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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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Alexander Graham Bell
전화기를 시험하고 있는 벨
전화기를 시험하고 있는 벨
출생 1847년 3월 3일(1847-03-03)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사망 1922년 8월 2일 (75세)
캐나다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 베인브레흐
국적 영국 영국캐나다 캐나다미국 미국
주요 연구 전화기 개발, 발성학, 청각장애인 교육
주요 성과 전화기 발명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년 3월 3일 ~ 1922년 8월 2일) 은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미국인 과학자이자, 발명가였다. 최초의 '실용적인' 전화기의 발명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기[편집]

원래 이름은 알렉산더 벨(Alexander Bell)이었지만 가족과 친하게 지냈던 알렉산더 그레이엄이라는 사람을 존경하여 자기 이름에 그레이엄을 더 많이 썼다고 한다.

스코틀랜드에든버러에서 태어났고 1882년 미국으로 귀화하였다. 영국 왕립 고등학교를 졸업 후, 런던에서 발음에 관한 연구를 하고, 대학교 졸업 후에 발성법 교사로 있다가 교육자인 아버지를 도와 청각장애인의 발음 교정에 종사하였다. 런던 대학교에서 생리 해부학 강의를 들은 후, 캐나다를 거쳐 미국의 보스턴에 가서 청각장애인 학교를 세우고 보스턴 대학교의 발성학 교수가 되었다[1]. 그가 음성의 연구에서 전기적인 원거리 통화법을 고안하였다고 알려져있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으로써 1837년에 이미 전화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은 제시되어 있었다.

1837년의 세일럼의 물리학자 겸 내과 의사였던 찰스 페이지는 전자석에 의한 소리 방출과 전류 방해속도에 따른 소리 변화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었다. 이를 바탕으로 1854년에 벨기에의 샤를 부르셸이 프랑스 잡지인 일러스트라시옹에 자신이 창안한 장거리 통신 개념과 금속판 진동을 통한 진동과 배터리의 전류 변화를 통한 음성전달 개념을 설파했으나 실제로 실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미 당대에 많은 학자, 기술자들이 연구에 뛰어들었고 1858년에 필립 라이스라는 독일인 교사는 최초의 전화기라 할 수 있는 DAS TELE PONE을 만들었고, 1863년까지 총 6기의 자신의 모델을 판매하는 한편 기술적 개선을 추구했는데, 이러한 매입자중에는 더블린의 기구제작자였던 스티브 예이츠도 있었다. 그는 수화기의 개선에 주력하였다.

1886년 기록에 따르면 벨은 이미 10대 시절에 1862년에 이미 에든버러의 공작소에서 이걸 구매했고, 1876년 특허 신청 직전인 1875년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조셉헨리의 연구실에서 필립 라이스의 모델을 다시 확인했음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립 라이스의 전화가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한 것은 전화 관련 특허 소송과 1885년 벨의 특허 무효 조사가 있었을 당시에 정작 법정에서 제대로 시연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003년 9월 영국 쪽에서 기록이 나왔는데 1930년대에 런던과학 박물관에서 실험을 했을 때 필립 라이스의 전화는 제대로 작동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즉 당시에 수화기 상태가 불량하다고 판정한 박물관과 제휴회사인 스탠다드 텔레폰 케이블사의 기술자들이 수화기를 교체한 뒤에 작동시키자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확인 보고서를 제출했으나, 당시 박물관 사정이 열악해 박물관과 제휴한 스탠다드 텔레폰 케이블 사는 사업 파트너였던 벨 전화회사의 후신인 AT&T의 입장을 살펴 보고서를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

그러나 최초로 벨이 얻은 특허의 핵심인 산용액을 이용한 음성전달이라는 벨의 실험자체는 도둑질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벨은 18세부터 헬름홀츠의 소리굽쇠 측심기에 대한 연구를 하고있었는데, 독일어 실력이 부족했던 벨은 배터리가 소리를 전신선으로 전달한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착각은 1870년에 영국을 떠나면서 착각을 뒤늦게 깨달았다. 벨의 착각은 1928년 출간된 벨의 조수인 캐서린 맥켄지가 쓴 전기에 자세히 나와있다.

