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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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
三島 由紀夫
Yukio Mishima.jpg
출생 1925년 1월 14일(1925-01-14)
일본 제국 일본 제국 도쿄 부 도쿄 시
사망 1970년 11월 25일 (45세)
필명 미시마 유키오
언어 일본어
국적 일본 일본
학력 도쿄 대학
주요 수상 1954년 신조사 문학상, 1955년 기시다 연극상
배우자 히라오카 요코

미시마 유키오(일본어: 三島 由紀夫 (みしま ゆきお), 1925년 1월 14일 ~ 1970년 11월 25일)는 일본소설가이자 극작가, 평론가, 정치 운동가로 우익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미시마 유키오는 필명이고, 본명은 히라오카 기미타케(일본어: 平岡 公威 (ひらおか きみたけ))이다.

태평양 전쟁 패전 뒤의 일본 문학계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대표작으로 『가면의 고백(원제: 仮面の告白)』, 『潮騒』、『금각사(金閣寺)』、『가가코의 집(鏡子の家)』、『우국(憂国)』、『풍요의 바다(豊饒の海)』4부작 등이 있고, 희곡으로 『녹호관(鹿鳴館)』, 『근대노가쿠집(近代能樂集)』, 『사드 후작부인(サド侯爵夫人)』 등이 있다. 인공성(人工性)과 구축성(構築性)을 갖춘 허무주의적이고 탐미주의적인 작풍과 함께 할복 자살로 유명하다.

만년에 정치적인 경향이 강해져 자위대(自衛隊)에 체험입대하는가 하면, 민병(民兵) 조직「다테노카이(楯の会)」를 결성하였는데, 1970년 11월 25일, 왕년의 우국열사 에토 고자부로(江藤小三郞)의 자결에 자극받아 다테노카이 대원 네 명과 함께 자위대 市ヶ谷 주둔지(지금의 일본 방위성防衛省 본성)를 찾아가 동부방면총감(東部方面総監)을 감금하고, 막료 여러 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사무실 앞에서 발코니 연설로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연설을 하고는 5분 뒤에 할복 자살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신우익(新右翼)이라 불리는 우익 세력이 생겨나는 등 일본 국내의 정치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자세한 것은 후술)

출자[편집]

할아버지 히라오카 사다타로

1925년(다이쇼 14년) 1월 14일, 미시마는 도쿄 시 요쓰야 구 나가스미마치 2번지(지금의 도쿄 도 신주쿠 요쓰야 4정목 22번)에서 농상공부 관료인 아버지 히라오카 아즈사(平岡梓)와 어머니 시즈에(倭文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기미타케」라는 이름은 그의 할아버지 사다타로(定太郎)가 붙여준 것으로 사다타로와 같은 고향인 토목공학자 후루이치 기미타케(古市公威)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형제로는 여동생 미쓰코(美津子, 1928년 - 1945년)와 남동생 지유키(千之, 1930년 - 1996년)가 있다.

아버지 아즈사는 영림서 사무관, 농림성 수산국장을 지낸 관료였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거쳐 고등문관시험에 1등으로 합격했음에도 면접관의 미움을 사서 대장성(大蔵省)에 들어가지 못하고 농상무성(農商務省)에서 근무하게 되었고(농상무성은 기미타케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 폐지되어서 곧 농림성으로 이동) 뒤에 내각 총리대신이 되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나, 일본 민법학의 태두로 불리는 와가쓰마 사카에(我妻栄)와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1924년(다이쇼 13년) 다치바나 시즈에(橋倭文重)와 결혼하였다. 다치바나 시즈에는 가가 번(加賀藩)의 번주(藩主)였던 마에다(前田) 집안을 섬기던 유학자 다치바나 집안 출신으로, 도쿄 가이세이 중학교 (開成中學校) 5대 교장이었던 한학자 다치바나 겐조(橋健三)였다.

