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슈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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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의 카를 슈미트

카를 슈미트(Carl Schmitt, 1888년 6월 11일 ~ 1985년 4월 7일)는 독일의 법학자이자 정치학자이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플레텐베르크에서 소상공인의 아들로 태어나, 베를린 대학교, 뮌헨 대학교,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1933년에 베를린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같은 해에 나치 당에 입당한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나치 당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의 주권에 대한 저작은 상당히 날카로운 관점을 가지고 있어, 발터 벤야민, 자크 데리다, 지오르지오 아감벤 등과 관련된 논의에서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논쟁적인 저서가 되어 있다.

나치에 대한 협력[편집]

카를 슈미트는 1933년 5월 1일 나치 당에 입당한다. 헤르만 괴링은 곧 그를 프로이센 추밀원의 고문관으로 임명했고, 11월엔 독일사회민주당 법학자 연맹의 장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나치의 이념적 기반으로 생각했고, 국가의 ‘총통’(Führer)의 정당화가 특히 독재자(auctoritas)의 개념을 통한 법철학에 대한 고려를 통해 이뤄질 수 있다고 보았다.

1934년 6월에 슈미트는 독일 법학자 신문의 편집장이 되었고, 같은 달에 그는 ‘장검의 밤’에 일어났던 정치적 살인을 “가장 고결한 행정적 정의의 형태”(höchste Form administrativer Justiz)라고 정당화했다.

슈미트는 스스로를 급진 반셈족주의자로 생각했으며 베를린에서 1936년 10월에 있던 법학자들의 집회에서 그 장으로 활동했다. 이 집회에서 그는 "독일 법이 유대 정신(jüdischem Geist)의 오염에서부터 깨끗해져야 한다"고 말했으며, 그 집회 이후 "유대인 학자가 발표하는 모든 논문에는 유대인임을 상징하는 작은 심볼이 부착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두달 뒤인 12월에 SS가 발표한 〈암약하는 반체제 조직〉(Das schwarze Korps)에서 그는 기회주의적 존재이자 가톨릭에 기반한 헤겔주의적 국가사상가이며 그의 반셈족주의는 단순한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점이 그가 초기에 발표한 나치의 급진 이론을 비판한 발언들의 인용을 통해 비판 받았다. 그 뒤, 슈미트는 그의 주요한 공직들을 잃었으며, 나치의 주도적 법학자의 지위에서부터 은퇴했다. 다만 베를린 대학의 교수직은 유지할 수 있었다.

1945년 슈미트는 미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1년여간의 수용소 생활 끝에 그의 고향인 플레텐베르크1946년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이후에 그는 플레텐베르크-파젤의 그의 부인(?, housekeeper)인 안니 슈탄트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학계나 정계의 주류로터 고립되어 있었음에도 그는 특히 국제법에 대한 연구를 1950년대부터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노쇠할 때까지 그의 친구 및 젊은 지식인들의 끊임없는 방문을 받았는데, 방문객 가운데에는 에른스트 융어. 야콥 타우베스, 알렉상드르 코제브 등의 인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슈미트는 1985년 4월 7일에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플레텐베르크에 매장되었다.

슈미트가 나치 치하에서 했던 행위들에 대한 최근의 몇몇 변명에도(그가 살아있는 동안 어떠한 변명도 스스로가 하지는 않았다), 나치 치하의 그는 초기 하이데거와 함께 기억되어야만 할 것이다. 슈미트는 그의 나치 체제에서 유력한 지위를 누렸으며, 나치의 권력 강탈에 대해 사법적 외관(façade)을 제공해 준 인물이기도 하다. 슈미트의 매우 통찰력있는 정치적 마인드는 나치의 진정한 본성과 그들의 리더쉽에 관해 실수를 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슈미트는 명백하게 심지어 독재적 권력까지 가진 강력한 권력을 선호했으나, 그러한 권력의 형태가 히틀러 총통의 체제를 지향하는 것인지 아니면 권위주의적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체제를 지향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질문이 열려 있다. 만일 우리가 관대한 쪽으로 기울어질 경우, 그가 히틀러를 비스마르크로 착각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대한 의견은 슈미트의 <<독재론>>을 읽어 보았을 때 의심받게 된다. 그는 계엄적 독재의 장을 위한 비난을 주권적 독재에 반대하기 위해 행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슈미트의 논의 가운데 꽤나 역설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인데, 그는 나치가 승리하는 시기까지만 해도 그가 궁극적으로 그와 같은 사람의 역할이 줄어드는 체제를 지원할 것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나치당 안에서 그의 지위는 그를 나치 독일 내의 법철학의 최고 권위로 만들기 위해 슈미트 스스로가 사용했던 것은 사실이다.