벨의 전화기가 웨스턴 일렉트로닉스사의 사장이었던 엘리샤 그레이의 특허를 훔친것이라는 문제가 제기 된것은 벨의 노트에서 2주 가량의 공백이 있은 뒤 갑자기 배터리가 아니라 산 용액을 통한 실험이 나타났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은 1876년 3월 10일에 벨은 실험에 성공해 음성을 전달했다고 했으나, 실제 당시 벨은 2월에서 3월 초순까지 워싱턴에 있었다. 그는 2월 14일에 특허를 신청했는데, 기이하게도 당시 미국 상원의회에서는 발명품을 제시하지 않아도 되는 법에 대한 입법 청문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3월 7일에 여전히 연구실로 돌아가지 않은 상태에서 벨에게 특허권이 단 3주만에 나왔다.이는 전례가 없는 일로써 1876년 3월 2일에 벨과 같은 보스턴에 기반을 둔 티머시 스테빈스는 유압 엘리베이터에 대한 특허를 요청했으나 5개월이 지난 8월 15일에 처리되었고, 뉴 헤이번의 윌리엄 게이츠는 1874년에 요청한 특허가 1876년까지도 처리되지 않았다. 특히 2월 19일에 특허 심사관은 벨에게 특허가 3개월간 보류될 것을 통보했었다. 심사관은 3개월 뒤에 우선적으로 심사를 받을 수있다고 했으나 1877년 에밀 베를리너의 마이크 특허는 우선권을 부여받은 결과 13년만에 특허를 얻었다.

이러한 빠른 특허의 배경에는 벨과 완전히 동일한 특허를 신청한 엘리샤 그레이의 전화기와 실험보고서 때문이었다. 엘리샤 그레이는 빈손으로 찾아온 벨과 달리 2월 14일에 전화기와 보고서를 들고 특허를 신청했고, 거기서 그레이의 발명특허권 보호 신청서 3페이지에는 벨의 노트에 그려진 것과 똑같은 실험 기구들이 그려져있다

당시에 벨이 전화연구 특허를 훔칠 동기도 충분했다. 벨의 장인인 허버드 가디너가 보낸 일련의 편지에서는 벨의 연구는 진전이 없었고, 집주인과 후원자들의 압박. 거기에 후원자겸 부인이 될 메이블 허버드의 아버지인 가디너 허버드는 교사노릇을 그만두지않고 전신기 개발에 주력할 것을 결혼여부를 두고 강요한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벨이 3월 10일에 가서 날조에 가까운 실험일화를 조작할 때 이미 그레이는 1개월 전에 모든 실험기구와 보고서를 제시했다. 실제로 벨은 그레이의 아이디어와 실험을 모두 베껴서 정치 로비를 통해 특허를 강탈한 것이다.

당시 엘리샤 그레이는 벨보다 유능한 발명가이자 사업가로 웨스턴 유니온 사는 엘리샤 그레이의 재능과 70여가지 특허권을 탐내 1872년에 엘리샤 그레이의 전기회사를 웨스턴 사의 협력 업체로 인정, 웨스턴 일렉트로닉스로 개칭해 사장자리를 맡겼다. 그러나 이것이 와전되어 후일 전화 특허 소송에서 무명의 발명가 엘리샤 그레이를 웨스턴 유니언 사가 꼬드겼다. 라는 잘못된 정보가 있으나, 실제로 볼품없었던 것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쪽이었다.

이후 다우드 소송에서 당시 특허 심사관이었던 세나 피스크 윌버는 자신이 빚을 지고 있었던 벨의 특허를 맡은 법률회사의 동업자인 마셀러스 베일리에게 빚을 지고 있었는데, 베일리의 요구로 윌버는 벨의 특허 서류가 먼저 도착한 것으로 고치고, 1876년 2월 26일에는 아예 베일리의 협박으로 그레이의 특허 도안과 전파 송수신방법을 벨에게 모두 공개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윌버가 알콜 중독자였고, 자주 진술을 바꿔서 증거로 채택되지 못했으나, 최종진술서의 원본을 피해자인 엘리샤 그레이에게 보내었고, 자신의 진술이 취해있던 아니던 진짜임을 강력히 주장했다는 편지를 남겼다.