미시마의 할아버지인 사다타로는 효고 현(兵庫県) 인나미 군(印南郡) 시바노무라(志方村, 지금의 효고 현 가코가와 시加古川市 시바 지방)의 농가에서 태어나 제국대학(帝国大学)의 법과대학(지금의 도쿄대학 법학부)을 졸업하고 내무성(内務省)에 들어가 내무 관료가 되었다. 1893년(메이지 26년) 무가(武家)의 딸이었던 나가이 나쓰(永井なつ)와 결혼하였으며, 후쿠시마 현지사(福島県知事) 가라후토 청(樺太庁)의 장관을 지내는 등 공직을 맡았으나 의옥 사건(疑獄事件)으로 실각한다(훗날 무죄로 판결). 할머니 나쓰코(夏子)는 호적에는 '나쓰(なつ)'로 기재되어 있는데, 대심원판사(大審院判事)를 지낸 아버지(즉 미시마의 외증조할아버지) 나가이 이와노죠(永井岩之丞)와 어머니 다카(高)[4]의 장녀로 태어나 12세부터 17세에 결혼할 때까지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 나루히토 친왕(熾仁親王)의 행의견습(行儀見習)으로서 친왕을 섬긴 적도 있었다. 작가 나가이 가후(永井荷風)로 유명한 나가이 집안과 기미타케의 할머니 나쓰코의 친가인 나가이 집안은 서로 동족으로 나쓰코의 9대 조인 나가이 히사마사(永井尚政)의 이복형 나가이 마사나오(永井正直)가 가후의 12대 조가 된다. 아버지 아즈사의 풍모는 가후와 흡사한 부분이 있어서, 기미타케는 아버지를 은근히 '가후 선생(荷風先生)'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외할머니 나쓰코는 어린 기미타케를 가리켜 '오토라(小虎)'라고 불렀다.

미숙아로 태어나 '자가 중독' 증세가 있었던 미시마는 생후 곧바로 할머니인 나쓰의 방에 함께 기거하며 조모의 보호 하에 성장하게 된다. 나쓰는 미시마가 소란스럽게 뛰어놀거나 또래 소년들과 어울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미시마는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내거나, 혹은 조모가 지정해 준 이웃집 여자아이들과 소꼽놀이를 하며 보냈다. 미시마는 12살이 돼서야 부모 품으로 돌아갔다. 미시마 문학에 모친 고착적인 성향이 짙은 것은 유년 시절의 영향이 크다는 평이다. 미시마는 어머니에게서 문학적 도움과 영향을 받았다. 도쿄제국대 출신이자 고급 관료를 역임한 아버지는 장남인 미시마가 관료가 되기를 열망했기에, 문학에 심취해 있는 아들의 방으로 찾아가 청년기 미시마의 원고를 무자비하게 찢어버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미시마를 격려했던 것은 어머니 시즈에였다.

학창 시절과 초기 작품[편집]

6세 때

그는 오스카 와일드릴케, 일본 고전 작품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미시마가 태어날 무렵부터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기에 그는 다른 귀족 자제 학생들만큼 유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귀족 집안 출신인 할머니의 권유로 귀족 학교인 학습원(가쿠슈인)에 다니게 됐다. 당시 가쿠슈인은 기숙사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지만 몸이 약한 미시마는 집에서 통학했다. 미시마는 공부를 잘했고, 학교 문학반 편집부에서 가장 어린 회원이 되었다. 미시마는 12살 때 첫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문학 잡지 "분게이 분카"에 실을 단편 소설을 쓰게 되어 《꽃이 만발한 숲》이란 작품을 제출했다. 이 소설은 1944년에 단행본 형태로 출간됐다. 미시마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징집 영장을 받았지만, 감기에 걸린 것을 이용해 군의관에게 결핵 증상이 있다고 거짓말을 해서 입대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당시에는 전쟁터에 가지않게 된 것에 대해 굉장한 안도감을 느꼈지만, 이후 살아남은 것과 영웅적인 죽음을 맞을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해 후회하게 됐다. 미시마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지원을 받으며 비밀리에 매일 밤마다 글을 썼다. 나치를 동경하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작가의 길을 걷는 대신 독일법을 공부하라고 강요했다. 미시마는 낮에는 수업을 듣고 밤에는 글을 쓰면서 지낸 끝에 1947년 도쿄 대학을 졸업했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 대장성 고등 관리직을 얻게 됐다. 그러나 직장 생활과 창작 활동을 병행하기가 힘들게 되자 결국 대장성을 사퇴하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걷게 됐다.

전후 문학[편집]

