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잇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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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잇키(일본어: 北 一輝, 1883년 4월 3일 ~ 1937년 8월 19일) 는 일본의 사상가, 사회운동가, 국가사회주의자로서 1936년 2월 26일 2.26 사건에 관여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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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이력 [편집]
국가사회주의 [편집]
니가타 현 사도 섬 출생으로, 본명은
일본 사상계 또 다른 조류는 국가주의 운동이었는데 이들은 독일에 영향받아 권위주의 성격을 띠고 비스마르크 주의 경향이 있었다. 기타 잇키가 청년기에 접한 사회주의 운동은 국가주의 성격을 띤 사회주의 분파나 우익 낭만주의 성격을 띤 반자본주의였다.
이것은 할 드레퍼가 제창하였고 "하향 사회주의"라고 일컬어졌으며, 상향 혁명 즉, 민중의 자각과 단결을 이용한 사회혁명[1]을 중시하는 마르크스주의와 무관했다. 즉 기타 잇키에게 영향을 준 하향 사회주의 즉, 국가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 반대하지만 마르크스주의와 무관했다.
초국가주의 [편집]
또한, 기타 잇키는 1901년 설립된 극우단체인 흑룡회와 같은 동향 이론가인 우치다 료헤이의 초국가주의에 영향받았고 이것은 초국가주의를 표방한다.
기타 잇키는 오카와 슈메이가 조직한 초국가주의 단체인 유존샤에 가입하고 저술과 정치운동에 전념하였다. 기타 잇키는 점차 이 조직의 지도 이론가가 되었고 우익 사상가로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손문의 영향과 신해혁명 참여 [편집]
또한, 기타 잇키는 대아시아주의자였으므로 손문의 사상에도 영향받아 손문의 중국동맹회에 가입했고 중국의 혁명가 쑹자오런과도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 1911년 중국에 가서 청를 타도하려는 우창 봉기와 신해혁명에도 가담하였다.
기타 잇키는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중국풍인 잇키(一輝)로 개명하고 1919년에는 일본에 돌아왔으나 그
일본식 국가사회주의 [편집]
기타 잇키는 저서인 《
초국가주의 [편집]
그
이것은 1923년에 재출판되었는데 그
또한, 그
체포와 처형 [편집]
기타 잇키의 《일본개조법안대강》 은 일본제국 육군의 황도파 청년 장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1936년 2월, 이들은 기타 잇키의 이념을 좇는 체제를 수립하려는 정변을 목표로 2.26사건을 일으켰으나 천황이 이를 승인하지 않고 진압을 명령하여 실패한 이 사건을 꾸민 주동자들은 자결하거나 처형되었고 그
주석 [편집]
- ↑ <사회> 정치체제뿐만 아니라 생산관계와 사회제도 전반에 걸친 변혁을 목표하는 혁명으로서 대표할 만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한 특징이 있는 프랑스 부르주아 혁명과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