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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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전쟁

포클랜드 제도의 위치
날짜 1982년 4월 2일~1982년 6월 14일
장소 포클랜드 제도,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와 그 인근 해상과 영공
결과 영국의 군사적 승리와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의 붕괴
이유 아르헨티나의 국내 문제 해결을 위한 포클랜드 제도 침공
교전국
아르헨티나의 국기 아르헨티나 영국의 국기 영국
지휘관
아르헨티나의 국기 레오폴도 갈티아리
아르헨티나의 국기 후안 롬파르도
아르헨티나의 국기 에른스토 크렙스
아르헨티나의 국기 마리오 멘데스
영국의 국기 엘리자베스 2세
영국의 국기 마거릿 대처
영국의 국기 존 필드하우스 경
영국의 국기 존 우드워드
영국의 국기 제레미 무어
병력
육군 1만 1명
해군 3119명
공군 1069명
군함 38척
항공기 216기
총병력 1만 4189명
육군 1만 700명
해군 1만 3000명
공군 6000명
군함 111척
(항공모함 2척 포함)
항공기 117기
총병력 1만 9700명
피해 상황
649명 전사
1068명 부상
1만 1313명 포로
항공기 75대 파괴
헬리콥터 25대 파괴
경순양함 1척 침몰
잠수함 1척 침몰
수송선 4척 침몰
경비정 2척 침몰
총 1만 3030명 사상
공군 100대 손실
전함 및 잠수함 8척 침몰
258명 전사
777명 부상
115명 포로
씨 해리어 6기 파괴
해리어 GR.3 4기 파괴
헬리콥터 24대 파괴
구축함 2척 침몰
프리깃함 2척 침몰
LSL 1척 침몰
LCU 1척 침몰
콘테이너선 1척 침몰
총 1150명 사상
공군 34기 손실
전함 및 잠수함 7척 침몰

포클랜드 전쟁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자국과 가까운 포클랜드 섬(혹은 말비나스 섬)을 '회복'하겠다고 선언하며 침공한 전쟁이다. 이 전쟁은 2개월 만에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으로 종료되었으며, 이로 인해 갈티에리의 군사독재정권은 실각하게 된다.

목차

[편집] 배경

아르헨티나말비나스라고 부르는 이 섬은 1690년 영국의 존 스트롱이 처음으로 상륙한 기록이 있다. 1764년 프랑스의 루이 앙트완 드 부갠빌이 처음으로 정착민을 데려와 살게 했다. 이 후, 섬에 정착했던 프랑스 정착민들은 1766년에 이 섬의 권리를 스페인에게 판다. 그 후 50년간 이 섬은 스페인의 관할에 있었다. 당시 아르헨티나와 이 섬은 둘 다 스페인의 식민지 였다. 1766년에 영국인들은 이 프랑스 정착촌의 존재를 모르는 채로 영국 정착촌이 세워졌고 프랑스 정착촌을 넘겨받은 에스파냐와 영국이 1771년 전쟁을 벌일 뻔하기도 했으나, 영국은 1774년, 에스파냐는 1811년에 각각 경제적인 이유로 철수했다. 이들이 철수한 이후 이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 되었다. 1816년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아르헨티나는, 스페인 식민지에서 벗어나면서 당시 스페인의 영토였던 이 섬도 같이 승계했다고 주장했다. 이 때 영국이 이 섬을 바다표범과 고래잡이 산업의 기지로 만들고자 했고, 영국계 정착민들이 유입되기 시작한다. 1826년 아르헨티나는 이 섬의 영유권이 아르헨티나에 귀속된다고 공식 선언한다. 1828년에 아르헨티나는 주둔군을 파견해서 관리한다. 영국으로써는 자신들이 최초로 상륙하고 자국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영토를 되찾았다는 입장이었고, 1833년 영국은 군사력을 사용해서 이 섬을 접수하고, 이 섬에 거주하던 아르헨티나계 주민들과 관료들을 모두 강제로 퇴거시킨 후, 천 명 이상의 영국인들을 이주시킨다. 당시 갓 독립한 약소국에 불과했던 19세기의 아르헨티나는 당시 전세계 인구의 25%를 지배하며 대영제국 빅토리아 여왕시대를 구가하던 최강국 영국에 정면으로 맞선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홍콩이 영국에 넘어간 것도 바로 이 즈음이었다.