영향[편집]

지오르지오 아감벤상탈 무페를 비롯한 많은 저자들에 따르면 칼 슈미트는 오늘날 우파에게 필수적인 참고 대상인 만큼 좌파에게도 그런 인물이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의 논의는 슈미트의 위치에 대한 해석에서뿐만 아니라 그가 현재 정치학의 문제에 매우 적절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외 상태의 문제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최근 연설 속에서는 리처드 닉슨이 외친 주장이 메아리치고 있는데, 이 속에는 전쟁상태 에서의 사법적인 예외적 관리 권력에 대한 주장이 담겨 있다. 이와 같은 권력은 영장 없는 전자적 감시 금지법의 범주를 제한할 수 있다거나 그와 같은 감시의 모든 불법성이 다만 겉으로 보이는 것에 불과해 사실을 합법적일 수 있다는 논의를 이끌어 내고 있다. 이는 외국 지식인 감시 법안{the Foreign Intelligence Surveillance Act}과 같은 법의 내용에 대한 위반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법에서의 전쟁상태 하의 최고통수권자로서의 대통령의 헌법적 권위와 대통령이 어쨌든 의회에 의해 군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된 절대적 권위를 받았다는 점에 의해 뒷받침된다. 좀 더 슈미트주의자다운 말로 하자면, 주권이 존재하는 장소는 사법적 질서의 안과 바깥 모두이며 주권은 그의 권력을 어떠한 법률로도 제한할 수 있다고 간주될 수 없는 권력이다. 단일 권력자 이론에 기초한 비슷한 논증이 최근 하원과 상원에서 통과된 고문 금지법에 붙은 공식적 성명(부시 그가 지지한, 물론 국가 안보의 이름 하에 요구되었다면 무시했을 이 법률안)에서 또 만들어지기도 했다. 아감벤과 무페의 독자들은 슈미트의 작업에 담긴 정신과 그 내용에서부터 끌어내어져 나온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논쟁에 들어가게 된다.

슈미트의 영향력은 또한 최근의 정치 신학(정치적 개념인 세속화된 신학적 개념에 영향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슈미트의 논증)에 대한 관심의 결과로도 보인다. 좋은 예로 유대계 독일 철학자인 야콥 타우베스는 슈미트에 대한 성 폴의 연구에 광범위하게 참여했다(The Political Theology of Paul {Stanford Univ. Press, 2004}를 참조하라). 그러나 타우베스의 정치신학 이해는 슈미트의 것과는 크게 달랐고, 정치적 요구를 종교에서 끌어내는 것보다는 신학적 요구가 가지는 정치적 관점을 오히려 강조했다.

비슷하게, 영향력있는 정치철학자인 레오 스트라우스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대한 비평(이 비평은 한국어판에도 포함되어 있다)에 참여했고 그의 제자들에게 슈미트의 법적, 정치적 시각과는 다른 그의 시각을 전했다.

동시대 학자[편집]

2010년 현재 한국의 헌법학에서는 켈젠(1881년생), 스멘트(1882년생), 슈미트(1888년생)를 자주 언급하는데, 이 셋은 모두 히틀러 시대의 동년배 학자들이다. 법실증주의의 켈젠은 스위스로 망명을 가서 나중에 미국인이 되었으며, 통합주의의 스멘트는 히틀러로 부터 소외되었고, 결단주의의 슈미트는 히틀러의 헌법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2010년 현재 한국 독일의 이론과 판례는 모두 스멘트의 통합주의가 통설이다. 스멘트의 한국인 제자로 허영 (헌법학자) 교수가 있어서 권영성 교수와 최근까지 쌍벽을 이루었다.

한국어로 번역된 저작[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