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시타 도모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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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시타 도모유키
1877년 5월 26일 - 1946년 11월 2일
Yamashita.jpg
태어난 곳 일본, 고치 현
죽은 곳 필리핀, 마닐라
별명 말라야의 호랑이
복무 일본 제국 육군 군기 일본제국 육군
복무 기간 1905년 ~ 1945년
최종 계급 帝國陸軍の階級―襟章―大将.svg 육군 대장
지휘 일본제국 육군 제4사단
일본제국 육군 제25사단
일본제국 육군 제1사단
일본 제국 제14방면군
주요 참전 중일 전쟁
제2차 세계대전

야마시타 도모유키 (일본어: 山下 奉文 (やました ともゆき), 1885년 11월 8일 ~ 1946년 2월 23일) 는 일본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육군 대장이었다. 별명은 "말라야의 호랑이"(マレーの虎)였다.

생애[편집]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일본 고치 현 출신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스위스독일로 유학을 떠났고, 귀국 후에는 육군성 군사 과장과 군사 조사 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일본의 우익 성격 군인들이 일으킨 2·26 사건에서는 황도파의 중심 인물로서 반란 부대에 대한 이해를 나타내었다. 2·26 사건 종료 후에 야마시타는 군에서 은퇴를 각오했으나, 가와시마 요시유키(川島義之) 당시 일본 육군대신의 배려로 군에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사건의 영향으로 일본 육군성은 한동안 일본 내에 그를 배치시키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편집]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육군 제25군 사령관으로 말레이 작전을 지휘하였다. 일본의 언론들은 그를 "말레이의 호랑이"라고 불렀다.

싱가포르가 야마시타의 통치 하에 놓였을 때, 중국인 게릴라들과 적군협력자들의 대량 처형[1]이 이루어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싱가포르에서는 반일 감정이 드높았다. 한편, 야마시타는 통치할 시기에 "바나나 노트"라고 불린 군표를 발행하고, 복권을 발매해 재산 축적에도 힘썼다. 이 때문에 그의 사후에 그가 싱가포르에 숨겨놓은 보물 찾기에 한동안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2]

말레이 작전의 성공으로 야마시타는 일본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천황이었던 쇼와 천황은 야마시타에게 자신을 방문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2·26 사건 당시에 천황을 앞세워 반란을 정당화시킨 야마시타의 행동이 원인이었다고 하며, 도조 히데키(東條 英機) 수상이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이 설로 통제파였던 도조 히데키황도파였던 야마시타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파악할 수 있다.

필리핀 방위전[편집]

항복 교섭중인 야마시타 도모유키와 싱가포르 주둔 영국군의 아서 중장
1945년 11월, 마닐라 군사 재판에서의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앙)

싱가포르 공략에 있어서 큰 공을 세운 야마시타였지만, 도조 히데키의 반감에 의해 만주로 좌천돼 큰 작전을 맡진 못했다. 그러나, 패색이 짙었던 1944년, 제14방면 일본 육군 사령관으로 기용돼 일본제국 육군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에 대한 방위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레이테 섬과 루손 섬에서의 연이은 패전으로 인해 1945년 9월, 필리핀바기오에서 항복하였다. [3]

군사 재판[편집]

항복할 당시에는 포로로 취급받았지만, 곧 전범으로 필리핀마닐라에서 군사 재판을 받았다. 야마시타는 마닐라 대학살 등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언도받았고, 사형 판결 후에 미국 육군의 법무 장교가 중심이 된 야마시타의 변호 인단은 판결에 불복해 필리핀 최고 재판소, 미연방 최고 재판소에 사형 집행을 금지하는 인신보호령을 청원하였다.

그러나, 미국 최고 재판소는 6 대 2의 투표로 소청을 기각하고 야마시타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처형은 그가 원하던 군복을 착용하는 것이 인정되지 않고, 죄수복을 입은 채 이루어졌다. 처형된 이후, 그는 다른 B, C급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빌라크루시스의 귀족 개인적 면담 비망록(68)
  2. 일본의 약탈금괴 "야마시타 골드"
  3. 《리콴유 자서전》 93쪽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