그 후 100여 년 동안 영국이 이 섬을 평화적으로 지배한다. 강대국 대영제국에 항의할 수 없었던 아르헨티나 정부는, 1946년 전 세계의 탈식민지화 추세가 나타나자 이 섬의 영유권을 다시 주장하기 시작한다. 1965년 유엔총회는 식민지의 독립을 추구하는 결의(결의 2065/XX)를 채택했다. 영국계 주민들이 대다수였던 이 섬의 주민들은 아르헨티나에 의한 지배를 반대했다. 1973년 아르헨티나가 이 섬에 대해 영유권을 다시 주장하기 시작했고, 평화적인 해결을 권고한 유엔의 결의에 따라 1973년부터 영국과 협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협상이 진행되지 않으면서 1982년 3월, 아르헨티아 정부는 영토 문제 해결을 위한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공식 선언한다. 이로써 영국과 갈등을 겪는다. 1982년 4월, 아르헨티나는 이 섬을 '회복'할 것이라고 선언하며 침공한 후 짧게나마 점령에 성공한다. 침공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영유권 때문이라기보다, 아르헨티나의 군사 독재 정권에 의한 내부 문제를 외부의 위기로 해결하려는 고전적인 정치 수단의 일환이었다는 설도 있다. 즉, 인플레이션과 실업, 정치 혼란, 강제수용소에 반독재 투쟁인사들을 투옥, 고문한 군사독재정권의 인권침해를 비판하는 목소리 등을 잠재우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또한, 영국 정부가 남대서양의 끝에 있는 별볼일없는 섬에 무력으로 개입할 것 같지는 않다는 판단도 무력 점령을 시도한 원인이라는 설도 있다. 실제로 이 당시 포클랜드 주둔 영국군은 해병대 코만도 소속 수십 명에 불과하였으며, 이들 모두는 포로가 되었다. 이런(영국인의 시각에서는 매우 수치스러운) 무력 사용에 영국 여론은 자국 영토가 침탈당했다는 자존심의 상처와 더불어 강경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편집] 경과

영국 해군 항공대의 씨 해리어
  • 4월 02일 : 아르헨티나의 국기 아르헨티나, 포클랜드 등 3개 제도에 대한 무력점령; 영국의 항의, 국제 연합의 국기 국제 연합의 중재노력; 영국의 국기 영국, 기동부대 파견 결정
  • 4월 26일 : 영국의 대규모 기동부대와 아르헨티나군간 전투; 영국, 남부 조지아 섬 탈환
  • 5월 2일 : 영국, 아르헨티나 전투함을 격침 [1]
  • 5월 21일 : 영국, 카를로스(San Carlos)섬 상륙
  • 6월 14일 : 영국, 포트 스탠리(Fort Stanley)을 탈환/포클랜드 주둔 아르헨티나군 항복

[편집] 결과

이 전쟁에서 패배한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정권은 실각하게 되어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후 아르헨티나는 순탄하지만은 않지만 민주화를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포클랜드(말비나스)섬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계속하고 있다. 메르코수르 회원국인 브라질, 우루과이, 파라과이 등도 역시 이 섬의 아르헨티나 영유권을 인정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침공에 대해 즉각 무력 대응을 결정하고 군대를 파견하는 결단을 내린 "철의 여인" 대처 수상에 대한 영국인들의 지지는 확고했다. 결국 대처 수상은 이 분쟁의 해결을 바탕으로 1983년에 다시 집권하는 데 성공하였고, "철의 여인"의 개혁정책은 계속 추진되었다.

전쟁의 결과는 전쟁 당시 집권세력에게 판이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편집] 아르헨티나군과 영국군의 전력 비교

[편집] 참고할만한 사이트

[편집] 주석

  1. 英, 아르헨巡洋艦격침 500명이상 死亡”, 《동아일보》, 1982년 5월 4일 작성. 2009년 5월 4일 확인.