미시마 유키오와 이시하라 신타로 (1956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첫 소설인 《도적》을 1946년에 쓰기 시작, 1948년에 발간하여 전후 작가 2세대에 속하게 됐다. 사회에 적응하기 위하여 가면 뒤로 숨어야 하는 한 젊은 잠재적인 동성애자에 관한 자전적 소설인 《가면의 고백》을 뒤따라 발간했다. 이 소설은 굉장한 인기를 얻었고, 미시마는 24세에 유명 인사가 됐다. 미시마는 소설뿐만 아니라, 수필, 가부키 극의 희곡을 썼고, 전통적 드라마의 현대적 판본을 작성하기도 했다. 또한 《태양의 계절》로 인기를 끌었던 이시하라 신타로와 더불어 당시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영화에 출연하기도 하고, 자신의 작품 《우국》을 영화화하여 제작.감독 뿐만 아니라 주인공 역을 맡기도 했다. 미시마는 일본인 작가로서 해외에 널리 알려져 국제적 작가로서의명성을 얻었다. 유럽미국에서 많은 독자층을 확보했고, 대표작들은 대부분 영어로 번역됐다. 그는 광범위하게 여행을 다니며, 많은 외국 출판인들과 사귀었고, 노벨 문학상 후보에도 두 번이나 지명됐다. 그러나 1968년 자신의 초기 조언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자, 미시마는 가까운 장래에 또다른 일본 작가가 그 상을 수상할 가망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미시마는 1940년대의 일본 문단에 자신을 소개했고, 나이 든 가와바타에게 상이 돌아가기를 원한 것으로 전해진다.

할복 자살[편집]

1966년 민병대 "방패의 모임(楯の會)'를 결성, 우익 정치 활동에 본격 참여했다. 방패회는 무장 투쟁 훈련을 했다. 이는 이후 일본의 신우익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시마는 1968년에 <문화방위론>을 간행했다. 이는 무질서할 정도로 자유롭게 전개되어 왔던 일본 문화의 정신과 '미의 총람자(總攬者)'로서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천황이라는 존재를 물질 문명의 더러움으로부터 구해내고, 또한 공산주의의 손으로부터 지키려면 무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미시마는 <문화방위론> 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는 현행 헌법하에서도 실현 가능하다고 서술했다. 죽기 직전 마지막 작품인 "《풍요의 바다 4부작》"을 완성했다. 1969년 우익 운동가 에토 고사부로의 자결에 큰 영향을 받아 1970년 11월 25일 방패의 모임 대원 4명과 함께 자위대 이치가야 주둔지에 '우수 자위대원 표창'을 명목으로 들어가 자위대 동부 방면 총감과 면담하던 중에 가지고 간 일본도로 위협해 인질로 잡은 뒤 부하 8명을 부상하게 했다. 총감의 방 앞 발코니에서 몰려든 기자들을 향해 미일 안보조약 개정, 헌법 개정을 요구, 자위대의 쿠데타를 촉구하는 '이치가야 연설'을 한 뒤 약 5분 후 모리타 마사카쓰와 함께 할복 자살했다. 이 사건은 세간에 큰 충격을 안겼다.

사후의 영향[편집]

미시마의 자살을 둘러싸고 수많은 의혹이 일어났다. 그는 가장 중요한 일본의 전후 스타일리스트 중 한 명으로 인식되었다. 40권의 소설집과, 18권의 희곡집, 20권의 단편집, 그리고 최소한 20권의 수필집이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기타[편집]

  • 할아버지는 히라오카 사다타로로 평민 출신이지만 도쿄제국대를 졸업한 엘리트로서, 중의원의 하급 관료로 임용된 뒤 히로시마 현오사카 부의 내무부장과 사할린청 장관, 후쿠시마 현 지사를 역임했다. 할머니 나쓰는 도쿠가와 일가와 관계가 깊은 무사 계급 출신이었다. 나쓰는 결혼 후 남편을 업신여기며 귀족적인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 완고한 성격을 가진 그녀는 좌골 신경통을 앓고 있었다. 어린 미시마는 조모의 신경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안마를 해주었다. 신경질적인 조모는 가끔씩 광적인 발작을 일으켰는데, 미시마의 출세작 "가면의 고백"에는 유년시절 조모와 함께 지냈던 이야기가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일부 평론가들은 죽음에 대한 미시마의 과대한 환상이 조모 나쓰의 영향이라고 분석한다. 나쓰는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읽을 수 있었으며, 가부키에 대한 귀족적인 취향을 지녔다.
  • 미시마의 할복 자살은 다음날 각 일본 유명 일간지의 1면을 장식했으나 그의 주장에 대한 반응은 미약했다. 물론 당시 연설을 했을 때도 그 때 모여있던 사람들의 반응도 없었다. 왜냐하면 음향 시설이 안 좋아서(중계용 헬리콥터가 인근에서 비행중이었다고 함)사람들이 아무도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 필명 '미시마'는 일본 열도의 전통적인 세 섬의 상징이라는 설도 있고, 시즈오카 현 미시마의 지명에서 따서 붙였다는 설도 있다.
  • 문인들끼리의 모임에서 다자이 오사무와 대면했을 때의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그 자리에 있었던 편집자 노하라 가즈오에 따르면 술을 못하는 미시마가 모리 오가이의 문학에 대해 다자이에게 질문을 했는데 다자이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화제를 돌리느라 "오가이도 좋지만 전집의 책 첫머리의 그 군복 모습도 괜찮더군요"라며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중얼거렸는데, 미시마가 대뜸 "나는 다자이 씨의 문학을 싫어합니다. 능글맞거든요"라고 다자이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고 한다.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다자이는 "그렇게 싫으시면 안 오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내뱉고는 얼굴을 돌려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시인 나카무라 미노루에 따르면 다자이는 그렇게 말하고 난 다음에 자리가 어색해져 버린 것이 신경쓰였는지, "말은 그렇게 하셔도 여기까지 오신 걸 보면 역시 좋아하시는 거겠죠."라며 황급히 얼버무리듯 말했다고 한다. 또한 연회가 끝난 후에는 "저 미시마라는 학생은 여러 잡지에 작품을 싣고 있습니다"라는 말에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할말이 있었는데....."라고, 사전에 미시마를 소개받았더라면 응대도 달라졌을 것이고 문학에 관해서도 할 이야기가 더 있었다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는 '다자이 기피증'을 공언한 미시마의 유명한 일화지만, 한편 이듬해 1947년(쇼와 22년) 10월에 스승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시마는 "다자이 오사무 씨가 쓴 「사양」 제3회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멸망의 서사시에 가까운, 훌륭한 예술적 완성이 예견됩니다. 그러나 아직 예견에 그칠 뿐이지요. 완성의 문턱에서 무너져 버린 듯 하면서도 다자이 씨 특유의 묘한 불안이 아직 달라붙어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수상[편집]