이후 벨은 이러한 의혹을 적극 부정했으나,1910년 벨과 그의 아내 메이블이 사위인 길버트 그로스가 쓰고 있는 벨의 전기에 쓰일 원고를 보냈는데, 거기서 벨은 윌버의 진술이 거짓임을 밝히기 위해 자신은 그레이의 서류를 전혀 보지 못했고, 윌버가 1876년 2월 14일에 그레이와 자신의 특허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한 단락을 보여주었다면서 그 단락을 인용했는데, 결과적으로 벨 자신이 실험한 3월 10일 이전에 2월 14일에 그레이가 실험한 내용의 핵심 비밀을 사전에 알게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 되었다.


또한 이미 1877년 당시에 그레이는 벨이 시카고 트리뷴 지에 기고한 기사에 대해 철회를 요구했는데, 당시 벨은 특허관련 문서가 공개되기 직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에게 당신의 특허내용이 뭔지는 모르지만, 액체에 전선을 담궈 소리를 전달하는 방식인건 안다.라고 핵심내용을 알고 있음을 실토했다. 즉 특허 관련문서가 공개되기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특허기밀문서를 확인했다고 자백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벨의 특허 신청서 원본 사진을 보면, 벨의 특허의 핵심인 가변저항개념은 본문이 다 이 쓰인 뒤에 서류의 여백에 덧씌워져있다. 이에 대해 1915년 영국의 기술자였던 존 킹스베리는 발명가가 자신의 발명품에 가장 큰 기여를 한 핵심요소를 마지막 순간까지 빠트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라고 일침을 가했고, 20년 뒤에 윌리엄 에이트겐도 벨의 신청서의 본문에 가변저항 개념이 빠진 것을 주인공 없이 희곡을 쓰는 짓.이라고 맹비난을 했다.

또한 벨의 특허권 조작에 대한 증거는 추가로 존재했었다. 당시 벨은 조지 브라운을 통해 1876년 1월 29일에 영국에 특허 신청을 먼저 내려고 했는데, 당시 영국에서는 다른 국가에서 특허가 나지 않은 상품에 대해서만 특허를 내주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에서의 특허를 얻기 위해서는 벨은 미국보다 영국의 특허가 더욱 중요했다. 그래서 장인이 될 허버드 가디너에게 반드시 영국의 특허가 난 뒤에 미국에서 특허를 신청할 것을 제시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영국에서의 특허가 나기도 전에 2월 14일에 급하게 벨과 허버드 가디너는 특허를 신청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후에 밝혀졌는데 1878년에 다우드 소송 때 벨의 법무팀은 1월 26일에 조지브라운에게 제시한 서류를 급하게 회수했다가 1885년에 다시 특허 취소문제와 관련해서 이 서류가 세상에 잠시 공개되었다. 사실상 특허 신청 서류의 원본라 할 수 있는 특허서류에는 벨의 액체 송수신기 개념과 가변저항 개념이 일체 없는 다중 전신기에 대한 내용만이 존재하고, 마지막에 가서야 소리, 혹은 소음을 전달할 수 있다.라고 기재되어 있어서 정확하게 음성에 대한 전달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후 이 서류는 이후에 일체 증거 및 소송 관련 서류로 제기되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러나 그레이가 벨이 자신의 액체송수신장치의 연구를 훔친것을 안 것은 후에 벨이 전자석송수신 장치를 개발하고 난 뒤였는데, 액체송수신장치 특허가 없었다면, 전자석송수신 장치 개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레이는 음성의 전달보다는 다중 전신장치에 대해 더 관심이 많아서 4개의 메세지를 전파하면 8개의 지역에서 송수신이 가능한 전시기의 개발에 주력하고 있어서 벨의 기계를 경시한 것이 패배의 큰 원인이었다.

그 후 계속 청각장애인과 발성 문제, 축음기, 광선 전화 등의 연구를 하고 만년에는 항공기의 연구에 전념하였다. 1880년에 《사이언스》지를 창간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청각 장애|청각장애인]]의 아버지'로 불렀다. 그러나 벨은 우생학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이 별명은 반어적이다. 영국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 UCL)에서 음성학 학사를 받았으며, 훗날 이곳에서 강의를 하였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1. Alexander Graham Bell Laboratory Notebook, 1875-1876 (1875-1876). 2013년 7월 23일에 확인.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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