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야마 도미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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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도미이치
村山 富市
무라야마 도미이치(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1995년)
일본 일본제81대 총리
임기 1994년 6월 30일 ~ 1996년 1월 11일
전임: 하타 쓰토무(제80대)
후임: 하시모토 류타로(제82·83대)

출생일 1924년 3월 3일(1924-03-03) (90세)
출생지 일본 일본 오이타 현 오이타 시
정당 일본사회당
배우자 요시에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어식 한자 표기: 村山 富市
가나 표기: むらやま とみいち
외래어 표기법 표기: 무라야마 도미이치
통용 표기: 무라야마 토미이치
로마자: Murayama Tomiichi

무라야마 도미이치(일본어: 村山 富市 (むらやま とみいち), 문화어: 무라야마 도미이찌, 1924년 3월 3일 ~ )는 일본정치인이다. 오이타 현 오이타 시 에서 태어났다. 제81대 내각총리대신일본사회당 위원장, 사회민주당 당수를 역임했다.

약력[편집]

총리 취임 이전[편집]

총리 재임[편집]

총리 퇴임 후[편집]

주요 활동[편집]

무라야마 담화[편집]

1995년 8월 15일에 열린 전후 50주년 기념식에서 내각 회의 결정에 근거해, 일본이 태평양 전쟁 이전이나 전쟁 중에 행했다고 생각되는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했다. 이 ‘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 통칭 무라야마 담화는 이후의 정권에서도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역사 견해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보수적인 의원 등에 의해 무라야마 담화와 다른 견해의 발언이 문제가 되어, 중국 및 한국 정부로부터 반발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진보적인 입장에서는 이 담화를 두고 ‘결국 나쁘다고는 생각하지만 일본정부는 어쩔 수 없이 태평양 전쟁에 말려든 것이다’라는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명칭에는 무라야마 개인의 담화로 표현되지만, 이는 내각회의의 결정을 거친 담화로, 무라야마 개인의 사적인 견해가 아닌 당시 정부의 공식 견해이다.

망언[편집]

1995년 8월, 무라야마 총리는 한일합방은 합법적이었다는 망언으로 논란을 빚었다.[1]

피폭자 원호법의 제정[편집]

리사이클법(재활용법)의 제정[편집]

미나마타 병 환자 구제[편집]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 설립[편집]

1994년 8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민간 기금에 의한 위문금 지급 구상을 발표하고, 1995년 7월에 총리부외무성 관할하에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을 설립했다. 이를 통해 1997년 1월, 처음으로 한국인 위안부에게의 위문금 지급이 시작되었다.

무라야마 내각이 출범하기 이전에, 국비를 이용한 손해배상이나 정부의 사죄를 요구하는 소송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다른 나라와 조약을 체결했을 때 이러한 문제는 해결이 완료되었다는 입장으로, 국비를 이용해 위안부에 대해 손해배상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방침을 고수했다.

무라야마의 구상에서는 정부가 기금을 설립하고, 이에 소요되는 자금은 민간의 지원으로 하는 것으로, 직접적인 국비의 투입을 피하는 동시에 모금에 의한 국민의 진지한 생각이 표현되는 것으로, 양자의 주장을 포함하면서 문제 해결을 도모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기금의 초대 이사장으로는 하라 분베에, 2대 이사장으로는 내각총리에서 퇴임한 무라야마가 취임해 6억여 엔의 모금액을 이용해 위안부 피해자의 생활지원과 함께 여성의 명예 및 존엄과 관련된 사업을 진행해 왔다. 필리핀, 한국, 타이완 등에서 지원사업을 전개했으며, 인도네시아 사업이 종료될 것으로 예정된 2007년 3월에 해산하기로 발표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바깥 고리[편집]


주석[편집]

  1. 日총리,"한일합방 법적으로 유효"발언 파문 연합뉴스 1995.10.11
전 임
하타 쓰토무
제81대 일본 총리
1994년 6월 30일 ~ 1996년 1월 11일
후 임
하시모토 류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