  • 1954 8월에 『파도소리』를 발표하여 12월에 제1회 '신조사 문학상' 수상.
  • 1955 희곡 『흰개미의 집』으로 제2회 '기시다 연극상' 수상.
  • 1957 1월, 『금각사』로 제8회 '요미우리 문학상' 수상.
  • 1964 10월에 『비단과 명찰』을 발표하여 11월에 '마이니치 예술상' 수상.
  • 1965 노벨상 후보에 오름
  • 1967 노벨상 후보에 오름

주요 작품[편집]

  1. 꽃이 만발한 숲 1941
  2. 담배 1946
  3. 도적 1948
  4. 가면의 고백 1949
  5. 사랑의 갈증 1950
  6. 순백의 밤 1950
  7. 푸른 시절 1950
  8. 금색(禁色)1951-1953
  9. 파도 소리 1954
  10. 금각사 1956
  11. 비틀거리는 미덕 1957
  12. 교쿄의 집 1959
  13. 향연은 끝나고 1960
  14. 우국 1961
  15. 아름다운 별 1962
  16. 오후의 예항 1963
  17. 비단과 명찰 1964
  18. 풍요의 바다,4부작(1965-1970)
    • 1부, 봄의 눈
    • 2부, 분마
    • 3부, 새벽의 사원
    • 4부, 천인오쇠
  1. 로쿠메이칸 1956
  2. 근대노가쿠집 1956
  3. 열대야 1960
  4. 10일의 국화 1961
  5. 사드후작 부인 1965
  6. 스자쿠가의 멸망 1967
  7. 내 친구 히틀러 1968
  1. 소설가의 휴가 1955
  2. 부도덕교육강좌 1958
  3. 나체의상 1960
  4. 나의 편력시대 1964
  5. 태양 1967
  6. 하가쿠레 입문 1967
  7. 문화방위론 1968
  • 기타
  1. 장미형(사진집) 1963

전통 일본극을 위한 희곡들[편집]

영화[편집]

미시마와 관련된 서적들[편집]

  •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 (새물결 출판사)
  • "금각사", 웅진출판, 허호 역.
  •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에 있어서 양성대립의 구도"(제이 앤 씨, 허호 저, 일본어 저서)

주석[편집]

  1. Waagenar, Dick, and Iwamoto, Yoshio (1975). "Yukio Mishima: Dialectics of Mind and Body". Contemporary Literature, Vol. 16, No. 1 (Winter, 1975), pp. 41-60
  2. Yamanouchi,Hisaaki (1972). "Mishima Yukio and his Suicide". Modern Asian Studies, Vol. 6, No. 1 (1972), pp. 1-16
  3. http://biblioklept.org/2011/09/24/william-t-vollmanns-favorite-contemporary-books/
  4. 히타치 국 아나호 번(宍戸藩)의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요리타카(松平頼位)의 서녀였다.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