠르트 슈마허
1953년 총선
162 / 509
28.8% 에리히 올렌하우어
1957년 총선
181 / 519
31.8%
1961년 총선
203 / 521
36.2% 빌리 브란트
1965년 총선
217 / 518
39.3%
1969년 총선
237 / 518
42.7%
1972년 총선
242 / 518
45.8%
1976년 총선
224 / 518
42.6% 헬무트 슈미트
1980년 총선
228 / 519
42.9%
1983년 총선
202 / 520
38.2% 한스 요헨 포겔
1987년 총선
193 / 519
37.0% 요하네스 라우
1990년 총선
239 / 662
33.5% 오스카어 라퐁텐
1994년 총선
252 / 672
36.4% 루돌프 샤르핑
1998년 총선
298 / 669
40.9% 게르하르트 슈뢰더
2002년 총선
251 / 603
38.5%
2005년 총선
222 / 614
34.2%
2009년 총선
146 / 620
23.0%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2013년 총선
192 / 630
25.7% 페어 슈타인브뤽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역사신문》/사계절
  2. 《사회주의란 무엇인가》/베른슈타인 지음/책세상의 저자소개
  3. <바이마르 공화국 연구>, 신일범, 단국대학교출판부, 1999
  4. <히틀러국가: 나치 정치혁명의 이념과 현실>, 마르틴 브로샤트, 김학이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
  5. <독일사회민주당의 역사적 발전과정에 관한 연구>, 유지훈, 충북대학교 사회대 사회과학연구소, 2001
  6. <독일사회민주당의 역사적 발전과정에 관한 연구> (유지훈) p216~p218, 2001
  7. <유럽 좌파정권 어디로 - 독일편>, 정병기, 노동일보 1999년 8월 12일
  8. <사민당 연정협상 공식화..獨 좌우 대연정 가시화>, 아시아경제, 2013년 10월 21일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